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1881년 3월6일 보령시 주산면 주야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제의 침탈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중 주렴산 독립만세운동 18인 중 한사람인 동생 김양제(金亮濟)와 더불어 만주로 망명하여 북만주와 블라디보스톡을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펼친바
김동삼(金東三)이 소백채구(小白菜溝)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설치하고 민족교육을 위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총무를 밑아 양규열(梁圭烈), 이근호(李根澔), 채찬(蔡燦: 白狂雲) 등과 함께 활략하는 한편
1920년 3월 상해 임시정부의 명에 의해 한족회 및 군정부의 여준(呂準) 등 27명이 모여 한족회를 새롭게 조직할 때 실업과장(實業課長)으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상무사장(商務司長)으로도 활략하였다.
1921년 1월에는 왕청현(汪淸縣)에서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에 가입하여 국내에 군자금조달을 위해 왕래하던 중 1922년10월 충남 부여에서 박길화(朴吉和), 김동진(金東鎭), 문장섭(文章燮), 문경섭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23년 3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5년 10월 출옥하자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정의부가 조직되자 박정조(朴正祚) 백남준(白南俊)과 함께 재만 한인의 생계를 지원하였으며 1926년 1월 24일 정의부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4월에는 만주지방으로 이주한 농민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김기풍(金基豊), 김진호(金鎭浩), 오동진(吳東振), 김동삼(金東三),현정경(玄正卿) 등과 함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하여 산업생산의 증가, 교육발전, 위생과 보건의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962년 7월 8일 83세로 타계하였고 웅천읍 죽청리에 묘소가 있다.
1963년 3월 1일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11년 11월 12일 1억4천 만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선생의 묘역정화사업을 마치고 준공식을 가졌다.
(사진은 준공식을 마치고 묘역에 참배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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