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18 : 소양왕의 꿈
진나라 소양왕(紹襄王)은 선천적으로 영웅의 기질을 타고난 호걸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꿈과 기상이 웅대하여, 일찍이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만조백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폭탄 유시를 선포했던 일이 있었다.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듯이 지상에 왕이 여러 명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나는 이제부터 전국 육웅을 모조리 정벌하여 만천하를 모두 우리의 영토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니, 경들은 나의 뜻을 받들어 전국 각지에 은거해 있는 양장(良將)과 현사(賢士)들을 널리 찾아 모셔 오도록 하오. 어느 나라 사람임을 막론하고, 나를 따라 전공을 세우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접할 것이오."
늙은 중신들은 애송이 신왕의 무모해 보이는 선포에 입을 딱 벌어졌다.
그 당시의 국제 정세로 보아, 전국 칠웅 중에서 진나라가 최대 강국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한(韓)과 연(燕) 같은 세력이 약한 국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조(趙), 초(楚), 위(魏), 제(齊)나라 등 4개국은 진나라를 위협할 만큼 세력과 지배 체계가 잡혀 있는 강국이었다.
그런데 그들 여섯 나라를 무슨 힘으로 모조리 정벌하여 천하를 하나로 통일을 한단 말인가? 그것은 말로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린 왕이 철이 없고 욕심이 많아도 유만부동이지, 여섯 나라를 무슨 힘으로 송두리째 집어삼키겠다는 말인가 ?)
늙은 중신들은 하도 어처구니없는 신왕의 말을 받아 아뢰었다.
"대왕 전하 ! 우리가 몇몇 나라와 힘을 합쳐서 한두 나라쯤 정벌한다면 모를까, 우리의 힘만으로 여섯 나라를 모조리 정벌해 버리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젊은 소양왕은 얼굴에 노기를 띠며 큰소리로 꾸짖었다.
"경은 무슨 그런 못난 말씀을 하고 계시오? 남의 힘을 빌려 천하를 통일하려다가는 우리 자신이 그 들의 밥이 되어 버릴 것이오.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힘으로 천하를 통일하여야 하오. 노력하면 불가능한 일이란 있을 수 없는 법! 모든 중신들은 그런 각오로 나를 보필해 주시오." 중신들은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소양왕은 그로부터 양병을 대대적으로 실현해 가면서, 재주가 있는 사람은 높이 등용하였다.
소양왕이 인재를 높이 등용한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 은거해있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용병술 (用兵術)이 탁월한 백기(白起)라는 무장도 있었고, 행정 수완(行政手腕)이 비상한 응후(應候)라는 현사도 있었다.
소양왕은 응후를 승상(丞相)으로 발탁하고, 백기를 대장군으로 등용하여 천하 통일의 기초를 착착 다져나갔다. 이렇게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국가 요직을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내가 그를 믿고 앞장서 달려 나가면, 나를 따라오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리오! "
하고 말하며 소양왕은 무모할 정도로 대담한 인사 행정을 펴 나갔다.
사람을 알아보는 소양왕의 안목은 과연 탁월하여서, 승상의 직책을 맡은 <응후>는 날이 갈수록 민생(民生)을 부유하게 해주었고, 군무를 전담한 <백기>장군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백만 진군을 막강한 대군으로 키워 놓았다.
"이만하면 육국을 치고도 남을 만하니, 이제부터는 육국을 차례로 정벌해가기로 합시다."
열국지 19
소양왕 13년, 그는 마침내 백기 장군과 함께 50 만 대군을 일으켜 한나라로 쳐들어가, 13개 성시를 점령하며 24만 명의 적군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고, 이듬해에는 위나라로 쳐들어가 61개의 성시를 취하면서 적병 10 만을 격멸하였고, 다시 5년 후에는 조나라로 쳐들어가 광량성을 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시 2년 후에는 초나라로 쳐들어가 도성인 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다시 5년 후에는 한, 위, 조 세 나라를 차례로 쳐들어가 13만 명의 적군을 진멸하였다. 이러다 보니, 전국 육국(戰國六國) 에서는 <소양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고 이를 갈며, 그를 <변방(邊方)의 승냥이>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남이야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소양왕은 오로지 세력 확장에만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리하여 소양왕 48년에는 육국의 영토 중 3분에 1을 점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 하였다.
그러나 뻗어 가는 힘에도 한계가 있었던지, 욱일승천으로 확장 해가던 진나라의 기세가 생각지 않았던 좌절을 맛보게 되었으니, 그것은 승상 <응후>와 <백기>가 세력 싸움으로 불화를 일으키더니 천하의 명장이던 <백기>장군이 억울하게도 비명으로 죽게 된 것이었다.
백기 장군의 비명횡사는 승승장구해 오던 진나라에는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왕손 자초가 적국인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불상사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진나라의 침략에 번번이 당하고 있던 여섯 나라는 공동보조를 취해 오면서,
"진이 어느 나라든 침범하기만 하면, 왕손 자초를 그날로 죽여 버릴 테니, 그리 알고 있으라"
하는 통고문까지 보내오지 않았던가.
<아아, 그렇다면 나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는 운을 타고났단 말인가?! >
소양왕은 장탄식을 하며 7년 동안이나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몸에 병마가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때마침 태자 안국군이 들어오더니, "대왕 전하 !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던 자초가 어젯밤에 탈출하여 돌아왔사옵니다."
하고 아뢰는 것이 아닌가.
"뭐라고? 자초가 탈출해 돌아왔다고?! 그 애를 당장 이리 불러오너라."
소양왕은 병석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외쳤다.
태자 안국군은 자초가 탈출하여 돌아오게 된 경위와, 장가까지 들어 손자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소양왕에게 자세히 설명해 드리고 나서, 자초의 세 식구와 여불위를 모두 어전으로 불러들였다. 소양왕은 자초의 손을 움켜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를 살아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구나. 이 할애비가 이제라도 너의 원수를 꼭 갚고야 말리라." 그리고 이번에는 주희 옆에 서 있는 소년 '정'의 손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이 아이가 바로 나의 증손자인 네 아들이냐 ?"
그러자 여섯 살짜리 소년 정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소양왕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할아버님마마 ! 저는 아바마마와 함께 조나라를 탈출해 돌아온 '정'이옵니다. 위대하신 할아버님마마를 뵙게 되어 무척 기쁘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어른스러운 인사에 좌중은 크게 경탄하였다.
"오오, 네가 내 증손자냐. 무던히도 숙성하구나. 얼마나 잘생겼는지, 어디 얼굴을 똑바로 보여라." 소양왕은 소년 '정'을 무릎에 앉히고, 이목구비를 요모조모로 뜯어보다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안국군과 자초에게 말했다.
"내가 상(相)을 좀 볼 줄 아는데, 이 아이의 기상은 장차 나의 뜻을 이어 천하를 통일할 천자의 기상이 분명하구나 ! "
열국지 20
소년 '정'이 소양왕의 말을 받아서 다시 대답했다.
"할바마마께서 못다 하신 일이 계시오면, 제가 자라서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바람에 좌중에는 폭소가 터졌다.
그러자 소양왕은 엄숙한 표정으로 좌중을 꾸짖었다.
"웃지들 마라, 국가의 흥망을 논하는 이 마당에 어찌 웃음이 나온단 말이냐."
그리고 안국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너는 성품이 나약한데다가 체질초차 포류질(浦柳質: 물가의 버드나무) 이어서, 나는 너에 대해서는 천하 통일의 기대를 갖지 못했다. 내가 죽고 나면 네가 왕위에 오르겠지만, 네게는 나라를 지켜나가는 일만 해도 힘에 겨울 것이다. 나는 그 점을 내심으로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아이를 만나 보니, 이제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방안은 갑자기 숙연한 공기가 감돌았다.
소양왕은 어린 증손자의 얼굴을 다시 뜯어보며 넋두리처럼 말했다.
"정아 ! 이 할애비는 천하통일의 웅지를 품고 50 여 년 간이나 동분서주하면서도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그러니 너는 할애비의 웅지를 이어받아서, 네 대에 가서는 천하를 통일하도록 하여라."
"할바마마, 명심하겠습니다."
소양왕은 어린 손자의 대답을 듣고 무언의 눈물을 흘렸다.
소양왕은 어린 손자를 상대로 자신의 회한과 포부를 한바탕 늘어놓고 나서, 이번에는 여불위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자초가 귀공의 덕택으로 조나라에서 무사히 탈출해 돌아오게 되었으니, 귀공의 은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구려. 귀공은 우리나라에서 길이 머물러 살면서 <동궁 국승(東宮局丞)>의 벼슬을 맡아 주기 바라오."
동궁 국승이란, 태자의 교육을 전담하는 중요한 자리인데, 조나라에 있을 때부터 자초 부자를 지도해 왔다고 해서, 그런 직책을 맡긴 것이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런데 귀공에게는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소."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귀공은 관상학 상으로도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오. 귀공에게 동궁 국승을 제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니, 귀공은 '정'을 특별히 위대한 인물로 키워 주기 바라오. 이 아이는 후일에 천하를 통일할 귀중한 인물이니까 말이오."
"지엄하신 분부, 거듭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여불위는 허리를 숙여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또 한 번 웃으며 중얼거린다.
('정'은 영감의 손자가 아니고 바로 내 아들이오. 이 애가 장차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 그 나라는 당신의 증손자가 아닌, 내 아들의 나라가 될 것이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