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전(藍田)마을과 창말(倉村)
충남 보령시 주산면 창암리(倉岩里)에는 남전과 창말이 있는데 옛날에 남전에는 남전역(藍田譯)이 있었고 창말에는 남창고(南倉庫)가 있었으며 또한 남천원(南川院)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1 역(驛)이 있었던 남전마을
이곳 마을에 남전역(藍田驛)이 있었는데 이인도(利仁道)소속이었다.<이인도: 충청도 중로(中路)의 서남부로 연결된 소로(小路), 작은 역을 관장하였고 중심역은 공주 이인역(利仁驛)이었다.> 역이란 공문서(公文書)의 전달, 관리(官吏)의 왕래와 숙박, 관물(官物)의 수송을 돕기 위한 기관으로서 대개 30리에 하나씩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지형 등 형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두기도 하였다. 이곳은 역 이름이 남전역인 것은 남포현(藍浦縣)관내에 있어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으며 역이 폐지된 후에도 마을 이름만은 그대로 남아 남전으로 부르고 있다.
호서읍지(湖西邑誌), 여지도서(輿地圖書), 남포읍지(藍浦邑誌) 등 옛 기록의 역원란에 역과 원은 (남포)현의 남쪽 30리 떨어진 불은면에 있고 이인도 소속이었다. 큰말(大馬) 2필, 타는 말(騎馬) 3필, 짐 싣는 말(卜馬) 5필, 사내종 45명, 계집종 54명을 두었다(驛院 在縣南 三十里 佛恩面 利仁所屬 大馬二匹 騎馬三匹 卜馬五匹 奴四五口 婢五十口)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어느 기록에 보면 이곳을 역리(驛里)라 하였고 116호에 남171명, 여293명이 거주 하였는데 남포현 관내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고 한다.(대보문화 제5집)
한편 지금도 이 마을을 역말 또는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여 이곳에 역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불은면은 이곳을 포함한 주산면(珠山面) 동부지역의 옛 이름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은 신라 소지왕 9년(487)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도로를 대,중,소로 3등분하고 547개의 역에 22명의 역승(驛丞)을 두고 그 아래에 역장(驛長) 역정(驛丁)을 두었으며 병부(兵部)에 소속되고 역전(驛田)으로 경비를 충당하였다. 조선 세조 3년(1457)에는 역승을 찰방(察訪)이라 개칭하고 전국에 538개의 역을 두고 40구역으로 나누어 찰방을 두었는데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찰방역이라 불렀다. 찰방역은 관내의 소속역을 통할하였다. .
한편 이인도(利仁道)소속으로 9개의 속역이 있었는데 남전역을 비롯하여 공주 이인역(公州利仁驛), 부여 용전역(夫餘龍田驛), 부여 은산역(夫餘恩山驛 ),정산 유양역(定山楡楊驛), 비인 청화역(庇仁靑化驛), 서천 두곡역(舒川 豆谷驛), 한산 신곡역(韓山新谷驛), 홍산 숙홍역(鴻山宿鴻驛), 임천 영유역(林川靈楡驛) 등이 있었고 보령현 지역에는 금정도(金井道)<금정도: 충청도 중로(中路)의 서부로 연결된 소로(小路) ·소역(小驛)을 관장하였고, 중심역은 청양(靑陽:현 청양군)의 금정역이다. 청양∼대흥(大興), 청양∼결성(結城)∼홍주(洪州)∼보령(保寧)∼해미(海美:현 해미면)∼서산(현 서산시)∼태안(泰安)으로 연결되는 두 역로를 관장하였으며, 처음에는 역승(驛丞)의 역도였다.> 소속의 청연역(靑淵譯)이 지금의 주포면 관산리에 있었다.
2 창고(倉庫)가 있었던 창말
호서읍지, 여지도서, 남포읍지 등에 남창고 17간이 (남포)현의 남쪽 30리 떨어진 불은면에 있다(南倉庫 十七間 在縣 南三十里 佛恩面)라고 되어 있는바 이곳 마을에는 지금도 창고 터가 전해오고 있고 터를 파헤치면 기와조각이나 곡식의 알갱이가 출토되며 마을이름도 창고가 있던 마을 즉 창말이 된 것이다.
이 창고는 (남포)현에서 관리 하면서 백성들에게서 세금 등으로 거둔 양곡을 보관하였다가 현으로 옮기거나 특별한 경우에 백성들에게 풀어 주는 기능 등 공공 양곡창고(公共糧穀倉庫)로서 할용 하였던 곳이다. 남포현에는 이 창고 외에 읍성내(邑城內)에 영창고(營倉庫=10간), 사창고(司倉庫=10간), 군향고(軍餉庫=3간), 저치고(儲置庫=7간), 군기고(軍器庫=8간)가 있고 해창고(海倉庫) 9간이 (남포)현의 서쪽 20리 떨어진 웅천면(무창포에 창고 터가 있음)에 있었다(海倉庫九間在縣西二十里熊川面)고 하는데 그중에서 이 마을에 있던 창고가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3 남천원(藍川院) 자리는 어디인가?
보령군지(保寧郡誌)에 보면 남천원이 이곳 창촌마을에 있었다고 되어 있고 호서읍지, 여지도서, 남포읍지 등에서 남포현의 역원(驛院)란에 역과 원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남전역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口傳), 지명(地名) 등은 전하고 있어도 남천원은 구체적인 기록이 보령군지를 제외하고는 찾지 못하였고 구전도 없으며 원터라든가 원말이라든가 하는 원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없어 과연 남천원이 있던 자리가 어디인가 알 수가 없다.
원이란 교통요지나 한적한곳에 설치하여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속칭 관집으로 일종의 여관이었으며 역과 함께 설치하기도 하였다 하니 남전역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원은 사람의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 한때는 크게 번성하였으나 그 사용자가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후기에는 점차 쇠퇴하였다고 하는바 오래전에 남천원도 없어져 지명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한편 보령군지에 의하면 보령지역에 이곳 남천원과 함께 횡천원(橫川院: 성주면 개화리), 청라원(靑蘿院: 청라면 라원리), 보원(寶院: 在縣 東30리), 갈두원(葛頭院: 대천2동 갈머리),, 위수현원(渭水縣院: 청라면 장현리 명대마을) 등 6개소의 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중에서 남천원과 횡천원이 남포현 관내에 있었고 나머지는 보령현(保寧縣)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4 그 밖의 남전과 창말에 관한 이야기
남전마을에는 조선 영조 때 병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 이조판서 등을 두루 지낸 이창수(李昌洙)와 그 직계존비속들의 묘가 있다. 그들은 서울출신이지만 이창수의 아들 이병정(李秉鼎)이 아버지의 묘를 명당에 모시고자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남전에 모셨고 증손인 이교빈(李敎彬)이 남전에 내려와 정착함으로서 그 후손들이 남전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세를 누리며 살았다.·
남전과 창말은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남아 있다. 남전마을 앞의 고인돌 2기와 도롱굴마을 가는 길가에 1기의 고인돌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남전 뒷산 즉 운봉산(雲峯山)자락 낮은 부분에 둘레 200m정도의 테뫼식 산성(山城)이 있다고 한다. 일제시대 조사하였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마산(馬山)이라고 하였으며 성벽은 훼손되어 문터 등 시설물을 확인할 수 없으나 다만 성안(城內)부분에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격자문계(格子文系) 토기파편이 발견된다고 하였다.
백제시대 고분도 발견되었다. 1977년 남전마을에서 토광묘(土壙墓) 1기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목 짧은 단지 1점, 목 짧은 삿자리무늬 단지 1점, 고리장식 손잡이 큰칼 1점, 쇠도끼 1점, 쇠창 1점, 쇠낫 1점 등 6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마을뒷산인 운봉산(雲峯山)에서 석실분(石室墳) 몇기가 도굴(盜掘)되었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5 전설
창말 입구에 주막집이 두 곳 있었는데 보부상들이 하룻밤씩 묵어가기 때문에 붐비는 날이 많았다. 어느 여름날 힘께나 쓰는 황장사라는 사람이 술을 먹던 중 장꾼들의 이야기에 정신 팔려 계속 술을 마시다가 그만 대취하여 주막집 앞 커다란 느티나무아래에서 잠이 들고 말았는데 밤이 되자 장꾼들은 돌아가기도 하고 주막집 방에 들어가 자기도 하는데 황장사는 혼자서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밤이 깊었는데 황장사가 잠결에 느낌이 자신의 몸이 둥둥 공중에 떠가는 것이 느껴져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커다란 호랑이 등에 업혀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아차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는 순간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은 차려라”라는 옛말이 떠올라 바짝 긴장한 채 실려 가고 있으려니 호랑이는 성주산(聖住山)구비를 지나 오서산(烏棲山)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산 중턱 깊숙이 들어간 호랑이는 널찍한 바위에 사람을 내려놓고는 앞발로 자신의 낮짝을 문지르더니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황장사는 이 틈에 도망치려고 주위를 살폈으나 너무 어둡고 사방을 분간할 수 없어 도망가기를 포기하고는 여차하면 호랑이와 한판 싸워볼 각오를 하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호랑이는 얼마 후에 다시 나와서 주변을 살피며 사람이 있음을 학인하고는 또 굴속을 들어갔다. 이윽고 날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하자 황장사는 호랑이와 싸울 유리한 장소가 어디인가 살펴보았다. 호랑이굴 옆에는 낭떠러지가 있어 그곳에 호랑이를 밀어버리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있으려니 호랑이의 으르렁 소리가 들려 재빨리 바위위에 엎드려 죽은 시늉을 하고 있었다. 호랑이는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오더니 장사의 등을 발톱으로 긁어 피가 흐르게 한 다음 새끼들이 핥아먹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픔을 참고 죽은 듯이 엎드려 기회만 엿보는데 갑자기 바위가 떨어지는 듯 한 소리가 들리며 큰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나 호랑이 새끼를 채가려고 덤벼들었다. 어미호랑이와 싸우던 독수리가 틈을 노려 새끼 한마리를 채가지고 날아오르니 어미호랑이가 이를 쫓으려고 펄쩍 뛰어 오르다가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칡덩굴에 걸려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다. 황장사는 재빨리 일어나 나머지 호랑이 새끼 한 마리를 번쩍 들어 어미 호랑이에게 던지고는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담력이 더욱 세졌고 백살이 넘게 장수하였다고 한다.
6 맺는 말
운봉산을 북으로 등지고 앞으로는 남쪽 탁 트인 벌판을 바라보며 형성된 남전과 창말은 살기 좋은 환경임을 한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일찍이 마을이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역(驛)이 설치되고 창고가 들어섬으로써 종사하는 많은 수의 관원이며 노비들이 상주(노비만도 역에 95명이라고 기록되었음)하고 외지관원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그들이 묵어가는 원(院)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니 이곳 남전과 창말은 조용한 시골이 아니라 늘 시끌벅적한 도시형태를 갖추었을 것이고 그 번창함이 대단하였으리라고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추측일 뿐 그 시절의 영화를 전하는 이야기도 기록도 없다. 옛 읍지나 군지 등에 역과 원, 그리고 창고가 있었다는 몇 줄의 기록과 주변의 지명 그리고 전설을 통하여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이곳 마을의 옛날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보령군지, 호서읍지. 여지도서, 남포읍지, 대보문화 5집)
※실은 곳: 2005년 주산면 발행 구슬뫼 이야기 /2006 발행 향토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