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늑전마을 이야기

구슬뫼 2011. 9. 13. 12:19

보령시 미산면 늑전리(勒田里)가 있다. 보령댐이 생기기전에는 교통이 아주 불편하여 시내버스에서 내려 30-40분은 걸어야 들어갈 수 있는 오지 중의 오지마을이었으나 보령댐을 시설하면서 미산면 옛 소재지(평라리)를 통과하던 군도 1호선이 이설되어 이 마을을 통과하게 됨으로서 교통이 아주 편리해졌다. 댐시설의 제일 수혜마을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성싶다.

 마을 이름에 굴레늑()자와 밭전()자를 썼으니 우리말로 바꾸면 굴레밭이 된다. 굴레밭이 무엇일까? 굴레란 말이나 소 따위를 부리기 위하여 머리와 목에서 고삐에 걸쳐 얽어매는 줄을 말하는데 그 굴레와 밭을 합한 이름이라 얼핏 그 뜻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이 마을 출신인사의 말에 의하면 풍수지리설과 관련하여 달려가든 말이 굴레를 벗어버린 곳(走馬脫勒形)이라 늑전이라 했다고 하며 주변에 말과 관련한 지명들이 여러 곳 전한다는 것이다. 말이 죽을 먹은 곳이라는 죽날, 말을 솔질했다는 솔뫼, 말이 굴레를 벗고 풀을 먹었다는 초장골(草場谷), 그리고 마치랑골(馬蹄岩)등이 있으며 늑전은 아니지만 초장골 너머 내평리쪽에는 질마고개 등이 그것이다. 이런 지명들이 마을사람들에게 구전되어 왔기에 풍수지리설과 관련하여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한자로 표기할 때 굴레를 벗은 곳(), 즉 굴레밭(勒田)이라고 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다.

 

 한편 이 마을을 순수한 우리말로 굴앗, 구리앗 등으로 부르다가 늑전으로 변했다고 내고장보령(1984), 보령군지(1991), 보령의지명(1998)’등 지역 여러 향토지에 수록되어 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고대에 '' 밑에서는 '' 이 된다.”고 되어있으며 그 예로 지명 중에 어전(於田)이란 곳은 느랏굴을 한자로 표기한 곳인데 이는 늘밭(길게 늘어진 밭)굴이 늘앗굴로 다시 느랏굴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느랏굴은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고 우리지역에도 청소면 정전리에 느랏굴(於田)이 있다. 그렇게 볼 때 앗은 밭이므로 굴앗, 구리앗은 굴밭, 구리밭이 변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굴이나 구리는 무엇일까? 수리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는 기름진 논을 구레논이라고 하여 상답(上畓)으로 쳤다. 국어사전을 보면 바닥이 낮고 늘 물이 있거나 물길이 좋은 기름진 들을 구렛들이라고 하였고 구레논을 찾아보면 고래실과 같은 말이라고 하였으며 고래실은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이라고 되어 있다. 늑전의 중심부에는 지금도 구레논이라고 부르는 들이 있으며 예부터 늑전은 우렁이의 속과 같이 깊이 들어앉아 있어 큰 부자는 나지 않아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전한다. 산골이 깊어 외부와 차단된 마을인데 큰 흉년에도 어떻게 굶어죽는 사람은 없을까? 그것은 이 마을의 구렛들에서 그 정답을 찾을 수 있다. 산골이지만 제법 넓은 구렛들, 물 걱정 없이 농사지을 수 있는 구렛논들이 있기에 그것이 가능하였던 것, 말하자면 늑전은 구렛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구렛들이 있는 밭(=마을)이라서 구레밭이라고 한 것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구리밭-구리앗- 굴앗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마을이름을 한자로 표기할 때 굴(구리)을 구레()가 아닌 풍수지리에 의한 굴레()로 표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 마을에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마을에는 이씨와 임씨가 살고 있는데 옛날 이씨 집안에서 임씨 집안으로 시집온 며느리가 있었다. 그녀의 친정아버지가 죽자 친정에서는 일찍이 잡아 두었던 묘 터가 있는지라 그곳에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런데 이씨부인(임씨집에 시집온)은 평소에 그 묘 터가 아주 좋은 명당이라 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하든 자기가 차지하려는 욕심을 품고 살아 왔던 것, 마침내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를 내일 장사지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놓았다. 이씨부인은 밤을 틈타 아무도 모르게 물동이로 물을 이어다가 구덩이에 붓기를 밤새도록 하였다고 한다. 아침 일찍 상주와 사람들이 상여를 모시고 구덩이를 판 현장에 도착해보니 어제는 멀쩡했던 구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좋은 명당이라고 일찍이 잡아놓고 정성을 다해 가꾸어 왔건만 물이 나는 곳이라니 . . .” 상주도, 지관도, 마을사람들도 모두가 실망했다. 물이 나는 곳에 묘를 쓸 수야 있나, 그래서 급히 다른 곳을 잡아 장사를 치렀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후 이씨부인은 친정오빠에게 그 묘자리를 쓰지 않으려면 자기나 달라고 했고, 오빠는 물이 나는 곳이라 쓸 수 없으니 순순히 주었으며, 그래서 임씨집안에서 그곳에 묘를 썼다는 전설이다.

 그러나 이 마을 출신 어떤 분은 당사자인 이씨부인(1589-?,李應參)은 남편(任慶門, 1588-1671)과 함께 주산면 야룡리에 묘가 있고 늑전에는 그의 아들의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전설일 뿐 사실과는 맞지 않을 것이라 한다. 또한 가까운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통박골마을 기계유씨(柳氏)집안에도 이와 똑 같은 전설(이곳은 박씨 할머니인데 죽은 후 남편과 함께 합장하려 하였으나 바람이 불어 명정이 날라가는지라 합장치 말라는 계시로 믿고 명정이 날라가 앉은 자리에 묘를 썼다고 함)이 있고 그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각지에서 많이 들을 수 있다며 전설일 가능성을 더욱 확신한다. 공주대 역사교수인 이해준교수 또한 이런 전설이 각 지역에 많이 있다며 이는 조선시대 아들·딸 구분 없이 상속하던 풍습에 따라 딸에게 산을 상속해주기도 하고 묘자리를 주기도 하였는데 이를 후손들이 미화하여 그런 전설들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마을사람들 상당수는 사실이라 생각하며 특히 임씨 집안에서는 17세기 살았던 임시제(任時濟, 1606-1690, 경문과 이씨부인 사이의 큰아들)의 묘가 바로 그 묘라면서 사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씨부인의 아들이 묻힌 그곳에 왜 그런 전설이 있는 것일까? 임씨가 늑전에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임경문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씨 처자와 혼인을 하여 처가동네에 살게 되면서라고 짐작하는바, 그가 늑전에 살았음은 풍천임씨 늑전파의 파조가 된 것으로 보아 신빙성이 있다. 그가 늑전에 사는 동안 이야기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묘 터를 얻은 이씨부인은 죽어서 남편과 같이 선영이었던 주산면 야룡리 야관에 묻혔으나 명당이라 굳게 믿고 작전까지 구사해서 얻은 묘 터는 죽기 전에 큰아들(시제)에게 넘겨주었을 가능성이 크며 큰아들은 죽어서 문제의 그 묘 터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그 후 시제의 자손 즉, 아들, 손자, 증손, 현손 . . . 내리닫이 늑전에 묻히면서 후손들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 세거하여오고 있다. 전설의 내용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옛 사람들이 얼마나 명당을 중요시하며 선호했나를 말해주는 동시에 여자는 출가외인이라서 시집가면 시집의 편을 들게 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있다. 늑전에는 맹정승의 묘라는 고분이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석물은 먼 옛날에 모두 훼손하여 마을에 있는 방죽논이라고 하는 논에 묻어버렸다는 말과 함께 봉분만이 전해왔던 것이다. 그 후 봉분마저도 사람들이 어떤 귀한 물건이라도 있을까하여 파헤쳐 없어지고 말았으며 나중엔 일부 사람들이 석물을 묻었다는 논을 철장으로 찔러 보는 등 유물을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언젠가는 맹씨들이 맹정승의 묘를 찾아 왔었다는 말도 전하고 있다. 아무튼 그 묘가 맹정승의 묘라면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고 이 마을에 맹씨들이 살았는지 조차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맹정승의 묘라고 전해왔고 봉분의 크기도 일반적인 묘보다 컸었다는 증언으로 보아 어느 권세가의 묘가 있었을 것이나 후손들이 몰락하고 묘역을 돌보지 않으면 유명한 인사의 묘라 해도 여지없이 훼손되는 예를 실감나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늑전은 전형적인 산골마을이나 사시사철 물걱정 없는 구렛들이 형성되어 큰 부자는 없지만 흉년에도 끄떡없이 살 수 있어 먼 옛날부터 사람이 정착하여 살아온 마을이다. 곳곳에서 발견된 백제고분들이 그걸 말해준다. 유서 깊은 마을이라서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이 전한다.

지금은 도로가 훤히 뚫려 교통이 아주 편리하면서도 산뜻한 산향기와 마을 앞 출렁이는 호수가 잘 어울어진 쾌적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되었다. 도시생활에 찌든 현대인들이 그리는 마음의 고향 같은 아늑한 마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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