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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계 여행기

구슬뫼 2007. 8. 31. 10:26
                             장가계(張家界) 여행기

 3.29 13:40 푸동공항도착→ 16:30 청포구 장요(蔣耀)구장 외8인 접견→ 17:30환영만찬

 3.30 08:30 노국광(盧國光)인민위원회 주임 외4인 접견 → 09:10청포박물관관람→10:10청포공업단지관람→13:00주가각고진 →14:30동방녹주 관람→17:00환송만찬→18:40상해 외탄거리 야경관람

 3.31 08:00상해 임시정부 청사관람→상해예원관람→12:30동방명주 관람→14:50 남경보행로 관람→20:15장가계 도착

 4.1 08:00천자산→하룡공원→원가계→ 보봉호수

 4.2 08:30십리화랑→금편계곡→황룡동굴→토가족민속박물관→

    푸동공항도착→레인보우 호텔숙박

  4.3 09:30소주 졸정원→호구원→실크공장→20:40푸동공항 → 22:30 인천공항도착

  ※방문단: 부시장 文明秀, 기획감사담당관 鄭樂重, 해양수산과장 田允秀, 주산면장 任瑾爀, 교류협력담당 金南龍, 수질관리담당 朴性洙,

 공업담담 尹炳斗


이번 중국방문은 공식초청을 받은 보령시의 방문단이 상해시 청포구를 방문하여 교류행사를 가진 다음 장가계와 소주를 관광하는 계획이다. 청포구관계자들의 안내에 따라 상해시 일원도 구경하였지만 2001년에 이미 보고 기행문을 쓴 곳으로 별로 틀려진 게 없으므로 상해시의 관람에 대하여는 기록을 생략한다.


<2005.3.31 맑음> 청포구 공식방문 일정이 끝나고 오후 6시10분 중국 동방항공기편으로 장가계(張家界)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예고도 없이 항공기가 7시 10분으로 늦어졌단다. 중국이란 나라는 이렇게 비행기시간도 믿을 수 없다고 변명인지 투정인지 모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늦으나마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가계(張家界)는 중국 호남성 장가계시로서 153만의 인구 중 69%인 93만명이 토가족(土家族)이고 백족(白族) 10만 명, 묘족(苗族) 27,000명을 비롯한 20개의 소수민족들이 산다고 한다. 전체면적은 9.587평방 km지만 그중 절경의 관광지 무릉원(武稜源)은 264평방km이며 국가 삼림공원, 츠리현의 삭계곡 풍경구, 쌍츠현의 천자산(天子山) 풍경구 등 세 개의 풍경구로 나뉜다. 수백m에 이르는 바위절벽들이 기기묘묘한 봉우리를 만들면서 신비한 풍경을 연출하기에 전문가들은 “대자연의 미궁”또는 “지구기념물”이라고 하며 그 경치가 하도 뛰어나 예로부터 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무릉원의 최고봉은 1,334m이고 봉우리의 수가 78,000봉(작은 것까지 합한다면 10만 봉이 넘는다고 함)에 이른다 하니 12,000봉을 뽐내는 우리나라 금강산(金剛山)은 이에 비하면 너무 왜소하게 느껴진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한편 장가계란 옛 초한지(楚漢誌)에 나오는 장량(張良= 張子房, 한고조 유방의 책사)이 늘그막에 정치를 버리고 정착할 곳을 찾던 중, 경치가 빼어난 이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고 하며 장씨 가족들이 사는 곳이라서 장가계(張家界)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1시간 40분을 날라 도착한 장가계공항은 작고 보잘 것 없다. 크기도 작지만 조명시설도 열악하여 한적한 시골 버스정류장 같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호텔까지는 관광버스로 이동하는데 조선족 출신 현지 가이드가 한명 타서 하는 말이 이곳은 자동차며 도로며 모든 시설과 사람들의 생활자체가 한국의 60년대와 비슷하니 한국과 비교하시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고속도로인지 유료도로인지 요금을 내고 들어간 도로가 구불구불하고 포장상태도 엉망이다. 그나마 2차선인 게 다행인 도로에는 경운기도 지나가고 보행자도 지나가는 그야 말로 전형적인 시골마을길 같다.  40분가량을 달려 도착한 개천국제주점(凱天國際酒店)이라는 호텔은 크기와 이름만 호텔일 뿐 시설은 여인숙 수준이다. 엘레베이터가 있는 것은 다행, 창문은 홑창이고 객실에 냉장고도 없다. 그래도 이곳에 있는 3개의 호텔 중에서 이곳이 제일 좋은 곳이라나? 새삼 가이드가 한국과 비교치 말라던 말이 생각났다.


<2005.4.1 비온 뒤 개임> 새벽 3시에 잠시 잠이 깨었는데 닭울음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개짓는 소리도 들린다. 방음장치는 안 되었다 손 치고 어디서 이런 소리들이 들리는 것일까? 날이 밝은 후 확인한 결과 호텔 뒤편에는 2층집들이 즐비한 마을이었고 그곳에서 갖가지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침은 호텔 1층에 있는 식당에서 먹었다. 요지도 없고 휴지도 없고 식수도 없는 열악한  식당이지만 크기만큼은 호텔식당이다. 여러 가지 중국음식을 뷔페식으로 차려놓고 각자 집어다 먹는 방식인데 우리 일행들은 여행사에서 준비 해 가지고 간 김치며 고추장, 김, 깻잎장아치 등이 있어 한국에서의 식사와 비슷한 맛으로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국에 와서 까지 꼭 한국음식을 먹어야 하는 가 의문이다. 중국에서는 중국 음식을, 미국에 가서는 미국 음식을, 아프리카에 가서는 그곳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침을 먹으려고 몰려든 사람 모두가 한국 사람이다. 장가계 관광을 위해 호텔에 묵은 사람 모두가 우리나라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국민이 떼로 몰려다니며 구경을 해도 되는 것일까? 차례를 지키지 않고 음식을 가져가는 사람, 옆을 의식하지 않고 떠드는 사람, 마치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저 무질서의 극치를 이루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나라사람들이 아닌가? 과거 60년대 일본인들이 아리랑관광이다 뭐다 해서 우리나라에 놀러 와서는 우리를 의식치 않고 멋대로 행동할 때 우리는 얼마나 아니꼽고 분개 하였던가. 그 때 그 일본인들의 작태를 우리가 이 나라에 와서 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한편 간밤에 비가 내렸고 아침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질척대는 빗속을 여행사에서 나누어 준 비옷(눈만 흘겨도 찢어지는 비닐 옷)과 우산을 이중으로 받치고 관광에 나섰다. 이곳 날씨는 이러다가 오후에는 갠다는 말에 희망을 가지면서 케이블카(스키장에서 타는 리프트 비슷함)를 타고 아슬아슬한 바위 절벽을 지나기도 하고 쭈삣쭈삣한 바위들을 타넘으면서 8분정도, 천자산(天子山)에 올랐다.  천자산은 해발 1,250m 과히 크지 않은 산이지만 그 모습이 정말로 장관이다. 산이 온통 깎아지른 듯 한 크고 작은 바위들로 덮여 있는데 바위라기보다는 돌기둥이라고 할까? 얼핏 보면 아파트 숲을 이루듯 돌기둥들이 하늘을 향하여 쭉쭉 서있고 그 바위 꼭대기와 중간 중간에 나무와 풀들이 자라 마치 동양화를 일부러 그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수많은 돌기둥들이 어우러져 갖가지 기기묘묘한 산봉우리를 만드니 선녀가 꽃바구니를 안고 서서 꽃을 뿌리는 형상의 선녀산화(仙女散花또는 仙女獻花), 임금님이 붓을 거꾸로 꽂았다는  어필봉(御筆峯)이 인상 깊다.

 버스를 타고 3분정도, 하룡공원(賀龍公園)에 도착하니 비가 서서히 그치고 구름이 뭉털 뭉털 벗어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하룡공원은 중국의 10대 원수(元帥)중 이곳 장가계출신인 하룡장군을 기념하기위해 만든 공원이라는데 강택민이 쓴 하룡(賀龍)이란 커다란 돌탑이 있을 뿐 말만 공원이지 관리가 엉망이어서 별로 볼 것도 없다.

 다시 버스 편으로 원가계(遠家界)로 향하였다. 구불구불한 도로지만 산꼭대기에 길을 내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아열대 지방이라서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데 지난겨울에는 너무 많은 눈이 와서 산에 있는 나무들이 무수히 부러졌단다. 주로 삼나무(스끼나무)가 많고 아직 잎이 나오지 않은 활엽수들이 섞여 있는데 50%이상이 폭설에 부러져 보기흉한 몰골들이다.

 간간히 지나치는 민가들은 하나같이 거무충충하고 굴뚝이 없어 지붕가로 연기가 흘러나온다. 또한 원주민들의 무덤도 간혹 길가에 보이는데 무덤 앞에 돌을 쌓아 장식하여 얼핏 보면 돌더미 같기도 하다. 참고로 중국에는 정책적으로 화장을 하여 뿌리는 식의 장례문화를 택하고 있지만 소수민족들의 장례식은 전통방식대로 허락한단다.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당국의 배려가 인상 깊다. 버스는 40분을 달려 원가계에 도착 하였다. 

 원가계는 장가계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천하제일교(天下第一橋) 오녀출정(五女出征), 정인곡(情人谷), 미혼대(迷魂臺), 등 그야말로 잘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절경들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특히 방금 갠 날씨 탓에 발아래 펼쳐진 구름들, 그 구름을 뚫고 삐쭉삐쭉 솟아난 봉우리들, 이름 하여 천대서해(天臺西海)라나? 마치 우리가 신선이 되어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듯, 바다위에 떠 있는 듯,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래서 이름도 미혼대(迷魂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천하제일교 난간이나 부근의 위험방지용 난간에 수도 없이 매달린 자물통들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이곳에 와서 자물통을 채워놓고는 열쇠를 계곡 아래로 던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이 헤어지려면 열쇠를 찾아다 자물통을 열어야 하는데 열쇠를 찾을 수 없으니 영원히 헤어지지 못하므로 사랑의 징표로 그렇게 자물통을 매달아 놓는다는 것, 재미있는 발상으로 자물통장수는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산정에는 차(茶)를 파는 곳이 가끔씩 있는데 조선족이 운영한다는 찻집에서 커피와 막걸리를 마셨다. 안주는 미꾸라지를 말려 저린 것이다. 막걸리 맛도 별로고 미꾸라지도 비려서 맛이 없지만 이역만리 산중에서 막걸리라니 반가운 마음에 한 컵 마셨다. 가게 앞에는 “김해 허씨, 밀양박씨 가게”라는 피켓을 세워놓고 한국인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집 주인아줌마가 돈을 아주 많이 버는데 장가계에 자선사업도 넉넉히 함으로서 크게 인심을 얻고 산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사람들이 유난히도 연고를 많이 찾기 때문에 그곳을 지나치는 사람은 대개 그 집에서 차를 마시고 가니 돈을 많이 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주인아줌마뿐이 아니라 장가계에는 1,000명 정도의 조선족이 사는데 모두들 한국인 관광객들 때문에 돈을 잘 벌고 또한 한국인들이 이곳의 경제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조선족의 위상이 아주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생교(天生橋)를 지나 350m 높이의 절벽에 있는 연심교(連心橋)를 지날 때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며 건너야 했다. 배선대(拜仙臺)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갔다.

 백룡전제(白龍電梯)라는 엘리베이터는 높이가 320m, 세계제일이라고 한다. 세계 제일 여부야  알바 없지만 반은 절벽에, 반은 수직 동굴로 이루어져 있는 구조가 정말 장관이다. 세 개의 엘리베이터가 나란히 오르내리는데 어떻게 이렇게 거창한 시설을 할 수 있을까? 중국인들의 큰 스케일이 새삼 놀랍다. 엘리베이터는 절벽을 급강하 하다가 어느 순간 동굴 속으로 빠져 들어가 눈 깜박 하는 사이에 기착지에 닿는다.

 원가계까지 오르내리는 방법에는 우리와 같이 케이블카를 타고 갔다가 엘에베이터로 내려오는 방법, 반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랐다가 케이블카로 내려오는 방법 외에 가마를 타고 오르내리는 방법도 있다. 젊은이 둘이서 간단한 가마를 메고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것인데 한번 타기에 10,000원씩이라고 한다. 가마꾼들이 몇 명씩 떼지어 앉아서 탈 사람들을 기다리기도 하고 호객을 하기도 한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확실하게 계약하지 않고 타면 가마꾼 1인당 만원씩 20,000원을 달라기도 하고 1km당 10,000원씩 계산해 달라기도 한단다. 사전에 계약을 하면 원가계는 한번 오르기 20,000원, 보봉호수는 10,000씩이라고 한다. 

 우리는 다시 걸어서 보봉호수(寶峰湖水)로 갔다. 배를 타고 호수를 지나치면서 가이드의 안내가 이어진다. 인공으로 댐을 막아 만든 이 호수는 길이가 2.5km, 폭은 넓은 곳이 150m, 수심 깊은 곳은 72m에 이른다고 한다. 물가에 작은 정자가 있는데 배가 지날 때마다 토가족 여인이 나와 노래를 부르다가 배가 지나치면 들어가 버린다. 토가족의 풍습에는 총각들은 노래를 잘 불러야 장가를 갈 수 있고 처녀들은 춤을 잘 추워야 시집을 간다고 하는데 여성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회라서 남자들은 돈을 벌고 가사일까지 도맡으며 여자들은 몸치장만 하며 산다고 하니 그 말대로라면 토가족들의 남성들이 가엽다고 생각 된다.

 호수의 끝에 가니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토가족의 민속 쑈를 하는데 소녀 6명과 총각 7명이 교대로 나와 춤을 추고 혼성으로 추기도 하는데 사회 보는 아가씨가 중국어로 말하고 춤추는 사이에 주고받는 말들도 중국어라서 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답답하다. 관광객이 거의 한국사람이니 한국말로 설명을 곁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오는 길에는 또 다른 정자 곁을 지날 때 토가족 남자가 나와 노래를 부르다 들어갔고 즉석에서 관광객도 몇 사람 골라 노래를 시키면서 왔다. 호수의 아래 부분에는 인공으로 폭포를 만들고 시간을 정하여 물을 내리는데 그 높이가 무려 119.5m에 달하여 또 하나의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피로하다. 만보기를 찬 일행의 말에 의하면 15,000보를 걸었단다. 호텔에 돌아와서 발맛사지를 받았다. 방 한 칸에 6명씩 들어가고 단체복을 입은 20세초반의 아가씨들이 각자 1명씩을 맡아 맛사지를 해 주는데  2001년 북경에서 받았던 것보다 잘 하는 것 같다.  맛사지가 끝나니 한결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조선족이 운영한다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한국식 삽겹살 구이와 여행사에서 가져간 김치 고추장 등을 먹으니 입맛에는 닿지만 중국식이 아니라서 못내 섭섭하다. 식사 후에는 노래방에 갔다. 우리나라의 단란주점과 같은 형식인데 시간과 술과 안주는 무제한으로 제공하되 1인당 20,000원씩 내라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소리야!!! 물가가 높은 한국보다 이곳의 노래방이 더 비싸단 말인가? 누군가 중간에서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역만리에서 봉이 되는 것을 생각하니 도무지 노래하고 놀 흥이 없어 나오고 말았다. 물론 일행 중 그 냥 남아서 놀다 온 사람들도 있었다.


<2005.4.2맑음> 오늘은 또 어떤 놀라운 경치가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어제의 관광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인데 비해 오늘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관광이란다. 먼저 간 곳은 십리화랑(十里畵廊), 3km의 협곡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라도 되는 양 아름답다. 꼬마열차를 타고 10분정도 들어가면 끝이다. 중간에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갖가지 형상으로 서있고 가이드는 이를 설명하기에 바쁘다. 약초 캐는 할아버지바위며 아이와 3가족바위, 손가락 한 개를 세운 듯한 식지바위, 특히 맨 안쪽에 있는 삼자매(三姉妹)바위는 형상에 따라 재미있는 이야기도 꾸며져 있다. 바위 세 개가 나란히 서있는데 맨 앞의 큰 언니는 아기를 엎고 있는 형상이고 가운데 서 있는 둘째는 아기를 안고 있는 모양이며, 뒤에 있는 막내는 임신을 한 모양을 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럴 듯 하군” 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다음으로 간 곳은 금편계곡(金鞭溪谷)이다. 입구에는 장량(張良)의 무덤이라는 공지가 있는데 돌에 장량의 무덤이라고 새겨 놓았을 뿐 봉분도 없고 그저 평평한 공터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사이로 구불구불 들어가는 계곡은 시원한 물소리와 숲에서 피어나는 향기로 신선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  바위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향하여 쭉쭉 서있고 나무들도 바위를 닮아 쭉쭉 하늘을 향하여 서있는데 아열대 식물이라서 우리나라의 나무와는 약간씩 달라 무슨 나무인지 알아볼 수 없고 어쩌다 보이는 소나무들도 역시 쭉쭉 뻗어 하늘을 향한 것이 제멋대로 크는 우리나라의 나무들을 보아왔던 우리들의 눈에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돌을 깎아 만든 보도부럭으로 포장한 길이 끝도 없이 숲 속으로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길이가 20km에 달한다고 하며 걸어서 2시간 30분정도 걸린다고 하여 한시간정도만 걷기로 하고 돌아 나왔다. 숲속 길에는 군데군데 인조목으로 만든 쓰레기통을 비치하여 마치 통나무를 깎아 만든 쓰레기통처럼 보인다. 또한 군데군데 위험한곳에는 난간을 만들어 손으로 잡도록 하였는데 이것들 역시 인조목으로  대나무처럼 만들어 친밀감을 주었으며 숲속 길을 깨끗하게 유지시켜 기분이 상쾌하다.

 다음은 황룡동굴로 향하였는데 그 규모는 상식을 초월할 만큼 대단하다.  1983년에 발견하여 그 다음해부터 개발과 개방을 계속하고 있다는데 굴의 크기가 어찌나 큰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개발을 계속하고 있으며 현재 관광객들에게 개방한 동굴의 총 길이는 11.7km이고 동굴 내 제일 높은 수직 고도는 140m나 된다고 한다. 동굴 속에 또 동굴이 있고 동굴 속에 강이 흐르며 동굴 속에 산이 있다고나 할까? 그 커다란 동굴 속에는 천정에서 자라 내려오는 종유석, 바닥에서 위를 향해 자라나는 석순, 그리고 종유석과 석순이 맛 닿아 기둥이 되어버린 석주, 크고, 작고, 굵고, 가냘픈 그것들이 기기묘묘한 형상을 이루며 갖가지 모형을 연출하는데 일년에 겨우 0.1mm 자란다는 저것들 중 가장 큰 용궁속의 석순은 무려 19.2m라고 하니 그 석순이 만들어지기까지는 20만년이라는 계산이 나와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견뎌온 동굴이 경이로움 바로 그것이 아닌가.

 가이드의 안내로 동굴 내에 있는 강에서 동력선에 20명씩 타고 2km쯤 들어간다. 조용하게 물길 가르며 앞으로 나가는 게 실내라는 특성과 동굴을 보호하기 위해 배터리를 이용한 동력선인 모양이다. 배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동굴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동굴로 들어가는 두개의 문이 나온다. 하나는 행복문이고 또 하나는 장수문이라고 되어 있다

 저만치 동굴 안에 놓인 다리가 보인다. 돌을 정교하게 가공해 틀을 맞춰 아치형 다리를 만들었다. 참으로 경이롭다. 천용교(天龍橋)라 이름 붙인 이 다리는 길이가 20m, 높이가 45m라고 하는데 철 구조물 하나 쓰지 않고 돌로만 되어 있다. 석순의 군상이 춤추며 노래하듯 하다고 가무청(歌舞廳)이라 불리는 곳을 지나니 저만치 이 동굴의 절정이며 최고층에 위치한 용궁이다. 용궁에는 용왕의 생일상, 용왕의 의자, 용왕 막내아들의 밭 등 모형에 따라 그럴 듯하게 여러 가지로 이름 붙여진 곳들이 많이 있고 맨 꼭대기에는 회음벽(回音壁)이라 하여 관광객들이 목청껏 소리쳐 자기의 소리가 메아리쳐 옴을 즐기는 코너도 준비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어찌나 동굴이 큰지 1층부터 2층, 3층 4층이라 구분하여 이곳 4층 즉 용궁까지 구경하면 밖으로 빠져나가 동굴구경을 마치는데 동굴이 크고 길다보니 어떤 곳은 덥고 어떤 곳은 춥고 어떤 곳은 습하여 기관지가 약한 나는 재채기가 나오고 콧물이 나오는 등 건강에 이상이 온다.

 동굴밖에는 수석을 비롯한 갖가지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귤이나 기타 먹거리를 들고 다니며 파는 사람들이 많다. 장가계의 어디를 가나 대개 비슷한 광경이지만 1,000원이면 대개는 살 수 있는 물건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저씨 천원”하면서 팔다가 안 팔리면 “두개 천원”하기도 하고 열쇠고리 같은 것은 나중에는 5개 천원도 파는 것이다. 또 웃기는 것은 1,000원짜리 한 묶음을 가지고 와서는 만원짜리와 바꾸어달라고 하는데 만원을 주면 천원권 9장만 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 한 장을 더 달라고 하면 없다고 버틴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전을 해주려면 우선 천원 권을 먼저 받아 세어 본 후 만원을 주지 않으면 곤란함을 당하기도 한단다. 그들의 눈에는 한국 사람들이 돈으로 보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빼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싶다. 수석가계를 기웃거리다가 삼만 원을 달라는 수석 한 개를 8천원에 샀다. 일행 중 한사람은 160,000원을 달라는 붕어화석을 만원에 샀다고 한다. 가짜를 비싼 값에 사는 것인지 진짜를 싼값에 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음으로 간곳은 토가봉정원(土家鳳情園)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일종의 토가족 박물관이랄까? 제사를 모시는 제사당(第祀堂)이기도 한 이곳은 건물이 웅장하고 검은 색깔로 보아 오래된 건물로 보였으나 그곳에 고용된 조선족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3년밖에 안된 건물이란다. 아마 관광객이 늘어나니까 새로 민속박물관 형식으로 지었는데 예스럽게 오래된 건물처럼 채색을 한 모양이다. 아무튼 건물입구에 들어서자 토가족 전통복장을 한 여인들이 민속노래를 부르며 술을 한잔씩 권한다. 방문을 환영하는 의식인 셈이다. 술을 한잔씩 마시고 안으로 들어서니 토가족들의 전통 생활기구와 농기구들이 진열되어있다.

 한 바퀴 돌아보는 코스를 마치니  닭싸움을 시키는 곳이 나왔다. 1호부터 4호까지 닭을 놓고 싸우기 전에 돈을 걸으란다. 자기가 돈을 건 닭이 이기면 건 돈만큼 따는 것이고 지면 건 돈을 몽땅 잃게 되는 것이다. 2호 닭이 덩치도 크고 싸움도 잘할 것 같이 생겼으므로 관광객들은 재미삼아 천 원씩 또는 2천 원씩 2호 닭에게 돈을 거는 것이었다. 나는 어차피 돈을 따려는 생각이 없었기에 장난기가 발동하여 약간 덩치가 작은 3호 닭에 천원을 걸었다. 드디어 1호와 2호의 싸움이 시작 되었는데 의외로 덩치가 큰 2호가 싱겁게 졌다. 다음엔 3호와 4호의 싸움인데 3호가 이겼다. 결국 1호와 3호가 결승을 하였는데 3호가 이겼다. 관광객들이 건 돈은 모두 합해 15,000원 정도였는데 나 혼자만 천원을 땄을 뿐, 모두들 돈을 잃고 말았다. 나중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닭싸움은 관광객의 돈을 뜯어내기 위한 일종의 사기극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보아도 크고 이길 것 같은 닭에게 돈을 걸도록 해 놓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닭이 지도록 하면 돈은 몽땅 주최측이 갖게 되는 게 아닌가?

 다음엔 전통 춤을 추는 곳이 나왔다. 한사람이 북과 징으로 장단을 맞추고 또 한사람은 꽹과리를 치며 ‘이호’라고 하는 바이오린 비슷한 악기를 타는 사람도 있다. 남녀 두 명이 나와 춤추다가 그 중 남자 혼자서 칼 4개를 가지고 던지고 받는 재주를 부린다. 마지막엔 아리랑을 불러 관광객들도 모두 합창을 하였다. 한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니까 아리랑도 부르고 간단한 한국말로 인사도 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조선족이 운영한다는 숯불구이집도 있었고 입구에는 한글로 “중한우호관계를 건립하자”라는 프랭카드도 걸어 놓아 한국인 관광객들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흔적들이 보인다. 

 장가계 공항근처로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고 21:50분 비행기를 타려고 나갔으나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언제 올지 모른단다. 우리가 타려는 비행기뿐이 아니라 여러 대의 비행기가 모두 오지 않아 공항대합실에는 어림잡아 2,000여명의 관광객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한국 사람이라는데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중국으로 놀러 다녔을까? 이 많은 사람들이 가져다 소비하는 돈은 얼마나 될까? 더구나 가관인 것은 중국 당국의 행태다. 이렇게 100%의 관광객이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을 위한 편의를 상당부분 제공해야 될 텐데 비행기가 연착한다는 안내방송을 끊임없이 중국어로 내 보내는 게 아닌가, 무려 두시간정도 기다렸는데 한국어 방송은 딱 한번 짤막하게 하고 만다. 장가계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인에게 이래도 되는 걸까? 올 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는 배짱인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홍성에서 왔다는 아주머니와 덕산에서 왔다는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중국은 우리나라가 먹여 살리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나치게 놀러 다니는 것 같다. 여행을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모두들 아무것도 사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해외에 나가면 바리바리 사가지고 귀국하던 한국인의 의식에도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오는 것인가? 2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비행기를 타고 상해 푸동공항에 내려 레인보우 호텔에 들었는데 호텔은 고급이었으나 내가 든 객실에는 담배냄새가 쩔어 기분이 영 찝찝했다.


<2005.4.3 맑음> 여행의 마지막 날로서 소주(蘇洲)를 관광하는 날이다. 먼저 졸정원(拙政園)으로 갔다. 이곳은 중국의 4대 정원 중 하나라고 한다. 4대정원은 이곳 졸정원, 역시 소주의 유원, 북경의 이화원과 역시 북경의 승덕피서산장 등이라고 하는데 이곳 졸정원과 유원은 개인의 정원이고 이화원과 승덕피서산장은 황궁의 정원이라고 한다. 졸정원은 소주관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상당부분을 호수로 구성하였는데 동.중.서 세부분으로 나뉘며, 그 핵심은 중원에 집중되어 있다. 중원에는 원향당, 향주, 독특한 모양의 견산루와 파산랑, 비파, 해당, 파초가 빽빽히 들어선 비파원 등 건축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졸정원은 원래 당나라의 시인 육귀몽의 집이었다가 원대에 대굉사로 바뀌었던 것을 명나라때 왕헌신이 중앙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칩거할 때 개축한 것이라고 한다. 졸정원이란 이름은 진나라의 반악이 쓴 글 가운데 '채소밭에 물을 주고 채소를 가꾸는 것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위정이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크고 웅장한 정원도 왕헌신의 아들 대에서 도박으로 날려 남의 손에 넘어갔다고 하니 “부자 3대 못 간다.”는 우리나라의 속담이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아무튼 개인정원의 웅장함이야 상해의 마가정원이나 예원 등 이미 몇 군데서 보았기 때문에 놀라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하게 중국인들의 스케일이 크고 사치가 극에 달한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다음으로 간곳은 호구원(虎丘園), 이곳은 산이 없는 평지이기 때문에 호구원에 인공으로 산을 만들어 놓고 오(吳)나라 제일의 산이라고 하였다는데 그 높이가 36m에 불과하니 참으로 쓴 웃음이 나온다. 바위들을 가져다 인공으로 기기묘묘하게  만든 운암산(雲岩山)을 거쳐 호구사란 절 앞에는 동양의 피사탑이라고 하는 호구사탑이 있는데 높이가 37m나 되는 이 웅장한 탑은 그 역사가 무려 1,000년이라고 한다. 땅 밑에는 수많은 보물이 숨겨진 지하궁전이 있다고 하며 전쟁시에 지하궁전을 지키기 위해 천명의 군사를 지하궁전 위 바위에 앉도록 한 다음 그 자리에서 모두 자결토록 함으로서 지하궁전의 실태를 감추었다는 천인석(千人席= 千人座라고도 함)이 있다. 한편 지하궁전입구에는 연못이 있는데 궁전으로 들어가려면 이 연못의 물을 없애야 되기 때문에 보물을 탐내는 사람들이 아무리 물을 퍼내도 마르지 않아 지하궁전에 들어가지 못했고 아직까지 지하궁전은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간곳은 실크공장, 이곳에서는 실크 패션쑈를 감상하고 누에고치에서 실크가 되어 나오는 과정들을 구경한 후 명주이불솜을 한개 샀다. 중국돈으로 430위안, 신용카드로 결재하니 편리하다. 이로서 중국여행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푸동공항으로 이동하여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일행들은 면세점을 돌아다니며 쑈핑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피곤하여 짐을 지키며 쉬었다. 이윽고 도착한 비행기로 인천공항으로 그리고 대기한 버스 편으로 돌아오니 밤 12시가 넘었다.

 

▢여행를 마치고

 장가계와 소주는 한국인관광객들로 북새통이다 그런데도 중국당국에서는 한국인관광객에 대한 배려가 아주 소홀하다. 왜 그럴까? 한국이 조금 잘 산다고 흥청망청 하는 꼴이 눈이 시어 그러는 걸까? 너희들이 아무려면 안 오겠냐 싶어서 그러는 걸까?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는데 우리는 왜 그곳에 아까운 돈을 퍼부어가며 기를 쓰고 관광을 가는 것인가?


○중국당국은 한국관광객들에 대한 편리를 제공해야한다.

 ●우선 장가계와 인천직항로를 개설해야한다.

 ●중국의 공항에서 한국어 안내방송을 많이 해야 한다.

 ●공항에는 한국인 안내코너를 만들어야 한다.

 ●각 관광지에는 한국어로 된 안내서를 비치해야한다.

 ●이밖에도 한국인 관광객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여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자각해야한다. 우리가 조금 먹고살기 나아졌다고 너도 나도 다투어 관광을 가는 것을 자제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까운 돈을 들여 관광을 할 때에는 그들에게 이에 상응하는 권리는 주장해야 한다. 한국인관광객이 주를 이루면 한국인을 위한 편리를 제공받아야 한다.

○여행사들은 각성해야 한다. 얄팍한 상술로 관광객을 모아 돈벌이에만 급급하지 말고 관광객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중국당국에 권리를 주장하고 영사관이나 외교부를 통하여 그것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영사관이나 외교부는 중국 내에서의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한국관광객의 편리도모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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