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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오간지유적과 백제유적

구슬뫼 2010. 3. 7. 11:28

일본의 오간지유적과 백제유적

 

     ○기    간: 2010.2.17 - 2.21

     ○답사목적: 일본의 오합사 흔적과 백제유적 돌아보기 및 보령홍보사진전

     ○참    여: 36명(보령문화연구회 21명, 회원가족 13명, 기타 2명)

     ○일정별 코스

▷2010. 2. 17고마츠공항- 중식- 토진보- 환영만찬- 성산장여관

▷2010. 2. 18다카하마자료관- 다카하마중학교- 보령의 집- 홍보사진전- 중식- 백제사-  서명사 - 귀실집사- 홀리데이호텔

▷2010. 2. 19광융사- 금각사- 서진산업 기모노쑈- 중식- 청수사- 니조성- 귀무덤-  오사카거리 -프라자 오스카호텔

▷2010. 2. 20백제사터- 동대사- 법융사- 중식- 왕인묘- 백제왕신사- 프라자 오스카호텔

▷2010. 2. 21사천왕사- 오사카성- 중식- 오합사지- 관서공항


(2월17일)

  새벽4시 하상주차장에 모여 관광버스편으로 인천공항에 가서 짐을 부치고 9시15분발 대한항공기(KE775)로 1시간30분을 날라 고마쯔(小松)공항에 도착하니 10시35분, 까다로운 입국수속을 받고 나가니 타카하마쵸(高浜町)의 국제교류원으로 있는 박영선씨와 먼저 입국한 구본태선생, 역사민속자료관장 타치다 타다시(舘太正)씨, 그리고 사진기사가 마중을 나왔다.  공항부근은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고 도로는 눈이 녹아 물이 흥건하다. 타카하마쵸에서 제공한 버스에 올라 공항을 벗어났으나 점심시간이 되었으므로 휴게소 식당에서 우동으로 일본에서의 첫 식사를 하였다.


<토진보>  

 타카하마로 가는 도중 후쿠이현 사카이시에 있는 토진보(東尋坊)라는 관광지에 들렀다.  토진보는 약 1,200- 1,300만년전 일어난 화산활동으로 마그마가 퇴적암층 중에 관입되어 식고 굳어서 생긴 화산암이, 일본해의 파도에 침식을 받아 지상에 나타난 것으로 짐작한다는데 제주도의 주상절리와 비슷하나 그 규모나 주변경관이 제주도만 못한 것 같다.

 한편 토진보는 자살의 명소로도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이를 막기 위한 비석이나 간판을 여러 개 설치하고, 공중전화에 전화카드나 10엔 동전을 상비해서 누군가에게 상담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구하는 전화>를 설치하고, 힘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등 자살의 낌새가 느껴지는 사람이 있으면 주변에서 즉시 신고를 하는 등 자살방지에 적극노력을 한다고 한다.


<성산장(城山莊)여관>

 성산장이라는 여관에 여장을 풀었는데 일본말로 ‘시루야마소’라고 발음하여 깜짝 놀랐다. 성(城)을 ‘시로’라고 발음 하는데 얼핏 ‘시루’라고 들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명중에 ‘시루’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곳에는 성(城)이 있다. 주산면 증산리(甑山里) 시루뫼 마을에 성이 있고, 청라면 향천리 시루생(甑城)이 마을에 성이 있다. 전국 곳곳에 증리(甑里), 증산리(甑山里) 등 시루증자를 쓰는 곳이 많은데 으레 그곳에는 성이 있으며 시루라는 마을이름을 쓴다. 우리나라의 시루(甑)와 일본의 시로(城)에 어떤 연관성은 없을까?

 먼 옛날 백제시대에는 성을 시루(시로)라고 하지 않았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시루를 증(甑)으로 표기하고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서는 성(城)으로 표기한 것이 아닐까?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전문가들의 고찰이 있었으면 한다.


<환영만찬> 

  여장을 풀고 다카하마쵸에서 준비한 환영만찬에 참석하였다. 2009년에 보령문예회관에서 사진전을 가졌던 다카하마쵸의 이케다 미츠히로(池田充窟)국제교류협력단장과 단원들, 지난 연말에 우리지역을 방문하여 우리와 교류를 가졌던 다카하마중학교 이또 코꾜(伊藤恭子)교장과 교직원, 그리고 쵸장을 대리한 히무라켄지(日村健二)부쵸장, 에토카즈오(永登三夫)교육장, 의회의장과 관계공무원 등 70여명, 우리와 합해 100여명이 큰 회의실에 음식탁자만 놓고 돌아다니며 먹는 파티식 환영연이었다. 이께다 미츠히로 교류협력단장의 노래와 부채를 이용한 민속춤, 검무(劍舞), 그리고 어린 소녀2명이 추는 민속춤을 선보이고 떡과 메를 준비하여 참여자들이 떡을 치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이벤트를 준비하여 행사를 더욱 이채롭게 했다. 음식은 일본 측 참석자들이 며 칠전부터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데 한 마리에 5kg이 넘을 것 같은 붉은 도미(호텔에서 먹으려면 시가 3만 엔 상당이라고 한다)와 방어 등을 이용한 생선회를 비롯하여 갖가지 이름 모를 일본음식들이 구미를 당겼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한 시간여를 즐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환영식장 인사말)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보령시에서 온 보령문화연구회장 임근혁입니다. 오늘 저희들을 열렬히 환영해주시는 히무라캔지 부쵸장님을 비롯한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특히 지난해 우리지역을 방문하셨던 이께다 미츠히로 단장님을 비롯한 국제교류협력단원 여러분을 다시 만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우리들은 다카하마쵸에서 보령을 소개하는 사진전을 가진 후 일본의 문화를 체험하고 백제시대에 일본과 교류한 흔적을 찾아보고자 이번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맨 먼저 이곳 다카하마쵸를 방문하여 이 같은 환대를 받으니 이번 4박5일의 문화기행이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대단히 기쁩니다. 아무쪼록 다카하마와 보령시가 우호를 더욱 깊게 하고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쵸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면서 간단하게 인사에 가름합니다. 감사합니다. (통역: 임창순)  

 

 (2월 18일)

<교류행사>

 다카하마쵸는 우리 보령시와 우호도시로 교류행사를 활발하게 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다카하마쵸 국제교류협력단이 지난해 11월 보령시 문예회관에서 사진전시회를 개최할 때 우리보령문화연구회에서 상당부분 협조하였고, 보령관내의 문화유적 안내를 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식사를 제공한바 있고 또한 연말에 다카하마중학교장 및 직원들이 내방했을 때 저녁을 제공하는 등 교류활동이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보령문화연구회가 이곳 문화회관에서 보령홍보사진전을 개최하게 되자 다카하마쵸 국제교류협력단에서 환영만찬을 해주고 사진전시회가 잘 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 주었으며 우리가 일본내에서 오간지 흔적과 백제유적을 돌아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다카하마는 1300년전 스시(壽司-초밥)를 만들어 교토(京都) 천황에게 진상하였던 스시의 발상지라고 한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130km 떨어진 교또까지 왕복하면서 천황에게 스시를 진상하는 행사를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다카하마쵸 역사민속자료관(高浜町 歷史民俗資料館) 방문: 아담한 건물에 3개의 전시실과 사무실 기타 필요시설을 갖추고 다카하마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과 각종 농기구, 생활용품, 석조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개관은 오전9시부터 오후5시까지이다.

○다카하마중학교 방문

 중학교에 방문하여 교직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는데 회원 중에는 전‧현직교사들이 여러분이 있어서 진지한 대화들이 많이 나왔다. 간담회 후에는 학생들의 수업광경, 체육관 등을 둘러보았다. 우리나라에 비해 컴퓨터 등 최신시설이 부족한 것 같다.  

○보령의 : 한국인으로서 다카하마쵸에 국제교류원으로 근무하는 박영선씨가 ‘보령의 집’을 운영한다. 머드제품을 비롯하여 보령의 특산품, 민속품 등을 전시하여 보령을 알리는 곳이다. 이런 훌륭한 일을 보조 없이 사비로 한다니 참 대단한 분이다.

 

 

○보령홍보사진전: 다카하마쵸문화회관에서 보령의 소개 및 행사사진 10매/ 역사사진 13매/ 관광홍보사진 13매/ 민속사진 15매/ 산업사진 6매/ 생활문화사진 4매 등 61매를  전시하는 개막식을 가졌다. 다카하마쵸 측에서 쵸장, 의회의장, 교육장, 교류협력단장을 비롯한 내빈, 학생 등 200여명이 참석하였고 앞으로 한 달간 전시키로 하였다.

 (사진전 개막식 인사말)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보령시에 있는 보령문화연구회장 임근혁입니다.

오늘의 행사를 가질 수 있도록 협조와 노력을 해주신 노새유타카 쵸장님을 비롯한 관계관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이 참석해 주신 다카하마의 시민과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 보령문화연구회원들은 보령시의 문화와 관광, 역사, 민속 등의 사진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카하마와 보령시는 똑같이 바다를 접하고 있기에 서로 비슷한 풍경들이 있어 더욱 친밀감이 가기도 합니다.

 사진 61매로 보령시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사진들이 보령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번 행사가 양도시의 우호를 더욱 깊게 하며 교류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다카하마와 보령시가 다 같이 발전하기를 기원하면서 간단히 인사에 가름합니다. 감사합니다. (통역: 임창순)

  

               테프커팅                        사진설명                  초등학생환영노래(고향의 봄)


<백제사>

  교류행사를 모두 마치고 오후에 찾아간 시가현의 석가산(釋迦山) 백제사는 일본의 수이고(推古)천황의 시대(554-628)에 성덕태자(聖德太子)의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관음당은 백제의 범각 용운사(龍雲寺)의 본을 따서 지었으며 처음에는 고구려 스님인 혜자(惠慈)를 주원사(呪願師=법회를 할 때 시주의 원하는 바를 읽고 행복을 기도해주는 법사)로 청하고 그 후의 절 행사에는 백제의 스님을 청해서 맡겼다고 한다. 백제사는 1000여명의 스님이 수행하던 장엄한 사원으로 오랫동안 번창하였으나 1478-1573년 사이에 화재, 전란 등의 화를 입어 없어지고 본존(本尊) 등 몇 개의 불상과 중요경전, 권(卷=두루마리 그림)종류를 보존하였다가 1650년 현재의 모습으로 지었다고 하는 자세한 설명문을 한글로 작성하여 배포함으로서 쉽게 알 수 있어 좋았다.

 백제사가 있는 지역이름을 아예 백제사정(滋賀縣 東近江市 百濟寺町)이라고 하며 금동미륵반가사유상(金銅彌勒半跏思惟像)을 비롯한 백제풍의 문화재를 보유하는 등 백제의 숨결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하였다.

 

<서명사> 

  다음에 간 곳은 백제사에서 그리 멀지않은 시가현의 사이묘지(西明寺)이다.

서기834년에 창건했다는 이곳은 아람드리 삼나무(쓰끼나무)가 빽빽이 늘어선 숲속을 약 30분정도 가파르게 올라가야 했다. 834년 인명천황(人明天皇)의

측원에 의해 창건되어 헤이안(平安),가마꾸라(鐮倉), 무로마치(室町)의 각 시대를 거치며 기원도량, 수행도량으로 각광을 받았으며 산내(山內)에는 17개의 제당(諸當)과 300개의 승방이 있다고 한다. 전국시대에 오다나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산이 불탈 때 절도 불탔으나 후에 재건하였고 다행히 국보 1호로 지정된 본당, 3층탑 2기, 그리고 중요문화재인 석가여래입상(釋迦如來立像)을 보유한 규모가 매우 큰 사찰이었다.

   

   <귀실신사(鬼室紳社) >

시가현 오노시 히노쵸(滋賀縣小野市日野町)에 있는 이곳은 7세기 백제의 귀족이었던 귀실집사(鬼室集斯)라는 인물을 모신 신사이다. 백제 부흥운동으로 활약한 복신장군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동생 또는 후손이라고도 전한다. 1,400년 전의 백제인을 오늘날까지 신으로 모신 신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인터넷을 검색 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귀실집사에 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백촌강의 전투 뒤에 일본에 망명했다. 백제 부흥 운동으로 활약한 부여복신의 친척으로, 후손으로 귀실미성(鬼室美成)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귀실집사는 665년 음력 2월에 소금하(小錦下)의 위계가 주어졌다. 백제 부흥에 노력해 2년 전에 죽은 부여복신의 근친자라고 생각되지만, 구체적인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집사(集斯)의 백제 위계는 달솔이었다. 일본서기는 이것에 이어 백제의 남녀 400여 인들이 오오미국(近江國) 가마에군(神前郡)<후의 가마자키군(神崎郡)>에 정착했다고 적으므로, 귀실집사도 동일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음력 3월에 가마에군(神前郡)의 백제인들에게 논이 주어졌다. 일본 에도막부 시기, 오오미국(近江國) 가모우군(蒲生郡) 오노무라(小野村)<현재의 시가현(滋賀縣) 히노쵸(日野町) 오노(小野)시>의 니시노미야(西宮) 신사에서, 팔각 석주가 발견되었는데 귀실집사묘(鬼室集斯墓)라고 그 오른쪽의 면에 ‘주오3년 무자 (음력) 11월 8일 조(殂)<귀인(貴人)의 사망을 말함>하시다(朱鳥三年戊子十一月八日殂).’, 왼쪽에는 ‘서손 미성(美成)이 만들다(庶孫美成造)’ 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편 부여군 은산면은 은산별신당에 복신장군을 모시고 있으며 이곳 히노쵸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다. 또한  귀실신사 앞에 한국전통의 팔각정과 한글로 된 기념비를 세워놓아 반가웠다.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오미(近江國) 조정이 오오쓰네 왕도를 정하였을 때 현재의 한국 당시의 백제나라에서 일본나라에 도래한 많은 사람들 중에 우수한 문화인이었던 귀실집사라고 하는 고관의 묘비를 이 신사의 본전 뒤의  석실에 모셔저 있으므로 이 신사의 이름이 지어졌다. 옛날에는 부동당이라 하여 고노(小野)마을의 서궁으로 에도(江戶)시까지 숭상하여진 신사이고 고노(小野)의 증좌인 신도들에 의하여 보호 유지되어왔다. 또한 오늘날에는 귀실집사(鬼室集斯)의 부친 복신장군이 대한민국 충남 부여군 은산면의 별신당에 모셔져 있음으로서 자매도시로 교류도 활발히 행하여지고 있다."


 

(2월19일) 교또(奈良)지역

<광융사>

 일본의 천년(794-1869) 수도였던 교또에는 1500 여개의 절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광융사(廣隆寺)는 진언종의 사원으로 서기 603년 쇼토쿠 태자가 지었다고 하는데 교또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고 쇼토쿠 태자가 지은 일본 7대사찰중의 하나라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720년에 지은 것이라고 하며 아스카시대(552-645)에 만들어진 목조미륵보살상(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 일본국보1호)를 비롯한 중요문화재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미륵보살상은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보살(국보 83호)과 너무 비슷하고 그 재질이 우리나라의 적송이라고 하니 백제에서 만들었거나 백제의 장인이 이곳에 재료를 가지고 와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고  또한 신라계의 진하승이라는 사람이  광융사를 건축하였다고 하니 이 사찰도 백제의 영향이 크게 끼쳤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안내책자를 일본어, 영어와 함께 한글로도 표기하여 반가웠다.

 

<금각 녹원사(金閣鹿苑寺)>

  잔디대신 이끼를 잘 가꾸고 연못과 인공섬, 건조물, 지방영주들이 바친 명석(名石), 수목, 화초 등을 아름답게 배치한 이곳은 당초 요스미쓰라는 개인의 저택이었으나 1400년대 그가 죽은 후 유언에  따라 녹원사라는 절로 만들었고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고 한다. 사리전을 금으로 완전히 덮어 금각을 만들었기 때문에 금각사(긴카쿠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께다 미츠히로 국제교류단장이 주

지스님과 각별한 사이라서 외인들이 출입금지 된 구역까지 자세히 안내받아 아름다운 경내를 속속들이 볼 수 있었으나 백제의 숨결은 느낄 수 없었다.

 

 

<서진직물회관(西陳織物會館)>

 니시진(西陣)일대에는 직물이 아주 유명하다고 한다. 오닌의 난(1467-1477) 당시 서군과 동군으로 나뉘어 싸울 때 서군이 머물렀던 곳으로 아주 지명도 서진이 되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직물은 서진직물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직물을 수공으로 짜는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짜낸 직물들, 그리고 그 직물로 만든 전통의상 등 을 팔기도 한다. 마침 기모노쑈가 있어 구경을 하고 직물 짜는 모습, 완제품 쇼핑을 한 다음 회관 내에 있는 식당에서 일본 전통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테라(청수사)는 778년에 엔친라는 스님이 창건하였는데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다가 1633년 현재의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규모가 웅장하고 일본에서 제일 큰 탑이 있으며 절벽에서 흐르는 세 줄기의 약수가 유명하다. 왼쪽은 지혜의 신이 학식에 대한 소원을, 중간은 사랑의 신이 사랑에 대한 소원을, 오른쪽엔 건강의 신이 건강에 대한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차례대로 물을 받아먹는데, 긴 장대 끝에 컵을 달아 멀리 떨어진 물줄기를 받아 마시는 것이었다. 이 약수 때문인지 모르지만 절이라기보다는 큰 관광명소라 해야 맞을 듯 연간 참배객이 300만을 넘는다고 한다.  


<니조성(二조城)> 

니조성은 1603년 도꾸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 교또고쇼(京都御所)의 수호와 본인의 교또방문시 숙박지로 만들었는데 1626년 도꾸가와가의 3대장군인 도꾸가와 이에미쯔(家光)가 후지미성(伏見城)의 잔유물들을 정리하여 완성한 성이다. 마루를 밟을 때마다 삐걱삐걱, 또는 휘파람새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자객들이 들어오는 것을 감지토록 만들었는데 이런 공법을 “우그이스바리”라고 한단다. 1867년 황실재산이 되고 1939년 교또시 소유가 되었으며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귀무덤(耳塚)> 

 뼈아픈 역사의 참상을 말해주는 귀무덤에 갔다. 귀무덤이라고 하지만 그곳에 묻힌 것은 대부분

 사람의 “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무장들이 부피가 큰 목 대신 가져갔던 것으로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부는 사천시로 옮겨갔으나 완전한 이장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는데 현재 일본에서도 별도의 관리 예산이 지원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도 전혀 별도의 예산 지원이 되지 않아서 3대째 이 무덤을 관리하는 개인이 관리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당 앞 공원에 방치되다시피 초라한 모습으로 있으니 히데요시의 전리품 같은 인상도 지울 수 없어 더욱 참담한 심정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정부차원의 무슨 대책이 있어야 하겠다.


<오사카거리 신사이바시와 도툼보리>     

이번 문화기행의 목적이 관광객이 별로 찾지 않는 문화유적위주이기에 특별한 몇 군데를 빼고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없고 지나치는 도로변에도 사람구경하기가 힘들었는데 이곳 오사카의 밤거리는 마치 서울의 번화가를 보는 듯하다. 북적이는 사람들, 활기찬 사람들의 발걸음, 상가들의 조명들 . . .

신사이바시는 오사카 최대의 쇼핑가로 백화점과 아케이드 거리가 난바까지 이어지고   동서로는 유럽촌과 아메리카촌이 있는데 유럽촌에는 명품가게, 레스토랑, 카페들이 밀집되어 있고 아메리카촌에는 힙합, 캐주얼가게, 인디언가게, 클럽 등이 있어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도툼보리는 번화하면서도 서민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난바로 이어지는 에비스바시에서 동쪽의 니혼바시(日本橋)에 이르는 거리는 화려하고 독특한 간판들이 많다. 문어 전문점인 듯 한 식당은 전면 간판을 커다란 문어형상으로 만들었고 커다란 꽃게 한 마리를 형상화한 식당도 눈에 띈다. 한편 난파라는 말이 있는데 젊은 남성들이 거리에서 처음만난 여성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행위라고 하며 이곳 다리 즉, 에비스바시를 지나치는 여성이 난파를 당하지 않고 건너면 매우 창피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젊은 남녀들이 난파를 노리고, 난파를 당하며 즐기는 문화가 성행하는 그래서 이 다리를 난파다리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2월 20일)나라(奈良)지역

 오늘은 나라(奈良)지역을 답사하는 날이다.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일행은 버스 편으로 나라를 향해 달렸다. 중간에 한적한 농촌마을 가운데에 있는 백제사 옛터를 찾았다. 한자와 가나를 혼용한 백제사라는 안내판만 있을 뿐, 절의 흔적은 없고 마을사람들이 붙여 놓은 듯  부적과 소원을 적은 작은 종이들이 수없이 걸려있는 신사가 있었다.

 

<동대사>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는 불교 사원 단지이다. 이 절의 대불전(大仏殿)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이라고 하며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비로나자불이 있는 일본 화엄종의 대본산이다.  부근의 절, 신사 등을 포함한 7개의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불전 안에 모셔져 있는 좌불상 또한 금동주조불상으로는 세계최대라고 한다. 서기 8세기 중반 가뭄으로 인한 흉작과 대지진, 전염병 등이 겹쳐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의 성무왕은 불사를 통해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동대사 창건에 착수했다고 하며 이때 대역사를 맡고 나선 이가 백제의 승려 양변과 행기였는데 행기는 바로 왕인박사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동대사는 여러 차례 불이 나 현재의 모습은 거의 일본화 되었지만 고구려식 주두는 아직 남아 있고 이 사찰 뒤편에 있는 정창원(正倉院: 신라의 물화를 보관하던 곳)과 이월당의 영보전, 고구려식 부경(창고), 고마이누(고구려계-일본의 수호신)등이 한국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중 정창원은 쇼무천황, 고묘황후 시대의 물건을 비롯하여 8세기 나라(奈良)시대를 중심으로한 많은 일본 전통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 중국, 인도의 고대유물까지 9000여점이나 보관하는 일본이 세계제일의 보고라고 자랑하는 곳인데 신라 민정문서와 신라금, 금동가위, 신라먹, 신라종 등 신라의 유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하여 일행들 중 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원들은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다녀오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한편 절 주위에는 수십마리의 야생 사슴이 사는데 관광객들 주변에 스스럼없이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주면 먹고, 관광객들이 만지고 같이 사진을 찍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슴이 겁이 많고 매우 민감하여 집에서 기르는 사슴도 사람이 가까이 가면 도망을 가는데 이곳에서는 야생이 사람과 함께 놀다니 . . .

 

<법융사(法隆寺)>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진 법융사(호류지)는 아스카시대(6세기 중엽-8세기 초)의

모습을 오늘날에 전해주고 있으며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적인 불교문화의 보고로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고구려 담징의 금당 벽화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고구려식 건축물이 지금은 변하여 일본화 되었고 절 앞에 있던 '백제목'이라는 팻말도 없어졌다. 5중탑과 고구려 담징의 벽화(훼손으로 모사된 것이나 일부 진본을 볼 수 있다)가 아직 남아있는데 벽화의 세부수법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있는 그림의 수법과 공통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금당벽화를 그린 사람이 고구려 사람이며 따라서 이 절도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유물 중 아스카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백제관음상은 그 만든 기법이나 모습이 백제불상과 맥을 같이 하며 1998년 특별히 백제관음당을 지어 이 불상을 모시고 있다. 한글로 된 안내서가 있어 반갑고 편리했다.    

한편 가와노 밋끼(川野貢)라는 관광자원봉사자가 여러 가지 자료를 들고 나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건축 계통의 기사로 젊었을 때 한국의 경기도지역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며 나이가 들어 은퇴한 후에는 자원봉사를 한다고 한다. 머리가 하얗고 나이가 들어 보여 나이를 물었더니 1941년생이라는데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을 다 설명해주고자 우리들보다 더 서둘러 달려 다니며 열심히 노력하는 태도가 매우 고마웠다.

   

<전왕인박사묘(傳王人博士墓)>  

 왕인박사는 1,600여 년 전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들고 가 문자를 전하고, 일본 문화의 시조로 숭앙받는 백제인이다. 그의 묘는 일본 오사카(大阪)부 히라카타(枚方)시에 있는데 오랜 동안 잊혀져 있다가 1731년 묘소가 고증되어 묘역이 다듬어졌으며 1938년 5월 오사카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고 근처에는 왕인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1984년 ‘제1회 왕인박사 축제’가 열리고 무궁화동산을 조성하였으며 1985년에는 대대적인 묘역 환경정화사업을 했다. 2006년에는 우리나라 전통양식으로 백제문을 세웠는데 목재, 기와, 돌 등 자재를 백제땅인 전라남도에서 가져다 썼다고 하며 묘역엔 김종필씨의 기념식수 그리고 묘내에 김대중 및 영암군수의 방문기념 액자도 걸려 있다. 한편 [일본서기] 응신기 16년 2월조에 『왕인이 왔다. 태자 토도치랑자(聖德太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여러 전적을 왕인에게 배웠다.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 등의 시조이다. 이해 백제 아화왕이 훙하였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나라에 돌아가 위를 이으시오”라고 말했다.(王仁來之 則太子菟道稚郞子師之 習諸典籍於王仁 莫不通達 故所謂王仁者 是書首等之始祖也』라고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백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이 아닌가? 일행들은 흐뭇한 마음으로 유적을 둘러보았다.


<백제왕신사와 백제사터 발굴현장>

 오사카부 히라카타(枚方)시 니시노초 나카노미야(西之町中宮)에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라는 큰 간판이 서 있다. 백제왕신사는 백제사 사적공원 경내와 서쪽으로 잇대어서 함께 자리 잡고 있으며 사적공원내의 백제사터는 한창 발굴 중에 있었다. 백제왕신사는 그 옛날 구다라스(百濟洲) 땅에서 백제 왕족이 조상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백제사 터와 함께 매우 유서 깊은 명소이다. 고문서에 “비다쓰천황(敏達天皇·572∼585 재위)시대에, 백제왕족 왕진이(王辰爾·6C)가 이곳에다 사당을 세우고 그의 조상을 제사지냈다”라고 기록되었다고 하니 이곳 일본 땅에 백제왕을 신으로 모시는 신당이 1400여년 역사를 가진 셈이다.  미리 연락을 받고 나온 문화재연구조사위원회 오께다라는 전문가가 발굴조사중간보고서와 도면을 가지고 현장에서 가람의 배치 및 규모, 형식 등 발굴성과에 대하여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알고 보니 내일이 각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중간보고를 하는 날인데 오늘 방문한 우리 일행에게 먼저 설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일부러 나와서 친절히 설명하고 질의에 답하여 주는 성의가 정말 대단하다. 특히 명함에 한글로 이름을 병기한 것이라든지 대화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백제유적이나 역사에 대하여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라고 생각하였다.


(2월21일)

<사천왕사> 

  593년 성덕태자의 서원에 의해 건축한 일본 최고의 官寺로 절의 규모가 웅장하다.

 5중 탑은 평소에 개방하지 않는다는데 마침 우리가 찾아간 날은 개방하는 날이라서 5층 꼭대기까지 올라가 사리봉안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탑 1금당 그리

고 강당으로 이어지는 일렬 가람형식이 백제형식이라서 이 절도 백제장인이 지었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하며, 그리고 이 절에서 행하는 행사의 구호 중에 “와쎄이, 와쎄이”하고 외치는 구호가 있다고 하는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먼 옛날 백제인들이 행사에 참석하여 “왔소, 왔소”라고 외친 것에서 유래 된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하기도 한다고 한다. 한글로 된 안내서가 있어 편리했다. 절의 주변은 야시장이 형성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들이 우리나라의 재래시장과 비슷했다. 별난 구경거리에 일행들은 즐거워 하면서 몇가지씩 사는 일행들도 있었다.


<오사카성(大阪城)> 

 오사카의 상징물로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하였고 전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그 후,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시대에 재건을 해 에도 막부의 서일본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성이 있는 곳은 현재 오사카시 주오구의 오사카조 공원 (大阪城公園)이다.

구마모토 성, 나고야 성과 더불어 일본 3대 명성중 하나라고 한다.


<오간지(烏含寺)유적>

   이번 문화기행 최대의 목적지인 이곳 오간지(烏含寺)유적을 찾았다. 오사카부 돈다바야시(富田林市)에 있는 이 유적은 오간지터(新堂廢寺=신도하이지), 구석고분(龜石古憤), 오간지이케(오간지 연못), 와요(瓦窯)터 등이다.  오사카부 돈다바야시(大阪府富田林市)의 교육위원회문화재과 나까스지 와타루(中辻旦)참사, 아사가와 미쓰(淺川充) 도시조성정책부장, 기타노야에(北野八重) 국제교류계직원 등이  현장에 나왔고 그중 와타루참사가 도면과 유인물을 나누어 주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유인물에 기재된 ‘유적개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적개요

 오사카평야의 남부에 소재한 7세기 전반의 고대사원 터, 와요터, 고분, 신당폐사터는 아스카(飛鳥)시대에 창건한 저명한 고대사원이고 특이한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오간지 연못기와가마터는 신당폐사에 사용할 기와를 구웠던 기와가마다. 구석고분은 남하내(南河內)를 대표하는 종말기 고분과 더불어 출토유물로부터 신당폐사의 창건에 관련된 인물의 묘가 아닌가 추정된다. 이와 간이 사원, 기와가마, 고분이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고 근접해서 소재하는 예는 지극히 귀중하다. 이러한 유적군은 당시의 남하내(南河內)에 있어서 세력의 동향을 알기 위해서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사원과 종말기 고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귀중하다.(번역: 강종선)


1.오간지터: 1800년 후반부터 많은 기와 등이 나와 유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중 1936년 이시다(石田茂作)라는 사원(寺院)연구가가 아쓰카(飛鳥:7세기 전반)유적이라고 발표하였고 1959년 오사카부에서 부영(府營)주택을 짓고자 조사하다가 사찰기단을 발견, 건축취소 후 1960년 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된 건물지 발굴, 그러나 서편 나라유적만 확인하고 동편의 아쓰카유적은 이미 주택이 들어 있어 발굴 못하고 있다가

1992년 동편의 아파트 재개발사업으로 발굴추진, 시텐노오지(四天王寺)식 가람이 있었음을 확인, “신도하이지식(新堂廢寺)"가람이라고 명명하였다.”

 

2.구석고분(龜石古憤): 오간지의 북서쪽 산자락에 돌로 만든 횡혈식(橫穴式) 고분이 있는데 일찍 도굴된 흔적이 있어 유물은 없었지만 오간지터와 와요터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기와들로 무덤 내부 벽을 만들어 오간지와 관련이 깊은 인물의 무덤으로 추측하며 무덤 속에 기와를 깔고 석관을 놓는 형식은 일본의 다른 무덤에는 찾아볼 수 없고 백제의 무덤형식과 같다는 것이다.

 

 3.오간지이케, 와요터:  오간지에 딸린 연못과 기와, 벽돌을 굽던 터로서 1969년 기타노 고헤이(北野耕平)교수가 오간지이케(御觀寺池)를 발굴조사하면서 나라(奈良)시대의 와요를 발견하였는데 이곳에서 오간지에 사용된 백제식 기와가 출토되었다. 나까쓰지 와다루씨의 설명에 의하면 1948년-1949년까지 조사하여 오간지라 명명하고 1959년 후지사와라는 역사학자가 백제의 오합사와 관련된다는 보고서를 냈으며 1985년 조사반이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에 오합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까지 조사하고 돌아갔다는데 그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오합사와 오간지가  가람형식이 똑 같고 사용한 기와가 같다는 것, 그리고 백제의 오합사는 615년에, 일본의 오간지는 620년에 지었다고 창건연대까지 밝히고 있는 것,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 보령에서는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성주사의 전신이 오합사냐 아니냐를 놓고 설왕설래하였는데 그들은 그렇게 일찍이 연구조사를 진척시키다니 . . .

 

<여행을 마치고>

○전문가의 적극적인 자세와 일본인의 친절

 백제사적 발굴지에서는 토요일 오후인데도 전문가(공무원)가 일부러 나와서 친절히 설명하고 질의에 답하여 주는 성의가 정말 대단하다. 첫인사를 “안녕하세요? 저는 오케다라고 합니다. 한국말은 이것밖에 모릅니다.”라고 우리말로 인사한 다음 설명하는 태도라든지, 명함에 한글로 이름을 함께 쓴 것, 대화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백제유적이나 유물, 역사에 대하여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오간지유적 발굴지에서도 일요일임을 불구하고 전문가(공무원) 2사람과, 여직원 3명까지 나와서 역시 유인물과 도면을 나누어주고 일일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보령의 오합사와 오간지의 가람배치가 같은 점, 같은 형식의 기와가 출토 된 점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귀국하려는 간사이공항까지 버스에 동승하여 질의응답에 응하는 등 최대의 성의를 베풀어 주었고 대화과정에서 우리나라의 몽촌토성에 대하여도 언급하여 그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사진좌: 공항까지 배웅 나온 나까쓰지 와다루씨(좌에서 2번째)와 이께다 미츠히로씨(4번째)

사진우: 공항까지 따라오며 오간지유적 설명을 해준 와다루씨에게 선물 전달하는 광경

 

○백제의 흔적들

 옛날에 일본을 백제가 다스렸다거나 일본천황이 백제인이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고 또 일본서기는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이제 주유성을 잃었구나. 이를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들의 묘소를 어떻게 찾아갈까."라고 기록하였다지만 나는 이 역사에 대하여 연구한바 없고 또 짧은 기간 동안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몇 군데만 돌아보고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으나 이번 문화기행을 하면서 백제의 영향력이 일본에 크게 미친것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오사카 철도역에 백제역, 시내버스정류장에 백제정류장, 공립학교인 남백제중학교(1894년 개교), 백제교라는 다리 2개소, 백제사정이라는 지명, 백제사라는 절도 5-6개소가 된다고 하며 또한 왕인박사묘에는 백제문이 있고 백제왕신사와 백제사적이 있으며 교또나 나라지역을 중심으로 버스를 타고 지나치는 도로변에 백제(百濟)라는 이정표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으니 일본 속에 아직도 백제의 숨결은 면면히 살아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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