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외 역사문화 탐방기
6박7일간 백두산을 비롯한 고구려유적, 항일투쟁관련 유적 등 몇 곳을 다녀왔다. 보령문화연구회 11명 가족4명, 대천여고학생 10명, 교사 3명, 그리고 충남 지리교육연구회 12명 등 40명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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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8.6. 맑음
09:30 하상주차장에 집합하여 관광버스로 인천공항에 가서 비행수속을 밟아 17:10분 출발하는 중국 남방항공기를 타고 한 시간을 날아 중국 다렌(大連)공항에 도착하니 현지시간 17:10분(한국보다 한 시간 늦음)이었다. 다렌(大連)은 랴오닝성(遼寧城)에서 두 번째 큰 도시로 랴오둥(遼東)반도 끝에 자리한 인구 56여만 명의 도시이다. 북방의 홍콩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며 잘 발달한 항구, 깨끗한 해변과 녹지 등으로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세계100대 도시 중 하나라지만 눈에 비치는 시가지는 교통질서가 엉망이고 도로변 아무데나 주차를 하는 혼잡한 도시이다. 현지안내인 범리해(여, 26세, 북한출신, 화교3세)의 안내로 근처 ‘송도횟집’이라는 곳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4시간을 달려 단동(丹東)에 도착하니 23:00, 장성주점(長城酒店)이라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준4성급이라지만 옷장이 따로 없고 면도기도, 드라이기도 없다. 깨끗하긴 해서 그런대로 괜찮았다.
단동(丹東)은 랴오닝성(遼寧城) 남동쪽, 즉 우리나라 신의주와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65만 여명이 사는 곳이다. 옛날에는 신의주보다 뒤떨어진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발전하여 저녁에 신의주는 캄캄하지만 단동(丹東)은 불빛이 환하여 이를 실감나게 한다는데 우린 밤에 나와 보지 않아 실감할 수 없었다.
2012.8.7. 맑음
(역겨움을 자아내는 항미원조기념관) 단동엔 ‘항미원조기념관,이라는 게 있다. 중국인들이 6.25때 북한에게 지원군을 보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우선 기념관 옆 운동장만한 넓은 터에 6.25때 중공군이 썼던 탱크, 장갑차, 소형 전투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들을 전시해 놓았다. 기념관 앞에는 높은 기념탑을 세웠으며 기념관 속에는 전쟁당시의 사진, 물품, 기록들을 전시해 놓고 미군과 국군을 이기고 자신들이 정의를 찾았다는 식의 미화한 이야기들, 자기들 편에서 공을 세운 전쟁영웅들을 치켜세우는 따위의 이야기들을 선전해놓고 있었다. 참으로 역겨움이 느껴진다. 옛날 만약 중공군이 개입치 않았다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김일성을 응징하고 남북통일을 이루어 지금쯤 북녘 동포들도 우리와 똑 같이 잘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겨보았다.
(압록강변) 강 건너 저편으로 북한이 보인다. 끊어진 다리와 사용 중인 다리가 나란히 놓여 있는 곳에 갔다.
6.25때 미군에 의해 끊어졌다는 단교의 중국 쪽 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옆에 ‘조중친선교’라는 다리가 건설되어 있는 것이다.
배를 타고 압록강줄기를 유람하였다. 북한 쪽 강가에는 이따금씩 민가를 비롯한 허름한 건물들이 나타나고 보초선 군인, 뭘 하는지 서성이는 사람, 웃옷을 벗은 채 목욕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강가에 매어 놓아 풀을 뜯는 소와 양 등이 보인다. 전에는 낚시꾼도 있고, 안개 자욱한 밤을 이용해 이 강을 헤엄쳐 탈북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우리 관광객들도 배로 유람하다가 북한 군인들을 만나 담배나 돈 등을 건네기도 하였다는데 지금은 경계가 심해 그런 일들이 어렵다고 한다. 주위를 살펴보면 북한지역의 산은 나무가 거의 없는 것이 특색이다. 산마다 모두 꼭대기까지 개간을 하였고 요즈음 철에는 옥수수를 심어 놓았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강을 굽이굽이 유람하다가 방향을 구분 못할 때 나무가 있으면 중국이고 없으면 북한이란다.
배는 위화도 옆을 지난다. 군인과 그 가족 등 5천 명 정도가 산다는 위화도, 먼 옛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안 하고 중국으로 진격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곳 단동, 아니 만주 땅이 지금 우리나라가 되어 있을까? 부질없는 상념에 잠시 젖어보기도 한다. 배에서 내려 지척(咫尺)이라고 돌에 새긴 국경선으로 갔다. 중국군인 2명이 감시를 한다. 강줄기에서 갈라진 좁은 물줄기, 그야말로 펄쩍 뛰면 건너질 것 같은 좁은 개울 저편이 북한이란다. 우리나라 땅을 이렇게 가깝게 놓고 건너가지 못한다니 . . .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박작성) 다시 30여km를 달려간 곳은 박작성(泊灼城), 고구려성으로 단동의 호산(虎山)에 있으며 648년 당태종이 설만철(薛萬澈)을 시켜 3만의 군사로 공격했으나 박작성 성주 소부손(所夫孫)이 1만 군사로 지켰고 이를 고구려 장군 고문(高文)이 오골성(烏骨城)과 안시성(安市城)의 군대 3만여 기를 동원하여 구원하였다는 성, 그동안 고구려의 천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으로 알려졌던 이곳을 중국에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만리장성이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며 옛 고구려식 산성을 허물고 다시 전돌로 중국식으로 성을 쌓아 여기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호산장성(虎山長城)이다’라고 써 놓았다. 그야말로 후안무치한 역사왜곡의 현장이다. 본래 만리장성의 동쪽끝은 중국의 산해관이라는 곳인데 . . .그 때문에 많이 찾아오던 우리나라 관광객이 확연하게 줄었다고 한다. 아무튼 쨍쨍 내려쬐는 뙤약볕을 무릅쓰고 성문위로 연결된 성벽줄기를 따라 9개의 작은 문을 거쳐 박작성의 꼭대기까지 올랐다. 정상은 해발200m정도 높이였지만 유유이 흐르는 압록강 줄기와 강너머로 보이는 북한의 산천이 넓게 펼쳐저 보인다. 아! 이곳도 먼 옛날 우리의 산천이었거늘 . . .
(환인현) 점심(銀杏園食堂)을 마치고 4시간이 걸리는 환인현(桓仁縣)으로 달렸다. 환인은 지린성(吉林城)지역으로 랴오닝성의 동부 접경에 있으며 인구 31만이 산다. 우리 동포들도 8천명 정도가 산다고 하며 그래서 그런지 버스를 타고 지나치는 거리에는 한글 간판도 자주 눈에 뜨인다. 이곳의 이름이 왜 환인일까? 혹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중의 환인과는 어떤 연관이 있진 않을까? 그 이름이 그대로 전해져 오늘의 지명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욕심(?)까지도 가져본다. 아무튼 이곳은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성(卒本城)이 있고 역시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이 있는 곳이다. 고구려 관련 설화에 주몽이 적에게 쫓기어 엄사수(淹斯水)에 이르렀으나 다리가 없어 더이상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물에 대고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으로 적에게 쫓기는 중에 있는데 어찌하리오"라고 하니 물속에서 어별(魚鼈)이 떠 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고 주몽이 무사히 건너자 어별이 흩어져 뒤에 다달은 적들이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엄사수가 이곳 어디쯤 있던 강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상념에 젖어본다.
(졸본성)광개토대왕비에 홀본성(忽本城)으로 되어 있는 졸본성은 해발 800여m에 있다.
산꼭대기 부분이 깎아지른 듯 한 절벽이어서 적들이 침략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이면서도 정상부분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분지로 되어있고 특히 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르지 않은 천지(天池)라는 연못과 옆에 우물까지 있어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생활할 수 있었기에 전시에는 이곳에 백성들까지 모두 올라 전쟁에 임하고 평시에는 내려와 평지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산 아래에 고구려 시조비와 박물관이 있으나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5시가 넘었기 때문에 박물관은 보지 않고 산성만 보기로 했다. 셔틀버스로 산 중턱에 있는 산성출입문까지 오른 다음 30-40분 정도 수없이 많은(1000개가 넘는다) 가파른 돌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 정상에 서니 사방팔방으로 탁 트인 경관이 매우 빼어났다. 굽이굽이 흐르는 비류수(혼강)와 그를 이용한 댐물, 넓게 펼쳐진 산과들 . . . 먼 옛날 고구려 백성들이 살던 곳이 아닌가, 1호 건물터(온돌, 쪽구들 등의 시설물), 연자방아터, 천지(天池)와 우물, 2호 대형건물터, 점장대, 소전장대, 3호 대형건물터 등 유적들을 보고나니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캄캄한 가운데 위험한 돌계단을 더듬더듬 내려오려니 몹시 힘들었다. 이곳도 중국에서 졸본성이라는 이름을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바꾸어 버렸다. 다섯 명의 선녀가 성을 쌓고, 살았다는 유래까지 그럴듯하게 만들어 유네스코에 등록하였으니 고구려의 흔적이 사라져가는 게 안타깝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4시간을 달려 지안(集安)에 도착, 호강대주점(豪江大酒店)이란 호텔에 들었는데 3성급 호텔이라는 곳이 식수가 없고 이불이 겨울 밍크담요여서 불편하였다.
2012.8.8. 맑음
길림성 지안(集安)시는 압록강변에 있으며 옛날 고구려 유리왕이 서기 22년 고구려의 서울을 졸본성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기에 광개토대왕비와 능, 그리고 장수왕릉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구려 무덤들, 환도산성, 국내성 등 북중국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혼이 아직도 면면히 살아숨쉬는 곳이다. 오늘은 그 벅찬 고구려의 숨결을 느껴 볼 차례이다.
07:00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려니 허름한 차림새의 80세 정도 된 잡상인이 강인식(姜仁植)이라는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며 강감찬장군 제36대손이라면서 다가왔다. 찐 옥수수 1,000원어치를 샀더니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 요즈음 올림픽이 한창인데 4,800만 인구를 가진 우리나라가 13억 인구의 중국보다 오히려 더 잘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 모형을 중국인들이 만들어 작은 돌멩이에 불과한 것을 1만원씩 받는다. 그런 것 사지도 말라, 또 중국인들은 부채도 2-3천원 받으면 될 것을 만원씩 받아먹는다. 나쁜 사람들이다. 그런 것들 사지도 말라. 또한 광개토대왕릉에 사람들이 돈을 많이 놓는데 그것들은 다 중국인들 술값이 된다. 돈을 절대 놓지 말라”는 등의 말을 하는데 말이 어찌나 빠른지 채 알아듣지 못할 정도이다. 그분은 우리가 관광버스에 오르자 인솔책임자의 허락을 받고 차에 올라 다시 한 번 그 말들을 강조하였고 일행 중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부탁을 덧붙이며, 광개토대왕비 뒤에 있는 기와집에 살고 있으니 다음에 오면 꼭 들려 달라 그러면 불고기를 대접해주마고 약속까지 하였다. 한국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는 동포였다.
(광개토태왕능) 광개토대왕비에서 서쪽으로 약 200∼30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積石塚)로 남아있는 높이 14.8m 한 변의 길이가 66m에 이르는 큰 규모다. 대형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구조인 대왕릉은 7단의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계단 안은 작은 돌들이 채워 넣어져 있다.
한편 이 무덤을 태왕릉이라고 하는 것은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태왕릉이 산과 같이 안전하고 언덕처럼 견고하기를 바란다)'이라고 쓴 벽돌이 이 무덤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광개토대왕비에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쓰여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장군총) 지안현[集安縣]에 고구려기단식 돌방돌무지무덤[基壇式石室積石塚]이 있는데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대형 단을 7층으로 쌓고 제4층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돌방[石室]을 설치했다.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이며 무덤의 네 모서리는 정확히 동서남북에 맞추어졌다.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 11.28m, 밑변 한 변의 길이는 29.34m,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 로 채웠다. 제1층의 각 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높이 5m가량의 대형 석재로 버팀돌을 세워 무덤을 지탱하게 했는데, 북면의 1개는 깨어져 없어지고 현재는 11개만 남아 있다. 널방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5.0m, 높이 5.5m이다. 널방 안에는 동서로 나란히 2개의 널받침[棺臺]을 설치했다. 널받침은 길이 3.7m, 너비 1.5m이며 윗면 가장자리를 요철형으로 두드러지게 하여 관이 놓일 위치를 나타냈다. 널방 안에는 본래 석회를 발랐으나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무덤정상부에 놓인 돔형의 석재 상면 4변에는 21개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고 주변에서 상당량의 와당편을 발견했다. 무덤의 거대한 규모, 5기에 이르는 배총, 무덤이 돌무지무덤의 최종단계형인 기단식돌방무덤인 점, 무덤 주변에 태왕릉(太王陵)과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등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무덤의 피장자를 412년에 죽은 광개토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고 한다. 벽화가 완전히 지워진 것도 이 무덤의 주인공을 짐작하는데 어려운 요인이 될까?
처음에는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 했으나 중국에서 산의 이름을 따서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라 부르다가 산 이름이 환도산으로 바뀌면서 성 이름도 환도산성(丸都山城)이라 한다. 성벽둘레는 7km, 높이는 6m, 지안현 서북쪽 2.5km지점에 있는데 앞에는 퉁거우강(通滿河)이 흐르고 뒤에는 해발 676m의 환도산줄기가 둘러있어 천혜의 요충지이다. 성안에 궁전터, 장대(將臺), 저수지(음마지/飮馬池), 수졸(水卒), 주거지(병영터) 등 유적들이 많이 있으나 더운 날씨탓으로 대충 들러보고 내려왔다.
부근에는 고구려 무덤군이 있다. 무덤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단이 없었다가 생기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5개의 기단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그 변화하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여러 종류의 무덤들이 공존하고 있다. 고구려 무덤이 당나라 무덤과 다른 점은 당나라는 석실이 지하부분에 있으나 고구려 식은 윗부분에 있다고 한다.
(국내성) 묘향산식당에서 북한식으로 점심을 먹고 압록강변에 있는 국내성(國內城) 옛터를 찾았다.
유리왕이 수도를 옮겨 400여년 고구려의 중심지역할을 하였던 이곳, 지안(集安), 그중에서도 중심이었다고 추정하는 이곳은 도시가 형성되어 옛 성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성곽의 극히 일부만 복원하여 놓았는데 그나마 성돌들이 우리지방 보령읍성이나 남포읍성 등에서 보는 성 돌에 비해 작은 돌로 쌓았고 그것도 높이를 1m정도밖에 쌓지 않아 가정집 돌담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아무튼 국내성은 당초에는 동쪽 성벽 554.7m, 남쪽 751.5m, 서쪽 715.2m, 총 둘레는 2,686m에 달했다고 한다. 평지에 있는 성이기 때문에 평상시에 살다가 전시에는 환도산성으로 옮겨 싸웠다고 한다.
고사속에 나오는 '황조가' 귀절을 떠올려 본다. "편편황조(翩翩黃鳥/훨훨나는 저 꾀꼬리) 자웅상의(雌雄相依/암수 다정히 노니는데) 념아지독(念我之獨/외로울사 이내 몸은) 수기여귀(誰其與歸/뉘와 함께 돌아갈꼬)" 황조가는 유리왕이 여러 세력들과 제휴코자 맞은 왕비들의 세력다툼으로 사라진 화희(禾姬)라는 아내를 찾아 나섰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며 허탈하게 부른 노래라고 한다.
(발마사지)통화(通化)시의 한 업소에서 발 마사지를 받았다. 실내에 10명씩 들어갔는데 마사지사가 무표정하게, 그저 형식적으로 움직이는 게 이게 서비스업인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팁을 주고 싶지도 않았으나 이미 일행들이 다 같이 2,000원씩 주기로 정한 터라 돈을 주었더니 그나마도 불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더 주기도 어렵지만 더 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한편 통화시는 옛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설립되어 10여년간 독립투사들을 교육시켰던 곳으로 애국독립지사들의 혼이 어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송강하마을)
내일은 백두산을 오르는 날이다. 미리 그 근처로 가기 위해 5시간 30분을 달려 송강하마을로 이동하였는데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지다가 이따금씩 산과 민가들이 나타난다. 마을을 지나치려면 이.미용실, 식당, 농기구수리 등의 한글간판도 나타나 이곳도 우리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다가 점점 산이 높아지고 옥수수밭도 드물어진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였고 송강하마을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완전히 어두운 밤이 되었다. 식당, 여관, 노래방 등 간판에서 흐르는 네온들이 관광지임을 말해준다. 저녁을 먹고 금강빈관(錦江빈舘)에 여장을 풀었다. 3성급이라서 그런가, 시설이 열악하다. 샤워실이 조잡하고 면도기는 뜯겨 사용할 수가 없다. 여행기간 중 가장 빈약한 숙소지만 내일 아침엔 4시에 일어나야 한다는데 호텔이 좋고 나쁘고 가 어디 있나?
2012.8.9. 맑은 후 흐리고 비
여 지금은 산천어가 많이 산다고 한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이 백두산의 2/3가 중국땅이라고 한다. 왜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중국 땅인가, 왜 백두산을 가는데 머나먼 길을 돌아서 가야하며 비싼 경비를 중국인들에게 써야 하는가,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2,700m가 넘는 고산지역인 탓에 산소가 부족하여 좀 빨리 움직이려 하면 숨이 차고 어지러운 기운이 든다.
(장백폭포) 내려오는 봉고차를 타고 장백폭포주차장으로 갔다. 천지의 맑고 푸른 물은 북쪽 천황봉과 용문봉 사이 열려 있는 곳, 즉 중국 쪽의 화구뢰(火口瀨)를 통해 밖으로 흐르며 해발 2,000m 쯤에서 68m의 커다란 폭포를 이룬다. 그 물줄기가 흰 비단이 하늘에서 내려오다가 중간쯤에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히면서 두 폭으로 갈라져 백두산 중턱에 걸려 있는 듯 한 장백폭포(長白瀑布), 이 폭포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 흘러내린다고 한다. 인근에서는 온천도 나온다는데 폭포를 본 것만으로 만족하고 내려오려니까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주차장에 도착하니 제법 비가 주룩 주룩 내렸다. 만약 한 두 시간 전에 이 비가 왔다면 천지구경은 못했을 터인데 우리는 참 재수가 좋은 사람들이다.
(지하산림욕장) 셔틀버스로 다음 간 곳은 지하산림욕장이다. 그야말로 수백, 수천년이 되었음직한 원시림사이로 산책길을 만들어 놓고 삼림욕을 즐기는 곳이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지만 일행들은 지하산림욕장의 맨 끝이 어떻게 생겼나 본다고 모두들 숲속으로 들어갔다. 30분정도 들어갔을까? 자신이 없어졌다. 몸이 피곤하여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려면 산길을 올라와야 되는데 숨이 차 어려울 것 같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행들에게 폐가 될 것이고 . . . 이쯤해서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일행들은 끝까지 다녀왔다.
(청산리 전투유적지 답사 무산)화룡시(和龍市)로 이동하여 성원대주점(盛源大酒店)에서 점심을 먹고 청산리관련 유적을 보기위해 15:00 청산리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할 때까지 시골길을 달리니 ‘안도’라는 곳이 나타났다. 이곳은 일행 중 한명이 자기 종조할아버지가 일제시대 살았던 곳이라며 반가워했다. 그 당시 보냈던 편지들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몇시간을 달렸는데 버스가 청산리와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길을 몰라 반대로 갔다는 것, 우리나라 같으면 네비게이션이 잘 발달하여 길을 반대로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는 중국이다. 일행들은 급히 협의를 한 결과 다시 길을 돌려 청산리로 갈 경우 캄캄한 밤에 도착하여 답사도 어려울 뿐 아니라 다음 일정에도 차질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청산리 관련 유적답사는 포기하기로 하고 연길(延吉)로 갔다.
그런데 연길에 도착하기 전부터 갑자기 아내가 머리가 몹시 아프다고 끙끙 앓는 게 아닌가? 마침 일행 중에 상비약을 가져 온 사람이 있어 아내는 진통제와 속 메스꺼움 방지하는 약을 먹은 후, 일행들이 저녁을 먹기위해 들른 한라산 식당 한 쪽에서 쉬고, 일행들은 등심과 삼겹살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일행들은 맛있다고 잘들 먹었으나 나는 아내 때문에 맛이 있는지 없는지 느끼지도 못하고 대충 먹었다. 다행이 진통제의 효과 때문인지 식사가 끝날 때쯤 해서 아내가 많이 좋아졌고 21:00 대주주점(大州酒店)이라는 호텔에 들어가 푹 쉬니 거뜬하다고 하였다. 피로가 겹친 때문이었을까?
2012.8.10. 맑음
(조선족자치구 연변)연길시는 한글간판이 흔하다. 한글로만 된 간판도 많고 한자간판에 한글로 토를 단 곳도 많다. 한글로 토를 달 때도 반드시 한자위에 한글을 쓰고, 옆으로 써야 할 때는 반드시 좌측에 한글을 써서 한글이 우위(優位)에 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연길(延吉)을 포함한 도문(圖們), 용정(龍井), 화룡(和龍), 돈화(敦化), 훈춘시와 안도현(安圖縣), 왕청현(汪淸縣) 등 연변은 조선족 자치구다. 인구 218만 명 중 98만 명이 조선족인데 그 수가 점점 줄고 있다고 하며 80만 이하로 준다면 자치구를 해제하여 일반으로 환원한다고 한다. 조선족의 인구가 주는 이유는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대우로 조선인은 정부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불이익을 피하여 한족으로 귀화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란다. 말로는 소수민족보호를 위해 각종 혜택을 주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실제로는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심하다는 것, 동북공정도 그 실질적인 피해는 연변에 사는 조선족이 가장 크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한국인들을 없인 여기는 풍조가 심했으나 그래도 요즘에는 연변 동포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고 연변발전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고 한다. 한편 9월 3일이면 연변자치구 제60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해서 건물들을 고치고 도색을 다시 하는 등 여기저기 공사들이 한창이다. 아마도 6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벌일 계획인 모양이다.
일제시대 간도협약에 의해 중국에 넘겨진 간도 지방, 한국인이 많이 살고 한국어가 통용되고 한글간판이 많은 이곳, 연변을 우리땅으로 할 수는 없을까?
샘에서 용이 나오는 꿈을 꾸고 용정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간도지방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아지자 광명, 대성, 용정, 은진, 영신, 동흥중학교와 그리고 명신여중학교 등 민족학교들이 설립되었고 이 학교들은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간도지방에서 1919년 3월13일 당시 30만정도의 조선인 중 3만 여명이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을 펼침으로서 이 학교들의 민족교육이 큰 성과를 거두었음을 말해주기도 하였다. 그들 학교의 중심역할을 하였던 대성중학교로 갔다. 지금은 용정중학교로 바뀌었지만 대성중학교 옛 팻말과 윤동주시비가 서 있고 옛 학교 건물을 기념관으로 개조하여 항일운동관련 사진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고 연변말씨를 쓰는 여인이 안내를 맡는다. 저항시인 윤동주를 비롯하여 이상설, 김좌진, 나운규 등 너무나 유명한 인물들이 이곳 중학교들을 다녔거나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였으며 문익환과 김일성의 사진도 소개한다. 이 외에도 이곳이 중국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여럿 전시되었으나 우리가 남한에서 온 사람들인 때문인지 설명을 생략 한다.
(일송정) 용정시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비암산이라는 곳에 가곡선구자의 노랫말에 나오는 일송정이 있다. 옛날 이곳 소나무아래에 민족지도자들이 자주 모여 용정시내를 바라보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곤 하였는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이후에는 연변지역과 특히 용정지역에 대한 학살과 압박이 극심했어도 일송정모임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일제는 이곳에서 모임을 갖지 못하게 하고 비암산을 군사훈련지로 정해 일송정을 사격목표로 하였으며 1938년에는 일송정, 즉 소나무가 살지 못하도록 약을 써 죽였다고 한다. 후세에 이곳에 정자를 짓고 20여 년 전에 소나무 한그루를 심어 일송정을 복원하였다. 용정 시내를 굽이쳐 흐르는 해란강(海蘭江)과 함께 일송정은 항일민족운동의 애환을 간직한 채 가곡 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시간이 없어 멀리 일송정만 바라보고 그냥 지나치려니 서운하기 그지없다.
(두만강 국경) 두만강은 강폭이 좁은 곳이 많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우리가 간 곳은 도문(圖們), 북한의 함경북도 남양시와 중국을 잇는 다리가 놓여 있는데 북한과 중국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다리이여서 북한 쪽에서 광물 등 원료를 그리고 중국 쪽에서는 생필품 등을 싣고 오고간다며 우리가 보는 중에도 트럭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편 다리 중앙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어 우리일행을 비롯한 관광객들은 그곳까지만 갔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강변에는 중조우의탑(中朝友誼塔)이니 도문강반(圖們江畔)이니 하는 따위의 구조물들을 많이 세워 놓았는데 그 규모나 만든 폼이 조잡스럽다. 강택민이 세운 중국도문구안(中國圖們口岸)이라는 구조물도 있다. 잠시 사진들을 찍은 다음 조금 이동하여 북한과 중국을 잇는 철로가 있는 곳에 잠시 머물러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흘러간 노래 '눈물젖은 두만강'을 잠시 떠올려보지만 우리가 본 두만강은 푸른물이 넘실대는 강이 아니라폭이 좁아 강이라기 보다는 냇물이라고 해야 맞을 성 싶다.
(밤 열차여행) 17:10 연길역에서 기차를 탔다. 침대열차인데 말이 좋아 침대이지 한 칸에 닭장 같은 3층짜리 침대 두 대를 마주보게 하여 놓았는데 높이가 낮아 앉아있으면 머리가 위에 받힌다. 더구나 2·3층은 오르내리기도 불편할뿐더러 3층은 벽면이 둥글게 되어 높이가 더 낮다. 다행이 나는 1층에 배정되어 불편이 조금은 덜했다. 챙겨가지고 간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웠다. 밤 열시가 되자 열차내의 모든 전등을 꺼 사람들이 잠을 자도록 한다. 어차피 밤이기에 밖을 구경할 수도 없고 움직이기도 곤란하니 잠이나 잘 수밖에 . . . 날이 밝아지자 복도에 나와 열차 옆을 스치는 풍경들을 감상했다. 그러나 사람은 여섯 명인데 앉을 자리는 겨우 2개, 그래서 1층사람 둘이 차지하면 2·3층의 4명은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으니 교대로 감상해야 했다. 내가 탄 칸에는 일행 4명이 한쪽 1·2·3층과 또 맞은 쪽 3층을 배정받아 맞은 쪽 1·2층이 비어 있었는데 1층에 30대정도의 중국 여인이 들었는데 덩치가 어찌나 큰지 100kg은 족히 될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한마디도 서로 나누지 못하고 그 여인은 코를 골며 자다가 새벽이 되니 부스스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열차에서는 처음 기차가 출발하면 열차표를 일일이 카드로 된 열차표로 바꾸어 주었다가 내릴 때쯤 되면 다시 카드를 회수해 가는데 열차원이 우리 칸의 카드를 회수하고는 뚱뚱녀가 탔던 자리를 가리키며 어디 갔냐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이 아니라 해도 한국어를 모르는 직원은 자꾸 무어라고 한다. 한동안 실랑이 끝에 종이에 동행(同行)이라고 쓰고 가위표(×)를 했더니 그제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한편 열차에서는 저녁에 뜨거운 물을 큰 보온병에 넣어 제공하더니 날이 새니 다시 바꾸어준다. 식수로 사용하기도 하고 컵라면 등을 끓여 먹으라고 하는 모양이다. 차량은 낡았으나 청소상태는 깨끗한 편이다.
2012.8.11. 맑음
약속시간이 잘 못 된 것인지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인지 버스가 한 시간이나 늦게 오는 바람에 식사시간도 그만큼 늦게 한원식당이라는 곳에서 김치찌개로 아침을 먹었다.
심양(瀋陽)은 랴오닝성(遼寧城)의 성도(城都)이며 중국에서 4번째 큰 도시로 800만 명의 인구가 산다고 한다. 심양의 서탑거리에는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있는데 일제시대 우리나라 항일운동가들이 이 지역에서 많이 활동하자 한국인들이 그들에게 국밥이라도 제공하려는 뜻에서 국밥장사를 하면서 한 사람 두 사람 늘어나 그 수가 많아짐으로서 한인촌을 이루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많아서인지 이곳에서도 한글로 된 간판이나 한자간판에 한글로 토를 단 간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연길처럼 한글을 반드시 위에 쓰거나 왼편에 쓰는 원칙은 없는 듯하다.
(청황궁) 청나라 초대 황제인 누르하치와 2대 태종(太宗)까지 황궁으로 사용하던 곳이지만 3대 성종(成宗)이 베이징(北京)으로 수도를 옮기는 바람에 황제가 이 지역(동북)을 순회할 때 사용하는 곳이 되었다. 특이한 것은 모든 건축물들의 간판에 한자와 더불어 구불구불한 여진족의 글씨들이 함께 적혀 있는 것이다. 여진족(만주족)이 중국을 평정하여 청나라를 세웠지만 한자문화에 동화되어버렸고 그들 문화의 흔적이 이렇게나마 남아 전하고 있는 게 서글프다.
만약 우리민족이 중국을 평정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다.
청황궁은 자금성에 비해 1/12정도 규모이지만 북방 기마민족으로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만주족의 기상이 깃든 건축물이라고 하며 2004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청태종능) 청나라 2대 황제인 태종(太宗)과 황후 효단문(孝端文)이 묻힌 곳으로 정식 명칭은 칭자오링(淸昭陵)이며 북쪽에 있다고 해서 베이링(北陵)이라고도 한다. 약 450만㎡의 넓은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규모가 너무 커서 관람객들을 실어 나르는 간이 자동차를 운행한다. 중앙의 정홍문을 지나 참배로로 들어서면 해태, 기린, 낙타, 말, 코끼리, 사자 등 6종류의 동물석상을 오른쪽에 숫컷 6마리, 왼쪽에 암컷 6마리를 나란히 세워놓았다. 능까지 이르는 동안 38동 건물들과 동물 석상을 비롯한 구조물들, 잘 다듬은 나무들, 웅장하면서도 잘 꾸며놓은 주위환경에 비해 막상 맨 안쪽에 있는 태종의 릉은 모래로 하얗게 덮여있는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해서 기분이 묘해진다. 한편 태종은 붓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명필 왕희지로부터 받은 글씨 한점을 몹시 아꼈다고 하며 죽은 후에는 무덤에 같이 묻어달라고 하여 그렇게 하였는데 청나라가 망하자 그 무덤을 파헤쳐 그 글씨를 꺼내보니 어찌나 보관상태가 좋은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거리) 평양식 냉면으로 점심을 먹고 5시간을 달려 대련(大連)으로 가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은 후 21:30 러시아거리로 갔다. 러시아인들이 많이 사는 곳, 러시아식 가게와 러시아 상품이 많은 곳, 그러나 시간이 늦은 관계로 거리는 어둡고 사람은 한산했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거리를 걸으면서 구경했다. 러시아거리라지만 한국물건을 파는 한국식가게도 있고 일본가게도 있다. 물론 중국식 가게도 있다. 일행 중 여고생들은 가게에 들러 인형 등 악세사리를 사기도 한다.
한 바퀴 주-욱 둘러보고 그랜드메큐어호텔에 투숙하니 23시 되었다. 이번 답사여행 중 가장 크고 좋은 호텔이이다. 편의시설이나 일회용품도 좋고 마지막 밤을 보내는 기분이 좋다.
2012.8.12. 비
(여순감옥) 성해광장에서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랴오닝(遼東)반도 남쪽 여순감옥(旅順監獄), 가는 중간부터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여순감옥은 처음 러시아가 만들었으나 일본이 점령한 뒤로 확장하여 일제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두는 형무소로 이용하였다. 275개의 방에 약 2천 명 정도를 동시에 수감할 수 있었고 일제 말기인 1942년∼1945년까지는 사형장도 만들어 3년간 약 700명의 수감자를 이곳에서 처형하였다고 한다. 1909년 하헐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의사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순국하였고 역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신채호(申采浩)선생도 이곳에서 옥사하셨다. 감방, 검신실, 고문실, 사형집행장 등을 둘러보며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애국선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관동법원) 질척대는 비속에 다음으로 간 곳은 관동법원이다. 항일투사를 비롯하여 중국과 한국 그 외 나라들의 국민을 판결하던 곳으로서 그 대상 중에는 안중근의사와 신채호선생 그리고 중국의 유명한 항일투사도 많이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1층에 재판정이 있으나 안중근의사를 재판할 때는 내외 언론기자, 동포 등 300여명의 방청인이 몰려 2층에 넓은 재판정을 특별히 사용했다며 그 곳도 잘 복원해 놓았다. 고문실에서 여러 가지 고문기구들을 둘러보면서 항일투사들을 다루든 일본인의 혹독한 고문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처진다. 항일 애국투사들을 기리는 전시관에는 안중근, 신채호, 이회령 세분을 별도로 방을 만들어 전시하고 다른 애국지사들은 한곳에 사진과 행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귀국) 귀국비행기를 타기 쉽도록 한 시간을 달려 대련공항근처의 송도횟집으로 갔다. 첫날 저녁을 먹었던 바로 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12:00공항에 들어가 수속을 밟고 14:10비행기에 올라 한 시간을 날라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16:10(한국시간), 관광버스로 오다가 화성휴게소에 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보령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고구려유적, 그리고 항일운동유적 등을 돌아보았다. 답사란 게 대개는 그렇듯이 빡빡한 일정에 여러 곳을 보려고 마구 달리다 보니 제대로 무엇인가 보지는 못하고 주마간산 격으로 휘-이 둘러보고 왔으니 사진 몇 장 밖에 남은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중국에서 동북공정이니 뭐니 한답시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우고 자기들 역사에 맞도록 고쳐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등 엉터리 행동을 자행하고 있다. 이렇게 하다간 중국지역에 있는 우리의 항일애국유적까지도 몽땅 자기들의 것이라고 우길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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