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산(雲峯山)
1 운봉산 위치 및 지형상 특징
운봉산은 웅천읍(熊川邑)과 주산면(珠山面)의 경계를 이루며 서있는 해발 337.3m의 아담한 산이다. 산 정상에서 북쪽 기슭을 타고 양쪽으로 갈라져 내려오는 산성이 있어 웅천읍 성동리(城洞里)에서는 성뫼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운봉산이라는 이름은 검은 구름이 이 산을 휘감고 돌면 비가 온다는 속설이 있어 이 때문에 운봉산이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다.
2 등산로
등산로는 웅천읍 대창초등학교(大昌初等學校)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 방죽굴 마을회관에서 오르는 길과 만나 정상으로 이어지는데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 사이로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길을 걷다보면 나무에서 발산하는 향기에 취해 날아 갈 듯 한 기분이 된다. 20분쯤 걸으면 절터가 나오고 여기서부터는 제법 가파른 산길인데 이 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쉼터가 나오고 간단히 몸을 풀 수 있는 운동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산 밑에 살면서 아침운동을 나오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가벼운 운동을 한 후 내려가기도 한다.
여기서부터 능선에 아직 남아있는 산성흔적을 따라 정상까지는 1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상쾌한 기분으로 가볍게 등산하기에 알맞은 산이라서 새벽녘이나 오전시간대에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즐기는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는 웅천읍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읍 소재지를 휘감고 유유히 구비쳐 흐르는 웅천천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남쪽으로는 주산면 일대가 훤히 들어 나 보이고 서남쪽의 주렴산, 동쪽의 양각산, 북쪽의 잔미산 등이 다정하게 손짓하는 것 같다. 내려올 때에는 장군봉 이라고도 하고 속날 이라고도 부르는 대창리 쪽 봉우리로 난 길을 따라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오면 오르던 길 중간부분을 만나게 됨으로서 출발점으로 다시 올 수 있어 승용차를 이용한 등산객들에게 편리하다. 또한 오르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달라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좋다.
3 주변마을과 환경
북서쪽 산 아래는 웅천읍 대창리(大昌里)지역으로 남댕이, 원굴, 육굴, 새터말(이상 대창2리, 벽남2구라고도 하였음), 방죽굴, 학교앞(이상 대창6리, 防築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음), 한내, 면소산(이상 대창5리, 한내라고도 하였고 한내와 방축을 합해 한축이라고 부른 때도 있었음) 등의 마을이 장터, 수차, 새터 등과 함께 대창1리~대창9리까지 형성되어 읍 소재지를 이루면서 읍사무소, 파출소, 농업협동조합, 웅천중․고등학교, 대창초등학교, 기차역 등 관공서가 들어서 있고 5일장(2일, 7일에 서며 일부는 상설시장화 되었음)이 살아 있어 주민들이 직접 가꾼 농산물이나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을 살 수 있어 풋풋한 시골인심도 맛볼 수 있다.
원굴에는 마을이 없어지고 석재전문화단지(石材專化團地)가 생겨 오석(烏石)과 애석(艾石)을 이용한 비석, 상석, 납골탑 등 각종 석공예품을 생산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성뫼산 아래에 있다하여 성동리(城洞里)라고 부르는 마을이 펼쳐지는데 역시 웅천읍지역이다. 안성굴, 양지뜸, 가자울(성동1리=內城), 밧성굴(밖성굴=外城: 성동2리=윗뜸, 중뜸, 솔너머뜰/ 성동3리= 아랫뜸, 정자나무뜸)등의 마을이 있다.
남쪽은 주산면 창암리(昌岩里)지역으로 비선거리, 갓너머, 창말(이상 창암1리= 倉村), 남전(창암2리= 藍田), 동남쪽은 화평리(花平里)지역으로 삿갓재, 안굴(이상 화평1리= 蒻峴) 등의 마을이 있다.
산 아랫부분에 있는 한내마을에서 가자울을 거쳐 안성굴까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농로가 형성되어 있고 이 산길을 사람들은 중재라고 부른다. 중재 아랫부분은 사람들이 면산(面山)이라 부르는 지역이 있는데 이는 옛날에 면사무소에서 소유하며 관리하는 산이라 하여 그리 부르며 지금은 보령시유재산(保寧市有財産)이 되었고 예로부터 주변사람들이 임대하여 경작지로 사용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운봉산의 서쪽 끝은 국도 21호와 장항선 철로가 지나는 데 철도연접부분이 바위절벽으로 되어 있어 쇄골재를 생산하기에 편리하므로 1960년대 말에 이곳에 철도자갈채취장을 시설하여 2003년까지 채석함으로서 산모퉁이가 크게 잘려나간 모습이다.
자생하는 식물은 소나무를 비롯하여 참나무류, 밤나무, 오리나무 등 활잡목류와 진달래, 싸리, 자귀나무, 화살나무 등 관목류, 칡, 멍가덩굴 등 덩굴류가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다. 바위는 대부분 콩크리트를 비벼서 만든 듯하여 일명 자갈바위라고 부르는 역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4 문화유적
문화유적으로는 산 정상으로부터 성동리 방향으로 포곡식(包谷式) 산성(山城)이 두 갈래로 갈라져 내려오면서 성안이라고 부르는 산골짜기를 에워싸고 있는데 그 둘레가 약 900m 정도이며, 자연석으로 공돌 쌓기를 한 성곽이 거의 허물어지고 기초 윤곽만이 남아있다. 성의 아래쪽 평평한 부분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고, 이곳에서는 기와 쪽이 발견된다.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성안에 우물이 있어 가자울이나 배챙이의 논에 농업용수로 흘려보냈다고 한다.
이 성동리 산성은 수부리(水芙里)산성, 대천리(大川里)산성과 함께 웅천읍 동부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형식이라서 옛날에 이 지역이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 해주는데 지역 향토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남포현(藍浦縣)의 소재지가 당초에는 이곳 웅천읍 수부리(水芙里)에 있었다가 남포면 읍내리(藍浦面 邑內里)로 이전하였음이 확실시 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참고로 웅천읍의 동부지역(평리 수부리 성동리 대천리 대창리)이 조선후기까지 고읍면(古邑面)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서부지역의 웅천면과 합하여 전체를 웅천면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읍(古邑), 즉 옛날에 현의 소재지인 읍(邑)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산의 남쪽 창암리(倉岩里)에도 산성이 있다. 창암리에서 화평리(花坪里)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에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보령군지(1991년 발간)에 따르면 일제시대에 조사된 기록으로 마산(馬山)이라고 한 이곳 운봉산 자락에 “둘레 약 200m의 소규모 테뫼식 산성이 있으나 파괴가 심하여 성벽이나 문터 등을 알 수가 없고 다만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격자문계(格子文系) 토기파편(土器破片)이 발견된다.”고 하였다.
산의 남쪽에 있는 남전마을은 조선시대에 남전역(藍田驛)이 있었던 곳이고 창말은 조선시대 남창고(南倉庫)가 있었으며 보령군지에 의하면 남천원(藍川院)도 있었던 지역이다. 이들 역(驛), 창고(倉庫), 원(院)에 대하여는 ‘남전마을과 창말’ 편에서 자세히 소개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국도변에 있는 비선거리는 조선시대 관찰사였던 송정명(宋貞明)의 송덕비가 세워짐으로서 마을 이름을 비선거리라고 하였는데 2004년 주산면에서 원위치보다 150m 북쪽에 작은 가로공원을 만들고 송덕비를 옮겨 놓았다. 또한 2005년에는 이곳에 조선말 항일운동가였던 백낙관(白樂觀)의 추모비를 추진위원회에서 세워놓았다.
절과 관련한 유적으로는 안성굴 뒤 운봉산의 3부 능선쯤에 보은사(報恩寺)라는 작은 암자가 있고 삿갓재마을 뒤에 30년 전까지만 해도 작은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대창리 뒤 등산로 변(40년전까지 암자가 있었다고 함)과 원굴 그리고 남전마을 뒤에도 절터라는 곳이 전하고 있으며 방죽굴마을 윗부분에 20여 년 전부터 운봉암(雲峰庵)이라는 암자가 생겨 운영되고 있다.
5 전설, 야화
○ 돌미륵에 얽힌 전설
산의 서쪽아래 철도자갈채석장이 있는 곳 길가에는 눈이 한쪽 움푹 파인 돌미륵이 한기 서 있는데 이는 예로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낙네가 미륵의 눈을 후벼다가 그 가루를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속설에 따라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눈을 파감으로서 그리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미륵으로 인하여 이곳 지명이 미륵모퉁이가 되었고 이 미륵과 관련한 전설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옛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잘 보는 개경에 사는 한 선비가 벼슬길에 오르는 대감과 궁중 호위장(護衛將)으로 출세하는 친구의 비명횡사(非命橫死)를 예언하여 맞춘 인연으로 그의 능력을 알아본 어느 대감이 같이 조정에서 일할 것을 청하였으나 자신의 팔자가 벼슬살이에 맞지 않음을 알고 사양한 후 내려와서 이곳 운봉산 자락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는 가끔 사람들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곤 하였는데 지혜로운 그의 안목을 간파한 마을 사람들이 점점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를 신처럼 따르게 되자 조정에서는 그를 잡아드리라는 포고문을 내렸다. 포리들이 그를 잡으려 이곳에 당도하였을 때 그는 성주산 깊숙이 들어가 숨어버렸고 늙어 죽을 때에야 비로소 옛집을 찾았다고 하는데 그가 죽자 그가 살던 초막이 없어지고 하룻밤사이에 미륵이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이 미륵이 자기들을 보살펴준 미륵이라고 믿고 그가 살았을 때처럼 정성으로 모셨는데 그 미륵에 소원을 빌면 성취되고 신병이 있을 때 빌면 병이 나았다고 하며 눈먼 봉사가 미륵의 눈을 파다 약을 해 마시면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봉사들이 눈을 파다 먹어서 지금도 한쪽 눈이 움푹 파였다고 전한다.
※실은 곳: 2004년 보령시 발행 '관광보령의 명산들', 2006년 발행 '향토사랑'(내용 일부추가)
※2007년에는 산성터를 따라 등산로를 개설하고 꼭대기에 정자를 세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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