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면서기의 추억(2)
1 새마을 운동과 관련하여
“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 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마을노래 가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마을길과 농로를 넓히고 초가지붕을 함석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등 수 천년 묵은 시골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고 근면, 자조, 협동(勤勉, 自助, 協同)의 기치아래 국민의식을 전환하여 잘살아보자는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었다.
1971년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가 가난을 벋고 근대화(近代化)에 이어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도약의 결정적인 초석이 된 이 운동의 최 일선에서 주민과 함께 몸으로 부딪히며 직접 뛰었던 공무원이 바로 면서기(面書記=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의 총칭)였다. 아직 옛 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한 주민들을 일깨우고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을 설득하여 농로를 개설하고 마을안길을 넓히며 새마을 회관과 마을공동창고를 짓는 공동사업과 부뚜막개량, 변소개량, 지붕개량 등 개인 사업에 이르기까지 농어촌의 모습들을 새롭게 바꾸어나가던 1970년대! 마을로, 들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사업대상지를 조사, 선정하고 사업이 시작되면 또 현장 방문하여 작업에 동원된 주민들을 격려, 지도, 감독하며 사업장의 전, 중, 후 사진을 찍는 등 숨 가쁘게 뛰어야 했고 밤에까지 마을에 출장하여 주민들을 모아놓고 새마을사업에 대한 회의를 하는 등 면서기들은 새마을운동의 최 일선에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 다녔었다.
1) 공동사업 편입용지의 타협
그 시절에는 주민들이 공동체 의식이나 협동심이 많았던 때라서 마을안길을 넓히고, 농로를 개설코자 하거나 새마을회관, 마을창고 등을 짓는다면 지주들이 순순히 편입(編入) 토지를 내놓았다. 땅값이 낮기도 하려니와 순박한 주민들이 마을에서 공동사업으로 추진하는 일을 반대하면 왕따가 되거나 무슨 불이익이라도 당할까봐 아깝긴 해도 땅을 내어 놓았다.
그래서 마을 유지(有志)나 이장, 새마을지도자들이 나서서 땅 타협을 곧잘 하곤 하였는데 더러는 지주들이 땅을 내놓지 않아 사업을 하지 못 할 경우가 있고 이럴 때는 면서기들이 나서 토지를 타협하였으니 이래저래 면서기들의 업무가 바쁠 수밖에 . . .
아무튼 마을단위 소규모사업은 토지를 희사 받아 주민자력으로 시행하였고, 대규모사업으로 편입 토지가 많이 들어가는 정부차원의 사업은 땅값을 보상하였는데 감정가격에 의거 땅값이 결정되는 대로 이의 없이 쉽게 땅을 내어 놓았으니 보상(補償)병에 걸려 조금만 땅이 들어가도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값을 요구하며 배짱을 내어 미는 오늘날에 생각하면 정말 꿈같은 시절이었다. 이 같은 보상심리는 1980-1990년대 전국적인 대단위 개발 사업들을 활발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땅값 상승과 이로 인한 땅 투기 붐, 정부보상금의 만연 등이 빚어낸 결과가 아닐까?
1970년대만 해도 농어촌에 행정의 권위(權威)가 살아있었고 순박한 주민들이 면서기들의 선도에 잘 따라주었기에 새마을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2) 새마을사업의 자재공급과 부작용
초창기(1970년대)의 새마을 사업 중 공동사업으로는 마을안길 넓히기, 농로개설, 소하천정비, 소교량 놓기, 암거시설, 도수로정비, 공동우물정비 등 생활기반시설과 마을공동창고, 새마을회관 신축 등 공동이용시설을, 그리고 개인 사업으로는 지붕개량, 담장개량, 변소개량, 부뚜막개량, 뜰팡개량 등을 추진하였던바, 공동사업에는 시멘트만 마을당 수백포대씩 지원하고 모래, 자갈 등의 채취며 작업인력, 기타경비 등은 모두가 주민부담으로 시행하였는데 마을마다 경쟁적으로 주민을 동원하고 마을공동경비를 마련하여 활발하게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였던 것, 겨울이 지나고 아직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5월에는 마을마다 새마을회관과 공동사업장에 새마을기를 펄럭이며 사람들이 수 십 명씩 나와서 작업을 하였으니 가히 전국의 농어촌이 새마을의 열기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동사업에 소요되는 시멘트의 양을 정확히 파악하여 필요량만 지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각 마을 똑같이 300-500포대씩 공급함으로서 어떤 마을에서는 시멘트가 부족하고 어떤 마을에서는 남는 시멘트를 마을사람들이 나누어 쓰는 일도 흔히 있었고 개인사업에는 지붕개량자금을 싼 이자율로 융자(融資)해주고 스레이트 등 자재를 공동으로 구입해 주기도 하였으며 담장개량 등 기타사업에는 소량의 시멘트를 공급 해주기도 하였는데 지붕개량자금을 융자해주고 회수하는 과정이나 자재를 공동구입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부 부정행위로 인해 관의 명예를 실추하고 담당공무원이 문책을 받는 등 불미스런 사례도 더러 있었다.
3)주요도로변 위주의 전시행정(展示行政)
1970년대의 일선행정은 주요도로변위주의 행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철도, 국도, 지방도 등에서 보이는(可視區域이라 하였음) 곳을 위주로 시책을 추진하였다. 바람직하지 못한 전시위주 행정이지만 주요도로변에 초가집이 즐비하고 새마을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업이 부진하다고 당장 상부기관으로부터 불벼락이 떨어질 판이니 하는 수 없이 오지(奧地)마을에 앞서 도로변 마을을 우선으로 지원하고 도로변의 초가집을 개량코자 하는 것이었다. 도로변 초가집개량에 애를 먹은 예로 웅천읍(熊川邑) 두룡리(杜龍里)의 ‘초가 3형제집’ 이야기는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 담당자들끼리 술좌석에서 가끔 오르내린다. 3형제라 해서 형제가 셋이 아니라 두룡리의 국도와 철도가 함께 지나는 가시구역에 초가집 3채가 나란히 있어 이를 두고 부른 이름이었다. 도로에서 뻔히 보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공무원들이 여러 차례 찾아가서 개량을 권장해도 집주인들은 형편이 어려워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3년 정도를 두고 권장이 지나쳐 사정을 하다 보니 군청에서는 물론이고 도청 담당부서에서까지 알려져 있어 가끔씩 전화로 “두룡리 3형제 초가집은 어떻게 되었나?”라고 확인을 하기에 이르렀고 면사무소에서는 주택개량지원 외로 무엇을 더 지원할 게 없나 찾아보면서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결국은 이들 세집의 주인들은 ‘용안이 마을’ 안에 집을 새로 짓고 이주를 하였는데 평소에 형편이 어려워 못하겠다는 핑계가 무색할 정도로 좋은 집을 지어 이를 추진하였던 담담 직원을 아연실색하게 한 일이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주요도로변 위주로 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생활형편이 어려운 초가집주인에게 자금은 적게 융자해주고 무리하게 지붕개량을 강요하여 궁지에 몰아넣는가 하면 심지어 가난한 도로변의 불량주택 소유주에게 힘에 부치게 주택개량을 시켜 생활파탄지경에 이른 일도 있었음은 참으로 딱한 일이었고 무리한 행정추진의 큰 과오였다고 하겠다.
4) 새마을 교육에 얽혀진 이야기
새마을 교육이란 국민교육차원에서 새마을지도자, 이장, 청소년지도자, 사회지도층, 요식업종사자, 운전사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피교육 대상자를 차출, 교육원에 입교시켜 소정의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인데 중앙교육은 새마을지도자중앙연수원(指導者中央練修院)에서, 그리고 지방교육은 시도단위로 교육시설을 갖추고 실시하였던바 충남도의 지방교육기관은 농민교육원(農民敎育院)과 복지농도원(福祉農導院)이 있었다.
◯ 꼭두새벽에 비상 걸린 일
주산면(珠山面)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1975년 11월, 새마을 중앙교육자 1명을 차출하는데 화평리(花坪里) 새마을부녀회장이 선임 된지도 얼마 안 되어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이며 또한 20대 초반인 미혼여성이라서 교육으로 인한 출타도 쉬울 것 같아 교육 대상자로 적정하다고 판단, 그녀를 선정하고는 마을 이장님을 통해 교육차출사실과 입교일, 교육기간 등을 공문으로 보내주었다. 그 후에 이장님으로부터 틀림없이 공문을 전달하였으며 본인(부녀회장)의 가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순박하고 관청에서 하는 일에 좀 불만이 있어도 웬만하면 잘 따라 주든 시대였으므로 이장님들에게 의뢰해서 일을 처리하는 예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장님이 거짓말을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는 마을에 전화도 없는 시절이었으므로 직접 통화를 할 수도 없고 여러 가지 바쁜 업무 때문에 직접 찾아가 확인 해보지 못한 채 이장님만 믿었던 게 실수였다. 틀림없이 가기로 약속하였다는 이장님의 말만을 믿고 별 걱정 없이 교육원 입교날이 다가왔고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잠을 잔 나는 늦가을이라 서리가 하얗게 내린 추운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5km정도 떨어진 마을까지 피교육생을 데려오기 위해 갔는데 그 집에서는 금시초문이라는 게 아닌가?
당시의 행정은 상, 하급 기관간의 위계질서가 너무 엄격하여 피교육생의 미입교, 특히 중앙교육의 미입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교육을 보내야 하는 판이니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더구나 이장님은 어제 나가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고 . . .하는 수 없이 이미 교육자로 차출된 부녀회장을 붙들고 사정하는 수밖에 . . . 우선 회갑이 넘은 그녀의 부모를 설득하고 다음으로 본인에게 통사정을 얼마나 했던가? 겨우 허락을 받아내고 교육갈 준비를 시켜 자전거 뒤에 싣고 면사무소를 향하는 마음은 교육을 펑크 내지 않고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과 이장님에 대한 분노가 교차했다.
그렇게 500m쯤 왔을까? 맞은편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왔다. 이장님이 대천(大川)의 어느 여관에서 자다보니 뒤늦게 교육생을 보내는 날임이 생각나서 친구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새벽을 달려 이렇게 오는 길이라면서 “어허허 임서기 정말 모범공무원이여” 하면서 너스레를 떠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홧김에 나보다 10여년은 연상인 이장님의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신경질을 냈다. 결국 이장님의 오토바이 뒤에 부녀회장을 실려 보내 군청에 인계함으로서 어렵게 교육을 입교시킨 일이 있었다.
◯ 송장이라도 데려와라
이 이야기도 새마을 중앙교육에 얽혀진 이야기이다. 웅천면(熊川面)에 근무하던 1978년 면 소재지에 사는 지도자 한 분을 차출하였는데 지역에서 유지(有志=재력이나 신망도 등 무시 못 할 유력인사)에 속하고 나이도 50세가 넘어 지긋한 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입교전날 갑자기 급성(急性)치질이 발작하여 거동을 못할 뿐 아니라 한전(寒戰)이 나는 등 몹시 몸이 아파 도저히 입교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군청에 전화를 걸어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도저히 입교가 불가함을 이야기하였는데 군청 새마을 계장님께서 하시는 말씀 “이제 와서 중앙교육을 빵꾸(펑크)내면 어쩌자는 거야 잔말 말고 당장 데려와, 송장이라도 데려오란 말이야” 하면 노발대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아파서 끙끙 앓는 지도자를 찾아가서는 죄송하지만 택시를 대절할 터이니 제 입장을 봐서 군청마당까지만 가셨다가 내리지도 말고 차를 돌려 병원으로 가시자고 통사정을 하여 간신히 허락을 받은 후 차에 태워 군청으로 갔다. 상상도 못할 중앙교육 펑크위기에 처한 새마을 계장님은 다급한 나머지 군청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도착한 지도자의 상태가 걷지도 못할 정도로 몹시 아픈 것을 보고 따뜻한 당직실(堂直室)에 눕도록 한 다음 군수께 이 사실을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군수님은 충남도 지방공무원교육원장(地方公務員敎育院長)을 지내고 처음으로 군청에 나오신 초출나기 군수였는데 당직실에 오셔서 상태를 살피고는 이렇게 편찮으신 데 오시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 후 충남도청(忠南道廳)과 새마을지도자중앙연수원(指導者中央練修院) 등 관계기관에 전화를 직접 하여 교육입교를 면하게 한 일이 있었다.
◯ 피 교육생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지고
새마을 교육 중에 기술을 가르치는 과정이 있었다. 벽돌공이나 미장공(浘匠工)등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차출하여 일정기간 기술을 가르쳐 기능공(技能工)으로 양성하는 교육과정으로써 직업도 없고 기술도 없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정책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런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입교한 사람들 중에도 도중 퇴교하는 자가 많이 생기는 등 정부의 뜻보다는 그 효과가 크지 못하였고 그래서 피 교육생 차출에 애로가 많았다.
1979년 주산면 근무당시 창암리(創岩里) 남전 마을에 사는 사람을 미장공 교육대상자로 차출하였는데 몸무게가 85kg이 넘는 거구의 남자였다. 내 몸무게는 당시에 65kg정도였으니 무려 20kg이나 무거운 사람을 자전거 뒤에 싣고 버스정류소까지 나오는데 애를 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이 교육기관에 입교한 후였다. 그때 그 집에는 부인과 3-4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부인은 아주 모자라서 돈벌이는커녕 벌어다 주는 것도 관리를 못하는 사람이었고 아이들은 모두 어려서 가장(家長) 혼자 날품팔이로 돈을 벌어 하루하루 살아가던 중 교육에 입교하니 당장 먹고 살길이 막연하였던 것, 하는 수없이 그 사람이 교육을 받는 기간 동안에는 영세민에게 매월 배급 주는 밀가루를 나투어 줌으로서 생계를 이어가도록 하였다. 그 후 그 사람은 두 달간의 교육을 마치고 돌아와서 미장공으로 살아갈 수 있었기에 그나마 교육효과를 보았던 성공적(?)인 새마을기술교육의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 밭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를 교육 보낸 면서기
이 이야기는 1970년대가 아니라 1983년 필자가 보령군청(保寧郡聽) 새마을과에 근무할 때의 일이지만 역시 새마을 교육과 관련한 특이한 이야기이기에 소개한다.
나는 새마을교육대상자를 읍면 직원으로부터 인계 받아 단체로 교육기관에 입교시키는 업무를 맡았었다. 한번은 청라면(靑蘿面) 직원이 새마을 중앙교육대상자를 차출하여 새마을과 사무실까지 안내하여 왔는데 교육을 간다는 부녀회장의 차림이 외출복이 아닌 작업복차림에 신발은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게 아닌가? 사연을 알고 본즉 교육을 가기로 되어있던 부녀회장이 갑자기 못 가겠노라고 펑크를 내었고 다급해진 면 직원은 밭에서 일하시는 자기의 어머니를 모시고 왔던 것이었다. 상부기관의 명령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구시대적 권위주의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자기의 업무는 어떤 경우에도 완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투철한 공무원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공무원은 나중에 군청(郡廳)을 거쳐 도청(道廳)으로 다시 내무부(內務部=行政自治部)로 영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행정자치부에서 간부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자치단체장을 민선으로 뽑지 않고 임명제로 하던 옛날 같으면 군수를 나올 위치까지 확보하고 있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2 체납세금(滯納稅金) 징수(徵收)와 관련하여
액수가 많든 적든 세금이라면 우선 내기 싫은 게 사람들의 심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그때그때 세금을 완전히 받아 내지 못해 체납세금이 남게 되는데 행정기관에서는 일제정리기간(一齊整理期間)을 설정하고 특별 징수반(徵收班)을 편성하여 체납세금 일소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곤 하였다. 군청(郡廳) 재무과(財務課)직원을 반장으로 하고 면서기를 반원으로 하여 편성한 징수반은 여러 명이 함께 출장하여 납세의무자들을 찾아다니며 좋은 말로 구슬리기도 하고 때로는 재산을 차압(差押)한다고 위협도 하면서 밀린 세금을 받는데 체납자들이 그 기세에 압도되어 밀렸던 세금을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끈질기게 납부를 거부하거나 징수반을 요리조리 피하는 체납자들 때문에 옥신각신하면서 TV등 가전제품에 압류(押留)딱지를 붙이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부동산을 압류하여 받아내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합동 징수반을 계속 운영할 수도 없는 터라 평상시에는 면서기들이 자기 분담마을의 체납세금을 책임지고 받도록 하였으며 산업사무가 뜸한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는 언제나 체납세금 일제정리기간이라 정해놓고 면서기들로 하여금 마을에 나가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일일 복명회(復命會)를 열어 그날 세금을 얼마나 받았는가? 결과를 보고 받으니 자기 본연의 업무가 급해도 그날 징수실적이 없으면 질책(叱責)이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출장을 나가 몇 건이라도 세금을 받아다가 저녁때 복명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계속 다니다보면 비교적 받기 쉬운 세금은 다 받고 나중에는 받기 어려운 고질체납자(固質滯納者)만 남게 된다. 체납자가 죽었거나 해외에 나갔거나 행방불명되었거나 멀리 이사하여 없는 경우, 체납자가 장기 출타한 경우, 부과가 잘 못 되어 재조정이 필요한 경우, 부과가 잘 되었는데도 생트집을 대며 납부를 거부하는 경우, 세금은커녕 오히려 도와주고 싶은 가난한 경우 등 별별 사정에 의거 받기 어려운 건만 남으면 정말로 속수무책이다. 그래도 징수실적이 없다고 닦달을 하면 하는 수 없이 세금액수가 적은 것으로 2-3건 자신이 채워 넣고는 그날 실적으로 보고하는 직원들도 간혹 있고 . . .
눈보라가 휘날리는 겨울 자전거에 몸을 싣고 체납세금을 받으려고 마을을 쏘아 다니던 그 시절, 지금생각하면 재미있던 추억도 떠오른다. 2인 1조로 징수를 나갔다가 무창포(武昌浦)바닷가에서 갓 채취한 싱싱한 굴을 사서 막걸리와 함께 먹던 일, 목표한 그날의 체납세금을 재수 좋게 일찍 받고는 새마을지도자 댁(바닷가 마을)에서 삶은 고동을 빼 먹으며 담소하던 일, 어두운 밤 돌아오는 길을 멈추고 노천리(蘆川里) 다리위에서 짚단에 불을 지펴 쬐면서 언 몸을 녹이던 일, 수부리(水芙里)에서 100원 세금을 내지 않고자 화를 벌컥 내는 체납자와 한바탕 싸우다가 막걸리를 한 됫박 사서 나누며 화해하던 일,(그 아저씨는 체납세금 100원을 못 내겠다고 버티다가 300원하는 막걸리를 사고 결국은 세금도 냈음) 등은 지금도 생각하면 저절로 빙그레 웃음이 떠오르는 추억이다.
그러나 기가 막힌 추억도 있다. 관당리(冠堂里) 어느 집에 체납세금을 받으려고 갔는데 아저씨는 돌아가시고 20이 다된 아들은 집을 나가 소식도 없고 어린자식들을 데리고 어렵게 사는 터라 세금 낼 돈은커녕 먹을 양식도 떨어져 간다는 딱한 사정을 보고 할 수 없이 호주머니를 털어 아이들에게 쥐어주고는 돌아와서 세금을 대납(代納)해 준 일, 어떤 집은 보아하니 세금을 낼 형편이 되는 것 같은데 못 내겠다고 버티므로 TV와 장롱에 압류딱지를 붙였더니 아주머니가 부르르 떨면서 세금을 내어 놓던 일, 또 어떤 집은 압류해도 내지 않아 면사무소로 압류한 물건을 실어오자 세금을 가져와서는 악담(惡談)을 하고 찾아가던 일 등은 못내 씁쓰레한 추억으로 남는다.
3 을류농지세(乙類農地稅) 때문에 생긴 일
지금은 농지세를 내는 사람이 대농가(大農家)로서 일개 읍, 면에서도 몇 안 되지만 옛날에는 갑류농지세(甲類農地稅)와 을류농지세로 나누었고 그 중 갑류농지세는 벼농사를 짓는 논이면 모든 곳이 해당이 되어 농민은 누구나 내는 세금이며 을류농지세는 논, 밭에 곡식 이외의 특용작물을 재배하면 내어야하는 세금이었다.
다시 말해 마늘, 딸기, 파, 수박 등 채소류로부터 포도, 사과, 배 등 과일과 약초에 이르기까지 소득이 좀 높은 특용작물을 300평 이상 재배하면 어김없이 을류농지세를 내어야 하니 사실 따지고 보면 농민들의 피땀 어린 소득을 세금으로 빼앗아 가는 일종의 악법(惡法)에 의한 제도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아무튼 악법인지 아닌지는 차치(且置)하고 이와 관련하여 상당히 곤혹스런 일이 있었기에 기억 해보고자 한다.
을류농지세를 매기려면(賦課하려면) 먼저 공무원들이 특용작물 심은 곳을 찾아가 면적과 작황(作況)을 조사한 후 기준세율을 적용하여 세금액수를 정하는 것으로 이를 인정과세(認定課稅)라 하였다. 면적이야 지적공부(地籍公簿)에 나와 있기도 하려니와 실제로 재어보면 다툼의 소지가 없겠으나 작황은 A급, B급, C급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이를 두고 조사공무원과 작인(作人)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웅천면 재무계(財務係)에 근무하던 1977년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성동리(城洞里)를 중심으로 웅천 일대에 딸기재배가 성행하여 소득이 아주 높던 시절이었고 이에 따른 을류농지세도 지방세수 중에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루는 군청 재무과 세정계(稅政係)직원 한사람과 내가 을류농지세 세원조사(稅原調査)를 나갔다. 성동리를 비롯하여 여러 마을을 다니다가 노천리(蘆川里)에 들어섰다. 이 마을에도 몇 농가가 딸기를 재배 하고 있었고 김모(金某)라는 사람이 1,200평 크기의 간척지 논 3필지(지적도상 1개 번지를 가진 땅을 1필지라고 함)에 딸기를 심었는데 2필지는 최고로 잘 되었고 1필지도 잘 된 편이었다. 다른 곳에서 조사한 기준으로 한다면 모두가 A급으로 하여야 하겠으나 3,600평의 딸기에 을류농지세를 A급으로 매긴다면 세액이 엄청나게 많아 조세저항(租稅抵抗)이 있을 수 있음으로 마침 논에 나와 있던 작인의 둘째아들(당시 30대 초반)에게 이 딸기들은 3필지 모두 A급으로 하여야 하겠지만 2필지만 A급으로 하고 1필지는 B급으로 하겠다고 말한 후 그의 수긍(首肯)을 받고 귀청을 하였다. 그 날 저녁에 하루 동안 조사한 자료들을 가지고 세금을 산출해 보니 김모씨가 내어야 할 세액이 그때까지 내던 을류농지세 납부자 중 최고자의 무려 10배가 되는 게 아닌가? 아니 세액이 이렇게 엄청나다니 . . . 지방재정이 튼튼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하겠지만 이를 그대로 부과 했다가는 조세저항(租稅抵抗)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한편 피 땀 흘려 일하는 농민을 도와는 못 줄망정 이렇게 많은 세금을 물릴 수는 없지 않는가?
“행정감사 측면에서 보면 징계(懲戒)받을 짓이지만 나는 공무원에 앞서 서민이니까 서민이 한 푼이라도 세금을 적게 내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세금을 깎아 내리는 방안을 연구한 끝에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때까지 세액을 줄이니 최고 농가의 2.5배 수준까지 깎아 내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당초보다 1/4로 세액을 줄인 것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속으로 흐뭇하였다. 보잘 것 없는 말단 공무원이지만 내 손으로 농민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게 보람차고 가슴 뿌듯하기까지 하였다.
아! 그런데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으랴, 고지서가 나가자 김모(金某)씨가 찾아와서는 노발대발하는 것이었다. “을류농지세를 왜 이렇게 많이 내라고 하느냐? 조사한 사람이 누구냐?” 크게 떠들면서 이의신청(異議申請)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었다. “뭐라구요? 내가 아저씨를 얼마나 도와드렸는지 알기나 하세요? 아무 말 마시고 내시기나 하세요.”
흥분한 나는 자초지종(自初之終)을 설명은 하지 않은 채 김모(金某)씨를 몰아부첬다. 그 후 김모씨는 두어 번을 더 찾아와서 이의를 하였으나 그때마다 나도 신경질적으로 대하였다. 마침내 김모씨는 웅천면장에게 내용증명(內容證明)으로 을류농지세의 이의 신청서를 냈고 이 민원(民怨)을 면장님의 명령을 받아 홍서기(洪書記)라는 직원이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홍서기는 김모씨와 그 부인, 둘째아들(딸기 조사 시 현장에 있던) 그리고 딸기를 심도록 논을 빌려 준 지주(地主), 마을리장 등 5인을 참고인으로 정한 후 진술서를 받고 그 진술서를 토대로 세금을 부과 해본 결과 애초에 내가 산정하였던 것과 똑같이 많은 액수가 나오는 것이었다.
홍서기는 그 자료를 김모씨에게 보여주면서 아저씨의 세금은 부과한 공무원이 크게 보아 드린 것이니 그리 알고 내시라고 한즉 그는 “을류농지세를 그렇게 많이 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세율이 어떻고 어쩌고 설명하지만 나는 그만큼 소득을 올린 일도 없으니 도저히 낼 수 없을 뿐더러 당초에 세금을 부과한 직원이 괘씸하니 어떻게 해서라도 벌을 받게 해야겠다. 만약에 이번 이의신청서가 내 뜻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소송을 걸고 대법원까지라도 가서 끝까지 해 보겠다”는 등 좀처럼 수긍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홍서기는 그가 딸기를 팔아서 작은 어선(魚船) 1척을 지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그에게 어선 건조(建造)에 든 5백 여 만원 자금의 출처를 묻자 서울에 사는 자기 여동생에게서 융통하였다는 등 끝까지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딸기를 매일같이 출하(出荷)할 때 나오는 돈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를 추궁하자 김모씨는 얼마 안 되는 돈임으로 집에 놓고 그럭저럭 써버렸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면 웅천 단위농협에 있는 아저씨와 아저씨 가족명의의 예금통장(내역서)을 조사 해보면 딸기 출하시기의 입금상황을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자 당황한 김모씨는 그런 것까지 조사할 수 있는 것이냐면서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의 딸기소득이 확실히 들어 나게 되면 세금이 훨씬 더 나올지 모르는 판이라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면서 하는 말 “하긴 이의신청소송을 제기하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만한 비용이 들것이니 차라리 세금을 내고 말겠다.”는 것이었다.
노련한 공무원 같았으면 그만큼 세금을 깎아 주었으면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수 있고 나아가 술이라도 걸게 얻어먹을 수 있는 것(얻어먹는 게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이며 혹시 비리에 익숙한 공무원 같으면 적당히 자기의 이익도 챙겼을 수 있는 그런 일을 욕만 잔뜩 얻어먹고 하마터면 징계까지 받을 번(세금을 깎아 준 사실이 알려지면 문책 가능) 한 고지식한 신출내기 공무원이 치른 곤혹스런 사건이었다. 농민을 돕겠다는 마음은 갸륵하다고 할 수 있으나 방식이 문제였고 기왕 도와 줄 바에야 상대방이 확실히 고맙게 생각할 수 있도록 자기가 한일을 분명하게 알려주었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었지만 내가 공무원생활을 하는데 두고두고 큰 교훈이 되었다.
4 혼분식(混粉食) 장려와 관련하여
1970년대 정부에서는 쌀 증산시책과 함께 쌀의 소비를 줄이려는 시책도 다각도로 펼쳤는데 ‘혼분식 장려’가 그 시책 중의 하나이다. 가정에서 쌀밥만 해 먹지 말고 보리, 콩 등 잡곡밥을 해 먹고 하루 한 끼씩은 국수나 수제비 등 분식(粉食)으로 먹을 것을 권장하면서 학생들이 싸오는 도시락에 잡곡을 섞었나? 선생님들이 일일이 검사하기도 하고, 방송에서는 흰 쌀밥만 먹으면 비타민이 부족하다느니 무슨 영양이 부족하다느니 하면서 은근히 겁을 주기도 하는 등 범국가적(汎國家的)으로 쌀 소비를 줄이려는 노력이 대단하였다. 음식집에는 흰쌀밥만을 팔지 말고 보리를 섞도록 지시하고, 공무원들이 직접 확인을 다녔는데 장사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손님들이 싫어하는 보리밥을 팔았다가 장사가 안 될까봐 몰래몰래 흰쌀밥을 팔다가 공무원이 확인을 나오면 보리밥을 내어 놓는 등 웃지 못 할 일들이 자주 일어났으며 그러다 보니 공무원들은 확인이 아니라 밥을 사먹으러 가도 언제나 보리밥을 내놓는 바람에 흰쌀밥을 사먹고 싶어도 사먹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그래서 일반인들이 공무원들하고 함께 식당에 가면 보리밥을 먹는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또한 매주 수요일을 아예 분식의 날로 지정하여 낮(오후 6시까지)에는 모든 음식집에서 분식만을 팔도록 지시하고는 공무원들이 직접 돌아다니며 확인하였다. 내가 웅천면에 근무하던 1974년의 일이었다. 분식의 날(수요일)에 동료직원과 함께 둘이서 면소재지의 음식집을 돌아다니며 분식만 팔고 있는지 확인하는데 여러 집을 보았으나 모두들 잘 이행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중화요리집에서 볶음밥을 시키니 금세 만들어다 놓는 게 아닌가? 내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여섯시가 못되었다. 주인을 불러 분식확인을 나왔으며 이를 위반했으니 확인서를 쓰라고 하였더니 주인이 자기 시계를 보면서 여섯시가 넘었으니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시계가 서로 틀려 옥신각신한 기억이 남았는데 정부가 얼마나 쌀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나를, 그리고 가난을 벗고 오늘의 경제도약을 하기까지 정부도, 음식장사도, 아니 국민모두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나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5 행려자(行旅者)처리
행려자라 하면 행려병자(行旅病者), 즉 의지 할 곳 없는 떠돌이 병자를 말한다. 정신이상자나 병이 든 거지가 의지 할 곳이 없어 헤매다가 더 이상 활동치 못하고 웅크리고 있으면 사회복지시설(社會福祉施設)에 데려다 주는 일도 공무원들의 몫이었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 행려병자도 많았는지, 그리고 한번 복지시설에 넘기려면 자동차가 귀한 시절이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특히 추운 겨울철, 숙직을 하는데 밤 열시나 지나서 행려병자가 발생하면 꼼짝없이 숙직실에 잠재우고(심한 경우에는 간단한 약이나 간식도 내 돈으로 사서 먹이고)새벽 첫 버스에 태워서 군청으로 보내야 했다.
그런데 더욱 어려운 일은 행려사망자(行旅死亡者)가 생겼을 때였다. 일단 행려사망자가 발생하면 경찰관이 지문(指紋)을 채취하여 신분을 조사하고 의사가 검시(檢屍)를 한 다음 절차에 의해 검사의 매장지시(埋葬指示)가 떨어지면 유족에게 인계를 하는데 유족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담당 면서기(사회사무 담당자)가 경찰관과 협조하여 현장을 보존하고 일처리를 돕는다. 만약 유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면서기는 일꾼을 사서 장사를 지내는 일까지 맡아서 처리하여야 하니 팔자에 없는 남의 상주역할(?)까지 하는 것이다.
1979년 주산면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삼곡리(三谷里)에 방을 얻어 살면서 보따리 행상으로 위장, 활동하던 50대 여간첩(女間諜)이 수사망이 좁혀오자 음독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경찰은 물론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현 國情院)요원까지 동원되어 마을사람들 중 상당수가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는 등 온 마을이 불안과 초조 속에 20여일을 시달렸다. 그러나 면사무소에서는 간첩사건에 직접 수사할 의무도 권한도 없는데다가 무시무시한 간첩사건을 수사하는데 가보기도 께름하여 아무도 사건현장에 가보지 안았다.
모든 수사가 끝나고 검찰의 매장지시가 떨어졌으나 간첩이 죽었으니 연고자(緣故者)가 있을 리 없고 따라서 행여 사망자로 처리하게 되어 결국 면서기의 책임으로 떨어지고 마침 사회 사무를 담당했던 내가 처리하게 되었다. 총무계장님과 함께 마을로 가서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를 만나 마을사람들과 함께 장사를 지내자고 하였으나 마을사람들이 “우리가 수사를 받을 땐 와보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장사를 지내자고? 너무 서운해서 우리도 협조할 수 없다” 면서 버티는 것이었다. 계장님과 나는 사람들을 설득 했다. “그래도 장사는 지내야지 송장을 마을 내에 언제까지 두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더운 여름입니다. 방부 처리한 송장이지만 곧 썩기 시작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리고 오늘 노력에 동원되는 인부는 다음 민방위(民防衛)훈련에 1일 참석한 것으로 해 드릴 테니 나오세요.” 마침내 설득에 성공,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가까운 공동묘지(花平里)에 장사를 지낼 수 있었으나 시간이 늦어져 오후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캄캄한 밤까지 일을 끝내었고 참여한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술을 권하다 보니 나 자신도 인사불성으로 술이 취해 집에 돌아 올 때는 남의 신세를 져야 했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6 민원실 풍경
지금은 웬만한 민원서류는 전산발급(電算發給)이 가능해 집에 앉아서도 필요한 민원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고 행정기관을 방문해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금세 서류가 나오지만 70년대에는 일일이 해당 행정기관에 가서 신청을 하면 담당직원이 펜으로 써서 발급하는 방식이었기에 민원인도 공무원도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작은 면(面)이라도 인구가 1만 명 정도 살기 때문에 민원서류를 떼러 오는 사람들도 항상 많았다. 특히 장날이라도 되면 민원실에 늘 10여 명 씩은 대기하는 게 일상적인 예였으니 면사무소에 아는 직원이라도 있는 사람은 슬그머니 새치기로 빨리 떼어가기도 하고 . . .민원담당직원이 바쁘면 다른 직원이 써서 발급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마침 들린 이장님이 직접 써서 담당직원의 확인을 받아 발급하기도 하였다.
그때는 왜 그렇게 호적등본(戶籍騰本)이나 주민등록등본(住民登錄謄本)을 요구하는 곳도 많았는지 취직, 취학, 혼인신고, 출생신고 등에 반드시 호적등본이 들어갔고 특히 신원조회나 외국여행(外國旅行)을 갈 때 신청서류에 필요한 호적등본은 죽은 사람, 시집가서 제적된 사람까지 모두 기록한 제적등본을 떼어야 하는데 분가를 하지 않은 종가(宗家)집의 호적은 40-50명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그런 집의 일정시대에 태어난 사람(제적자 포함) 출생기록 등은 일본말로 된 경우도 있고 그 사유 또한 길어서 한사람의 란을 쓰려면 3-5분씩 소요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 사람의 란을 쓰는데 3분정도 소요된다면 50명이면 2시간 30분이 걸리므로 그걸 써서 발급할 동안 다음 차례 민원인이 기다리면 본인도, 담당공무원도 미안하니까 먼저 해주기도 하고 . . . 그러다보니 그렇게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민원인은 아예 퇴근시간에 맞추어(다른 민원인이 없을 때) 오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민원인 입장에서야 편리하고 좋지만 퇴근도 못하고 저녁까지 일해야 하는 담당직원은 그야말로 짜증나는 일이 아닌가.
웅천면사무소에 근무하던 1978년 어느 여름의 토요일이었다. 오후 1시 30분 쯤, “퇴근하여 점심 후에는 밭에 가서 일 좀 해야지” 하면서 막 나가려는데 50대의 아는 주민이 호적등본을 떼러 왔다. 할 수 없이 호적부를 꺼내놓고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게 바로 외국여행 할 사람이 필요한 제적사유까지 기재하여야 하는 40여명의 방대한 호적이었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쓰는 동안 민원인은 내가 점심을 먹었는지 굶었는지 아랑곳 할 것 없이 기다리다가 시간이 길어지자 꾸벅꾸벅 졸더니 급기야는 쇼파에 길게 누워 잠을 자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여 적막한 사무실, 배에서는 연방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허기진 배를 꾹 참고 두어 시간을 써댄 끝에 마침내 완료하여 발급을 해주니 민원인 부스스 일어나면서 “수고 했네” 한마디 하고는 휭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그때 그 허탈하든 심정이야 무어라 표현해야 옳을까?
그러나 긴 시간을 요하는 민원이야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대로 넘어가지만 그보다 더 얄미운 민원인은 자주 오면서 습관적으로 퇴근시간에 맞추어 오는 사람들이었다. 일과시간에 오면 조금 기다리는 게 싫어 공무원이 서류를 서상에 다 넣고 퇴근하려는 시간에 와서는 “지금 와야 기다리지 않고 뗄 수 있지”하면서 자기가 무척이나 머리를 쓰는 사람처럼 이야기 할 때면 그 약삭빠른 태도에 면박이라도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불친절하다 어쩠다 뒷말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냥 떼어주기 일쑤였다.
7 도로보수(道路補修)업무
옛날에는 모든 도로들이 비포장이었으므로 자갈을 고르게 깔아 자동차가 다니기 좋게 보수를 하였는데 자동차가 다닐 때마다 바퀴자국이 나고 비가 오면 도로에 흐르는 물에 골이 저서 정기적으로 보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평소 도로 한쪽에 길게 자갈 무더기를 만들어 놓았다가 도로가 많이 패이고 울퉁불퉁하면 자갈을 깔아 보수를 하였는데 자갈을 깔고 나면 다시 보충하여 자갈무더기는 항상 준비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자갈을 쌓아 놓는 일이며 까는 일을 마을별로 구간을 정해놓고 그 부분은 그 마을에서 책임지고 보수하도록 하였다. 각 마을에서는 맡은 구간을 주민들을 동원, 자갈무더기도 만들고 또 펴는 일도 하였는데 도로보수를 “길 닦는다.”고 하였다.
길 닦는 날에는 마을사람들이 가래, 삽, 쇠스랑, 싸리삼태기 등 을 들고 나와 공동으로 길을 닦았으며 지게로 가까운 시냇가에서 자갈을 날라다 쌓아 놓고 굵은 자갈은 망치로 깨어 쌓기도 하는 등 온 마을주민이 총출동하였다. 이를 도로부역이라 하였고 면서기들은 수시로 출장을 나가 어느 마을이 담당한 도로가 엉망이니 즉시 보수하라고 지시하기도 하고 도로보수 하는 날 현장에 나가 “굵은 자갈은 깨라” “노면(路面)이 고르지 못하니 좀 더 고르라” “길 옆 수로를 쳐라” 등 지도감독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주민동원이 어려워져 1970년대에는 도로부역대라는 이름으로 자갈부설 및 보수에 들어가는 경비를 걷어 자갈과 인부를 사서 유료로 도로보수를 하였으니 주민들 입장에서는 도로부역을 나가지 않아 편하긴 하지만 어려운 살림에 잡종금(세금이외로 산림조합비, 적십자회비 등 여러 가지의 잡종금이 있었음)이 한 가지 늘어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더구나 도로의 혜택을 많이 보는 도시지역이나 적게 보는 시골지역이나 심지어 도로의 혜택을 전혀 보지 않는 섬지역의 주민들까지 똑같이 도로부역대를 내라고 하였으니 이에 대한 불만들이 많았었다.
이렇게 거둔 도로부역대는 예산과는 별도로 면사무소에서 세외수입 통장에 넣어 경리하면서 트럭 등 장비를 임차하고 인부를 사서 직접 도로를 보수하였는데 점차 도로들이 포장되어 일거리가 줄자 70년대 말에는 군청에서 직접 트럭을 보유하고 도로보수 전담요원(수로원)을 채용, 연중 도로 순찰 및 보수를 하게 함으로서 도로부역대도 사라졌다.
8 조림사업(造林事業)
1970년대 초까지는 땔감을 모두 산에서 채취하였기 때문에 산들이 대부분 벌거숭이였다. 새마을사업으로 몇 년 사이 지붕개량이 되어 볏짚이 땔감으로 사용됨으로서 산의 수난은 줄었지만 이미 황폐해진 산림을 녹화하기 위해 정부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봄이면 주민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나무심기를 하였는데 공유림(公有林)은 물론 사유림(私有林)까지 나무를 심어 주었다. 동원되는 주민들 중에는 내심 바쁜 일이 있는데도 부역(負役)을 나가지 않으면 곤란을 당할까봐 할 수 없이 나온 사람도 있어 불만도 많고 이래저래 일의 능률이 잘 오르지 않았으며 나무를 적당히 심어 활착률(活着率=뿌리가 내려 사는 율)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나무심기는 산림조합(山林組合)에서 주관하였지만 조합직원들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여기에도 면서기들이 동원되어 지도감독을 하였다.
아침 일찍 사람들이 모이면 나무 심는 요령을 교육하고 장정들은 구덩이 파기와 나무 심기, 부녀자나 노약자는 묘목 나누어주는 일을 하도록 역할분담을 시키고는 긴 줄을 띄우고 나무를 심었다.
나무 종류는 주로 리기다소나무, 오리나무, 아카시아나무였는데 관에서 공짜로 나무를 심어 주니 좋기는 하지만 아카시아를 심으면 산을 버린다고 생각하여 산주(山主)들은 자기 산에는 리기다소나무나 오리목을 심어달라고 요구를 하기도 하였으나 산의 경사도, 습도, 토질, 응달, 양달 등을 감안하여 수종을 미리 정하기 때문에 쉽게 산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니 할 수 없이 밤에 몰래 이미 심어놓은 아카시아를 뽑아버리는 촌극을 빚기도 하였다.
이렇게 주민들을 부역으로 동원하여 나무를 심는 식목사업도 1970년대 말에는 사라지고 품값을 주고 인부를 사서 심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9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인 이야기
옛말에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나 오랜 경험자가 새내기보다 일을 잘 처리한다는 말이리라. 요즈음처럼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신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개발되는 시대, 특히 컴퓨터 실력이 업무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시대에는 이 말이 덜 맞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옛날에는 공감이 잘 가는 말이었다.
1977-8년경 웅천면에 이모(李某)라는 40대 중반의 직원이 있었는데 술을 좋아하며 업무에 태만하여 무능하다고 평을 받아 승진에서도 계속 누락되는, 그러다보니 자주 술에 취해 자포자기 비슷하게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가축통계(家畜統計)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각 마을 분담직원으로 하여금 자기 담당마을의 소와 돼지를 조사하여 3일 후까지 복명서(復命書= 결과보고서)를 내도록 하였다. 직원들은 모두 주어진 기간 안에 자기 분담마을(1-2개 마을)의 농가를 방문하여 소와 돼지의 수를 조사하였는데 이모씨는 출장을 나가 조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이장님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묻지도 않은 채 자기업무만 보면서 시간나면 술이나 먹다가 보고기일이 돌아오자 적당히 소는 00마리, 돼지는 000마리라고 복명서를 내어 놓았다.
산업계의 담당직원은 어이가 없긴 하였으나 이모씨가 10여년 연배이며 또한 술에 젖어 있는지라 다시 조사해달라고 하지 못하고 본인이 직접 해당마을에 나가 조사를 해보았더니 소의 숫자는 맞고 돼지의 숫자는 불과 2마리밖에 차이가 없더라는 것, 그런데 신규직원이 직접 출장을 나가 조사한 다른 마을 중 미심쩍은 마을을 확인 해 본 결과 10여 마리가 차이 나더라는 것이었다. 이모씨가 술에 취해 근무는 엉망일망정 평소에 담당마을에 자주 출장을 가서 주민들과 어울려 마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분담마을에 자주 출장 가는 직원은 각 가구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기에) 가축을 일일이 조사하지 않고도 그 숫자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후 직장동료들은 신규직원과 이모씨의 예를 들면서 구관이 명관이란 말을 흔히 사용하곤 하였다.
10 반상회(班常會)와 관련한 이야기
주민들에게 특별히 홍보할 디책이 있거나 또는 교육을 시킬 일이 있으면 야간강화(夜間講話)라고 해서 공무원들이 저녁시간, 마을에 출장을 나가 주민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주재하는 일이 많이 있었는데 1970년대 중반부터 반상회라는 이름으로 아예 한 달에 한 번 씩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도록 하였다. 매월 25일(처음에는 매월 말일로 하다가 25일로 바뀜)에 전국적으로 일제히 반상회를 열도록 하고 공무원들을 참석시켜 정부시책도 홍보하고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여 행정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시, 군청이나 읍면동 직원은 물론이려니와 각급학교 교사들까지 총동원하여 전체 마을에 1명씩 분담(分擔)을 시켜놓고 반상회 회보(回報)를 인쇄하여 나누어주고는 나가서 회의를 주재한 후 결과보고서를 써내도록 하였던 것,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저녁에 몇 km에서 몇 십 km까지 떨어진 오지마을을 분담한 사람은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공무원들(특히 교사들)의 불만이 팽배하였다.
몇 년이 흐르자 교사들은 빼고 시, 군청과 읍면동 직원들만이 참석토록 변경되었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주민들의 참여율이 점점 떨어지고 공무원들 또한 상당수가 참석치 않고 거짓으로 결과보고서를 작성, 제출하는 등 실효성이 없는 시책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나 일부 극소수의 마을에서는 동계(洞契)를 조직하고 매월 반상회 날에 모임을 가지도록 하여 친목을 도모하는 형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반상회의 실효성이나 내용은 차치(且置)하고 반상회 날을 이용하여 일부 직원들이 단합대회를 한 추억이 있어 적어보고자 한다. 웅천면 총무계에 근무하든 1977년 7월 31일 반상회를 하는 날이었다. 총무계 직원들과 소황리(小篁里) 및 관당리(冠堂里) 담당직원 등 일곱 명인가 여덟 명인가를 서부 해안지역으로 반상회 분담을 시킨 다음, 반상회를 마치고 밤 열두시까지 무창포(武昌浦)에 있는 서천하숙(여인숙)까지 모이도록 하였다. 마침 토요일이기 때문에 다음날 즉 일요일에 바다낚시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각자 반상회에 참석하여 회의를 마친 후 약속장소로 모여들었고 다 모이게 되자 해수욕장까지 와서 그냥 잘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술들을 거나하게 먹고는 새벽 한 시경에야 대부분 술에 취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 겨우 한숨 눈을 붙였을까 말까 한 새벽 5시, 이 번 행사를 주선하고 또 함께 참여키로 한 이장 두 분이 우리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나가지 않으면 낚시 배를 탈수가 없다는 것, 우리들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낚시 배에 올라 새벽 바다를 가르며 낚시터로 나가는데 술이 아직 덜 깨고 잠도 부족하여 몹시 피곤한 기색들이 역력하였다, 배에는 아침밥까지 준비되었으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낚시 터(바다 한가운데)에 도착하여 보골치(백 조기= 맛은 없으나 생김새는 조기와 비슷하고 갓 잡아 뱃전에 올려놓으면 “보옥, 보옥” 하고 소리를 낸다 하여 보골치, 보굴치, 또는 보구치라고 부르며 7-8월경에 많이 잡혀, 낚시질을 잘 하는 사람은 한번 나가서 200마리 이상 낚을 수 있고 초보자도 50-100마리 정도를 낚을 수 있다)를 낚는데 간밤에 먹은 술과 잠을 못 이룬 때문에 오는 피로로 해서 한사람 두사람 토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일부 체력이 강한 사람들과 이장 두 분은 고기를 잘도 낚아 올리는데 나도 예외 없이 겨우 세 마리를 낚은 후 배 멀미 대열 끼어서 구토를 하였으므로 배 바닥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렇게 누워 있다가 구토가 나오지 않아 다시 일어나 낚시를 하려면 속이 또 다시 뒤집히는 듯 메스꺼워 다시 눕고, 하다가 그냥 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를 자다가 눈을 떠보니 일행들 2/3정도가 잠을 자므로 낚시를 그만 두고 바다를 질러 춘장대(椿莊臺)해수욕장을 향해 배를 달리고 있었다. 그 곳에 도착한 우리들은 백사장에 배를 대고 음료수며 음식을 사먹으며 바람을 쏘이다가 다시 배를 돌려 타고 무창포로 돌아와서 하루 단합대회를 마쳤다.
즐겁게 하루를 지내고자 계획하였던 바다낚시가 배 멀미로 말미암아 고생만 잔뜩 한 꼴이 되었다. 어찌나 배 멀미에 혼이 났던지 일행 중 한사람은 춘장대에서 배로 돌아오기를 포기하고 버스 편으로 돌아 온 사람도 있었으니 그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어려운 하루였지만 두고두고 즐거운 추억으로 떠오름은 무슨 때문일까?
11 그만 둔다면서 정년(停年)까지 가는 공무원
지금은 공무원을 가리켜 “철밥통이다.” 혹은“안정적 직업이다”라는 사회적 인식이 공감대를 이루고 보수도 웬만큼 주기 때문에 인기직종 상위그룹에 속한다고 하지만 1970년대에는 별로 인기가 없는 직업이었다. 은행원, 대기업의 사원, 공장기술자, 장사하는 사람 등 타 직업인에 비해 보수가 너무 적어 상대적 허탈감을 느꼈으며 쥐꼬리 만 한 봉급으로 생활하기에도 벅찰 정도였으니 오죽하면 “하다못해 면서기”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있었을까? 이것저것 해 보다가 아무것도 못하면 결국 면서기를 들어온다는 뜻으로 공무원들 사이에 회자되던 말이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공무원들의 이직율(離職率)도 높았지만, 걸핏하면 그만둔다는 말을 잘 했다. 상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업무적으로 복잡한 일이 있을 때, 민원인으로부터 아니꼬운 일을 당했을 때, 그리고 인사이동이나 승진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 등 속상한 일이 있으면 “에이 때려치우고 장사라도 해야지, 더럽고 치사하고 메스꺼워 해먹겠나. 이거 때려치운다고 당장 굶어 죽기야 하겠어? 빨리 그만 두는 게 상책이지”하면서 사직서(辭職書)를 내기도 하고 하루 이틀 결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가족들은 제발 그만두지 말라고 통 사정을 하고 직원들은 동료애(?)를 발휘, 찾아가서 설득하여 데려오는 것도 공무원 사회의 낮 설지 않은 진풍경이었다.
실제는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시위용으로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이 원하던 바를 성취하기도 하고 또 가족이나 동료들에게 자신의 위신을 세우는 것으로 착각하여 습관적으로 이를 연출하는 한심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자신의 평판이 얼마나 나쁜지 알지 못하고 시위용으로 사직서를 냈다가 덜컥 수리하는 바람에 직장을 잃어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게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런 경우가 흔치는 않지만 간혹 발생하여 공무원들의 입방아에 두고두고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아무튼 실제로 그만두는 사람은 평소에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만둘 일이 있으면 사직서를 내고 깨끗이 물러나는데 입버릇처럼 그만둔다고 말하는 사람은 실제 물러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공무원은 그만둔다. 둔다 하면서 정년퇴직까지 간다.”는 말도 있었다.
12 풋내기 공무원시절의 추억
1974년 첫 발령을 받아 웅천면에 근무 할 때의 일이다. 나이가 비슷한 직원들끼리 자주 차를 마시고, 술도 하고, 점심도 먹다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그래서 생겨난 게 바로 “사다리 멤버”라는 이름의 그룹(?)이었다. 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공무원경력이 임장순(任章淳, 당시28세)씨만 2-3년 정도로써 직급도 한 단계 위인 지방행정서기였을 뿐 김복기(金復冀, 당시27세)씨와 신기형(申基衡, 당시27세)씨는 경력 6개월 그리고 박동식(朴東植, 당시28세)씨와 나(당시 29세)는 갓 발령받은 동기였다. 모두들 햇병아리 공무원들이었기에 쉽게 마음들이 통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다섯은 자주 어울렸고 모두가 경제형편이 넉넉지 못한지라 만날 때 들어가는 찻값이나 술값, 밥값 등 은 어느 한사람이 부담할 것 없이 사다리를 타서 해결하곤 하였고 그래서 사다리 멤버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다섯줄의 사다리를 그린 다음 1등-5등을 표시한 후 그쪽이 보이지 않게 접어놓고 각자 한 줄씩을 짚은 후 사다리를 타서 등수를 가리는데 예를 들어 1등은 공짜, 2등은 100원, 3등은 200원, 4등은 300원, 5등은 400원으로 부담하면 합계가 1,000원이 된다. 당시에는 자장면이나 우동이 200원씩 하였으므로 1,000원이면 다섯이서 점심을 먹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다리를 타면서 아슬아슬하게 1등을 비켜나가고 꼴찌에 들어가면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던 일이며 어쩌다 1등이나 2등에 들어가면 별것도 아닌 행운(?)에 좋아하던 일 등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빙그레 떠오르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어찌 보면 너무 유치하기도 하지만 때 묻지 않고 순수하기만 했던 그 풋내기 공무원시절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고 또 그리워진다.
사다리 멤버들은 마을출장(出張)을 갈 때도 곧잘 같이 가곤 했는데 모두들 자전거를 한대씩 타고 이 마을 저 마을 함께 다니면서 세금(稅金)도 걷고, 퇴비증산(堆肥增産)도 독려(督勵)하고, 영농지도(營農指導)나 새마을사업지도도 합동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여럿이 같이 하면 혼자 하는 것보다 수월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자전거를 타고 줄지어서 들길을 달리기도 하고, 바닷가에도 가고, 고갯길 오르막엔 자전거를 끌거나 짊어지기도 하면서 낄낄대며 함께 다니는 그 맛에 한데 어울려 다녔다는 게 오히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간혹 크게 바쁜 일이 없거나 혹은 괜한 일로 상사(上司)로부터 꾸중을 들었을 때에도 “야- 우리 출장이나 가자”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떼를 지어 나가서는 한 바퀴 휘- 돌아옴으로써 기분전환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어울리던 사다리 멤바들은 전출입(轉出入)으로 뿔뿔이 흩어져 타면으로 혹은 군청의 이 부서 저 부서로 옮긴 후에도 연락을 취하며 친하게 지냈고 가끔씩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옛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등 우정을 오랫동안 지속하여 나갔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모두들 나이가 들어 퇴임 후 각자 자연인으로 돌아갔어도 어쩌다 만나면 새내기 공무원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살아나 “어! 사다리멤버 만났군.” 하면서 반갑게 손을 잡고 옛 이야기를 하면서 대폿집으로 어깨를 나란히 들어가곤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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