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동오리 이야기

구슬뫼 2007. 8. 21. 12:56
 

 동오리 이야기


 충남 보령시 주산면에 있는 동오리(東五里)는 동막(東幕)과 오상(五相)의 이름을 따서 동오리라고 한 것이다. 지금의 동오1리는 옛날에는 동막부락이라 하고 동오2리는 오상부락이라고 하였는데 이곳 동오2리는 오상태, 곰굴, 선들 등 3개의 마을을 하나의 행정리(行政里)로 묶어 리장을 한명 두고 행정을 처리하고 있다. 마을마다 전해오는 이야기도 다르고 그 유래도 가지가지이지만 동오2리 즉 오상마을에 얽혀진 이야기가 색달라 알아보고자 한다.


1 선사시대(先史時代)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

 야트막한 산줄기를 등에 지고 앞으로는 넓게 펼쳐진 기름진 들녘, 그리고 사시사철 풍부하게 흐르는 화산냇물은 이 지역이 농경시대(農耕時代) 사람살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어 놓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는 선사시대에 이미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았고 그때 만들어 놓은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흔적들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1기의 선돌(立石)과 5기의 고인돌(支石墓)이 바로 그것이다.

 선돌은 대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청동기(靑銅器)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세운 목적은 민간신앙의 대상, 일종의 기념비, 그리고 일정구간의 표시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 보령지방에는 선돌이 이곳과 삼곡(三谷)리 동실마을 등 두 곳밖에 없는데 동실마을에 있는 선돌은 그 생김새나 크기가 이곳의 선돌만 못하여 명실 공히 선돌하면 이곳의 선돌을 떠올리게 된다. 2m 68cm 키에 아래 부분의 폭이 1m에 이르는 이 선돌로 인하여 마을이름도 선들(선돌이 변함)마을이 되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선돌을 지팡이바위라고 부르며 오랜 세월동안 정월 대보름날 치성을 드리고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은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기원하는 등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역할을 해온 것이다.

 한편 5기의 고인돌이 이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하나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마을의 고인돌 중 가장 큰 마당바위(주민들이 그렇게 부름)는 둘레가 무려 20m 70cm나 되는 초대형 고인돌로서 넓고 평평하여 오랜 세월동안 주민들의 쉼터로 사용되어 왔다. 나머지 4기는 마당바위 동북쪽 50여m 지점에 비교적 작은 고인돌들이 흩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들을 꾀깔(고깔)바위라고 부르며  앞에서 언급한 지팡이바위, 마당바위와 함께 재미있는 전설도 어려 있어 뒤에 소개하기로 한다.


2 다섯명의 재상(宰相)이 살았다는 오상태

 이야기는 먼 옛날 고려말(高麗末)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 31대 공민왕은 신돈(辛旽)<고려 공민왕 때 개혁정치를 담당하였던 승려, 자는 요공(耀空),  본관은 영산(靈山). 법명은 편조(遍照). 돈은 집권 후의 속명이다. 왕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기화로 급진개혁을 꾀하면서 권력을 남용하여 인망을 잃었다.  귀족 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천도(遷都)를 건의하였으나, 왕과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왕의 신임을 잃게 되자 반역을 획책, 수원(水原)에 유배되었다가 참형(斬刑)당하였다. > 에게 국정을 맡겨 많은 실정을 하게 되었고 이에 맛서 많은 조정중신들이 대항하다가 밀려나게 되는데 풍천임씨(豊川任氏) 족보에 의하면 이때 정승(政丞)벼슬에 있던 임향(任珦)이라는 사람도 신돈의 실정에 맛서 항소직간(抗疎直諫)하다가 밀려 홍주(洪州=홍성의 옛 이름)에 유배되었다가 남포(藍浦)에 이배되었는데 유배가 풀린 후 이곳 오상태 마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전하며(李朝隱居五相洞矢義自靖=조선조 불복, 절의를 지키며 오상마을에 숨어 살았다) 지금 보령지방에 사는 대부분의 풍천임씨들이 그 후손들이라고 한다. 한편 구전(口傳)에 의하면 다섯 명의 재상(宰相)이 은거하여 살았던 마을이라서 오상태(五相터)라고 하였다(任珦의 墓碑에도 기록 되어 있음)<웅천 평리에 있음(蓋麗季相臣五人隱淪於此名其洞曰五相洞云縣東二十里熊峙下五相洞府君晩年之遺址尙存)>

는 말이 있어 추측하기 좋아하는 일부 향토사가들로 하여금 좀 더 비약적(?)인 추정을 하게 하기도 한다.  다섯명의 재상이 은거하였다면 옛날 임향이 정착할 무렵 전후 하여 유명한 몇 사람이 실제로 이곳에 정착하여 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 중에 같은 시기에 함께 생활한 사람들은 없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미산면(嵋山面) 용수리(龍水里) 양각산(羊角山) 밑에 고려말의 학자인 익제 이제현(益薺 李薺賢)<1287∼1367 (충렬왕 13∼공민왕 16)]고려 말기 문신·학자·시인. 호는 익재(益齋),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도 뛰어났고, 성리학을 수용,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선생을 모시는 삼사당(三思堂)이 있고 그 건너편에 역시 고려말의 문신 매헌 염제신(梅軒 廉悌臣)<1304∼1382(충렬왕 30∼우왕 8)]고려시대 문신, 자는 개숙(愷叔). 본관은 서원(瑞原;坡州).친원파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한 뒤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원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선생을 모시는 수현사(水玄祠)가 있으니 그분들이 혹시 그때 은거한 재상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동막동(東幕洞)에 옥산사(玉山祠)를 짓고 매년 제를 올리는 고려말의 성리학자 이재 백이정(彛齋 白履正)<1247∼1323(고종 34∼충숙왕 10)]고려시대 유학자. 호는 이재(彛齋). 본관은 남포(藍浦). 안향(安珦)의 문인으로 1275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원(元)나라의 연경(燕京)에서 10년간 머물며 성리학을 연구한 뒤 정주(程朱)의 성리서적과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 뒤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 체계를 파악하여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 등으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선생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하면서 함부로 상상하기도 한다.

 한편 동오1리 중 정주안마을에는 수령이 100-200년쯤 되어 보이는 정자나무 두 그루가 함께 서 있고 그 사이에 1993년에 세운 팔각정이 있는데  현판에 보면 옛날에 백이정선생이 후손들을 위해 이곳에 정자터를 잡고 귀목(貴木)을 심었으나 600여년이 지나자 나무가 늙어 다시 정자나무를 심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적어 놓았는바 이는 마을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하여오던 것을 기록하였다고 하니 백이정과 이 지역이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갖게 한다. 전문가들의 깊은 고찰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다섯 사람의 재상이 누군가에 대하여는 갖가지 억측들을 해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임향을 제외한 다른 분들이 이곳에 정착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보지 못하였다.

오상동의 구전이 근거 없이 전해진 이야기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 있었던 이야기인지, 실제 있었다면 그들은 누구였는지 두고두고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3 곰굴과 곰재

 오상태마을 옆으로 곰굴마을이 있고 곰굴 뒤에 곰재가 있다. 곰굴과 곰재라는 이름으로 보아 옛날에 곰이 살았던 골짜기라든가 곰이 자주 출몰하여 무서웠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있을 법도 한데 그런 이야기도 없고 그럴 싸 한 전설도 없어 못내 아쉽다. 다만 산이 곰의 형상이라서 곰재라고 하였다는 말과 곰재가 시작되는 동쪽 2-3부 능선쯤 묘들이 몇 기 모여 있는데 이 부분이 곰의 발바닥부분이라서 명당자리라고 하는 말이 있고 7부 능선쯤 숲속에 노송 한그루가 서 있는데 일제시대 이 나무에 양민을 묶어놓고 학살하였기 때문에 그 후에도 건드리면 피가 흘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곰굴과 곰재에 관한 이야기나 전설이 있었으나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멸되지 않았을까?


4 지팡이 바위, 마당바위, 고깔바위에 얽혀진 전설

 옛날 성주산 근처의 한 아낙네가 남편은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고 아들딸 남매를 데리고  산속으로 도망쳐 숨어사는 데 칡뿌리를 가루 내어 음식을 장만, 아이들을 먹여 살리다가 차츰 논밭을 일구어 농사지은 곡식으로 음식을 해먹이니 이게 웬일인가? 아이들이 몸이 쇠약해지고 자꾸 말라가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칡뿌리가루로 음식을 해 먹였더니 아이들은 아주 힘이 센 장사로 자라났다. 하루는 아들이 암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아 집에 메고 오니 밤에 숫호랑이가 나타나 지붕을 펄펄 뛰어넘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딸이 시끄럽다고 팔을 걷어 부치고 나가다니 숫호랑이를 잡아 내동댕이쳐 죽여 버렸다. 그날 밤  어머니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노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살생을 금해야 그대의 남편이 좋은 곳에서 그대들을 지켜줄 텐데,  나의 사자를 둘씩이나 죽이다니, 그러고서도 온전할 줄 아느냐? 네가 자식들에게 칡뿌리를 먹여서 그렇거늘 . . . 그 기운을 호랑이 잡는데 쓰다니 . . .

얼마 안 있으면 나라에 큰 난리가 있을 것이다. 그때 자식들이 큰일을 하도록 하고 우선 내일당장 주암산 근처로 자리를 옮기 거라 그렇지 않으면 해를 입을 것이다.”

 꿈에서 깬 아낙은 불길한 꿈이라 생각하고 산신령의 말대로 남매를 데리고 주암산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주암산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오빠는 웅천 쪽에서 돌을 날라 오고 누이는 주산 쪽에서 돌을 날라 왔다. 성이 거의 완성되어 가던 날  오빠가 웅천 쪽으로 돌을 주우러 떠났고 누이는 돌을 성터에 갖다 놓은 다음 다시 주워오는데 하나는 머리에 이고 하나는 앞치마에 싸들고 긴 돌 하나를 지팡이삼아 짚어가며 오는데 산위에서 오빠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렷다. “야 오랑캐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오니 빨리 올라와” 이 말에 깜짝 놀란 누이가 이고 오던 돌을 떨어트렸고 앞치마에 싸안고 오던 바위를 그 자리에 놓았으며 지팡이처럼 짚고 오던 긴 돌도 그 자리에 팽개친 채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산위에서는 오빠와 오랑캐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누이도 합세하여 쌓아놓은 성돌을 산 아래로 굴리면서 오랑캐들과 맛서 싸웠다. 그러나 오랑캐의 숫자가 너무 많아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오랑캐들 때문에 쌓아놓았던 돌을 모두 굴린 후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남매는 맨손으로 오랑캐를 무수히 죽이다가 장열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숫자를 잃은 오랑캐들은 주암산을 넘어오지 않고 돌아가 버렸고 그 때문에 주암산 안쪽마을은 난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누이동생이 버린 바위가 지팡이바위, 마당바위, 꾀깔(고깔)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옛날에 기운이 아주 센 여 장사(女壯士)가 한사람 살았는데 선들 마을 뒷산인 멍덕봉에서 돌꾀깔(고깔)을 쓰고 돌지팡이를 짚고 앞치마에 큰 바위를 싸안고 들 건너 배창산(운봉산)으로 훌쩍 뛰다가 그만 치마폭이 터지는 바람에 싸안았던 바위가 떨어지고 꾀깔(고깔)은 벗겨져 저만큼 나가떨어지고 지팡이를 땅에 ‘팍’ 하고 찍는 바람에 지팡이 바위, 치마바위(마당바위를 그렇게 부르기도 함), 꾀깔(고깔)바위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5 우리들의 과제      

 오상태는 다섯 사람의 재상(宰相)이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오상(五相)태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중 한사람인 임향(任珦)은 비록 한 성씨(姓氏)의 족보(族譜)에 있기는 하지만 오상태에 정착하였음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백이정(白履正) 이제현(李薺賢), 염제신(廉悌臣)을 모시는 영당(影堂)이나 사우(祠宇)가 근처에 있고 백이정은 그 행적이 구전(口傳)되고 있다. 물론 그분들이 우리 지역과 연고가 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영당이나 사당을 처음으로 지은 시기도 1740년(龍岩影堂= 三思堂)년과 1873년(水玄祠), 1970년(玉山祠)에 후손들이 지어 영정 또는 위패를 봉안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무언가 우리들이 모르는 역사적 사실들이 잠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못 궁금하다. 이미 600-700년이 흘러버린 먼 옛이야기라서 알아보기 힘들기는 하겠지만 역사적 사실이 묻혀 버렸다면 이 시대 이 지역에 사는 우리들이 파헤쳐봐야 할 과제가 아닐까?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 아니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들의 심층 연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참고문헌: 보령군지, 보령의 고인돌, 풍천임씨족보)

※실은 곳: 2005년 발행 구슬뫼 이야기/ 2006년 발행 향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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