고사, 명언

열국지24-26

구슬뫼 2025. 1. 8. 08:36

열국지 24

<승상>이란 지위는 왕의 다음가는 권력의 자리이다.

여불위에게 중책(重責)이 맡겨지리라고 예측을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너무도 엄청난 등용에 중신들은 입을 벌리며 놀랐다. "홍은이 망극하옵니다. 여불위, 천학비재(淺學非才)하오나, 신명을 다해 대왕을 보필 하겠사옵니다."

여불위가 바닥에 엎디어 사은숙배(謝恩肅拜) 하자, 장양왕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고맙소이다. 경도 잘 아시다시피 과인이 워낙 경륜이 부족하니, 차후 모든 국사를 승상과 상의하여 처리해 나가도록 하겠소." 그리고 중신들을 돌아보면서, "중신들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여승상은 나의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경륜이 천하에 뛰어난 분이시오. 그러므로 경들은 여 승상을 나처럼 여기고, 충성스럽게 받들어 모시도록 하시오."

 

왕이 이정도로 나오니, 제아무리 경륜이 많은 중신이라 하여도 여불위를 감히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양왕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게 여겼는지, 다시 이런 분부를 내렸다. "아울러 경에게는 <문신후(文信侯)>를 제수하며, 성동에 있는 50식읍(食邑) 10만 호의 영지를 별도로 하사하오."

여불위가 장양왕에게 하사받은 50식읍 10만 호의 영지는, 가히 조그만 나라 하나의 크기였다.

(승상의 자리에다 10만 호, 50식읍의 문신후라!..) 여불위는 꿈을 꾸는 것 같아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아프다. 아픈 것을 보면 꿈이 아닌 현실이 확실하였다.

 

권력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어서, 여불위가 승상자리에 오르자, 그날부터 그의 집에는 하객과

아첨 배들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중신들도 있었고, 명성이 자자한 선비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특급재상(特級宰相)의 눈에 들기 위해, 천하의 재사, 현사들이 앞 다투어 여불위의 집에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구름처럼 모여드는 문객(門客)들을 접대하자니, 여불위의 집은 노복(奴僕)만도 3백 명이 넘게 되었다. 게다가 여불위의 시중을 드는 시녀만도 백 명이 넘었다.

(영화를 이정도로 누리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여씨가문(呂氏家門)을 영원히 빛낼 수 있는 사업을 하나 일으켜 보았으면 싶은데 뭐가 좋을까?) 여불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지혜로운 사공자(四公子)>가 떠올랐다.

 

지혜로운 사공자란 전국 칠웅 시대부터, 여러 나라의 세도 있는 왕족(王族)들이 천하의 재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 해다가 빈객(賓客)으로 접대해 오는 풍습이었다. 그들을 통상 식객(食客)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식객 중에는 경륜이 탁월한 정객도 있었고, 초야에 묻혀 지내다 기회를 찾던 선비도 있었고, 변설(辯舌)이 능란한 논객도 있었고, 점술이 탁월한 술사(術士)도 있었지만, 힘이 남달리 세거나 훔치는 솜씨가 비상한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방면에서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면,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가 융숭하게 대접해왔다.(계속)

 

열국지 25

주인의 대접이 융숭하다 보니, 식객들도 주인을 소중히 받들어 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주인의 신변에 어려운 일이 생긴다 치면, 식객들은 자기의 일처럼 각자의 재주를 짜내어 주인을 도와주었다. 말하자면 주인과 식객과의 인간관계가 동지적(同志的)인 의리(義理)로 결합되어서 은연중에 무시 못 할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울타리라고 볼 수 있는데, 울타리치고는 이처럼 믿음직스러운 울타리가 없었다.

 

그 무렵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세도 있는 왕족치고 식객 2, 3백 명쯤 거느리지 않은 왕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도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 ()나라의 신릉군(信陵君), ()나라의 춘신군(春申君), ()나라의 평원군(平原君) 같은 왕족은 식객을 무려 3천 여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 네 사람을 <지혜로운 四公子>라고 불러오고 있었다.

 

여불위 자신도 문신후(文信侯)라는 작호를 받았기에, 이제는 자기도 <지혜로운 四公子>를 본받아 양객(養客)으로 가명(家名)을 높여 보고 싶었다. 승상 여불위가 양객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원근 각지에서 내 노라 하는 지사(志士), 현사(賢士), 논객(論客), 학자(學者), 술사(術士)등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식객이 무려 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에 따라 가동과 노복들도 천 명으로 늘리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양객을 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든다. 여불위는 워낙 이재에 밝은 사람이라, 큰돈을 투자해가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놀려 두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식객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이런 제안을 하였다.

 

"귀공들은 모두가 학문에 해박한 선비들이오. 선비가 학문을 게을리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니, 오늘부터는 여러분이 힘을 모아 책을 저술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책을 저술하오리까?" "내가 알기로, 공자는 일찍이 <춘추>라는 역사책을 편찬했소. 그러므로 귀공들은 춘추 이후의 역사를 편찬해 보면 어떻겠소. 비용은 얼마든지 대 드릴 터이니,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서를 한번 편찬해 보도록 하오. 그래서 그 책이 완성되면, 책이름을 <여씨 춘추(呂氏春秋)> 라고 명명하면 좋겠소.

 

말하자면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여씨 가문의 명성을 길이 빛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여씨 춘추>는 그로부터 7년 후에 식객들의 손에 의해 26 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책으로 발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치와 생활의 참고로 삼기위해 저술되어 당시의 시대를 볼 수 있는 일종의 백과사전으로써, 이것은 오로지 여불위의 혜안(慧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여불위의 문화적 식견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呂氏 春秋>의 저술이었던 것이다.<계속>

 

열국지 26 : 승승장구하는 여불위!...

 

한편, 식객들에게 편 에서와 같이 역사서 편찬에 대한 지침을 주고 그들의 뒤를 보살펴주던 어느 날, 여불위는 장양왕의 부름을 받는다. "대왕 전하! 찾아 계시옵니까?" 여불위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장양왕은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승상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왕이 신하에게 <부탁>이라니! 봉건왕조시대에 있어서는 당치 않은 말이지만, 장양왕은 일찍이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여불위에게 크나큰 신세를 진 일이 있었던바, 여불위에게 만큼은 일반 신하들에게 하듯 왕의 행세를 하는 것이 거북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무슨 분부이시온지 하명 하시옵소서." "승상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과인이 볼모로 잡혀가서 조왕에게 7년 동안이나 박해를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오. 따라서 다른 나라는 몰라도 조나라 만큼은 꼭 손을 좀 보아 주어야 하겠소. 그러니 승상은 과인의 심정을 헤아려서, 조나라를 징벌해 주기 바라오."

여불위는 장양왕이 조나라에 품고 있는 한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곧 어명을 받들어 조를 치도록 하겠사옵니다."

 

여불위는 물론 무장은 아니다. 그러나 승상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려면 무엇인가 뚜렷한 업적을 세워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행히 진나라에는 기라성 같은 맹장이 수두룩하였다. 여불위는 그들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사전에 충분히 주물러 두었던 터라 군사를 일으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불위가 왕명을 그대로 받들 자세를 보이자, 흡족한 듯 장양왕이 물었다. "싸우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겠지요?" ", 조나라를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멸망시키는 일은 당장은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국경 지대의 성읍(城邑) 몇 십 개쯤 빼앗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한을 다소나마 풀어 주면 고맙겠소이다." 여불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조속히 군사를 일으켜, 신금(宸襟)을 평안토록 해 드리겠나이다."

 

여불위는 퇴궐하는 길로, 몽오(蒙鰲), 장한(章悍), 왕전(王剪) 장군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명했다. "우리는 어명에 의해 조나라를 치게 되었소. 몽오장군은 원수(元帥)가 되고, 장한 장군과 왕전 장군은 좌우익(左右翼) 사령관이 되어, 20만 군사를 3대로 나누어 조를 치도록 하시오. 세 장군이 합심하면 승리를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그러면서 세 장군에게 특별히 묵직한 전축금(前祝金)을 건네주며 이렇게 격려하였다.

"나는 세 장군의 풍부한 지략과 탁월한 전술을 전적으로 신임하오. 하여, 세 분 장군에게 특별히 중책을 맡기는 바이니, 합심 일치단결하여 기필코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오도록 하시오. 이번에 승리하고 돌아오면 세 분의 명성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자자손손까지 무한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오."

 

여불위는 사람의 심리를 헤아리는 재주와 용인술이 남달리 비상하였다. 엄할 때에는 추상열일(秋霜烈日) 같다가도, 회유책 (懷柔策)을 쓸 때에는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살가운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세 장수는 과분한 지우(知遇)에 크게 감동되어 "승상의 뜻을 받들고, 신명을 다해 기필코 승전보를 올리고 돌아오겠습니다."라며 굳은 맹세를 뒤로하고 장도에 올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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