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왕봉산과 이괄네묘

구슬뫼 2007. 8. 14. 11:15
 

왕봉산과 이괄네 묘

                                                                              임근혁

1 화산(花山)마을과 왕봉산(王峯山)

 충남 보령시 주산면 화평리(花平里)에 화산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그 뒷산을 왕봉산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화산(花山)이라고 부르다가 이 산이 왕봉(王峯)이라는 하나의 큰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언제부턴가 왕봉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해발 239m밖에 안되는 작은 산이지만 그 이름이 독특하고, 특히 산중에는 이괄(李括 - 朝鮮中期의 武官, 仁祖反正에 참여하였으나 후에 난을 일으켰다)네 묘라는 4기의 분묘(墳墓)가 있는데, 오랜 세월 사람들의 갖가지 억측 속에 이 묘를 둘러싸고 특이한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줄기가 보령(保寧)지역으로 내려온 후에는 오서산(烏棲山)과 성주산(聖住山)을 거쳐 한줄기가 옥마봉(玉馬峯)과 잔미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동남으로 흘러 양각산(羊角山)에서 주춤하고 뭉쳤다가, 서남방향으로 뻗어 내려 이 곳 왕봉산에서 끝나고 있는데, 이 산 아래 남쪽 기슭에 화산마을(화산내라고도 함)이 형성되어 있고, 이 마을을 큰 화산 냇물이 U자형으로 감싸고돌면서 흘러 웅천천(熊川川)을 이루어 서해 바다로 흘러간다.

 화산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몰라도 고성이씨(固城李氏) 족보 및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조상 중 이줄(李茁-조선시대 무신, 中宗反正과정에서 잘못되어 20여년 유배생활(남포유배)을 하였음)이란 사람이 조선(朝鮮)중기인 16세기 초반 남포지역(藍浦縣지역)에 유배되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유배가 풀린 후 이 곳 화산마을에 정착하였다고 하며 그 후 그의 자손들이 100년 정도 살다가 이괄의 난(李括의 亂)이후 떠났다고 하는 바, 이줄의 남포지역 유배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확인이 된다.

2 화산과 왕봉산의 지명 유래

 왜 이름이 화산(花山)일까? 꽃이 많이 피어있는 곳이어서 그리 불렀다는 기록도 있으나, 그보다는 명당(明堂)이 있는 곳이라 그리 불렀다는 말이 있는바, 그게 맞지 않을까 한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성주산(聖住山)에도 8모란이라 하여 명당 여덟 자리가 있다는 전설이 있는 것처럼 꽃, 즉 명당이 있는 산이 훨씬 더 그럴싸한 말이 아니겠는가?

 풍수지리에 대하여는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이 마을이 명당인지 또는 마을 뒷산에 명당이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지만 긴 산줄기가 끝나는 남쪽 부분에 맑은 물이 그림처럼 휘어감아 돌아 흐르니 누가 보아도 지형으로 보아서는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葬風得水=風水)의 명당이라고 할 만 할 것이다.

 왕봉산(王峯山)이라는 이름은 앞에서 밝힌 바 있듯이 화산(花山)이 왕봉이라는 산봉우리와 그 산자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왕봉이 있는 산이라고 부르다가 왕봉산으로 부른 듯하며 구전에 의하면 이 산 자락에 왕이 태어날 명당이 있다는 것이다.


3 왕봉산과 이괄네 묘와 관련한 전설

왕봉산 아래에서 왕(王)이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

 예부터 이곳 왕봉산 자락에서 왕이 태어날 거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왕이 태어난다면 이는 곧 역성혁명이 일어남을 뜻하는 것이므로, 이를 안 조정에서 유명한 지관을 보내어 과연 왕이 태어날 형국인가를 조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지관이 왕봉산 일대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산의 생김새나 산을 휘감아 도는 물이나 과연 명당처럼 생겼는데 양각산 자락과 왕봉산이 이어지는  낮은 부분이 삽재라는 고개이므로 “아하, 삽재라면 꽂을 삽(揷)자라 꽃은 꽃이로되 꽂아놓은 꽃이구나. 꽂아놓은 꽃은 금방 시들어 버릴 것이니, 이곳 왕봉산에서는 왕이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안심하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명당이 있는지 없는지, 또 있을 경우 믿을 수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일제(日帝)시대 잔악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맥을 끊는다고 쇠말뚝을 박은 사실은 새삼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아는 바이지만 이곳 왕봉산에도 일본인들이 맥을 끊은 뜸터가 있다. 또한 이 전설과 이괄의 난을 연계시켜서 이괄네 묘가 이 산에 있고 그 정기를 이어받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새로 왕을 세우고 정권을 잡았으나 3일천하로 끝난 것은 이 왕봉산의 정기가 꽂아놓은 꽃이라서 그렇게 되었다면서 만약 꽃아 놓은 꽃이 아니라면 이괄의 난이 성공하여 정권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잠깐 이괄의 난을 언급해보면, 이괄은 조선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 光海君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仁祖)을 옹립한 사건. 李貴, 金自黙, 김류, 李括 등이 주도하였음)에 가담하여 반정에 성공한 후 2등 공신에 책봉되었는데 1624년(인조2년)에 난을 일으켜 임금은 공주(公州)로 피난가고, 이괄은 한양(漢陽)에 입성하여 흥안군(興安君-宣祖의 아들, 이름은 제. 李括이 난을 일으킬 때 왕으로 추대하였음)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였으나 3일 만에 평정된 사건이었다.


이괄네 묘에 가까이 가서 성묘(省墓)하면 죽는다는 전설

 이곳 왕봉산에 이괄네 묘라는 4기의 분묘가 있는데, 이 묘는 호랑이 심장혈(心臟穴)이기 때문에 이 묘에 와서 성묘를 하면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매년 시제 때가 되면 묘역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3km정도 떨어진 들 건너 월현(月峴)고개에서 묘역을 향해 제(祭)를 올리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50~60년 전까지만 해도 그 광경을 보았다는 노인들이 있으며 그 후 후손들이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묘역에 후손들이 들어가면 죽는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왜 후손들이 조상의 묘역에 들어가면 죽을까? 그리고 이 묘는 이괄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 묘일까? 이괄의 조상 묘라면 아버지? 할아버지? 아니면 그 위 선대일까? 여러 가지 의문과 갖가지 억측 속에 많은 세월 사람들은 궁금하게 생각하여 왔다.


이괄네 묘의 장군석(將軍石)에 얽힌 전설

 묘역에는 여러 기의 석물(石物)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1기의 장군석과 석물 흔적들이 남아있고 옆의 솔밭 속에 목이 부러진 장군석 1기가 아무렇게나 서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장군석을 세워놓으면 마주 바라다 보이는 동오리(東五里) 선돌마을의 여인네들이 바람이 나고, 장군석을 쓰러뜨려 놓으면 바로 산 아래 화산마을의 남정네들이 바람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전설을 믿고 동오리 선돌마을 사람들이 자기네 마을 여인네들이 바람이 나면 큰일이므로 저녁에 몰래 와서는 장군석을 쓰러뜨려 놓고 가면 화산마을 사람들은 자기마을 남정네들이 바람이 날까봐 장군석을 세워놓기를 반복하였다는 이야기인데,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일이(장군석을 세웠다 쓰러뜨렸다) 계속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손들이 찾지 않는 묘소이니 사람들이 함부로 장난삼아 한 일이 그렇게 전해지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4 이괄네 묘의 베일을 벗긴다

이 곳 묘역의 관리는 고성이씨들이 화산마을주민 중 한사람에게 위탁하여 해마다 벌초를 하는 등 관리하여 왔었는데 15~16년 전쯤 관리하던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묘역관리가 안 되어 봉분을 비롯한 묘역전체에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등 엉망이 되었다.

 그러던 터에 2001년 후손들이 다시 나타나 화산마을 사람들과 접촉하고 나무를 말끔히 베어내는 등 다시 관리를 시작함으로서 그 후손과 접촉한 주민을 만나 연락처를 입수하고 전화를 연결하여 관련 자료를 받아 봄으로서 신비에 쌓인 이괄네 묘의 베일을 벗길 수 있게 되었고 각종 향토지와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충자료를 확인 한 것이다.

 앞에서 잠깐 밝혔듯이 고성이씨인 이줄(李茁)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으며 살고 있던 중 이괄의 난이 터지자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게 되었고 이괄과 일가인 고성이씨네의 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괄네 묘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곳 묘역에는 4기의 묘가 있다. 1기는 이줄(李茁)의 묘, 1기는 그의 큰아들 이응(李應)의 묘이며, 그리고 2기는 넷째 아들 이충(李忠)과 손자인 이보(李保)의 묘라고 하는데, 이들 묘 중 이줄의 묘와 이응의 묘는 고성이씨 족보에 화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줄의 묘는 남포읍지(藍浦邑誌), 호서읍지(湖西邑誌), 여지도서(與地圖書) 등의 능묘(陵墓)란에 고 병조참판 이줄의 묘가 (藍浦)縣 남쪽 30리 떨어진 화산 남쪽 기슭에 있다(故兵曹參判 李茁墓 在縣南三十里 化山南麓)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묘역에 들어가면 죽는다 하여 멀리 떨어진 고개에서 제(祭)를 올리는 전통은 무슨 때문일까? 그 이유를 추리해 본다.

 이괄이 난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리게 되고 그의 삼족을 멸하려고 하자 그와 가까운 일가친척들 중 일부는 잡혀서 죽기도 하고 일부는 도망을 가서 소리죽여 숨어 살게 되었을 것이다. 화산마을에 살던 고성이씨들도 이때 흩어져 숨어버렸는데 숨어사는 사람들이 자기의 조상 묘역에 나타나면 역적의 일가로 발각되어 죽을 것이 염려되므로 어린 자식들을 이끌고 묘역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고개에서 제를 올리면서 “얘들아 저산에 조상님들의 산소가 계신데 거기에 들어가면 죽으니 이곳에서 제를 지내는 것이란다.”하였을 것이고 또한 지나는 사람들이 왜 이곳에서 제를 올리느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으니 “묘역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하였을 법하다. 어린 자식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대로 이유도 모르는 채 “묘역에 가면 죽는다.”고 하였으므로 멀리서 제를 올리기를 수백 년 거듭하다 보니까 그런 전설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5 맺는 말

 오랫동안 갖가지 억측 속에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던 옛 묘의 진실이 밝혀지니 시원하기도 하지만 신비한 비밀이 없어져 버려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하다.

 우리 고장에 이괄네 묘가 있기에 혹시 이괄의 직접 조상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괄이 우리지역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 같은 것도 있었는데 그게 아닌 것이 밝혀져 서운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왕봉산도 전설처럼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는 산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풍수지리를 좀 안다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왕봉산이나 화산마을에는 명당이 없다고 한다. 왕봉산의 좌측 부분이 산자락이 없이 가파르게 죽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좌청룡(左靑龍)이 없다는 것.

 풍수에 대하여는 알지도 못하고, 또 믿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명당이 있다고 하면 좋겠다. 삽재의 이름이 나빠서 인물이 안 난다면 좋은 이름으로 바꾸어보면 어떨까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하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 도움말씀 주신 분 : 홍순정, 이문영, 김석규, 박관우, 오관규, 김진옥(이상 지역민), 이각호(고성이씨, 서울거주)

※ 참고문헌 : 輿志圖書, 湖書邑誌, 濫浦邑誌, 朝鮮王朝實錄, 固城李氏 族譜, 뿌리교육교재(고성이씨 서울종친회 발행)

※ 실은 곳: 2004년 발행 보령문화,2005 주산면 발행 구슬뫼 이야기 ,2006 향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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