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방문기(北京, 上海)
1 5박6일의 여정
<2001,9.25 맑음> 우리 중국방문단 9명은 새벽 다섯 시에 시청을 출발, 인천공항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09:50 북경행 비행기를 타고 1시간 40분을 날라 북경공항에 도착하기까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국의 모습은 과연 광활한 대지였다. 끝도 없이 쫙쫙 뻗어나간 도로망들, 거대한 뱀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들, 넓은 들엔 누렇게 혹은 파랗게 깔려있는 저것들은 무슨 농작물들일까?
북경공항은 1999년10월에 문을 연 공항답게 시설이 새 건물이고 주변 환경이 모두 깨끗하여 좋은 인상을 주었다. 마중 나온 조선족출신 가이드를 따라 북경시내로 이동한 우리는 중국에서 처음 먹는 식사시간으로 들어갔는데 말로만 듣던 중국음식 특유의 향과 기름기 때문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일행도 있었다. 그분들은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내내 음식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음식의 내용이 고기류가 많고 또한 야채까지도 모두 기름(콩기름, 땅콩기름)으로 튀기고 독특한 향이 가미되었기 때문이었다.
북경은 경기도와 맞먹는 넓이에 1300만 명의 인구가 사는데 그중 조선족이 10만 명이며 한국공관이나 기업 등에 종사하는 한국인이 3만 명쯤, 합하여 약1%의 한국인이 거주한다고 한다. 오랜 중국의 수도역할을 해왔기에 수많은 문화유적이 전해오며 또 새롭게 지어지는 현대식건물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그런 도시이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게 TV에서나 본 끊임없이 흐르는 자전거의 물결,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에 자전거들이 거리낌 없이 유유히 다니고 그 옆에는 보행자들이 많지는 않지만 활보하는 모양들이 신기할 정도이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도 없고 바삐 몰아가는 자전거도 없고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그리 바쁘지 않게 그저 모든 게 물 흐르듯 서서히 흘러가는 인상은 바삐 살아가는 우리들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다. 보행자가 길을 건너는 곳도 특별히 지정되지 않고 아무 데서나 적당히 건넌다. 인도와 차도도 별로 구분되어있지 않은 얼핏 보면 무질서한 듯 하면서도 질서가 살아있어 교통사고가 별로 없다고 하니 아직 차량이 적고 바쁜 사람이 적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만만디라는 중국인 특유의 성품 때문인지 모르겠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자동차는 자전거에게 양보하고 자전거는 보행자에게 양보하는 걸 원칙으로 삼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런 면에서는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북경은 물 사정이 아주 나쁘다. 수돗물을 먹으면 당장 배탈이 나니 절대로 먹지 말라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생수를 사먹어야 한단다. 맥주보다 생수가 비싼 곳이란다. 그리고 수시로 차를 많이 마시라고 한다. 중국인의 음식이 기름지고 고기류가 많으나 중풍이나 성인병에 잘 걸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차를 많이 마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중국인은 양파를 많이 먹어서 중풍이 없다고 알고 있는 것은 잘못된 지식인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의 음식에서 양파를 구경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일행들도 틈틈이 차를 마시고 또 마셨다.
중국은 사회주의국가이다. 그래서 사유재산의 소유는 되는지? 된다면 어떤 형태로 가지는 것일까 궁금하여 물어 보았다. 가이드의 대답에 의하면 토지만 소유할 수 없다고 한다. 건물도 소유하고, 가게도 소유하고, 기업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사립학교까지도 소유가 가능하지만 다만 토지만은 국가소유이기 때문에 임대하여 그 위에 건물을 짖는다고 한다. 그리고 통신, 건설, 은행만은 국가에서 관장함으로서 경제적 동요를 막고 국가의 장악력을 공고히 한다고 한다. 특히 지금까지 8년 동안 환율의 변동이 없다고 하니 국가의 금융통제가 철저한 모양이다. 또한 주유소와 약국이 드물어 물어보니 주유업도 국가에서 관장한다고 하며 약국도 자유롭게 내지 못한다고 한다. 역시 통제가 심한 사회주의 국가임을 실감케 하는 부분이다. 중국에는 무덤이 없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여 그 재를 바람에 날리든지 아니면 물에 흘려보낸다고 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살아생전에 하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서 제사도, 명절 때 차례도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어찌 보면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유교사상의 발상지인 중국에 그런 문화가 깡그리 사라졌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최대의 명절은 설(구정)로써 15일간을 휴무로 정한다고 하며 두 번째 명절은 국경절이라고 해서 10,1 중국공산당정부가 장개석으로부터 해방(그들의 표현)된 날로써 10일간의 휴무를 주고, 세 번째 명절은 노동절(5,1)로 8일간의 휴무를 주며 마지막으로 신정 때에는 3일의 휴무를 준다고 한다. 물론 관공서 등의 휴무야 그렇게 많은 기일을 줄 수 없지만 일반인들은 긴 휴무를 즐기는 것 같다. 하긴 땅이 너무 넓어 한번 고향에 다녀오려면 20일- 30일까지도 소요된다고 하니 긴 휴가가 필요하리라.
북경의 도로들은 땅이 넓기 때문에 거침없이 쭉쭉 갈라놓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접도 구역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나무(주로 은수원사시 비슷한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차를 타고 지나면서 도로변의 집들이나 농경지를 거의 볼 수 가 없었다. 또한 가로수에는 밑에서 1.5m정도 높이까지 흰 페인트를 칠해 저녁에 야광을 발하여 운전자들을 돕고 좀벌레 등의 서식을 막는 효과를 얻는다고 한다.
100만 명의 군중이 운집할 수 있다는 천안문광장은 중국 민주화운동의 산실이다. 1989년 젊은 대학생들의 열화 같은 민주화요구시위를 군대를 앞세워 묵살하였던 천안문사건이 있은 지도 벌써 12년이나 흘렀다. 그날의 함성은 아랑곳없이 넓은광장 이곳저곳에는 중국개국 52주년행사(10,1)를 앞두고 설치한 꽃탑과 화분을 이용해 잘 만들어진 꽃밭, 그리고 펄럭이는 오성기(중국국기)와 프래카드 등이 커다랗게 확대한 모택동의 사진과 함께 관광객들의 카메라 후래쉬를 맞이하고 있었다. 남북으로 길이가 880m, 동서로는500m, 면적은 40만㎡나 되는데 광장 주변에는 동쪽으로 중국역사 박물관, 서쪽으로 인민대회당, 남쪽으로 전문, 북쪽으로 천안문이 있고, 그 중앙에 인민영웅기념비가 있고, 바로 그 남쪽에 모택동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모택동 기념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금성으로 들어서는 천안문(당초에는 승천문이라고 함)에는 문이 다섯 개 있는데 중앙의 문은 황제만 사용했던 문이라고 한다. 천안문이 건축되기는 1417년이라고 하니 58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문이다. 자금성은 동서로 750m, 남북으로 960m, 면적은 72만㎡이며 자금성 둘레는 높이 10m, 길이 3420m의 성벽이 있고, 그밖에는 너비 52m, 길이 3840m나 되는 해자가 성벽을 감싸고 있다. 넓은 성안은 모두 돌로 포장되어있는데 이는 황제를 시해할 자객들이 땅을 파고 숨을 곳을 마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며 그 시절에는 성내에 은신처를 없애기 위하여 나무 한 그루도 심지 않았다고 한다. 건물은 모두 800채나 되고 방은 9천 개가 되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그림, 도자기, 보석, 공예품 같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진짜 값진 보물들은 전쟁시 대만으로 몽땅 가져갔다고 갔다고 한다.
자금성의 건물은 대체로 명나라 영락제가 1406-1420년 사이에 건축한 것이다. 태화문을 통과하면 황제가 집무하던 외조인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 태화전의 둘레에는 돌로 조각한 짐승의 머리가 두 줄로 열을 지어있는데 비가 올 때에는 낙숫물이 이 돌짐승의 입으로 분출되는 자연분수역할을 하게 되어 장관이라고 하며 보화전 뒤편 계단 중간에는 9마리의 용이 새겨진 중국 최대의 돌 조각이 눈길을 끌었다. 하나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길이가 16.57m,폭 3.07m,두께 1.7m,무게만도 200여 톤이나 된다고 한다.
황제가 거주하던 내정은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으로 되어 있는데 외국사절들이 보낸 선물이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전시실 뒤쪽에는 기기묘묘한 수석으로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이외에도 농민을 위해 제를 올렸다는 천단공원, 옥황상제(중국에서는 皇天上帝)의 위패를 모신 기년전(祈年殿) 등 수많은 건물들이 모두 못하나 들어가지 않았으며 580여년이 흐른 지금도 좀을 먹지 않았다고 하니 그 기술에 감탄할만하다.
저녁에는 서커스를 구경하였는데 T. V에서나 보던 명기들을 실제로 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부채 돌리기, 시이소에 그릇을 올려놓고 반대쪽에 서서 톡 튀어 오르게 하여 차곡차곡 자기 머리에 쌓기, 시이소에서 튀어 올라 높이 떠있는 의자에 오르기, 누워서 양산 돌리기, 누워서 방석 돌리기, 접시 돌리며 무용하기, 원통형에 몸을 반으로 접어 넣은 다음 빠져나오기, 자전거 타며 묘기부리기, 어린 꼬마의 갖가지 재주부리기 등 하지만 너무 어린아이들이 고난도의 기술을 부릴 때는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였기에 저런 정도까지 이르렀을까? 다른 아이들 같으면 부모 품에서 재롱이나 피우고 있을 나이에 무슨 팔자가 기구하여 저 고생을 할까? 생각하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비단 나 혼자 만이 아니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 아이들은 대개 고아라고 하며 그런 아이들 중에서 크게 출세하는 아이들이 나온다고 한다. 중국의 유명한 액션배우 이소룡이나 성룡같은 배우들 중에 서커스단 출신이 많이 있다는 것, 그래서 서커스단의 아이들은 은근히 그런 꿈을 꾸며 산다고 하는데 그 꿈이 이루어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고생만 하다가 마약이나 그 밖의 나쁜 유혹에 빠져 일생을 망치는 아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극장 안의 관람객들은 한국사람이 반정도는 되는 것 같다. “외화 많이 들 없애는 구나”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극장을 나왔다.
<2001, 9, 26 맑음> 2일차 관광에 나섰다 “만리장성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을 말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적은 뭐니 뭐니 해도 만리장성일 것이다. 길이가 무려 6700km나 되고 평균높이 7,8m 폭6,5m(위부분 5,8m)인 만리장성은 기원전 221년- 206년 사이에 진시왕이 7개의 큰 성을 연결하여 쌓았다고 하며 명나라 때인 1400년- 1500년 사이에 18차례에 걸쳐 벽돌과 바위로 재 축성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이름이 헛되지 않을 만큼 웅장하여 사람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신비함을 느끼게 하였다. 오르내리는 관광객도 많지만 깜짝 놀랄 일은 그들의 상당수가 한국말을 하는 게 아닌가. 경상도에서 왔다는 사람, 군산에서 왔다는 아주머니, 인천 산다는 학생 등 “우리나라관광객이 50%는 되겠는 걸” 하고 중얼거렸더니 옆에서 걸어가던 아주머니 왈 “50%가 뭐예요? 80%는 될걸요”하는 게 아닌가. 이 많은 관광객들이 여길 다녀가면서 무엇을 느낄까? 그리고 무엇을 배워가지고 돌아갈까?
명나라황제는 모두 16명인데 그들 중 13명만이 능(陵)이 있다고 하며 한곳만 발굴하였다고 한다. 자그마한 동산의 땅 밑 17m지점에 만든 거대한 지하궁전을 건설하였다고나 할까,
황제의 석관이 있었던 석실과 관 받침 등이야 당연히 있는 것이겠지만 살아있을 때에도 수시로 황제가 들어와서 쉬던 공간이며 황후의 방과 궁녀들을 데리고 놀던 공간 등 그야말로 황제의 호화로운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었다.
이화원은 건륭제가 1750년 옛 사원을 별궁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을 140년 후 서태후가 자신의 여름 궁전 겸 정원으로 대대적인 개조 공사를 해 이화원으로 이름을 정했다고 하는데 전체 면적이 88만평에 달하며 그중 4분의 3이 곤명호(昆明湖)로, 이 거대한 호수가 인력으로 만든 인공호수이다 보니 흙의 처리가 곤란해져 다시 부근에 만수산(萬壽山)이라는 인공산(人工山)까지 만들게 됐다고 한다. 이 호수는 서태후가 뱃놀이를 위해 만든 것인데 중국에도 해군(海軍)이 있어야 하며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호수가 있어야 한다고 핑계하여 호수를 파놓고는 한 번도 훈련용으로는 사용치 않았다고 한다. 이화원의 명물로는 석방(石舫)이라는 돌로 만든 길이 36m의 2층 배와 서태후가 비나 따가운 햇볕을 피해 산책하도록 지붕이 설치 된 728m의 복도, '장랑(長廊)'이 있는데 서태후가 혹시 걸으면서 심심해 할까봐 복도 천장엔 모두 8천 폭의 그림을 그려 화랑을 방불케 한다.
서태후는 황제가 죽자 아들을, 아들이 죽자 조카를 황제에 올리고 온갖 실정을 한 요녀였다고 한다.
저녁에는 발 맛사지를 받으러 가자는 일행들이 많아 말만 듣던 발 맛사지를 받기로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발 맛사지 하는 곳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한 번도 받아본 일은 없는데 이곳 중국 땅에 와서 받아보는 것이다. 방 한칸에 4-6명씩 들어가 안락의자에 앉으니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 한 사람당 한 명씩 들어와 발 맛사지를 하는 것이었다. 우선 따뜻한 약물에 발을 5분 정도 소독한 다음 물기를 제거하고 한발씩 맛 사지를 하는데 1시간정도 하였을까, 일행들이 너무 비싸다고 항의 하니까 10여 분간 어깨안마를 해주는데 솔직히 너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에 누가 중국에 간다면 발 맛사지는 절대 받으러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다. “에이 잠만 밑졌잖아” 하는 기분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2001,9,27 맑음> 청포구를 방문하는 날이다. 북경공항에서 중국 동방항공기를 타고 12:00 상해의 홍교공항에 도착하였으나 우리를 마중 나오기로 된 청포구 관계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당초에는 포동공항으로 가도록 되어있었는데 여행사에서 실수로 홍교공항으로 보내놓고는 연락을 취하지 않아 그런 불상사(?)가 났던 것, 어쨌든 이역만리 타국 땅에 말조차 통하지 않으니 그 답답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국말을 하는 안내코너가 있을까 하여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고 일행 중에 영어회화라도 하는 사람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사람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말을 하는 조선족 동포 한사람을 만나는 행운이 있어 한시름 놓을 수 있었고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야 청포구관계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청포빈관에 여장을 푼 일행은 중식 후에 청포구 인민대표대회와 우리시의회사이의 회담을 가졌다. 양측참석자는 다음과 같다.
-보령시 의회측: 의장 오배근(吳培根), 총무위원장 임세빈(任世彬), 의원 황규원(黃圭元), 임대식(任大植), 김주성(金周成), 전문위원 임근혁(任瑾爀), 김병두(金柄斗), 기획감사 담당관 채봉근(蔡鳳根),의정담당 윤승호(尹承鎬)(이상9명)
-청포구인민대표대회측: 상무위주임 노국광(盧國光), 부주임 원국량(袁國梁), 부주임 반중생(潘俊生), 내무.사법공작위주임 장영원(張永元),경제공작위주임 심금용(沈金龍), 성시.환경공작위주임 손연천(孫演千), 교육.과기.문화,위생,공작위주임 종복천(종福泉),
상무위 변공실주임 주준화(朱俊華), 인민정부 외사변공실 부주임 호해민(胡海民), 인민정부 외사변공실 주홍매(朱홍梅)(이상 10명)
-통역: 최계화(崔桂花)
15:00부터 17:30까지 장장 2시간 30분에 걸친 회담을 통하여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도 하고 자기편의 의견을 이해시키면서 시종일관 진지한 대화를 가진 끝에 양측은 2년에 1회씩 교류를 정기화하고 행정부에서 기체결한 자매결연 협정서에 따라 행정. 경제. 문화. 과학. 교육. 기술. 체육. 관광 등 많은 분야의 교류에 의회차원에서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을 약속하는 등 4개항의 합의 사항을 도출해 협의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청포구 인민대표대회는 총2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고 5년에 한 번씩 직접선거에 의하여 위원을 선출한다고 하는데 여성위원이 25%정도 된다고 한다. 총회는 1년에 한 번씩 가지며 22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하여 상무위원들이 모든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청포빈관의 5층 홀에서 환영연을 열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식 음식이 끝없이 나왔고 술은 포도주였다. 청포구 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노국광주임을 비롯한 회담에 참석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여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먹고 마시며 즐겼는데 중국식으로 술을 권하고 받기를 하면서 왜 우리는 외국인들을 접대하려면 우리 식으로 하기보다는 그 나라 식으로 하려고 하면서 이렇게 외국에 나와서는 또 우리식이 아닌 그들의 식대로 할까? 참으로 우리나라는 이상한 나라야. 예로부터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화(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는)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도 해보았다.
<2001,9,28 맑음> 08:30 청포구장 소위림(巢衛林)과 접견시간이다. 장소는 역시 우리가 묶고 있는 청포빈관, 두사람의 수행원과 함께 나온 구장은 40대의 온화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명함에 공학석사이며 고급경제사라고 인쇄한 걸로 보아 실력이 대단한 모양이다. 대화내용은 주로 자기고장의 소개정도로 청포구의 자랑, 발전잠재력 등을 설명하고 우리 측에서 의장도 보령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수준의 대화를 가졌다.
상해임시정부 옛터를 방문하여 과거 대통령의 집무실, 침실, 주방, 그리고 국무위원들의 사무실 등을 돌아보고 홍보영화를 본 후 김구선생의 흉상 앞과 기념관 팻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산실이요 본거지였던 이곳을 둘러보면서 우리의 선인들이 이런 곳에서 고생한 댓 가로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니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낄 수 있었다. 성금 함에 금일봉을 넣고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그곳을 나왔다.
상해예원이라고 하는 대규모 상점가를 구경하였다. 그 상점들의 규모나 갖추어 놓은 물건들도 대단하지만 어느 개인이 조성하였다는 정원의 거창함은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대규모 사찰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큰 건축물들, 기기묘묘하게 가꾸어놓은 정원, 괴석들을 모아다 서로 붙이고 쌓아 만들어 세운 조형물들, 작은 자갈을 세워서 무늬를 만들며 포장한 사잇길들, 그야말로 호화와 사치의 극치를 이룬 이 걸작품은 개인인 어느 부호가 만든 것이라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돕지 않고 이렇게 사치를 한다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그들의 스케일이 큰 것만큼은 알아주어야 할 것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동방명주(東方明珠)는 468m의 방송탑이라고 한다. 방송탑이긴 하지만 호텔, 식당, 오락실, 전망대 등을 갖추고 있어 4계절 관광객이 끊이지를 않는 세계적인 관광명소라고 한다. “아! 우리 대천해수욕장에도 이런 정도의 타워가 하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행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흘러나온 말이다. 동방명주 의 맨 아래층에는 상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관이 있었다. 옛날 서민들의 생활모습, 개화기의 모습, 현대의 모습 등을 사실과 같이 묘사하여 건물, 사람, 선박, 기타 건조물 등을 실제로 착각할 정도로 세밀하게 만들고 효과음까지 생생하게 방송함으로써 구경꾼들로 하여금 실감나게 만든 것이었다. 보령의 석탄박물관은 이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장난감 같다면 너무 비하한 말일까?
저녁에는 청포구에서 마련한 프로그램대로 써커스를 구경하란다. 우린 피곤하기도 하고 북경에서 써커스는 보았으니 생략하고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나 청포구 관계자들은 정해진 계획대로 꼭 써커스를 관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크게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권하는 대로 구경을 하였는데 써커스의 내용(항아리 돌리기, 탁자 위에 접시 세워 돌리기, 부메랑 던지기가 추가되었음)은 북경과 거의 비슷하였으나 북경보다 세련되고 기술이 한수 위인 써커스였다. 역시 어린이들의 묘기가 있을 때에는 안쓰러운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곳 상해의 써커스 관람객은 서양인들이 많아 관객의 60%정도는 될 것 같았다.
<2001,9,29 흐린 뒤 비> 09:30 공산당서기 종연군(鐘燕群)과 접견시간이다. 청포구에는 구장도 있고 인민대표대회 상무위 주임도 있지만 공산당서기인 종연군이 실권자라고 한다. 과연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가보다. 아무튼 명실공이 청포구 제일의 권력자라는 이 사람은 뜻밖에도 인상이 깨끗하고 온화한 46세의 여자가 아닌가, 공산당하면 어딘가 서슬이 시퍼럴 것 같고 딱딱할 것 같은 이미지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아무튼 서기와의 만남은 20분도 채 되지 못하였다. 그녀는 09:00부터 주가각고진이라는 곳에서 민속행사가 있어 개막식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 우리일행도 그 행사에 참관을 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서기와의 접견이 끝남과 동시에 버스를 타고 주가각고진으로 옮겼다. 주가각고진에서 하는 행사는 일종의 조정경기인데 행사장면이 우리와 다른 점이 많았다. 의식행사도 없고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사자탈을 쓴 두 사람이 나와 춤을 춘 다음 직접 조정경기로 들어가는 어찌 보면 단순하고 어찌 보면 자유분방한 행사를 보고 우리가 무슨 행사를 한답시고 거창하게 대회사다 격려사다 축사다 하고 지나친 의식행사를 하는 것은 지양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행사장을 나왔다.
주가각고진은 황포강의 지류인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천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로써 수백 년 된 가옥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강물을 따라 낡은 배를 이용하여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며 인근 전산호라는 호수에서 고기도 잡고, 찾아오는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 음식, 약재, 차등을 팔면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데 강물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수많은 가옥들에서 흘러나오는 생활폐수의 처리가 궁금하여 물어보았더니 분뇨는 수거해가고 생활폐수는 그냥 강물로 흘려보내고 있는 실정으로 앞으로 하수처리시설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강물은 비록 더럽게 느껴지지만 1500년대에 놓았다는 돌다리들은 배가 밑으로 통과 할 수 있도록 모두 아치형으로 만들었는데 그 견고함이 아직까지 부서질 염려가 조금도 없어 인상적이었다. 주가각고진에도 어느 부호가 조성하였다는 정원이 있어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상해예원의 개인 정원보다는 규모가 좀 작았지만 이곳은 1912년 그러니까 최근에 마씨(馬氏) 성을 가진 대지주가 지은 집인데 특이한 것은 불란서 유학을 할 때 전기 불을 켠 것을 보고 온 지주는 아직 중국에는 전기가 없지만 언젠가는 전기가 들어 올 것을 예상하여 각 건물에 전기배선을 하였고 또한 시멘트가 없었으나 외국에서 처음으로 시멘트를 들여와 건축에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저녁에는 주가각고진에서 행사를 자축하는 불꽃놀이에 초청되어 가보았는데 마침 비가 내려서 행사를 진행하는 측이나 구경꾼이나 모두 불편을 겪었다. 아침에 민속행사(조정경기)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격식이 없이 무대도 없는 공원에서 남. 녀 가수 1명씩이 나와 노래 한 곡씩을 부른 다음 20쌍의 남녀가 서구식 복장을 갖추고 나와서 음악에 맞추어 부르스와 지르박 춤을 한바탕 추고는 직접 불꽃놀이로 들어가 수많은 폭죽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민속행사라면서 춤은 왜 서구식으로 출까? 의아했다. 우리 같으면 흥겨운 농악을 울리고 지방에 따라서는 덩더꿍 춤이라도 출 텐데.
아무튼 공산당서기를 비롯한 청포구장, 인민대표대회 상무위 주임등 주요인사와 외국손님(우리일행), 많은 공산당 원로들이 참석하였으나 고작 탁자와 의자를 놓았을 뿐 무슨 장식도 없고 특별대우도 없고 바나나, 빵, 생수 등을 1인분씩 비닐봉지에 싸서 탁자마다 놓아두고 비가 오기 때문에 비옷 한 장(상의) 씩을 놓았을 뿐이었다. 격식 없는 행사진행,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폭죽(우리 보령시의 불꽃놀이는 10분 정도인데 비하여 그들은 30- 40분간)이 인상에 남았으며 돌아오는 중에 거리거리에 몰려나온 구경꾼들이 너무나 많은데 다시 한 번 놀랐다. 비가 내리는데도. . .
우리 보령에 연고가 있는 전영한(全英漢, 비치모텔 경영, 원래는 천안출신)씨가 경영하는 전가유회사(全家乳會社)에 초청받아 공장을 견학하고 회사식당에서 점심을 대접받았는데 우리입맛에 맞는 김치, 된장찌개, 떡 등을 내어놓아 일행들을 기쁘게 하였다. 상해시 우유의 14%를 공급한다는 이 회사는 종업원이 350여명 자동차가 52대로써 상당히 큰 기업이었는데 전영한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진정부(鎭政府=한국의 경우 진은 읍에 해당)에서 12%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국에서는 한국인의 기업이라 해서 지원을 회피하고 한국에서는 중국기업이라 해서 지원이 없어 애로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사람들이 중국에서 기업을 한답시고 대부분 실패를 한다는 말을 일찍이 들은바 있었는데 그 애로사항을 직접 들어보니 우리한국기업들의 어려움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 회사 전영한 회장은 우리가 상해에 머무르는 동안 직원들을 동원하여 불편함을 덜어주고 부사장으로 하여금 우리와 같이 행동하면서 불편 없도록 하라고 특별배려를 해주었다.
중국에 와서 술 한 잔 사 먹어보지 않고(식사하면서 곁들이는 술 말고) 갈수 있느냐? 하는 의견들이 나와 저녁에 술을 먹으러 가기로 하였다. 전가유회사 부사장의 안내로 몇 군데를 다녀보았으나 술집이 많지 않을뿐더러 분위기도 별로 이고 또 다른 손님들이 있어서 10명이나 되는 우리일행을 받을 수 없다는 집도 있었다. 몇 집을 돌아다닌 끝에 한집을 들어갔는데 양주는 딱 한 병밖에 없고 가격도 5만원이라고 해서 맥주를 먹기로 하였다. 2층 홀에는 안락의자 몇 개를 놓고 노래방기계를 갖추고는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한국가요를 틀어주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하였지만 분위기도 별로여서 맥주만 10병을 마시고 나왔다. 종업원인 듯 한 22세 되었다는 아가씨가 혼자 술을 팔고 있었는데 시중드는 아가씨가 필요하면 일행 수만큼 불러주겠다고 하였지만 사양하였다. 우리가 좋은 곳을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나라만큼 술 마시기 좋은 곳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1,9,30 약간 비> 간밤에 내리던 비가 아직까지 질척거리는 가운데 아침식사를 마치고 09:00 홍교공항으로 버스를 달렸다. 그 동안 열심히 우리를 안내해준 청포구 관계공무원들과 통역아가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 채 공항출구를 빠져나왔고 출국수속을 마치고 아시아나 항공기에 올라 인천항에 도착하니 15:00이었다.
2 아! 거대한 나라 중국
중국인으로 태어나서 못해보고 가는 게 세 가지가 있다는데 첫째 중국의 문화유적을 모두 볼 수 없고, 둘째 중국의 음식을 모두 맛보지 못하고, 셋째 중국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중국인으로 태어나 일평생을 살아도 이 나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이해되는데 하물며 5박7일의 짧은 기간 동안 두 개의 도시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다녀와서 어떻게 중국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만 그래도 나름대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거대한 나라라고 할 수 있겠다. 땅덩어리가 우리나라의 99배라고 하는데 땅만 큰 게 아니고 그들의 스케일도 그만큼이나 우리보다 크지 않을까? 입이 딱 벌어지는 문화유적, 새롭게 늘어나는 웅장한 건물들, 쭉쭉 뻗은 도로망, 깨끗하게 잘 가꾸어진 거리 그리고 무궁무진한 노동력,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한나라, 아직 사회주의가 남아있어도 국민들은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는 나라, 아직 잘 살지 못하면서도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하는 나라, 거리마다 자전거가 넘치고 보행자들이 질서를 안 지키는 것 같아도 교통사고가 거의 없는 무질서한 듯 하면서도 질서가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10여년쯤 되었을까, 어느 일본인이 “한국인이 쫓아온다.”라는 제목으로 일본사람들에게 한국으로부터 추월당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책을 써 관심을 집중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중국이 일어나는 걸 안이한 태도로 지켜만 보다가는 몇 년 안가서 중국으로부터 모든 분야에 뒤쳐지고 말 것이다. 아니 지금도 상당한 분야에 그들에게 뒤지고 있는 것 같다. 요즈음 한류(韓流)라 해서 안 모라는 탤런트는 중국공연 1회에 1억을 버느니 HOT라나 하는 그룹이 중국공연을 하려면 입장료가 15만원씩하고 중국의 열성 팬들이 극성을 부리며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의 연예인들을 흉내 낸다고 하며 중국의 일부 관광객들이 제주도에 와서 싹쓸이 관광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중국에 한국바람이 부느니 어쩌니 하면서 한껏 고무된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는 우리를 젖히고 저 앞에 달려가는 중국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그들보다 조금 잘산다고 해서 또 어느 분야에서 조금 앞서있다고 해서 자만심을 가져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들과 비교해서 우리가 못한 점은 무엇인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여 결코 그들에게 뒤지지 않고 우리가 리드 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아직도 귀에 생생한 호텔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만난 한국인 기업인의 말을 소개한다. 중국에 와서 20여 년 동안을 인쇄업을 한다는 그가 말하기를 “중국이라는 나라는 한국인들이 와서 기업 하기는 어렵지만 인민들은 불편도 불만도 없이 잘들 살고 있다” “중국정부는 인민을 위하여 정치를 한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정부자신을 위해 일을 한다.”고 했다. 물론 그의 말이 100%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왜 그들의 눈에 우리나라는 그렇게 비치는 걸까?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깊이 반성해 볼일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곳: 2006발행 향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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