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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금장군의 고향을 찾아서

구슬뫼 2009. 3. 1. 09:51

계금(季金)장군의 고향을 찾아서

 ○기    간: 2009.2.19 - 2.24

 ○답사목적: 계금장군의 고향답사(중국 태주, 소주, 항주, 상해)

 ○참    여: 34명(보령문화연구회 23명, 회원가족 8명, 기타 3명)

   ※계금은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왔던 명의 수군 유격장군, 충청수영에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후 남해로 내려가 해전에 참여하였다. 충청수영이 있던 보령시 오천면에 그의 청덕비(欽差統領折直水兵遊擊將軍季公淸德碑)가 있다.

 

(2월 19일)

 아침 07:00에 하상주차장에 모인 일행은 관광버스 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부치고 출국수속을 마친 후 비행기(대한항공)에 오르니 11시가 넘었다. 비행기 안에서 주는 점심을 먹으며 2시간을 날라 상해 포동공항에 내리니  현지시간으로 12: 50분(한국시간 보다 1시간이 늦음)이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선포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金九) 등이 환국할 때까지 일제의 강제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할·통치했던 임시정부청사는 허름한 상해의 한 골목을 개발하지 않고 원래 모습으로 보존하고 있다. 김구주석의 집무실 겸 침실, 자료실, 영상실 등을 갖추고 김구주석의 집무모습도 재현해 놓았는데 나는 전에 한번 다녀간 일이 있었기에 새롭지 않았으나 처음 보는 일행들은 감격스러워하는 모습들이었다.

 

예원(豫園)관람

 

 예원은 반윤단(潘允端)이란 사람이 명나라 때인 1559년 개인 정원으로 만들기 시작하여, 1577년에 완공되었는데, 거의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명조의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가이드의 말에는 어머니를 위해) 만들기 시작했는데, 완공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그 자신도 몇 년 살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그는 담장위에 다섯 마리의 황용을 만들어 놓았는데 황제가 들른다고 하여 황급히 용의 색을 검정색으로 바꾸고 용의 발톱을 하나씩 잘라놓은 다음 황제가 구경 오자 이것은 용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변명하여 징벌을 면했다고 한다. (용은 황제나 만들 수 있고 개인이 만든다면 역심을 품은 것으로 여겨 처벌하였다고 함) 상하이 구시가지 푸시의 중앙에 있는 명‧청시대의 양식을 가지고 있는 정원으로 중국 정원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평가받고 있다. 역시 전에 보았기에 나는 큰 감흥이 없었다.

 

남경로 관람

  중국의 2000년을 보려면 중경을 보고, 1000년을 보려면 북경을 보고, 100년을 보려면 상해를 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상하이는 현대 중국에서 최고의 발전을 구가하는 곳이다. 상하이 중에서도 남경로는 최고의 번화가이자 중국현대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또한 나는 이미 구경한 적이 있기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처음인 일행들은 휘황찬란한 거리의 모습에 모두들 놀라워하였다.


서커스구경

 전에 상하이에서 구경한 서커스와는 무대자체가 틀렸다. 원형무대의 2/3정도를 둥글게 감싼 계단식 객석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서커스를 막론하고 기가 막힌 묘기에 혀를 내두르기 마련이지만 이 서커스 역시 이어지는 묘기가 모두들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줄타기, 널뛰기, 항아리 돌리기, 접시돌리기, 날라서 원 통과하기 등 흔한 기술들도 그렇지만 마지막 오토바이 타기는  묘기의 절정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원형 통(공)에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들어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빙빙 도는 데 한 대, 두 대, 들어가더니 마침내 여덟 대까지 들어가는 게 아닌가?

아! 정말로 사람의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 . 아내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하는 말

 “저렇게 탈 수 있을 만큼 되려면 얼마나 많은 사고가 났을까?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가촌이라는 식당에서 중국식으로 저녁을 먹고 4시간 30분을 달려 항주에 있는 금천호텔에 도착하니 새벽1시가 넘었다.


 (2월 20일)

 오늘은 계금장군의 고향인 절강성 태주시(台州市)와 그 관할구역인 온령시(溫嶺市) 송문진(松門鎭)을 방문하는 날이다. 말하자면 이번 답사여행의 목적이 오늘에 있는 것이다.


송문진방문

 진은 우리나라에서 읍에 해당하는 행정단위인데 송문진은 인구가 11만 명에 달하는 곳이라고 한다. 미리 연락을 했기 때문에 청사 앞면에 한국보령문화연구회대표단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프래카드를 붙였고 김서화(金瑞華)진장을 비롯한 온령시(송문진의 상위기관) 관계관 등 주요 인사들이 나와 우리를 맞았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환영 프래카드가 또 있음은 물론 우리일행 34명 모두의 자리마다 명패와 찻잔을 놓는 등 그 환대분위기가 대단하다. 대부분의 회원은 물론 가족들 모두 난생처음 받아보는 환대에 흐뭇해하였다. 대전시의 서구와 온령시가 자매결연을 맺어 사무관 한사람이 파견나와 있어 자리를 같이 해 반가웠고 계금장군의 후손이라는 노인 두 분도 참석하여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인사와 소개, 간단한 대화, 기념품교환을 마친 후 오찬장으로 안내되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훌륭한 중국정식을 맛보았다.

 식사 후에는 송문진청사 앞과 온령시청사 앞에서의 기념촬영을 마치고 태주시로 향하는데 진장과 주요간부들이 송문진 경계까지 나와 배웅하는 등 끝까지 성의를 베풀어 주었다.

 

태주시방문

 태주시는 온령시의 상위기관으로 인구가 560만 명(유동인구까지 합하면 7-800만)에 달하는 절강성의 소재지이다. 우리를 맞이하기로 된 외사판공실 주임은 다른 행사가 있어 부주임이 영접하였다.

  회의실에는 역시 우리를 열열환영한다는 프래카드를 걸어놓았으나 송문진에서 만큼의 환대분위기는 느낄 수 없다. 좌석배치도 대표 4명의 자리만 명패를 놓고 나머지는 구분 없이 앉았다.

 인사와 소개, 기념품교환을 끝내고 청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다음 계금장군이 옛날에 수군을 이끌고 우리나라로 출발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두를 답사하였다. 그러나 성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낙후하고 작은 어항이다. 주변과 어시장 등을 구경하였다. 태주시에서 나온 조선족 출신의 안내자가 끝까지 안내하였다.

 태주시에서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했으나 사양하고 우리끼리 중국식 저녁을 먹은 후 태주개원대주점(台州開元大酒店)이라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2월 21일)

 오늘은 관광일정이지만 태주에서 항주까지 4시간 30분의 이동시간 때문에 관광시간이 많지 않다.

 

서호(西湖)관광

 중국식 발음으로는 시호, 또는 시후라고 해야 하는데 중국 절강성 항저우시 구서면(區西面)에 있는 호수로 중국국가단위풍경구명승구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담수호이다. 중국에 시호(西湖)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가 800개가 될 정도로 아주 많다고 하는데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항저우의 시호라고 한다.

 동서 3.2km, 남북 2.8km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호수를 유람선을 타고 구경하니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호숫가에는 음식, 기념품 등을 파는 곳이 늘어서 있다.

 

악묘(岳墓)

 악묘는 중국 남송의 명장 악비(岳飛, 1103-1142)를 기리는 사당이다. 악비는 관운장과 함께 중국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장군이라고 하며 기념관과 악비의 묘가 있다. 사당안에는 악비의 수하장군인 우고(牛皐)와 장헌(張憲) 두 사람의 동상과 소개문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악비를 밀고하고 계략하여 죽게 한 진회라는 사람과 또 다른 사람 등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악비에게 사죄하는 동상을 만들어 놓아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일정을 마치고 첫날 투숙했던 금천빈관에 여장을 풀었다.


(2월 22일)

뇌봉탑(雷峰塔)

 뇌봉탑은 북송시절인 977년 오월국(吳越國)의 왕인 전숙(錢淑)이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세웠으며 처음에는 황비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것은 황비를 위해 지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목조로 지었으나 1924년 무너져 2002년에 무너진 잔재위에 동으로 탑을 세웠다. 모두 5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백사(白蛇)의 사랑”이라는 전설을 목판에 조각하였고

 2층에는 오월조탑도(吳越造塔圖) 즉, 옛날 오월국왕이 탑을 만들 때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3층에는 뇌봉탑에 대한 역대 시를 적어 놓았으며

 4층에는 탑의 주변경치 즉, 서호십경을 조각하였다. 

 5층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조각하였으며 천정은 순금으로 도금하였는데 이에 들어간 금이 무려 2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5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거나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가운데 바닥에 남아 있는 옛 탑의 잔재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던져 넣으며 소원을 빌었는지 수많은 돈들이 널려있다. 큰돈, 작은 돈, 종이 돈, 동전, 심지어 우리나라 돈도 가끔 눈에 뜨인다. 왜 거두어들이지 않고 놓아두는 것일까?


영은사(靈隱寺)

 1600년 전 동진시대에 혜리(慧理)라는 인도의 스님이 항주에 왔는데 경치가 아주 빼어난 산이 있어 “신선의 영이 깃들어 있다(仙靈所隱)”고 말한 후 절을 지어 영은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 스님이 살던 곳의 산과 똑 같은 산이 있어 그 산이 날라 왔다는 뜻으로 비래봉(飛來峯)이라 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비래봉에는 수백년 - 천년전에 만든 석굴조각들이 길을 따라 수없이 많다. 영은사는 중국에서 3번째로 큰 절이라고 한다.


유원(留園)

 영은사 구경을 마치고 소주로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유원이다.

명나라 중기에 개인이 만든 정원인데 연못, 산(만든 산), 정자(亭子)를 잘 배치한 디자인이 뛰어나고 건물의 직선과 곡선, 밝음과 어둠, 높고 낮음을 절묘하게 조화시켰으며 회랑에는 역대 중국 문인들의 필적이 새겨져 있으나 규모면에서는 예원만 못하다고 느꼈다.


한산사(寒産寺)

 한산사는 남북조 시대인 6세기에 묘리보원탑원으로 창건됐다고 한다. 한산사라고 하는 현재의 이름은 당나라 시대인 7세기 초에 한산이란 스님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절의 창건은 8세기 ~ 9세기에 걸친 것이고, 석두희천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전한다. 전성기 한산사의 면적은 매우 넓어 말을 타야 절의 정문을 볼 수 있다고 말 할 정도였으며 북방의 여행자들은 대개 한산사를 먼저 참배하고 나서 소주 시가지에 들어갔다고 전한다.

  오늘이 특별한 날인가 폭죽처럼 긴 종이로 만든 대롱에 담긴 향을 곳곳에 촛불처럼 무수히 세워 태우고, 또 수많은 중국인들이 들고 다니며 태우니 경내가 온통 연기로 자욱하다. 향을 태우면서 주문을 외우는 사람,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 사람, 탑에 절을 하는 사람,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자유스럽게 소원을 비는 광경이 이채롭다.

 

 한편 우리 보령시의 오천면에 있던 충청수영성을 처음에는 고소성이라고 하였고 건너편에 한산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한산사는 이곳 소주의 한산사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말이 있으며 고소성은 내일 관람할 반문(盤門)의 옛 이름인 고소성을 딴 것이라는 말이 전한다(이 부분은 좀더 깊이 있는 고증이 필요하다 하겠다)

 장계(張繼)라는 사람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에

月落烏啼霜滿天 (달 지자 까마귀 울고, 서리는 하늘에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강가 단풍나무와 고깃배의 불을 보며 잠 못 이루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 밖 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자정을 알리는 범종소리는 나그네의 뱃전에 부딪치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고소성과 한산사가 함께 나온다. 참고로 한산사와 와 고소성(반문)은 15km정도 떨어졌다고 하는데 성에 연결된 운하의 한산사와 가까운 곳에서 종소리를 들었다는 말일까?

 구경을 마치고 금지성좌(錦地星座)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2월 23일)

현묘관(玄妙觀)

 소주에서 향불이 가장 많이 피워지는 곳은 불교사원이 아닌 도교사원 현묘관이라고 한다. 현묘관은 서진(西晉)시대에 처음 지어져 이미 17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곳 경내의 남송(南宋)시기에 지어진 삼청전(三淸殿)은 중국 강남지역의 최대 목조건축물로 기둥 60개가 받치고 있으며, 처마곡선이 아름다운 이중지붕이 얹혀있다. 전내에는 봉양의 높이가 17미터에 달하는 삼청(상청(上淸),옥청(玉淸),태청(太淸)) 소조가 앉아있는데, 송대 소조작품 중에서도 월등하다고 한다.

 현묘관 앞에는 수 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검도연습을 하고 있어 구경꺼리가 되었다.


반문(盤門)

 반문은 소주 옛 성벽 중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하나밖에 없는 수륙(水陸)성문으로 2개의 물길과 3개의 육지 위의 문이 옹성(甕城)과 합쳐진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소주 옛 성벽 남서쪽에 자리 잡은 반문은 서광탑(瑞光塔), 오문교(吴门桥), 반문성루(盘门城楼)로 유명한 반문삼경(盘门三景)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서광탑은 3세기에 처음 세워져 강소성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 현재의 서광탑은 북송시대의 전탑(전塔/벽돌탑)으로 탑의 높이는 43.2m, 8면 7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벽, 회랑, 탑심(塔心)으로 조성되어 있다.

 

 약 2500년 전인 기원전 514년에 오왕(吴王) 합려(阖闾)의 명에 의해 오자서(伍子胥)가 오나라의 성읍으로 건설한 것으로 원래 8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반문이 유일하다.

원나라와 명‧청 시대에도 수리가 이루어졌고 성루는 1986년에 다시 재건되었지만 현존하는 반문은 송나라 시대의 그림과 대조해 보면 그 총체적 배치와 건축구조가 원말‧명초(元末‧明初)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반문 한쪽에는 중국 춘추시대의 오나라의 명재상 오자서(伍子胥)를 모신 사당도 있었다.

 이 성의 옛 이름이 고소성이라고 한다. 우리 보령시의 오천면에 있는 옛 고소성(충청수영성)이 이 성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데 사실일까? 운하지만 성안까지 배가 들어 올 수 있는 구조가 바다에 연접하여 성문 바로 앞까지 배가 들어 왔던 충청수영성과 흡사하여 그랬을까?


황포강유람

 상해로 이동한 우리는 버스를 타고 지나며 황포 강을 끼고, 강 서쪽에 자리 잡은 외탄(外滩)거리를 볼 수 있었다.  1.7km에 달하는 이 거리는 150년 전 조계시대에 세워진 다양한 유럽식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밤을 보낼 상해오각장쾌첩가일주점(上海五角場快捷假日酒店)호텔에 짐을 풀고 황포강 유람에 나섰다.

 황포강은 무석의 태호(太湖)를 그 원천으로 하는 총길이 113㎞의 강으로, 상해 중심을 흐르며 이 강을 중심으로 상해는 포동지구와 포서지구로 나눈다. 유람선의 종류와 유람 시간도 매우 많다고 하는데 우리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외탄 선착장과 양포대교를 왕복하는 1시간짜리 투어를 탔다. 배를 타고 천천히 왕복하면서 휘황찬란한 야경을 감상하였다. 크게 꿈틀대는 상해의 역동적인 분위기를 느끼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2월24일)

홍구공원(노신공원)

 1932년 상하이 천황 탄생일(천장절) 기념행사 때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의 주요 인물들을 암살함으로서 세계만방에 우리 대한민국의 기개를 떨치고 중국정부에게 우리임시정부에 대한 중요도를 각인시켰던 장소, 바로 그 홍구공원이다.

 지금은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원 한쪽에는 윤봉길의사의 사당을 짓고 관광객들의 참배를 받고 있다. 넓은 공원은 잘 가꾸어졌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산책을 즐기는가 하면 이곳저곳에서 남녀가 수 십 명씩 무리지어 간단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스포츠댄스를 하는 사람들, 체조를 하는 사람들, 이상한 춤을 추는 사람들, 간단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 늙고 젊은이들이 다양하게 즐기는 모습들에서 공산주의세계지만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귀국

 일행들은 기념품가게에 들러 각자 한 두 가지씩 물건들을 사가지고 포동공항에 나가 14시 출발하는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니 우리시간으로 17시, 대기한 버스에 올라 귀향하다가 홍성휴게소에 들러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밤 9시가 넘었다. 이렇게 해서 5박6일의 답사여행을 모두 마쳤다.


여행소감

 ○이번 답사여행은 그저 즐기기 위해 다녀온 관광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던 계금장군의 고향을 돌아보고 또한 오천의 고소성(충청수영성)과 한산사를 명명한 근거가 되었을지도 모를 중국의 고소성과 한산사를 가볼 수 있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송문진에서의 환대가 앞으로 우리지역과의 교류로 이어질 것 같다는 기대, 특히 계금장군의 후손들이라는 사람들과 앞으로 연락을 취해 우리가 필요한 자료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 같은 기대도 가져 보는 등 비교적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여행사에서 내어 놓는 관광상품은 대개 비슷비슷한 코스로 짜여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한국관광객을 만나지만 이번 여행은 답사코스를 우리가 정하였기에 몇 군데를 빼고는 우리나라 관광객을 볼 수 없고 중국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점도 특이했다.

 ○우리 보령문화 연구회가 외부의 어떤 도움도 없이 중국답사라는 큰 행사를 잘 치러냈다는 데 대하여도 자부심을 가지면서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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