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공동노동풍습 ‘두레’
1. 두레란 무엇인가?
1) 들어가기
두레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농촌에서 농번기에 서로 협력하여 공동작업을 하기위해 만든 조직”이라고 되어있다. 말하자면 농사짓는 일을 모두 손으로 하던 때에 있었던 마을단위의 공동작업체로 자율적이며 노동의 효율성이 높고 또한 응집력이 강한 조직이었다. 두레는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농촌사회에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자리 잡았고 두레싸움·두레밥·두레기·두레놀이 같은 두레문화를 이루었다.
두레는 매년 조직하여 운영하고 목적을 이룬 후 해산하는데 1년 중 두레를 실시하는 시기는 여름철 볏논의 김매기를 할 때이다. 김매기는 한꺼번에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그래서 효율적인 일손관리와 능률적인 농사방법이 요구되며 이는 두레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벼농사 중 가장 힘이 들고 호미를 사용해 일일이 작업을 해야 하는 김매기는 대개 초벌(애벌)·두벌·세벌(만물) 등 3번에 걸쳐 하며 세벌이 끝나는 칠월 칠석쯤 되어야 한 해 농사의 어려운 시기를 넘기게 된다. 그래서 두레의 마무리 행사인 호미씻이를 7월 15일(백중)경에 하고나서야 그 해의 두레를 끝낸다.
2) 두레의 역사
두레의 기원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공동으로 길쌈을 한 “길쌈두레(共同績麻)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성행한 시기는 벼농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새로운 이앙법이 널리 보급된 조선 후기라고 한다. 즉 두레는 논농사에서 이앙법이 널리 퍼짐과 더불어 활성화 된 것이었다. 새로운 이앙방법은 영농규모의 확대로 이어지고 확대된 영농은 모내기와 김매기 등에서 한꺼번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두레가 발전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발전하여 영농활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두레는 한편으로 농민의 집단문화를 발전시키는 기능도 하였음으로 일부 관(官)에서는 두레의 변질되는 힘을 두려워하여 영조 때는 전라도 부안에서 두레의 농기와 풍물기구가 민중들의 반란에 이용될 수 있다 하여 몰수해 버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두레는 점점 퍼져나가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서는 한반도 북부지역의 일부를 제외한 논농사지역 전체에 두레가 널리 퍼져 당시 전라·경상·강원·경기·충청지역 전체에서 두레가 행해졌다고 한다.
3) 두레노동
(1) 두레 조직은 언제 어떻게 하나?
두레조직은 대개 모내기를 끝낸 후 두레꾼들이 모여서 하며 이를 '두레짠다'고 하는데, 먼저 두레의 역원을 뽑고 일의 순서를 결정했다.
①가입의 의무화 : 마을내의 농사를 짓는 성인남자는 의무적으로 가입한다.(한집에 2명 이상의 장정이 있어도 모두 가입해야한다.)
※미성년자는 '진서'라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가입할 수 있다.
②마을단위 조직 :자연마을 단위로 구성하였다.
③노동 및 문화조직체계 :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두레 일 때는 소임(영좌·공원·소임·총각대방·식화주)을 정한다.
-두레놀이 때는 상쇠·징수·고수·무동·법고·화중 등이 나온다.
④민주‧평등성 : 두레를 짤 때 호미 모둠이라는 매우 민주적인 회의를 열고, 두레를 결산할 때는 하루를 노는 백중절 또는 호미씻이 등 행사를 벌였다. 구성원의 권리 의무는 똑같다.
⑤엄격한 규율 : 규율과 벌칙을 엄히 하여 위계질서와 단결성을 확보했다.
⑥상부상조 : 노약자나 과부 등 노동력이 없는 집에는 농사를 무료로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마을의 기금을 마련하여 마을 대소사에 지원하는 기능도 했다.
⑦마을지킴이 : 마을의 청·장년들이 모두 가입 된 힘 있는 조직으로 외부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마을 내 범죄를 예방하는 등 자율방범역할도 하였다.
(2) 두레 일
두레일은 대개 아침 일찍 정자나무 등 마을의 일정장소에 모여 풍물을 치면서 출발했다.
두레기를 앞세우고 길군악을 치며 논으로 나가 논둑 등 높은 곳에 기를 꽂아 놓고 장풍장을 치면서 일을 한다. 두레의 어른인 영좌‧좌상 등은 일의 순서를 매기고 일을 감독하며 소리꾼은 선소리로 두레 일의 신명을 돋운다.
김매기는 한 줄로 서서 시작하고 한배미를 마칠 때는 '몬들소리'를 부르며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작업을 마무리 하는데 이를 '쌈을 싼다'고 한다. 바로 옆의 논으로 가려면 두렁을 타고 직접가지만 떨어져 있는 논으로 가려면 풍물을 치면서 이동하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길군악을 치면서 마을로 돌아와 한바탕 놀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4)두레문화
(1) 두레밥
두레 일을 할 때는 일터로 밥을 날라다 먹는데 이를 두레밥이라고 한다. 점심과 오전 오후 두 차례의 참을 먹는다. 두레밥에는 술이 따르고 음식 또한 평소보다 좋게 차림으로 두레 일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두레밥은 아낙네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밥짓기 품앗이로 마련했다.
(2)두레풍물
두레풍물패가 행하는 풍물굿[農樂]은 징, 꽹과리, 북, 장구, 새납 등 간단한 악기로 장단을 맞추어 일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일반적인 풍물보다는 악기의 종류가 좀 적다. 풍물패가 앞에서 소리를 잡으면 일꾼들은 소리를 받으면서 일을 해나갔다. 일을 마치면 모두 어울려 장원질소리를 하면서 돌아와 농기를 세워놓고 굿을 벌인다. 두레굿은 김매기를 마치고 바로 하지만 놀이가 점점 커지자 김매기를 모두 끝낸 후 칠월 백중이나 칠석 쯤 날을 잡아 두레굿을 벌여 놀았던 것이다.
(3) 두레기
두레기는 두레풍물패의 상징인 농기로서 대개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글을 썼다. 두레기에는 흔히 용(龍)을 그렸는데 이는 논농사의 풍요를 위해 물을 충분히 줄 것을 수신·용신에게 기원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두레기는 아주 힘이 센 장정들만이 들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만드는데 큰 대나무 장대에 매달고 꼭대기에 꿩털로 만든 깃봉을 꽂고 그 밑에 수술을 달았다.
두레기는 매우 존엄한 것이어서 말 탄 양반도 두레기 앞을 지날 때는 누구나 내려야 했으며, 마을 간에 두레기를 뺏으려고 두레싸움이 크게 벌어지기도 하였다. 두레기는 농민들의 자긍심의 상징이었다.
(4)두레싸움
서로 다른 마을의 두레 간에 일어나는 싸움으로 농기싸움이라고도 한다. 두레기의 꿩장목을 빼앗아 싸움의 승부를 냈는데, 싸움이 심하여 기뿐 아니라 악기도 부수고 사람이 다치는 경우도 있었다. 두레패가 일하러 나갈 때 먼발치라도 이웃마을의 농기를 마주보면 북을 울려 인사를 해야 한다. 다른 두레패가 북으로 신호를 보내면 이를 받아 신호를 교환하는데 조금이라도 무시하고 지나치면 자기 두레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형두레·아우두레 혹은 선생두레·제자두레가 정해져 있어 서열을 따진다. 형두레는 주로 오래된 두레로서 인구가 많은 큰 마을의 두레가 되었고, 역사가 짧고 작은 마을의 두레는 아우두레로서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동생두레의 악기가 낡게 되면 형두레에서 악기를 새것과 바꿔주기도 했다.
2. 두레의 소멸
이러한 두레는 조선 말경 고지노동 등 품팔이노동이 늘어나고 임금을 받는 공동노동도 생겨나면서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고 일제시대에 이르러 변화가 더욱 심해졌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이어 토지사유제가 확립되자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이는 자영층에 기초를 두고 있던 두레가 소멸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마을 단위의 통폐합으로 마을의 공동계금(共同契金)이 없어지는 등 두레의 물질적 기반까지 없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농업진흥위원회 등 관제조직은 두레의 소멸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하지만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온 두레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도 상당수 마을에서 변형 된 형태로 명맥을 이어 오다가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를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3. 두레의 소멸 후 전하는 흔적(보령지방)
두레는 모두 사라졌지만 ‘두레 먹는 날’만은 오랫동안 남아 대개의 마을이 여름철 농사일이 끝나면 하루 날을 잡아 마을잔치를 벌여 음식을 나누고 풍물을 치며 흥겹게 놀았다.
1)1960-70년대의 두레 먹는 날
‘두레 먹는 날’은 7월 백중, 또는 칠월칠석을 전후로 정하다가 1970년대부터는 아예 양력 8월 15일로 정하는 마을도 많았다.
(1)두레 먹는 날의 사전준비
전날 마을주민이 모두 참여하여 마을안길, 농로 등의 풀을 깎고 울퉁불퉁한 길바닥을 정비하며, 공동우물을 품어내어 말끔히 닦고 마을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다.
(2)두레비용 마련
①머슴을 둔 집은 술 한말과 수제비 한동이를 냈다.
②어른품값을 받을 대상이 되는 청년은 ‘진서 술’로 술 한말, 수제비 한동이를 낸다. 진서술을 낸 후부터 장정품값을 받을 수 있다.
③마을 공동작업에 참여치 못한 집은 술 한말을 낸다.(도로부역, 조림사업부역, 마을안길 보수 등 마을 공동작업을 할 때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한사람씩 나와야 하는데 젊은 남자가 없어 인부를 내지 못하는 집에서는 ‘두레 먹는 날’ 술을 냈다.)
※1960년대에는 술과 수제비를 냈으나 1970년대는 현금으로 비용을 냈다.
(3)두레 먹는 날
정자나무 밑이나 마을회관 등 적당한 장소에 온 마을 주민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풍물을 치며 흥겹게 논다. 음식의 장만은 부녀회가 주관을 한다. 개를 잡기도 하고 돼지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
(4)결산
두레 먹는 날 행사는 대동계장(또는 이장)이 주선하고 결산한 다음 남는 돈은 마을공동기금에 넣는다.
2)현재의 두레 먹는 날
농촌환경이 크게 변하여 두레를 짤 장정도 없고, 영농의 기계화로 두레의 필요성도 없어졌지만 ‘두레 먹는 날’의 풍습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일부 마을에 전하고 있다. 대부분 젊은이들은 도시로 다 떠나고 노인들만 사는 농촌마을이기에 옛날같이 흥겨운 풍물놀이도 없고 왁자지껄한 신명도 없이 조용히 음식을 나누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름은 ‘두레 먹는 날’이요 마을잔치이다. 이장이나 대동계장이 주축이 되어 개도 잡고, 술도 장만하고, 외지에 나가 사는 마을출신 인사들도 찾아와 함께 즐기기도 하는 제법 풍성한 잔치이다. 또한 비록 ‘두레 먹는 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진 않지만 이와 비슷한 행사를 양력 8월에 실시하는 마을들도 있다.
옛날에는 자연마을 단위로 두레를 먹었으나 요즈음은 인구가 줄어서인지 대부분 행정리단위(이장단위)로 두레를 먹는다.
(1)2009년 보령관내 ‘두레 먹는 날’ 실시마을들
지역별 |
마을수 |
마 을 명 |
합계 |
51 |
|
웅천 |
14 |
성동1리안성굴, 성동2리(위촌+중촌), 성동3리(하촌+정마), 두룡1리(두루니마을), 두룡2리(용안이마을), 구룡2리(마차울), 대천리(중뜸), 관당2리(무챙이), 소황리(희여물마을), 황교리(동계마을), 죽청1리(장터+봉우재), 죽청2리(대숲굴), 노천1리(가라티), 노천2리(사그내) |
주교 |
3 |
주교1리(울개), 주교3리(팔봉), 관창3리(해창마을) |
오천 |
2 |
갈현리, 도미항 |
천북 |
1 |
신죽3리(새뜸+청룡굴) |
청소 |
6 |
진죽1리(평촌), 진죽2리(죽하마을), 신송1리(원안마을), 신송3리(송동), 야현1리(평야마을), 야현2리(통남마을) |
청라 |
1 |
옥계리(서촌마을) |
남포 |
7 |
창동1리(고야실), 창동2리(으름내마을), 봉덕1리(환리), 봉덕2리(대덕마을), 삼현1리(삼곡마을), 삼현2리(삼상마을), 양항2리(개목마을) |
주산 |
7 |
주야2리(장작굴+작은 주렴산마을), 신구1리(구산마을), 신구2리(죽나무굴), 증산3리(송림마을), 증산4리(돌고개마을), 창암1리(제배마을+도롱굴), 창암2리(남전마을), |
미산 |
10 |
늑전리, 도흥리(자명동), 풍산리, 대농리, 남심리, 은현리, 옥현1리, 옥현2리(내동), 봉성리(새재마을), 삼계리, 내평리 |
2009.8월 미산면의 두레 먹는 날 행사(위: 늑전리/ 아래: 도흥리)
(2) 2009년 ‘두레 먹는 날’ 행사 참여기
○일 시: 2009. 8. 15
○마 을 이 름: 장작굴 +작은 주렴산 (주산면 주야2리)
○가구 및 인구: 42호 91명
내 고향 주산면 주야리 장작굴 마을에서는 두레가 사라진 뒤에도 매년 8월 15일을 ‘두레 먹는 날’로 정하여 마을잔치를 해왔는데 어언 40여년이 넘었다. 나는 30년 전 마을을 떠나 대천에서 생활
하면서도 이날 행사만은 꼭 참석하여 옛 어른들 그리고 친구들과 정겨움을 함께 나누곤 한다.
올해는 ‘두레 먹는 날’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두레 먹기에 앞서서 하는 풀베기 작업부터 사진 찍기로 작정하고 사전에 이장님(박종수)과 협의하니 당일 새벽 5시 30분에 제초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일어나 바삐 새벽길을 승용차로 달려 현지에 도착하니 5시 40분, 임주순씨가 예초기로 풀을 베고 아주머니 한분이 갈퀴로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뒤이어 군데군데 주민들이 나와 풀을 베기 시작하였고 모두 합해 예초기 10여대에 20여명의 주민들이 작업에 참여하였다. 옛날 내가 젊었을 때는 ‘두레 먹는 날’을 하루 앞두고 온 동네 장정들이 가래, 삽, 괭이, 낫 등 연장을 들고 나와 농로와 마을안길을 정비하고 마을 안팎의 풀을 말끔히 베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었는데 지금은 농로와 마을안길의 풀을 베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옛날처럼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하는 게 아니라 예초기를 짊어진 사람과 갈퀴를 든 사람이 2인 1조씩 50여m 정도 간격으로 띄엄띄엄 떨어져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공동작업 같은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도 옛날엔 남자뿐이었지만 지금은 남녀가 함께 하고 나이를 보면 50대는 2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60-70대,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87세(윤석태씨)에 이르니 그야말로 초고령화 된 농촌의 모습을 여기에서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나마 공동작업의식이 남아있어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사진을 찍노라니
“대천서 일찍 오느라 고생혔구먼” “아따 뭣 헐려구 사진은 찍는디야” “이따가 아침(밥)일랑 우리 집이 와서 자시게” 하면서 한마디씩 정다운 인사를 한다. 1시간여 만에 농로와 마을안길 등을 말끔하게 깎고는 모두들 집으로 들어갔다.
잔치는 마을회관에서 하였다. 9시 30분에 한차례 먹고 12시 30분이 되자 점심 격으로 또 한차례 먹었다. 음식의 장만은 비교적 젊은 부인들이 맡아서 한다. 개를 잡고, 부침개를 부치고, 돼지고기, 수박, 포도 등을 사고, 소주와 맥주와 음료수를 곁들여 제법 풍성한 음식상을 마련하여 먹으면서 즐거워한다. 옛날에는 풍물도 치고 춤도 추고 푸짐한 잔치에 남녀노소 온 동네 사람들이 하루 종일 축제분위기에 젖어 놀았으며 질펀하게 술에 취해 주정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풍경은 없고 노인들이 대부분인지라 술도 못 드시거나 조금만 드는 분이 많아 그저 조용히 먹고 담소하고 이따금씩 깔깔대는 웃음소리만 잔치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할까?
음식상을 물리자 한쪽 방에서는 몇 사람이 둘러앉아 100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거실에서는 음식 뒤치닥거리에 고생했던 젊은(젊다고 해야 50-60대지만) 부인들이 일을 대강 마무리하고 음식상에 둘러앉아 이러 쿵 저러 쿵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래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끝마무리는 반장님(백정돈.여)이 나서서 마을잔치의 결산결과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번 잔치에는 개를 한 마리 내어놓은 분(백홍균씨)을 합하여 찬조자가 19명, 그 금액이 113만원(개는 35만원 환산)이었으며 현물로 소주와 맥주, 음료수를 내어 놓은 사람, 수박, 포도 등 과일을 내어 놓은 사람, 그리고 주산농협에서도 맥주를 가져왔다. 잔치경비는 553,570원이 들어갔으며 남는 돈은 대동계 자금에 넣는다는 것, 찬조자 19명과 현물을 내어 놓은 사람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 액수 및 내용을 밝혀주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마을주민 79명과 출향인으로 서울에 사는 전수길씨와 숙자씨 모녀, 대천에 사는 나, 외부인사로 주산농협협동조합장과 동네 상수도공사를 맡아서 시공한다는 건설업자 한사람 등 마을 이외 사람이 6명이었다.
이렇게 하여 2009년 장작굴마을의 ‘두레 먹는 날’행사가 끝났다. 젊은이들도, 요란한 풍물도, 흥에 겨워 비틀거리는 취객도 없는 잔치 같지 않은 조촐한 ‘두레 먹는 날’이지만 이렇게나마 두레의 흔적이 전해온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인가? 그나마 두레의 흔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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