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이야기/공직과 관련한 이야기

70년대 면서기의 추억

구슬뫼 2007. 10. 14. 09:42
 

1970년대 면서기의 추억

(영농시책 권장과 관련하여)

     예나 지금이나 정부에서는 새로운 영농기법(營農技法)을 개발하여 농촌에 적극 권장하고 있다. 지금은 농민들이 새 영농기법을 적극 받아드리고 영농관련기관을 스스로 찾는 등 신기술을 터득코자 노력하는 일이 대단 하지만 옛날에는 농민들이 행정기관에서 권장하는 영농기법을 선뜻 받아드리지 않는 경향이 많았다.

 이와 같이 우리 국민들이 정부시책에 잘 따르지 않았던 것은 일제시대(日帝時代) 억압정책에 대한 거부반응이나 반항의식에 뿌리 한 것이 큰 원인일 수 있겠고, 또한 대대로 이어오는 전통영농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하며, 신기술(新技術)에 대한 믿음, 또는 정부시책에 대한 믿음이 적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국민성향으로 인하여 이를 권장하는 공무원과 농민들 사이에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곧잘 벌어지곤 하였다.

 또한 시책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국민과 이를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상부기관 사이에서 읍면직원들이(실적이 부진하면 질책을 받을까봐)직접 농민을 대리해 모도 심어주고 보리도 베어 주는 등 이른바 대역행정(代役行政)을 함으로서 농민들에게 “그냥 두면 기관에서 해주려니” 하는 나쁜 타성(惰性)을 길러주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필자가 1970년대에 행정의 최 일선에 근무하면서 경험했던 영농시책 권장에 얽힌 이야기들을 추억해보고자 한다.


1 보온못자리

 1970년대에는 비닐을 이용한 보온(保溫)못자리의 권장이 시작된 시기였는데 수 천 년 물못자리에 고착된 농민들은 처음 접하는 보온못자리를 선뜻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보온못자리를 하려면 비닐과 활대 등 자료를 사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찮고, 또한 그걸관리하는  

                        

                    

                                           보온 못자리 설치광경

기술도 없으니 못자리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이 핑계 저 핑계 보온못자리를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각급 지방행정기관에 해당지역을 책임지고 “농민들이 보온못자리를 설치하게 하라”고 지시하고 못자리철이 되면 수시로 현지 확인(現地確認)을 나와 실적이 부진하면 성화를 부리고 어쩌다 물못자리가 보이면 관계공무원의 책임을 추궁하는 등 강하게 밀어붙였다.  상부기관의 확인반이 나오거나 높은 분들이 지나칠 때 보온못자리가 아닌 물못자리가 발견되면 불벼락이 떨어질 판이라 하는 수 없이 눈에 쉽게 띄는 국도(國道) 등 주요도로변(主要道路邊)의 논에 주인이 보온못자리를 회피 할 경우 울며 겨자 먹기로 공무원들이 직접 설치 해주는 일이 흔히 있었다.

 4월, 봄이라지만 아직도 물에 들어가면 발이 시린 계절, 못자리를 설치하느라 공무원들이 물 논에 들어가 비닐을 씌우는 고역(苦役)! 정말 해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심정이었다.


 2 모내기 

 ○일찍 모내기 : 5월 하순이면 모내기가 시작되어 6월 초순까지 일모작(一毛作) 모내기가 끝나는데 문제는 2모작(二毛作)이다. 논보리를 빨리 베어 내고 모를 심어야 가을에 제대로 수확 할 수 있다고 상부기관에서는 야단법석인 것이다. 아직 보리가 덜 익어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데도 6월 20일 경이면 확인반이 나다니며 “왜 아직도 논보리가 있느냐? 빨리 베어내고 모를 심어라”고 성화를 해 대는데 농민들은 보리가 덜 익었다든지, 일손이 바쁘다든지, 이런 저런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니 답답한 건 담당 공무원이라. 하는 수 없이 농촌 일손 돕기란 명분하에 학생도 동원하고, 기관단체 임직원도 동원하여  보리도 베어 주고 모도 심어주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모내기에 동원되어 줄모를 심는 학생들     

 물론 순수한 일손 돕기 행사도 많았지만, 눈에 잘 띄는 주요도로변의 보리 베기와 모내기를 하지 않으면 지적을 받게 될까봐 우선 큰 도로변부터 일손을 지원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도로변 위주로 일손을 돕다보니 주요도로변에 논을 가진 농가 중에는 행정기관에서 해 주려니 하고 타성에 젖어서 자기가 할 수 있어도 일부러 놓아두는가 하면 심지어 어떤 농민은 기관에서 자기 집 모를 심어주는 날 본인은 품팔이를 가는 비 양심가도 있었으니 대역행정(代役行政)이 빚어낸 웃지 못 할 폐단이라고나 할까? 반면에 상부기관의 눈치를 살피느라 주요도로변부터 일손을 지원한 전시위주행정(展示爲主行政)도 바람직하지 못한 구시대적 유물이었다.


○줄모심기: 옛날에는 아무 기구도 없이 적당한 간격으로 흩어 심는 산모(散모)방식으로 모를 심었다.(지방에 따라서 ‘틀 모’라 해서 모를 줄 맞추어 심을 수 있도록 각목(角木)으로 만든 모틀을 이용하여 심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던 것을 일제시대(日帝時代)부터 못줄을 띄우고 줄을 맞추어 심는 줄모 방식을 권장하였다고 하는데 농민들은 이를 회피하고 틀 모나 산모방식을 고집하여 해방된 지 30년이 지난 1970년대 중반까지도 줄모가 완전 정착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줄모로 심으면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결과적으로 포기수도 많고, 포기사이로 공기유통이 좋아 벼의 성장에도 좋으며, 또 김매기나 농약뿌리기 등 관리하기도 편하고, 여럿이 합동으로 모내기 할 때면 능률도 훨씬 오르는 등 선진 농업기법인데도 농민들은 선뜻 받아드리지 않아 공무원들이 애를 먹었었다. 오죽하면 우리농촌에 줄모 심기를 정착시키는데 50년이 걸렸다는 말이 있었다.

 

○소주밀식(小柱密植): 또한 전통적으로 농민들은 모의 섭수(한 번에 심는 모의 수)를 많이 잡고 드문드문 심어 모포기가 굵어야 좋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 정부에서는 섭수를 조금씩 잡고 촘촘히 심을 것을 권장하였는데 이를 어려운 한자말로 소주밀식(小柱密植)이라고 하며 영농교육 또는 현지 출장 등을 통하여 농민들에게 이를 권장하면서 소주밀식이라고 마을회관 벽에 써 놓기도 하고 현수막에 “심경객토 소주밀식”이라고 써서 사람들이 잘 보이는 도로변과 건물 벽 등에 걸어 놓아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심경객토(深耕客土)라 함은 논을 깊이 갈고 새 흙(黃土)을 넣는 땅 힘 높이기 사업의 일종이었다. 이렇게 소주밀식이라고 한글로 써놓으니까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려니와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사람들은 “소주(술)를 몰래 먹으라는 말이여 뭐여” 하면서 곧잘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장방형 모심기 : 1970년대 중반에 모심는 방법에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장방형(長方形)모심기이다. 옛날에는 산모를 심건, 틀 모를 심건, 줄모를 심건, 모를 심은 모양이 가로거리와 세로거리가 같은 정방형(正方形)으로 심었으나 이를 장방형, 그러니까 가로의 거리는 짧고 세로의 거리는 길게 심는 방법으로 바꾼 것이었다.

 이렇게 심으면 논매기에도 편리하고, 농약을 뿌리기 위해 논에 들어가 돌아다니기도 좋으며, 넓은 세로거리 사이로 바람도 잘 통하여 벼의 성장에도 좋고 병충해(病蟲害)에도 덜 걸리는 등 좋은 점이 많아 몇 년이 지나자 모두 장방형 심기로 바뀌었고 정방형 모심기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지만 이 시책 역시 처음에는 농민들이 선뜻 받아드리지 않아 권장하는 공무원들이 매우 애를 먹은 것 중의 하나이다.  


3 통일(統一)벼 권장과 노풍피해

 옛날에는 식량자급(食糧自給)이 국가시책 중 대단히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다수확품종(多收穫品種)벼를 끊임없이 연구 개발하는데 1970년대 초에는 수확이 월등히 많고 도열병(稻熱病)도 걸리지 않는 통일벼라는 벼 품종이 개발되어 농가에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정책을 폈다.

 이 벼의 장점은 그동안 재배하던 일반품종에 비하여 20-30%정도 수확량이 많을 뿐 아니라 키가 작고 튼튼하여 수확기에 엎치지도 않고(엎치다=쓰러지다) 잎이 무성하고 억세어 도열병도 안 걸리는 우수품종이었다. 그러나 단점은 수확기에 벼 낱알이 쉽게 쏟아지고 쌀의 질이 낮아서 밥을 하면 진기가 없어 부실푸실 하며 밥맛이 없는 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단점 때문에 농민들은 통일벼의 재배를 회피하였고 “쌀 한 톨이라도 더 생산”이라는 시책을 추진하는 정부에서는 공무원들을 출장시켜 농가를 방문하면서 통일벼를 권장하고 다녀야만 하였다. 침종시기(浸種=볍씨 담그기)인 4월경이면 공무원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볍씨 담근 그릇을 일일이 확인하여 통일벼가 아닌 일반 벼를 담갔으면 건져내고 통일 볍씨로 담가주고, 공무원이 돌아가면 농민들은 다시 통일벼를 건져내고 일반 벼를 담그는 등 농민과 읍면직원 사이에 숨바꼭질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공무원들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70년대 중반에는 통일벼의 재배면적이 거의 40-50%(확실한 전국적인 숫치는 모름)에 이름으로써 전국의 쌀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 한때는 식량자급을 이루는 때도 있었다. 아래 표를 보면 1976년도부터 수확량이 급증 한 것이 나타난다.


○ 1970년대 연도별 벼 재배면적과 쌀 수확량(당시 보령군)

연도별

벼 재배면적

쌀 수확량

비고

1971

8,959.8㏊

29,580.0톤

 

1972

9,188.7㏊

31,493.0톤

 

1973

9,150.6㏊

33,418.4톤

 

1974

9,117.6㏊

32,198.8톤

 

1975

9,216.7㏊

30,684.0톤

 

1976

9,084.4㏊

43,081.6톤

 

1977

9,379.4㏊

51,012.4톤

 

                     ※자료 : 보령시 소장, 통계연보

 그러나 통일벼의 단점(밥맛이 나쁘고 수확기에 낱알이 쏟아지는)때문에 정부에서는 수확량은 많되 맛은 일반 벼와 같은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그 결과 나온 품종이 '노풍'이라는 벼로써 1977년에 정부차원에서 전국농촌에 이 벼를 대대적으로 보급하여 그 재배면적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는데 그 해 가을 이상기온으로 전국의 노풍벼들은 일제히 냉해(冷害)를 입어 농사를 크게 망쳐 버린 일이 있었다.(일반품종은 냉해에 강하여 피해 없었음) 결국은 노풍피해 농가에게 정부에서 보상을 주고 농지세를 감면(減免)하는 등 크게 손해를 보전 해주었는데, 나중에 전전으로 들은 이야기로는 농촌진흥청(農村振興廳) 농사시험장(農事試驗場)에서 '박노풍'이라는 학자가 이 벼 품종을 개발하던 중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이를 알고는 서둘러 보급을 시킴으로서 실패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나 사실여부는 확인 해 보지 않았다. 아무튼 노풍피해사건은 식량증산에 정부차원의 노력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 수 있고 한편으로는 정책을 너무 성급하게 추진함으로서 실패를 자초한 대표적인 졸속행정(拙速行政)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4 다수확(多收穫)심사에 얽힌 에피소드

 농사를 경쟁적으로 잘 짓도록 유도하는 식량증산시책의 일환으로  가을 수확기에 접어들면 읍면별로 벼의 수확량을 심사하여 순위를 매긴 후 가장 우수한 읍면에 표창을 주는 한편 읍면별 다수확 농가 몇 가구씩을 선정하여 시상을 하였으니 여기에 선정 된 사람은 자신의 소득도 높은데 상금까지 받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다수확농가가 되기를 원했다.

 다수확 심사반(審査班)은 군청 농산과(農産課)에서 읍면별로 공무원 1명씩을 차출하여 편성, 각 읍면별로 심사를 내 보내는데 자신이 근무하는 읍면에는 가지 않도록 조정한다.

 심사는 읍면에서 추천하는 논의 작황을 살핀 후 벼 작황이 평균정도인 부분의 한평(사방 1.8m)에 줄을 띄우고 벼의 포기 수, 이삭 수, 낱알 수를 센 다음 논 전체의 면적(평수)에 곱하여 수확량을 계산해 내는데 심사를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받고 싶은 해당논의 주인이나, 이장, 면 직원까지 비상이 걸려 심사반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만 청소면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한가지 만 소개한다. 

 청소면 ○○리의 어느 논이 다수확심사를 받게 되어 면 직원, 이장, 해당 농가 등 여러 사람이 군청에서 심사반이 온다고 아침 일찍부터 논두렁의 풀을 베고 주변을 깨끗이 치우는 등 법석을 떨었다. 마침내 심사반원이 도착하였는데 L이라는 공무원이었다. 그런데 L씨는 키가 150cm 정도로 체격이 작고 나이는 20대 중반인데 외모가 어려 보여 10대 후반정도로 보였다. 해당 면직원이야 아는 사람이니까 심사반원에 대한 예우를 갖추었으나 그 마을 이장님은 쪼그마한 청소년하나가 왔다 갔다 하면서 이것저것 참견을 하니까 면사무소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사환정도로 알고 “야! 너는 워디서(어디서) 왔냐?” 하고 묻는 실수를 한 것, 그렇게 물어 본 이장님이나 그런 물음을 받은 L씨나 난처한 입장은 같지 않았을까?

 그 논의 심사를 마치고 다음 추천한 논으로 이동하는데 그 시절은 자전거가 중요한 교통수단이던 때라 이장님(공교롭게도 이장의 키는 180cm가 넘는 거구였음)의 자전거에 L씨를 태우고 이동하게 되었다. 자전거가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너무 가볍게 올라가는지라 도대체 자전거에 한사람을 실은 것 같지가 않더라는 것, 그래서 혹시 심사반원이 어디서 떨어졌나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된 이장님은 한손을 뒤로 돌려 사람이 타고 있나 더듬어보았더니 L씨가 타고 있어 안심하였다는 것이다.  점심식사 후 L씨가 또 다른 논에 들어가 한참을 포기 수와 볏 대수, 낱알 등을 세고 있는데 그의 몸집이 너무 작아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더라는 것, 마침 이장님이 잠깐 어딜 다녀와서 보니 심사반원은 보이지 않고 면 직원과 논주인 등 몇 사람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장님 생각에는 아차 심사반원이 아까 점심 먹을 때 술도 한잔 곁들이더니 심사는 하지 않고 어디서 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아니 심사반은 워디 간 거여? 키라고 쬐끄만  혀 가지고 그런 사람이 무슨 심사를 헌다고 원 참, 공무원이 그렇게 사람이 없남? 하면서 농담석어 한마디 하는 게 아닌가? 한창 논 속에 들어가 심사를 하던 L씨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서면서 “이장님! 사람을 놓고 그렇게 말하기요?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 몰라요?” 하며 당차게 공격하는 바람에 이장님의 입장이 매우 난처했더라는 것, 특정인의 키가 너무 작아 생긴 사건(?)이지만 다수확심사이야기가 나오면 오랫동안 공무원들 사이에 웃으며 회자되던 실화이다.

5 퇴비(堆肥)치기

 옛날부터 농민들은 소외양간이나 돼지우리에서 겨울 내내 가축의 똥오줌이 흠뻑 젖은 두엄을 논에 냈고, 봄에는 새로 돋아나는 풀이나 나무의 연한 잎가지들을 베어다가 논에 뿌렸으며 여름에는 틈나는 대로 풀을 베어 퇴비장에 쌓아 두었다가 잘 썩은 다음 논밭에 넣곤 하였기에 집집마다 두엄무더기나 퇴비장이 꼭 있었다. 그러나 비료(肥料)가 보급되자 농민들은 구하기 쉽고 거름 효과

                       

               

                                        마을공동퇴비치기     

도 좋은 비료를 많이 쓰고 퇴비치기는 게을리 하게 되었다.

 비료는 화학성분으로 되어 있어 계속 사용하면 땅이 산성화 되어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 불모지로 변하게 되는데 농민들이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비료만을 너무 사용하였기 때문에 농토의 산성화(酸性化)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정부에서는 퇴비치기를 권장하였고 퇴비를 많이 치는 마을에는 상금을 주는 등 적극적으로 퇴비증산시책을 추진하였던 것, 하지만 비료에 맛을 들린 농민들은 어렵기도 하고 거름효과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 (효과가 눈에 띄지 않는)퇴비치기를 좋아 할 리 없었다.

 비료 한포대만 쓰면 작물이 시커멓게 자라는데 별 효과도 없는 퇴비는 처서 무엇 하느냐고 슬슬 퇴비 치기를 회피하는 실정이었다. 정부에서는 하는 수 없이 퇴비증산 목표를 세우고 공무원들을 앞세워 목표를 달성시키라고 압력을 가하였으니 여기에 동원되는 게 다름 아닌 읍면직원이었다. 새벽부터(낮에는 일하러 나가기 때문에 아침 일찍 방문해야 농민들을 만나기 쉬워 면사무소 출근 전에 분담마을을 한 바퀴 둘러 본 다음 출근하는 경우가 많았음)분담마을 농가를 한집, 한집 방문하면서 퇴비를 넣어야 흙의 산성화를 막고 땅 힘을 높여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고 발이 부르트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득하며 돌아다니던 일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어디 그 뿐인가 집집마다 직접 퇴비장을 손질도 해주고 퇴비장 팻말도 만들어 세워주면서 돌아 다녀야 했으니 어려운 노력 끝에 한집 두 집 퇴비장이 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이젠 퇴비심사(堆肥審査)가 나와도 괜찮겠지”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던 일이며, 이웃마을에는 퇴비누리를 산같이 쌓아 놓는데 내 분담마을에는 좀처럼 퇴비누리가 올라가지 않아 애태우던 일, 퇴비심사에 일등을 하면 시상금이 많이 나오니까 우리 마을에서 이번에 꼭 일등을 해보자고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공동으로 퇴비 치던 일, 냇둑을 타고 기다랗게 퇴비를 쌓아 일명 열차퇴비장을 만들어 놓고 퇴비심사관으로부터 칭찬을 듣던 일, 심지어 퇴비누리 속에 솔가지 등을 넣고 겉에만 풀을 쌓아 큰 퇴비장으로 위장하던 일, 높은 분들이 지나가시는 도로변의 보릿짚누리에 풀을 덮어 퇴비누리처럼 임시로 위장하던 일 등 갖가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6 지력증진(地力增進)

 퇴비증산에서 말했듯이 계속 비료만을 쓴 덕분에 흙이 산성화되어 정부에서는 땅 힘 높이기 즉 지력증진(地力增進)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퇴비치기 이외에도 추경(秋耕=가을갈이), 객토(客土), 소석회 넣기, 규산질비료 넣기 등이 있었다.

 추경은 말 그대로 가을에 논을 갈아 놓는 것인데 흔히 추경치기라고 했다. 지금이야 트랙터 등으로 손쉽게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소와 쟁기를 이용하여 가는 원시적 방법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각 마을 이장을 통하여 선일(논갈이를 해주고 품값을 받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동원, 한마지기(200평)를 가는데 맥강(麥糠=보릿겨) 한 가마씩을 주면서 추경을 쳤다.

           

               

                                                        잘 갈아 놓은 논

 보릿겨는 소, 돼지 등 가축을 기르는데 사료로 썼는데(사료가 귀하던 때였으므로 그 대용으로 보릿겨의 인기가 높았음) 정부양곡도정공장에서 생산되는 보릿겨는 읍면사무소를 통 해 각 마을에  할당하여 배급 주듯이 팔았기 때문에 사고 싶어도 필요한 양을 마음대로 살수 없었으며 시중에 나도는 것은 가격이 꽤 비싼 편이었다. 따라서 보릿겨를 농가에서 매우 좋아하였고 “추경치러 나오면 보릿겨를 준다”고 하면 이에 응하는 농민들이 많이 있었다. 주로 국도나 지방도 같이 주요도로변 논을 중점적으로 가는데 그 중 마른논은 쉽게 갈 수 있지만 물기가 있는 논들은 정말로 어려움이 많았다. 쌀쌀한 늦가을, 약간 질퍽한 논에 맨발로 들어가서 논갈이를 하려면 춥고 발이 시려 농민들이 보릿겨고 뭐고 이것만은 못하겠다고 버티기 일쑤이고 그런 때는 막걸리를 받아주면서 달래기도 하고 따뜻한 날로 골라서 다시 쫓아가 사정도 하면서 추경을 쳤던 것이었다.

 객토(客土)는 논에 새 흙을 넣어 주는 일이다. 산에 있는 황토를 파다가 논에 골고루 뿌려주면 황토에 들어 있는 새로운 성분이 산성화된 묵은 흙과 섞어져 중성화(中性化) 내지는 약 알카리성화 되어 작물이 자라기에 알맞게 되는 것이었다. 겨울철 논에 물기가 얼어서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다니기에 편리하게 되면 자동차나 경운기 리어카 또는 지게 등을 이용하여 객토를 하는데 모래흙

                       

            

                                           객토를 위해 논에 부어놓은 황토

으로 된 논이 주로 대상이 되며 농촌지도소에서 논흙의 산성도를 측정하여 객토 대상 논을 미리 통보하여 주기도 하였다.  소석회(消石灰)나 규산질(硅酸質)비료는 땅의 산성화를 방지하는 비료의 일종으로서 정부에서 해마다 많은 예산을 들여 공급하면서 농민들에게 시용(施用=사용)할 것을 권장하는데 이것 역시 농민들은 즉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관계로 회피하는 경향이 많았다 .

                  

          

                                        도로변에 쌓아 놓은 규산질비료

  농민들은 소석회를 석회, 규산질비료를 골탄이라 부르면서 마을별로 나누어주면 마을 회관 앞이나 동리입구 등에 몇 달씩, 혹은 몇 년씩 쌓아 두어 미관을 해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허물어진 논둑을 쌓는데 사용하는 일도 있었으나 공무원들의 끊임없는 계도에 힘입어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효과를 느끼게 되어 중요성을 알고 올바르게 사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7 피사리

 전통적인 농사방법은 모내기를 한 후 세 번의 김(애벌, 두벌, 만물)을 매고 가을수확을 기다리는데 피는 벼와 생김새가 비슷하여 김매기 할 때 모르고 지나치기가 일쑤다. 따라서 뽑지 않은 피는 그대로 자라다가 벼이삭이 팰 무렵에 피도 이삭이 패어 볏논에 삐쭉 삐쭉 모개(피 이삭)를 내밀면 농부들이 뽑거나 낫으로 베어버리는 일을 피사리라고 한다. 피는 번식력이 강하여 뽑아 버리지 않으면 다음해에는 씨가 번져 엄청나게 많이 나게 되므로  피사리를 하는 게 농부들의 상례였다.

 그런데 제초제가 생겨나자 김매기 대신 손쉬운 풀약(제초제)을 사용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어려운 김매기를 차츰 줄이더니 얼마 후에는 아예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제초제를 사용한다 해도 가을에는 살아남은 잡초들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피는 일반제초제로 없애기가 어려워 살아남는 게 많으므로 벼이삭 위로 툭 툭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피사리를 해야 하는데 70년대 후반에는 이농(離農)현상이 시작되어 농촌에 일손도 줄었을 뿐 아니라 편리함에 길들여진 농부들이 어렵게 논에 들어가 피사리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공무원들이 그들에게 피사리를 권장해보지만 농부들은 “이미 농사를 다 지었는데 피가 있어봤자 수확량에 지장을 주지 않고, 내년에는 피 죽이는 농약을 하면 될 텐데 무슨 피사리가 필요 하냐”면서  자꾸만 회피하는 것이다.

 상부기관에서는 영농지도를 소홀히 하여 피사리를 하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리고 도로변의 논에서 피가 발견되면 해당 읍면장과 분담공무원에게 질책이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공무원들이 논에 들어가 피사리를 하여주기가 일쑤였다.


8 벼 도열병 방제

  행정기관에서는 묘판설치에서부터 모내기 수확에 이르기까지 농사적기를 알려주고 좋은 종자를 보급하는 등 농사를 잘 짓도록 연중 영농지도활동을 펼쳤는데 병충해 방제시기와 알맞은 농약을 알선해주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1970년대에는 벼농사의 병충해 중 대표적인 것으로 도열병(稻熱病)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 외에도 문고병, 벼멸구, 이화명충, 혹명나방 등 여러 가지 병충해가 있지만 도열병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것이다. 도열병은 어린 묘에서부터 중간크기 때, 그리고 이삭에 걸리는 목도열병까지 벼의 일생을 두고 괴롭히는 병인데 벼가 한창 자라는 중간 크기 때 도열병에 걸리면 시커멓게 자라나던 벼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포기 전체가 검붉게 변하면서 죽게 되는데 전염성도 강하여 논 전체는 물론 옆의 논으로 번져나가고 병균이 바람을 타고 다른 들녘으로도 번진다.

                                

           

                                                  도열병방제 현수막

 벼논 군데군데 둥글게 벼가 주저앉으면 그해 농사는 피롱(避農=농사를 망치는 일)하게 되어 망연자실, 농부들의 가슴도 함께  주저앉는다. 그래서 그 시기쯤 되면 “질소비료를 너무 쓰지 말라” “통풍을 잘 되게 하라” “○○농약을 미리 뿌려라” 등 많은 지침을 내리고 분담공무원으로 하여금 마을에 나가 활발하게 계도활동을 펼치도록 하는데 대다수의 농민들은 잘 따르고 또한 자기네 농사를 버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방제를 하지만 일부 게으른 농민들은 조금 미루다가 도열병에 걸려 농사를 망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어느 지역 논에 도열병이 생겨 펑크가 나면(둥글게 주저앉으면) 그 마을의 분담직원을 문책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공무원 한사람 당 한 마을씩 분담마을을 정해 놓고 그 마을의 도열병은 그 직원이 책임지라는 것인데 농사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은 몰라도 본연의 자기 업무가 있는 공무원이 어떻게 분담마을에 영농지도를 매일 나갈 수 있으며 또 논 주인이 하지 않는 병충해 방제를 어떻게 억지로 할 수가 있겠는가?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게 통하는 시대여서 많은 공무원들이 틈을 내어 분담마을에 출장, 병충해방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 주었으며 실제로 군청사회과에 근무하던 M씨(읍면직원 뿐 아니라 군청, 사업소 직원까지 분담마을 지정하였음)는 분담마을이 국도 21호변에 있었는데 도열병이 발생하여 문책을 당한 일이 있어 두고두고 화제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9 한해대책

 지금은 곳곳에 저수지가 있고 그렇지 않은 곳에는 크고 작은 관정(管井)을 많이 설치하여 천수답(天水畓)이라는 용어조차 없어져 버렸지만 1970년대만 해도 수리시설이 잘 안된 곳이 많아 가뭄이 찾아오면 농사에 큰 지장이 있었다.

                       

              

                                                가뭄에 갈라 터진 논바닥 

 모내기철은 점점 끝나 가는데 비가 안와 모를 못 심었거나 아니면 모는 심어 놓았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타들어가는 논바닥만큼이나 농민들의 가슴도 타들어간다.

그리되면 읍면에 보유하고 있는 양수기와 물 호스를 농민들에게 빌려주고 공무원들도 들녘에 나가 농민과 함께 물을 품기도 하고 하천바닥을 굴착(掘鑿)하여 물길을 찾고, 물이 날만한 곳을 찾아 새롭게 관정을 파기도 하였다. 다행이 물을 품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물이 있으면 좋으련만 거리가 멀면 양수기 한 대의 힘으로 품지 못해 2-3대씩 늘어놓고 2단 양수, 3단 양수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러다보면 그 무거운 양수기를 옮기기 위해  공무원들이 짊어지고 다니던 일도 잊지 못 할 추억중의 하나다. 가뭄극복을 위해 정부에서는 매년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한해대책사업을 추진하였으나 일거에 수리시설을 완비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농민과 공무원이 함께하는 가뭄과의 전쟁은 1980년대까지도 계속되었었다.

        

10 보리갈이

 1970년대에는 식량증산시책의 일환으로 가을에는 보리를 많이 갈도록(갈다=심다) 독려하는데 농민들은 보리를 심어 봐야 별 타산이 맞지 않음으로 이를 회피하였다.  

 하는 수 없이 정부에서는 보리 재배의 목표치를 세우고 각 지역별로 그 면적을 할당하고는 공무원들에게 보리재배면적을 채우라고 성화를 해대기 때문에 말단기관인 읍면직원들은 분담마을의 보리재배면적을 최대한으로 늘려야만 하였다.

 이래서 생겨난 게 맥작대장(麥作臺帳)이라는 것인데 농가별로 소유한 논과 밭을 지번(地番), 지목(地目), 지적(地籍)을 표시한 다음 보리를 심은 필지와 심지 않은 필지를 표시하고 심지 않은 필지는 심도록 계속 찾아가서 권장을 하는 것이었다. 말이 권장이지 이것 역시 사정을 하거나 아니면 반 강제로 심게 시키거나 공무원이 직접 심어주는 경우도 허다하였고 그런 과정에서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많이 발생하는데, 물 논에 보리를 갈았다고 보고하는 사례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 때는 직원들이 매일같이 보리 심기를 독려(督勵=감독하여 장려함)하고는 그 날 실적을 맥작대장에 표시하여 저녁 때 또는 그 다음날 소속 읍면장에게 복명(復命=보고)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직원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고유의 업무가 있으며 보리 심기를 독려한다거나 기타 영농사업을 권장하는 따위의 업무는 부수적인 협조업무에 불과한 것임으로 자기 업무가 바쁘거나 기타 사정이 있으면 독려를 못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날에는 해당마을 이장이나 부녀회장, 또는 새마을지도자 등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통하여 물어 봐서 그 날의 실적을 잡기도 하고 그도 여의치 못하면 거짓으로 적당히 실적을 꾸며 보고도 하였는데 이게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읍면장들은 대개 그 지역출신이거나 평직원 때 오래 동안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므로 관내 주민들의 사정을 훤히 다 알고 있었다. 어떤 마을의 논들 중 몇 번지 선은 구레논이라서 항상 물이 들어 있는 곳이고 보리를 갈만한 논들은 대개 몇 번지 선이라는 것과 누구네 논 중 어떤 논은 마른논이고  어떤 논은 물 논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판인데 마을실정을 잘 모르는 신규직원이 거짓말로 오늘은 ○○○씨네 몇 번지 논에 보리를 갈았다고 보고를 하였을 때 공교롭게도 그 논이 물 논이었을 경우 면장님께서 “물 논에도 보리를 가느냐?”고 되물음으로서 난처해하던 일은 두고두고 웃음 나던 추억(?)으로 남았다.

 이렇게 보리 재배의 확대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으나 수익성이 떨어지는 보리를 농민들은 심지 않으려고 회피하였기 때문에 아래 표에서 보는바와 같이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는 보리 재배면적이 급격히 줄었음을 볼 수 있다.


연도별

보리 재배면적

보리 수확량

비고

1971

5,353.8㏊

11,121.6톤

대맥,나맥,소맥,

1972

5,517.9㏊

12,835.1톤

호맥 모두 포함

1973

5,870.5㏊

13,275.3톤

 

1974

6,535.0㏊

13,578.4톤

 

1975

6,687.3㏊

17,685.8톤

 

1976

4,542.5㏊

11,630.1톤

 

1977

3,095.8㏊

5,721.6톤

 

○1970연대 연도별 보리 재배면적 및 수확량(보령군)

                  ※자료 : 보령시 소장 통계연보

 11 양곡수매(糧穀收買)

 양곡수매라 하면 정부에서 양곡을 사들이는 것으로 추곡수매(秋穀收買)와 하곡수매(夏穀收買)로 나뉘는데 추곡수매는 가을에 벼를 사들이는 것이고 하곡수매는 여름에 보리를 사들이는 것이다.

 이중곡가제(二重穀價制)라고 해서 곡식을 생산하는 시기에 시중가격(市中價格)보다 높은 가격으로 사들였다가 곡가가 올라가면 시중가격보다 싸게 방출(放出)함으로서 곡가의 심한 오르내림을 방지하고 연중 가격안정을 도모하는 말하자면 생산자인 농민도 보호하고 소비자인 서민도 위하는 제도의 일환으로 양곡수매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농민들이 양곡수매를 기피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정부의 수매가격이 시중곡가보다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농가들은 수매를 하지 않고 놓아두었다가 수매기간이 지나 시중가격이 높아지면 내다 팔아 더 많은 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매가격을 많이 올리면 그럴 일이 없을 테지만 수매가를 올리면 모든 물가가 들먹이고 정부예산이 많이 들어가므로 함부로 올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수매가격은 해마다 예산 부서(당시는 경제기획원)에서 적정수준이라고 올린 안(案)을 국회에서 동의하게 되는데 안을 작성할 때부터 결정하기까지 그야말로 한바탕의 실랑이를 벌이곤 하였다. 농사관련 부서나 농민단체들은 “좀 더 올려야 한다” 예산관련 부서에서는 “적게 올려야한다” 국회에서도 야당의원들은 많이, 여당의원들은 적게 올리려고 온갖 노력들을 하지만 결국 예산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일반물가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결정이 되곤 하였는데 그 인상폭이 항상 농민들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쳤고 겨우 생산시기의 곡가보다 약간 높은 수준으로 결정되곤 하였다. 따라서 돈이 급하여 당장 수매를 하지 않으면 곤란한 농가들만이 수매에 응하는데 그 양이 목표치(目標値)의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목표치라 하면 정부에서 그해 추곡 수매량(여름에는 하곡 수매량)을 몇 백 만석이라고 정하고는 각 시도별로 경지면적 등을 토대로 할당하고, 시도에서는 시 군별로, 시 군에서는 읍면별로, 읍면에서는 마을별로, 마을에서는 농가별로 할당하여 수매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연도별

추곡

하곡

비고

목표량

실적

목표량

실적

1971

25,360

21,972

11,579

9,478

 

1972

25,053

20,381

20,770

22,654

 

1973

67,389

70,703

71,411

70,311

 

1974

68,986

63,764

130,000

92,924

 

1975

23,200

23,512

2,532

4,215

 

1976

27,100

25,902

30,000

39,252

 

1977

81,000

46,343

5,000

8,734

 

1978

47,300

47,067

13,650

13,615

 

1979

60,400

40,727

18,000

19,450

 

○1970년대 추곡 및 하곡수매 현황(보령군)            단위: 석

                       ※자료 : 보령시 소장 통계연보

 상부기관에서는 목표치를 채우라고 성화이고 농가에서는 수매기간이 끝나면 곡가가 올라갈 터이니 수매를 기피하고 이래저래 답답한 것은 읍면직원이었다. 직원1명당 1-2개 마을을 분담(分擔)마을이라 정해놓고 수매를 독려하라고 하는데 자기분담마을이 수매목표치를 못 채우면 야단을 맞게 되므로 농가마다 방문하여 수매를 권장하지만 농가에서는 쉽게 응하지 않으니 할 수 없이 “내 사정을 보아서 한가마만 해주시오, 두 가마만 해주시오” 하고 애걸복걸(?)하면 농민들 한다는 말, “그럼 내 임서기(任書記) 사정 봐서 한가마만 해주지” 하면서 무슨 큰 인심이나 쓰는 듯이 한두 가마씩 수매에 응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제길 할 수매 해주다니? 그 값 받아서 날 주나, 제가 갖지, 원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하고 욕지거리가 목까지 올라와도 꿀꺽 참고는 “고마워요” 하면서 돌아서려면 신세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수 없이 들곤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어렵게 한두 가마씩 수매장에 끄집어내면 검사결과 1등을 받아야 값을 많이 쳐주는데 2등이나 3등을 맞으면 농민들은 또 불평을 하고 심지어 수매를 않고 다시 가져간다고 하기가 일수인지라 직원들은 수매등급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었다. 농산물검사원과 친분을 맺어 놓고 등급을 올려달라고 사정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등급을 찍는 도장(자빡이라 불렀으며 흔히 검사 보조원이 들고 다니며 검사원이 양곡을 검사하고 등급을 부르는 대로 찍었음)을 직접가지고 검사원을 따라다니며 검사원이 ‘3등’ 하면 2등을, ‘2등’하면 1등을 얼른 찍고는 검사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촌극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기도 하였다.

 농가를 방문하면서 끄집어낸 양곡으로 수매목표량이 차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면 질책이 떨어지는 판이라 수단 좋은 공무원은 곡창지대인 전라북도에 가서 차떼기(트럭을 대절하여 한차 가득)로 양곡을 사다가 수매에 응함으로서 일찍이 목표치를 채우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수단을 부려 목표량을 일찍 채운 공무원은 유능하다 하여 표창을 주기도 하고 승진(昇進)이나 영전인사(榮轉人事)에 우선 발탁(拔擢)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고지식한 공무원보다야 그들이 유능한 공무원임은 맞는 것 같다.

 

 이상과 같이 영농시책추진과 관련한 추억을 몇 가지 더듬어 보았다. 필자의 주관적인 글이니까 다른 사람들(그 당시 읍면에 근무한 공무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에 현장에서 느낀 점들이 좀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공감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 밖의 분들(당시에 읍면에 근무하지 않은 공무원이나 주민들)에게도 1970년대 우리나라의 일선행정이 주민들의 사이에 어떻게 침투했는지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써 보았다.  끝으로 사진을 제공해 주신 보령시청 산업과 임화빈(任和彬)담당님께 감사드린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