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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9열사의 유배지를 찾아서

구슬뫼 2013. 8. 21. 10:07

홍주 9열사의 유배지를 찾아서

 

 

  보령문화연구회에서

대마도지역의 홍주9열사 유배지를 답사하였다.

기간 : 2013.8.12.8.14(23)

인원 : 41(회원22, 회원가족7,

항일열사 후손8, 기타4)

 

 

답사배경: 1906년 일본군에 맞서 싸운 홍주의병항쟁에 앞장섰다가 붙들려 대마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홍주의병 9열사가 있다. 열사들은 단식투쟁, 일본 옷 입기 거부 등 강력히 저항하였고 그들보다 22일 늦게 유배되어 온 최익현, 임병찬과 더불어 더욱 강하게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던 중 최익현은 5개월여 만에 순국하였고 열사들은 유배생활 내내 줄기차게 저항을 계속하였다. 9열사 중 우리 보령 분으로 내항동 출신 유준근열사와 웅천출신 최상집열사가 있었기에 우리 연구회가 그분들의 행적을 더듬어 보며 그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자 이번 답사를 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대마도에 유배된 홍주9열사는 다음과 같다.

이름

출신지

의병직책

생몰연대

비고

柳濬根

보령 내항

儒兵將

18601920

건국훈장 애국장

崔相集

보령 웅천

召募將

18491909

건국훈장 애족장

南奎振

예산 창호

돌격장

??

 

文奭煥

서천 비인

書記

18691925

건국훈장 애국장

申輔均

홍성 홍동

參謀

18611912

건국포장

申鉉斗

청양 화성

右翼將

??

 

安恒植

청양 화성

參謀

18601922

건국훈장 애국장

李相龜

공주 우성

左翼將

18591926

건국훈장 애국장

(+)

청양 정산

參謀士

18731936

건국훈장 애국장

 

2013.8.12.(맑음)

  출발전 국내 문화유적답사: 일행 중 절반 이상이 6070대 지긋한 나이라서 출발당일 아침 7:30까지 부산항에 도착하기엔 어려움이 있어(보령에서 부산까지 45시간 소요) 하루 전 출발하여 국내 유적을 답사하고 부산인근에서 하루 쉰 후 대마도로 떠나기로 했다.

 

  08:00 출발하여 경남 창원시 봉림동에 있는 봉림사지(우리지역 성주사와 더불어 신라시대 선종의 구산선문 중 한 곳/경상남도 기념물 제127)와 그 절터에서 1960년 상북초등학교에 이전했다는 봉림사지 3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을 구경하였다.

    

   창원시 불모산 자락에 성주사(聖住寺)라는 절이 있어 우리지역 성주사지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하며 찾아갔다. 안내기에 신라 흥덕왕 때 무염국사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되어있다. 흥덕왕은 신라 제42대왕으로 재위기간이 826836년까지이다. 한편 창원시 홈페이지에는 흥덕왕10(835)에 무염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연도까지 나와 있다. 그러나 무염국사는 제46대 문성왕 7(845)에 당나라로부터 귀국 하였으니 이 절을 창건하였다는 시기보다 10년이나 뒤의 일이다. 전문가들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경남 남해안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당시 왜군들이 일본식 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한 곳이 30개 정도 있다는데 그 중 하나인 진해시 남문동의 웅천 안골왜성(경상남도 기념물 제79)을 보았다. 우리나라 성곽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안내판 에 웅천안골왜성(熊川安骨倭城)이라고 표기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누가 생각해도 안골이란 안에 있는 고을이라는 순수한 말일 터인데 이것을 한자로 안골(安骨)이라고 표기하다니 . . .   

   

  창령군 창령읍 교상동의 창령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국보 제33)

높이 178cm, 175cm, 두께 약 30cm의 자연석 앞면을 다듬은 후 624자의 글자를 새겼는데 400자 정도가 판독이 가능하다고 하나 얼핏 보아서는 글씨가 있다는 것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름은 척경비지만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에 있는 3개의 순수비와 더불어 진흥왕순수비로 역할을 한다. 그 앞 20m 떨어진 곳에 조선말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있다. 일본 강점기에 모두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국내 답사일정을 모두 마치고 미리 숙소를 잡아 둔 부곡으로 향했다.

 

2013.8.13.(맑음)

07:30부산항에 도착하여 천천히 출국수속을 마치고 09:00출발하는 대마도행 국제여객선 코베(KOBEE)호에 올랐다. 바다는 잔잔하여 흔들림 없이 1시간 10분을 달리니 대마도의 히타카수항에 도착하였다. 입국수속이 너무 까다로워 지루한 시간을 오래 보내야 했다. 박지영이라는 부산출신 여자가이드가 경상도 억양으로 이것저것 설명한다. 얼마 전 문화재 도둑들이 대마도에서 불상을 몰래 훔쳐 한국으로 반출한 사건이 있은 후로 입국수속이 매우 까다로워졌다고 한다.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상대마와 하대마로 나뉘며 길이가 총 82km 이고 폭이 가장 좁은 곳은 18km 정도이며 거제도의 1.5, 울릉도의 10배 면적인데 일본본토에서 132km,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49.5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섬으로 인구는 4만 명 정도, 그러나 본토로 자꾸 빠져나가 점점 인구가 주는 추세라고 한다. 거의가 시골처럼 낙후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70년대를 생각하란다. 둘러보니 정말 높고 화려한 건물이 없다. 대마도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이지하라시(嚴原市) 조차 우리나라의 읍소재지를 떠올릴 정도로 초라한 모습들이다.

참고로 대마도(對馬島)를 일본말로는 쓰시마시마라 해야 하는데 쓰시마(對馬)라고 시마()를 생략해 부르고 우리나라에서는 대()를 생략해 마도(馬島)로 부르기도 한단다. 뒤에 나오는 유준근과 임병찬의 마도일기(馬島日記)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전망대(韓國展望所): 대마도 가장 북쪽 카미쯔시마쵸의 작은 산봉우리, 우리나라가 잘 보이는 곳에 한국식 팔각정을 지어놓았다. 계획단계부

터 완공까지 한국산 자료를 쓰고 한국의 전문가를 불러 철저히 한국풍을 고집하였다.

 대마도 사람들이 한국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열망과 또한 근래에 와서 대마도를 찾는 한국인들이 늘어나자 2년 반 전에 이 전망대를 세웠다.

       

조선역관사순국비(朝鮮譯官使殉國碑): 한국전망대 바로 옆에 있다. 1703(숙종29)25108명의 조선역관과 이들을 수행하는 일본 측 역관4명이 대마도의 와니우라항에 들어오기 직전 폭풍을 만나 모두 순국한바 이들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비(慰靈碑)이다. 정사 한천석(韓天錫)을 비롯하여 부사, 상관(上官) 28, 중관(中官) 54, 하관(下官) 24명으로 구성된 국제외교사절단으로 대마도 제3대 번주 종의진(宗義眞)의 죽음을 애도하고 새로 번주가 된 종의방(宗義方)의 습봉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애석하게도 참변을 당하였다고 한다. 희생자 112명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았다.

 

    미우다해수욕장: 아주 조그만 해수욕장(해수욕장이라 하기에 너무 작은 바닷가)

이지만 모래만큼은 곱고 깨끗하다. 조개껍질이 부서져 만들어진 모래와 맑은 바닷물 그리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가족단위로 텐트를 쳐 놓고 며칠 묵으며 해수욕도 즐기고 바다낚시도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곳이다. 특히 모래사장 가운데 부분 앞 2030m 떨어진 곳에 앙증맞은 세모뿔 모양의 여(바위)가 솟아있고 그 위에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가이드는 그곳을 작은 섬이라 표현하는데 섬은 무슨 섬? 또 이곳이 일본의 100대 해수욕장 중 하나라고 하는데 글쎄 그 말을 믿어야 할지 . . .?

 

에보시다께 전망대(烏帽子岳展望所): 역시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곳이다. 대마도는 리아스식해안으로 이루어져 있고 107개의 무인도가 있어 경관이 매우 빼어나다. 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에보시다께 전망대이다. 해발 176m의 산정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니 사방팔방이 탁 트여 가슴속까지 시원한 느낌이 든다. 마치 베트남의 세계적 명승지인 하롱베이를 보는 듯 크고 작은 섬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날이 좋은 날에는 서쪽 저 멀리로 부산의 오륙도가 보인다는데 오늘은 마침 먼 바다에 안개가 있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섭

섭했다.

 

와다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 바다신을 모시는 신사로 도리이가 나란히 다섯 개 서있는데 2개는 바다 속에, 3개는 육지에 있다. 일본 건국신화에 천신의 아들 형제가 낚시를 하는 중 형이 낚시 바늘을 잃어버리자 아우가 그것을 찾으려 물속에 들어갔다가 용왕의 딸과 결혼하게 되고 바다 속에서 3년 살다 육지에 나왔는데 아내의 아이 낳는 모습을 엿보지 말라는 경고를 어기고 엿보다 아내의 본 모습(큰 구렁이)를 보게 되었다. 이에 아내는 용이 되어 바다로 돌아가고 남기고 간 아이가 자라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일본 시조인 텐무천황이라는 것, 결국 일본시조는 천신과 해신의 적자라는 신화로 그 해신과 아들을 모시는 신사가 바로 이곳인 것이다.

 

    만관교(万關橋): 상대마와 하대마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대마도는 한 개의 섬이었으나 1897년 시작하여 1900년 완공한 운하로 인해 남북으로 나뉜바 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만제키바시(万關橋)이다. 다리 길이는 100m, 폭은 3.6m 높이 36m이다. 참고로 다리 아래 운하는 길이 300m, 65m,

수심 5.5m인데,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전함을 이 운하를 통과하여 아소만 타케시키 부근에 숨겨놓았다가 진해, 거제도, 송진포 등의 전함들과 연합함대를 만들어, 쳐들어온 러시아 발틱함대를 여지없이 격파해 버림으로서 이 운하를 크게 활용하였던 역사적인 장소라고 한다.

 

    아유()모도시자연공원: 은어가 돌아온다 (아유모도시)의 이름을 가진 이 공원은 푸른 숲과 그 속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는데 특히 계곡의 바닥이 모두 바위 면으로 되어 있어 흙탕물이 일지 않는다. 국립공원으로 관리한다고 하며 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조금 높은 바위에서 다이빙을 하는 등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들이 정겹다. 숲길을 한참 걷다가 돌아와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시원하여 온종일 답사 다니느라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2013.8.14.(맑음)

황윤길현창비(黃允吉顯彰碑): 아침일찍 조선통신사 황윤길현창비를 찾았다. 황윤길은 1590년 통신사로 대마도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도요토미히

데요시를 만나는 등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임금께 일본의 침략을 예견, 대비책을 강구할 것을 보고하였으나 부사로 갔던 김성일(동인)이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과는 반대로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인물이 보잘 것 없고 침략기미도 없다고 보고함으로서 방비책을 미처 통일치 못한 상태로 1592년 임진왜란을 당했던 것이다. 2011.12.3. 한국대표 황수영박사와 대마도 대표 영유구혜(永留久惠)가 주축이 되어 설립하였다. 비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가이드가 그걸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다. 가이드가 서툰 것인지, 아니면 찾는 사람이 적어 자주 찾지 않아 그런 것인지?

한편 대마도에는 이곳 황윤길현창비를 비롯하여 면암최익현선생순국비, 통신사부사 김성일 시비, 조선통신사지비, 통신사 이예 공적비,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왕인박사현창비, 박제상순국비, 조선역관사순국비 등 10개의 한국관련 비가 있다고 한다.

    덕혜옹주비(德惠翁主碑): 덕혜옹주는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 사이에 태어났으나 경성일출심상소학교 재학 중 일제의 요구에 의거 도쿄로 유학하였고 1931년 옛 대마도 번주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다. 이때 대마도에 사는 조선인단체 상애회회원들이 봉축하는 기념비를 세웠던 것인데 1955년 이혼 후 쓰러트렸던 것을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자 2001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어찌 되었건 비문에 이왕가(李王家)와 종백작가(宗伯爵家)가 결혼함을 축하한다는 글자가 눈에 거슬린다. 일본인들이 나라를 빼앗고 황실을 이왕가로 격하시켜 부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조(李朝=李氏朝鮮의 준말)라는 말을 별 생각 없이 듣고 쓰는 경우가 있는데 앞으로 쓰지 않음은 물론, 들으면 반드시 고쳐줄 것을 회원들은

다짐하였다. 일제의 잔인한 강압과 냉혹한 국제 현실 속에 한 많은 인생을 살아야 했던 옹주는 하나밖에 없는 딸마저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긴 채 행불이 되었고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하다가 1962년 귀국하여 이덕혜(李德惠)라는 이름으로 국적을 얻어 창덕궁 낙선재안의 수강재에서 살다가 1989년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대마도역사문화자료관(對馬島歷史文化資料舘):이즈하라주변의 역사적인 유물들을 전시한 곳으로 신라시대의 불상, 청동거울, 일본 최초로 교린수지라는 조선어 학습서를 지었다는 아메노모리호우슈(雨森芳州)의 초상화가 전시되어있다. 경내에 고려문과 조선 통신사지비가 있다.

 

    고려문(高麗門):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문이었다.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제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쌓고 그 정문, 즉 영은문(迎恩門)으로 만들었는데 이름을 고려문이라 한 것이 흥미로운 일이다. 그만큼 대마도에서는 우리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반증일까? 당초에는 성 앞에 있던 것을 1900년대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조선통신사지비(朝鮮通信社之碑): 통신사들은 반드시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에 들어갔다. 그래서 흔히 대마도를 통신사의 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비석이 그를 말해주는 것 같다. 한번 갈 때마다 300500명씩 다녔고 기간도 68개월이나 걸렸다. 이에 들어가는 경비만도 약 100만 냥씩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현재 돈으로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 어림잡아 500억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무튼 조선통신사들이 갈 때마다

일본에겐 경제적 활성화는 물론이고 선진문화에 대한 목마름으로 글씨 한 점 또는 그림 한 점을 받기 위해 앞 다투어 경쟁을 하였다하니 당시에 통신사들의 인기를 짐작한 만 하다.

 

    아메노모리호슈선생현창비(雨森芳州先生顯彰碑): 대마도와 왜관을 왕래하며 조선과의 실무교섭을 담당했던 외교관이다. 22세에 대마도 번의 진문역(眞文役=한문을 다루는 관리)을 시작으로 88세로 죽을 때까지 오직 조선과의 외교에만 매달린 친한파 유학자였다고 한다.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통신사를 에도까지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그가 지은 교린수지교린제성에 조선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적어 명확한 조선관을 가졌음이 잘 나타며 조선과 수교자세에 있어 성신(誠信)을 바탕으로 한 신뢰외교(信賴外交)를 주창하였다고 한다.

 

슈센지(修善寺): 이곳은 면암 최익현선생의 순국비(大韓國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가 있는 곳으로 비의 크기는 높이 2.1m, 0.45m, 두께0.25m이며 한국의 황수영박사가 쓴 비문에 면암 최익현선생이 19071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 될 때에 이 절에서

하룻밤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 이 비를 세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절은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원래는 규우홍인(九品院)이라고 불리던 비구니 절이었다가 1573년경 남승의 절로 바뀌고 절 이름도 슈센지로 바꾸었는데 슈센(修善)이라는 현판은 조선말 판서를 지낸 김학진의 친필로 아직도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치만궁신사(八幡宮神社): 이곳은 우리가 이번 대마도 답사를 실행하게 된 동기 즉, 홍주의병 9열사의 체취가 묻어있는 곳이다. 열사들은 이즈하라(嚴原)의 경비대에 인치(引致)되어 유배생활을 하였으나 이 신사의 우측에 있는 여관에 상당기간 머물렀던 것이다. 그 시절 대마도에는 이 신사를 중심으로 81315일까지 하치만궁제(八幡宮祭)라는 섬 안 남녀노소가 모두모여 노는 민속행사가 있었는데 11열사(홍주9열사 + 최익현, 임병찬)들은 이 민속행사를 보

 

 

고 감상의 시를 한수씩 지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유준근과 임병찬이 쓴 마도일기에도 이 민속행사가 소개되고 있다.

아래 유준근의 마도일기에 “. . .소위 신당이라고 하는 것이 여관의 왼편에 있어 정원이 무척 넓은데 . . .”라는 내용과, 임병찬의 마도일기에 “ . . .대개 신궁(神宮)은 우리가 있는 좌편에 있는데 정원이 넓다.”라는 내용에서 열사들이 이 신사의 우편에 있는 여관에 머물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유준근의 마도일기중에서)

1906814: 무인 아침에 별이 나고 낮에 흐렸다. 유준근이 추위에 병들어 누웠다.

본 섬에는 소위 팔번궁제(八幡宮祭)가 있는데 이 제사를 마친 3일에는 또 해안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소위 신당이라고 하는 것이 여관의 왼편에 있어 정원이 무척 넓은데 10일전부터 섬사람이 부역하여 풀을 뽑기 시작한다. 이달 13일부터 사방의 상인들이 가옥(假屋)을 세워 장막을 치고 서로 흥행하는데 구경꾼이 줄지어 모여들고 밤이면 오색 등불을 켜서 낮과 같이 밝다. 그 제복은 대략 심의(深衣)와 같고, 관은 명나라 유건(儒巾)과 같은데, 귀가 없을 뿐이다.(마도일기는 1906618같은 해 92일까지 격고 느낀 점을 적은 일기)

 

(임병찬의 마도일기중에서)

1906813: 이 섬에는 팔번궁(八幡宮)의 제사가 있는데, 오늘부터 시작이어서 섬 안의 남녀노소가 3일동안 모두 모여 논다고 한다. 삼택증치(三澤曾治)라는 사람에게 들으니 옛날 신황(神皇)의 후궁이 삼한(三韓)을 정벌 할 때 이 섬을 거쳐 갔기 때문에 고적(古蹟)이 많다고 한다. 그 후에 신당을 만들어 세우고 팔번제(八幡祭)를 사흘 지내는데, 사흘 되는 날에는 바닷가에 나가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대개 신궁은(神宮)은 우리가 있는 좌편에 있는데, 정원(庭園)이 넓다. 열흘 전부터 각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나와서 풀을 뽑으며, 또 수일 전부터 각 지방의 상인들은 가옥(假屋)을 짓고 장막을 둘러치며, 각기 채등(彩燈)과 종이로 만든 꽃을 달아매어 서로 서로 밝게 비치는데, 꽃과 촛불이 서로 고운 모양을 자랑하여 보는 것마다 감회가 일어난다. 이에 우리는 각각 7(七絶) 1(一首)씩 읊었다.

 

한편 이곳은 일본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곳이다. 삼한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제14대 주아이 천황의 황후, 신공황후를 모신 신사인데 이런 엉터리 주장이 관련된 장소에서 항일열사들이 망국의 한을 곱씹고 저항의 의지를 불태웠던 것은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코쿠분사와 / 사명대사비: 고쿠분사(國分寺)라는 곳은 한일병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고쿠분쇼타로(國分象太郞)라는 사람의 묘가 있는데 그 묘비 이름을 이완용이 썼으며 후작이완용서(侯爵李完用書)라고 표기하였다는 것이다. 아마 국내에 그런 비가 있었다면 성난 민초들에 의거 파괴되어 없어졌을 것이나 이곳은 일본 땅이므로 온전하게 보존된 것 같다.

 

일행들이 국분사를 구경하는 동안 이춘호회장과 임창순전교장, 이덕영선생, 그리고 나는 근처에 사명대사비가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그곳을 보기로 했다. 임창순 교장선생님이 인근 지도를 한 장 구입한 뒤 가이드가 설명하는 대로 표기를 한 후, 그것을 가지고 여기저기 헤매었다. 누구에게 물으려 해도 뜨거운 대낮인지라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간신히 어느 절에서 스님에게 물어도,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는 우편배달부를 잡고 위치를 물어도 사명대사비를 알기는커녕 지도에 표기한 위치도 찾을 수가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헤매기를 두어 시간,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일행들에게로 돌아 와야 했다. 한편 일행들은 국분사를 구경한 후 점심식사장소로 옮겼는데 12시까지 오기로 한 우리들 4명이 점심을 다 먹은 13시까지도 오지 않으므로 크게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해대고 큰길까지 나와 기다리는 등 애를 태웠다.

 

귀국길: 당초에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온천욕을 즐긴 후 항구로 이동할 계획이었으나 우리 네 명이 사명대사비를 찾아 헤매는 바람에 시간이 늦어져 온천욕 코스를 생략하고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히타카수항으로 이동하였고 16:00출발하는 국제여객선 코베(KOBEE)호로 부산항에 도착하여 대절한 버스 편으로 돌아오다가 휴게소에 들려 저녁식사를 하고 대천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다 되었다.

 

참고자료

(유준근 일생요약)

1860년 보령 내항(녹문)에서 출생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보령지역 유림들과 연합하여 납세거부운동

1906년 민종식의 홍주의병에 유병장(儒兵將)으로 참여-왜병에 패하자 피신하지 않고 의병관련서류 불태우고 체포되어 대마도 유배.

1909년 귀국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일제호적에 올리기 거부

1912년 고종의 밀명으로 조직한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에 충청도대표자로 활동

1919년 순종복위와 독립국 선포 상소문의 소두(疏頭)가 되었고 조선민족대표12인이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한다는 12인들의 장서를 연명하여 총독부전달, 종로보신각의 군중 앞에 낭독 만세시위 확산도모

1919년 파리장서에 유림대표로 서명하고 전라도지역 담당하여 서명받기 추진

1920년 일제의 유교 어용화 정책반대와 유교윤리진작을 통한 항일운동으로 서울에서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를 설립할 때 보령지역 대표로 참여코자 상경도중 왜경들이 행인에게 전염병 예방접종을 하였다. 이에 접종을 거부하고 고향에 돌아왔는데 그 전염병에 걸려 서거

1977년 건국포장 추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올려 추서

 

(유준근의 시)

이 내 몸은 하느님께 받은 몸이라

함부로 없앨손가 터럭 하나인들

추상같은 의기를 굳게 지키니

깔 끝 같은 저 봉우리 애를 끓는 듯

 

동녘바다 한 구석 대마도 섬에

이 내몸 잡혀오니 무득 슬프네.

어디대고 절의를 논한단 말인가

다만 저 푸른 솔 푸른 대만이 . . .

-1906625일 말복-

 

팔번(八幡)을 굽어보니 달빛 새롭고

장막 속의 섬중 사람 가득 모였네.

사흘 밤 향등 켜고 술 마실 적에

색 옷 춤과 꽃 장식 모두 봄이로구나.

-1906814일 팔번궁제를 보고-

 

(최상집(崔相集)의 일생요약)

1849년 보령 웅천 소황리에서 출생

1906년 민종식의 1차 광시의병, 2차 홍산지티봉기 및 홍주의병에 소모장(召暮將)으로 참여

1908년 귀국

1909년 유배지에서 겪은 고초 후유증으로 61세 서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최상집의 시

오늘도 또 하루라 가을을 보내면서

산을 보고 물을 보니 마음 절로 상하누나.

나라 생각 누구는 눈물 흘리는고

신세가 하도 슬퍼 내 역시 애를 끊네.

 

바람이 이니 나뭇잎은 한없이 소실하고

달이 뜨니 산 집은 더욱 쓸쓸 하구나

거울 속의 내 머리 아침마다 희어가니

모두가 수심 때문 말길 길 바이 없네.

-1906625일 말복-

 

강은 만 번 휘어도 동으로 쏟는 거라

늘그막에 나라위해 잡혀 왔네

부슬 부슬 밤비에 꿈을 깨어보니

숲속의 부는 바람 선들 기운 보내준다.

-1906715-

 

바다밖에 졸지에 늙은 상공(相公) 오신다 전하니

처음 듣고 눈물 흘러 참을 길 없네.

하늘에 치솟는 절의(節義) 사는 것만 어이 취하리.

만 리 밖에 우레와 같이 크게 소리 날 날 있으리.

-1906715-

 

비록 몸은 늙었지만 뜻이야 변하겠나.

갓을 벗고 앉았을 적에 내 눈물이 쏟아 졌네.

궁하면 제자리로 돌아온다더니

하느님이 이제야 옛 모습 찾아 주네.

-1906726-

 

지난날 원님이 오늘 날 의사

이역에 멀리 와도 성화는 높네.

더구나 사제(師弟)간의 의를 다하니

명예가 백대를 전하오리다.

-1906728-

 

가을이라 쌓인 비 시름을 자아내니

길손이 물()을 보고 정을 어찌 참겠는가.

다락 위엔 주렁주렁 산유자 열매 맺고

창창한 송림사이 새벽달 비쳐 온다.

 

안력(眼力)도 함께 있어 먼 곳은 못 보나니

꿈 혼은 몇 번이나 한양성 들렸던고

의복세탁 바느질 제 손으로 맡기시니

한 가닥 빨래 줄이 빈공에 비끼었네.

-1906729-

 

맑은 샘물 끌어드린 좋은 별장에

먼 나그네 와서 보니 때마져 가을

말은 서로 모르지만 수·(水火)를 통해 주고

한 집안 사이 마냥 거처를 빌려 주네.

 

괴석을 의지하여 국화가 많고

물결 따라 갈매기는 떠다니누나.

세상사는 재미가 이에 족하니

고기 낚고 나무하며 날을 보내네.

-190682-

 

이역에서 한번 보고 마음이 맞아

군무가 바쁜데도 틈틈이 찾네

필답을 써서 나를 위로 하면서

저도 고향으로 가게 된다고 . . .

-1906810-

 

하얀 달 붉은 둥불 밤경치 새로운데

그림 같은 사람들 거울 속에 오고 가네

듣자 하니 한가위 사흘 간 모임에는

늙은이 젊은 사람 어울려 논다는군.

-1906814일 팔번궁제를 보고-

 

 

 

답사를 마치고

일제와 싸우다 붙잡혀 국외로 끌려간 경우는 이들 홍주 9열사와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홍주9열사보다 22일 늦게 대마도에도 유배된 최익현(崔益鉉) 및 그의 제자 임병찬(林炳瓚) 11인밖에 없었다. 면암 최익현은 만천하에 그 공적이 널리 알려지고 인지도가 높아 수선사에 면암 최익현선생 순국비(大韓國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가 세워졌다.

  그러나 홍주9열사의 흔적은 아무데도 찾을 수가 없다. 그분들은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떨쳐 일어선 홍주의병의 선봉에 서서 일제와 용감하게 싸우다 붙잡혀 대마도에 유배되어 수많은 고초를 겪은 분들이다. 홍주9열사의 대마도 행적들은 국가보훈처에서 이미 밝혀 포상하였고 유준근의 마도일기, 임병찬의 마도일기, 당시 최익현을 비롯한 11열사들이 지은 시문 등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그분들의 애국애족의 혼을 기리려면 그분들이 고생했던 자리, 그 분들의 체취가 배어 있는 대마도에 그분들의 행적을 알리는 작은 비석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끝)

 

 호텔에서 맞는 아침 떠오르는 해가 멋있어 몇 분 간격으로 찍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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