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27
진나라의 20만 대군이 3대로 나뉘어 조나라를 쳐들어가는데,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기마는 산야에 넘치고, 정기(旌旗)는 하늘을 덮어 그 위풍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나라는 전국 칠웅 중에서 제(齊), 초(楚)와 함께 비교적 강한 국가이기는 하나, 그 크기는 진나라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두고 진에게 수없이 시달려 왔기 때문에 진군이 또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나라 군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었다.
그리하여 진군은 이렇다 할 싸움도 안하고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37개의 성을 무혈점령하고, 조나라의 요충(要衝)인 태원성(太原城)을 겹겹이 에워싸 포위했다.
조나라는 태원성이 함락되는 날이면, 도성인 <한단>이 위태로워질 형편이었다. 태원성을 포위하고 10여 일이 경과하자, 이번에는 태원 성주가 백기를 들고 제 발로 걸어 나와, 몽오 장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왕은 그 급보를 받고 긴급히 대책 회의를 열었다. "태원성이 함락되어 이제는 도성이 위태롭게 되었소.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승상 인상여(藺相如)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성루(城壘)를 높이 쌓고 외곽으로 돌아가며 늪(池)을 깊게 둘러 파서, 진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사옵니다. 적이 도성을 포위하더라도 軍糧조달문제로 오래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오니, 우리는 그 사이에 위(魏)와 초(楚)에 사신을 보내어 응원군(應援軍)을 청해야 할 것이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군사를 총동원하여 늪을 깊게 파고 성루를 높이 올려 쌓게 하였다.
진군이 한단성으로 진격 해 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진군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와도 조군은 죽은 듯이 성문을 굳게 잠그고 성 안에 틀어박힌 채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나라 승상 인상여가 예상한 대로 진군은 20萬이란 대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군량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또한 계절이 한 겨울로 들어서자 군사들이 동상(凍傷)과 기한(飢寒)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이에, 몽오 장군이 그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니, 본국에서는 <37개 성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흡족하니, 즉시 회군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몽오 장군이 "명년 봄에 다시 와서 한단성을 기필코 함락시키고야 말겠다!"는 장담을 남기고 돌아왔다.
이에 장양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선 37개의 성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나의 한이 많이 풀렸소. 여 승상과 장군들이 모두 힘을 합해 나의 뜻을 받들어 준 결과라 고맙기 그지없소!"
이리하여 여불위는 승상으로서 업적을 크게 세웠다. 그는 세 장군을 따로 불러서, 그들의 전공을 극구 치하해 주기를 잊지 않았다. 이렇게 진나라의 국세가 크게 확장해 나가자 여불위에대한 국민의 신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참으로, 여불위는 사람 장사, 한 발 더 나아가 용인술을 기막히게 잘 하는 사나이였다.
열국지 28 : 조나라의 평원군
조왕은 진군에게 37개의 성을 빼앗긴데다가 "명년 봄에 다시 오겠노라"는 사전 통고까지 받고 보니, 국가의 안위가 크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사공자'로 불리는 아우 <평원군>을 불러 상의한다. "진군이 내년 봄에 다시 오겠다고 공언하고 돌아갔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평원군이 대답한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진군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초, 위등과 군사 동맹을 맺어 공동 방위 태세를 갖추는 것이 마땅하다하겠습니다."
"초와 위가 우리와 함께 싸워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으나, 그들이 진의 미움을 극복하고 우리와 손을 맞잡으려고 하겠는가?" "물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앉아서 당할 수는 없사오니, 되든 안 되든 제가 직접 나서서 우선 초나라 부터 설득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평원군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에 3천여 명의 식객을 거느려오며, 그들을 친형제처럼 소중하게 대해 왔었다. 평원군은 초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사리에 밝고 설득력은 물론 변설이 능한 식객 중 20 명 정도의 조력자가 필요하였다. 19명은 곧바로 추려낼 수 있었으나 나머지 한 명은 적격자가 없어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모수(毛遂) 라는 식객이 자원하고 나섰다.
"나머지 한 사람은 저를 데리고 가 주시옵소서."
평원군이 모수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은 눈에 익었지만, 평소에 신통치 않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선생은 내 집에 오신지 몇 해나 되었소?" "공자의 신세를 진지가 어언간 3년이 넘었습니다." "3년!....?"
평원군은 내심 실망하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선생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현명한 사람은 囊中之錐 (낭중지추)와 같다고 하였소. 송곳 끝은 반드시 주머니 밖으로 솟아 나오게 마련인데 선생은 내 집에 오신지 3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나에게 송곳 끝을 보여 준 일이 없으셨으니, 내 어찌 선생더러 초나라에 동행하자고 말 할 수 있겠소?"
모수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대답했다. "송곳 끝이 주머니 밖으로 솟아 나오려면, 그 송곳이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저를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를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십사 하는 뜻에서 배행을 자처하는 것이옵니다."
평원군은 모수의 뛰어난 논리에 속으로 감탄하며, 그를 수행원에 포함시켰다. 그러자 19명의 수행원들은 모수가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 사실을 알고는 모두들 코웃음을 치며 반대했다. 그러나 평원군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모수를 대동하고 초나라로 출발하였다.
열국지 29
며칠 후,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 일행은 초왕과 회담을 개시하였다.
초왕과 평원군은 단상에 단둘이 마주앉았고, 수행원들과 초나라 중신들은 단하에 마주보고 이열 횡대로 앉아 회담에 임하고 있었다. 회담석상에서 평원군은 조, 초, 위 등, 인접 삼국은 군사 동맹을 맺어, 강적 진나라의 침략에 맞서 함께 대항하자는 합종설(合縱說)을 입이 닳도록 역설하였다.
그러나 초왕은 좀처럼 응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나라와 섣불리 군사 동맹을 맺었다가 진의 미움을 사는 날이면,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리는 결과가 되겠기 때문이었다.
회담은 아침부터 시작 되었지만 날이 어둡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모수는 진종일 참고 지켜보다 못해, 마침내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초왕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양국이 군사 동맹을 맺고 진나라 침략에 대비하자는 것은 다 같이 이로운 일이거늘, 무엇 때문에 이처럼 시간을 끄십니까?"
초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평원군을 보고 물었다.
"이자는 누구요?" "제가 데리고 온 수행원 입니다."
그러자 초왕은 대노하며 벼락같은 호통을 질렀다.
"네 이놈! 썩 물러가거라.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네놈이 무례한 행동을 하느냐!"
이에 모수는 가슴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어 초왕의 가슴에 들이대며 말했다.
"대왕께서 소인을 꾸짖는 것은 초나라의 힘을 믿기 때문일 것이오. 그러나 대왕은 지금 바로 제 눈앞에 있고, 대왕을 도와줄 사람들은 멀리 있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들어보신 뒤, 가부를 답해 주소서. 초나라는 영토가 진나라 못지않게 넓을 뿐만 아니라, 군대도 백만 명이나 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초와 같은 강대국이 진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이웃 나라와 화친 맺기를 꺼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초나라가 이처럼 비굴하기 때문에 진나라에게 멸시를 받게 되는 것이오이다. 우리가 군사 동맹을 맺자는 것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초와 더불어 공생공존(共生共存) 하자는 사실을 어찌 모르시옵니까? 진실로 떳떳한 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진나라에 대한 공포심부터 버리십시오."
초왕은 칼날 같은 모수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생의 말씀을 들어 보니 과연 내가 지나치게 비겁했던 것 같구려. 좋소. 귀국과 군사 동맹을 맺기로 합시다." 군사 동맹은 이렇게 일순간에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모수는 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모수는 단하에 있는 초나라 중신들을 굽어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대왕께서 군사 동맹을 맺기로 결심하셨으니, 이제는 혈맹(血盟)의 의식을 하도록 합시다. 지금 곧 닭과 말의 피를 속히 구해 오도록 하오!"
초나라 중신들이 동물의 피를 구리 쟁반에 가득 담아 오자, 모수가 초왕에게 정중히 받들어 올리며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