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주산의 고개들

구슬뫼 2007. 8. 13. 10:00

 

 주산의 고개들

 

1 머리말

 산줄기가 미산면(嵋山面)과 경계를 이루며 북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리다가 서쪽으로 구부러지면서 남쪽의 서천군(舒川郡)과 경계를 만들어 놓으니 미산과의 통행도 고개를 넘어야 하고 서천과 왕래를 하려 해도 고개를 넘어야만 한다. 또한 주렴산(珠簾山)줄기는 주산면의 중심부를 감싸 안고 병풍처럼 둘러서 신구리(新九里)와 유곡리(柳谷里,) 증산리(甑山里)를 소재지와 분리하여 놓으니 그쪽마을 사람들과 중앙부에 있는 사람들이 왕래를 하려면 고개를 넘어야 하였다. 이렇게 두 개의 긴 산줄기 때문에 주산면에는 일찍이 고갯길이 많이 발달하였던 것이다. 

 

2 주산의 고개

 

1) 간재고개(간재재)

 주산면의 소재지는 간재마을이다. 여기에 5일마다 서는 장을 간재장이라고 한다.

이곳마을을 한자로 표기하여 간치(艮峙)라고 하는데 이곳 간재에서 미산면(嵋山面) 대농리(大農里)로 통하는 고개가 간재고개(간재재)이다. 대농리 쪽에서 볼 때 간재로 통하는 고개라서 간재고개인지 아니면 간재고개가 먼저고 그 아래에 있다 해서 지명이 간재인지는 알 수 없고 또한 간재가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옛날에 소금장수들이 주산에서 소금을 받아다가 내륙인 미산면을 비롯하여 부여군(扶餘郡)의 홍산(鴻山), 옥산(玉山) 등지로 팔러 다니는 바람에 간재고개에 소금을 많이 흘려 간에 쩐 고개, 그래서 간재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하기도 한다.

 하긴 옛날에 있었던 묵은 도가집(양조장)을 사람들은 ‘벌터도가집’이라고 불렀다하니 벌터라면 소금벌과 비슷한 말이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해보고 또 어렸을 때 어른들의 옛이야기 속에 소금장수 이야기가 많았던 것은 이 지방이 혹시 소금의 집산지나 생산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억지로 해보지만 진실은 알 길이 없다.

 간재장터에서 청석다리를 거쳐 신깃굴로 들어서 구불구불 올라가면 간재재 고갯마루에 닿고 태봉굴을 거쳐 대농리와 남심리(南深里) 사이로 내려가는 산길이 제법 길차다. 지금은 고개도 많이 낮추고 도로도 2차선으로 확포장하여 자동차가 맘대로 다니는 큰 도로가 되어버려 옛 정취를 느낄 수는 없다.

 옛날엔 이 길이 간재와 내륙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특히 판교(板橋)장에 다니는 장꾼들이 이곳을 통하여 미산면과 판교의 경계인 가루고개를 거쳐 장을 왕래코자 자주 이용하였고 대농리, 남심리 풍산리(豊山里) 주민들이 간재장에 나올 때, 그리고 그 곳 학생들이 주산중학교(珠山中學校)나 주산농업고등학교(珠山農業高等學校 = 현 珠山産業高等學校)에 통학하기 위하여 뻔질나게 넘나들던 고개이다.

 판교장은 황소를 팔고 사는 쇠전(소의 시장)이 유명하여 많은 소장수들이 드나들었는데 쇠 시장이 한창 번창할 당시에는 전문 소몰이꾼이 있어 판교장에서 소를 몰아다(걸려서 데려다) 간재나 웅천(熊川), 멀리는 대천(大川)까지 옮겨주기도 하고 반대로 웅천이나 간재쪽에서 소를 몰아다 판교장에 대주기도 하는 등 이를 돈벌이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래저래 간재고개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었다. 장사꾼의 왕래가 잦자 그들을 노리는 강도들도 이곳 간재고개에서 심심치 않게 출몰하여 소를 판돈을 쥐고 밤늦게 간재고개를 넘다가 강도에게 소 값을 몽땅 빼앗기는 등 불상사도 가끔 있었으며 채알귀신(차일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 등 귀신이나 도깨비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밤에는 넘기가 무시무시한 곳이기도 하였다.

 한번은 간재장터에 사는 김모(金某,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이름을 대면 아는 사람이 많이 있음)라는 사람은 모시장수를 하는데 밤에 혼자서 간재고개를 넘게 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어둠속에서 강도 한명이 나타나 식칼을 들이대며 돈을 요구 하였는데 김씨는 대담하게도 강도와 맛 붙어 싸웠다는 것, 강도가 칼을 들이 밀자 김씨가 칼날을 움켜 쥔 채로 싸우다보니 손에 피가 난자하였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 싸웠다고 하며 마침내 강도를 물리치고 2km정도나 떨어진 간재장터까지 달려 도망하여 왔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보니 그 흘린 피의 흔적이 소재지까지 계속 이어졌더라는 실화도 전해오고 있다.  

 

2) 동곳재

 동고재, 동구재, 동굿재, 등굿재라고도 한다. 금암리(金岩里) 통점마을에서 시작하여 판교면의 심동으로 이어지는 동곳재는 아주 먼 옛날부터 사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 고갯마루에는 옛날에 만들어진 서낭당이 아직도 옛 모습대로 남아 있는바 돌 더미며  주위한경들이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동곳재는 왜 동곳재일까? 어느 집안의 족보내용에 “동고치하(動鼓峙下)○○좌”라고 되어 있는데 장항선 철도개설시 이곳 동곳재 아래에 터널이 뚫려 기차가 왕래를 하니 이는 “베틀 속에 북이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지 않느냐” “지명과 맞아떨어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동곳재 아래 계곡이 경칩알을 먹고자 사람들이 많이 찾던 곳이라 개구리가 많았다고 하는데 개구리가 울 때 양 볼을 불룩거리는 것이 마치 “동물이 북을 치는 것과 같다 해서 동고치(動鼓峙)라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명이 생길 때 어려운 한자말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극히 적고 순수한 우리말이나 쉬운 말로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게 지명이기 때문에 두가지 모두 너무 비약한 짐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곳재가 무슨 뜻일까? 상투에 끼우는 동곳과 같아 그리 불렀다는 말도 있으나 맞는 말일까? 아니면 동굿재일까? 동굿재라면 혹시 서낭당도 있고 하니 동네 굿을 하던 동굿재가 아닐까? 갖가지 짐작을 해 보지만 그럴싸한 이유도 알 수 없고 아는 사람이 없어 궁금증을 더해준다.  이곳 고갯길은 철도가 생기고부터 서서히 이용자가 줄더니 나중에는 아주 없어져버렸으나 요즈음에 임도가 신설되어 간재고개와 연결됨으로서 이곳을 통해 심동으로 넘어가는 차량이 가끔씩 이용하고 있다.

 

3) 판숫굴재

 주산소재지에서 청석다리, 구룡목을 거쳐 산계곡을 따라 오르면 미산면 삼계리 판수굴마을로 넘어가는 판숫굴재가 나온다. 이 고개는 삼계리(三溪里)와 내평리(內平里) 주민들이 간재장을 보러 왕래하였고 그쪽 학생들이 주산중학교와 주산산업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이다. 특히 판수굴마을 주민들이 땔나무를 팔고자 나뭇짐을 짊어지고 이 고개를 넘어 간재장에 많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판수굴 마을에서는 장고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필봉(文畢峯)과 주걱봉(또는冑角峯)을 양쪽으로 두고 형성된 이 고개는 높이도 만만치 않지만 인근의 곰재와 간재재에 도로가 나서 편리하게 이용하게 되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겨버려 지금은 희미한 옛길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한편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판수굴은 판서굴(判書谷)이라고도 하는데 판서가 날 마을이라 판서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 이 고개의 판수굴쪽에 평범한 분묘가 1기 있는바 이 묘자리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이라고 하며 그곳에 묘를 쓴 집안의 후손이 서천군 비인면에 살았는데 해방 후 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둘이 판사가 됨으로서 사람들은 3판사가 나왔다고 판수굴이 아니라 판사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4) 영얼이재

 이 고개의 이름은 영얼이재가 아니라 이응어리재에서 ‘이응’을 한 글자로 압축하여 불러야 맞다. 'l'와 ‘ㅗ’를 합하면 ‘ㅛ’가 되듯이 ‘ㅣ’와 ‘ㅡ’를 합하여 한 글자로 발음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글자는 없으므로 그냥 영얼이재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삼곡리 동실마을에서 늑전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늑전(勒田)이나 삼계리 주민들이 간재장을 보거나 땔나무를 팔기 위해 주산면 소재지로 나올 때 이용하던 고갯길이었으며 그쪽마을에 사는 학생들이 주산중학교나 주산산업고등학교에 다니고자 넘나들던 고개다.

 옛날에는 여러 사람들이 다녔으므로 큰 길이 형성되었었지만 인근의 곰재에 큰 도로가 생기고 교통이 발달하자 영얼이재는 발길이 점점 끊어져 지금은 길의 흔적만 남아있다. 이름이 왜 영얼이재일까? 달이 항상 휘영청 걸려있다는 뜻으로 영월(迎月)이재라 불렀다는 말도 있다.

 이곳 고개 옆으로 테뫼식 산성의 흔적이 있다. 그래서 어떤 향토사학가는 테뫼식 산성을 멀리서 보면 용이 오르는 형상이라서 용오리재라고 이름 지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도 맞는다는 생각이  선뜻 들지 않는다. 만약 용오리재가 변한 말이라면 곰재에서 멍덕봉으로 그리고 이곳 용오리재를 거쳐 금암리(金岩里)쪽으로 길게 이어진 산줄기를 용으로 가정하여 이곳이 용의 허리쯤 해당되지 않을까? 그래서 용허리재라고 한 것이 변하여 용오리재가 된 것은 아닐까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5) 곰재

 곰재는 동오리(東五里) 곰재마을에서 미산면의 평라리(平羅里)로 이어지던 고개인데 지금은 보령댐이 생겨 평라리는 수몰되고 늑전리로 이어지고 있다. 미산면의 평라리, 용수리(龍水里), 늑전리, 봉성리(鳳城里), 은현리(隱峴里), 옥현리(玉峴里), 도흥리(都興里), 도화담리(桃花潭里)를 비롯하여 부여군(扶餘郡)의 외산면(外山面), 옥산면(玉山面)등지에서 간재장을 나오거나 주산중학교 및 주산산업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장꾼들과 학생들이 넘든 고개, 수많은 사람들의 숱한 애환을 간직한 이곳 곰재는 그 옛날의 높고 힘들던 기억은 추억 속에 묻힌 채 지금은 군도 1호로 정하여 도로가 나는 바람에 고개정상을 수 십 미터 낮추고 2차선으로 확포장하여 수시로 자동차가 넘나드는 편리한 고개가 되었다.

 풍천임씨 족보에 웅치하 오상동(熊峙下五常洞)이란 글귀가 보이는 것을 보아 곰재는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면서 이용하였던 것 같다. 산의 형상이 곰의 형상이라서 곰재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고 고개 아래 동오리 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끝 부분에 여러기의 묘소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이 곰의 발바닥에 해당하는 명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고개의 7부 능선 쯤 동오리 쪽으로 큰 소나무가 한그루 잡목 속에 서 있는데 일제시대 왜놈들이 양민을 학살한 나무라고 하며 그 한이 서려 지금도 나무를 건드리면 피가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 곰재는 미산쪽 내륙과 주산면을 잇는 가장 큰 고개였으며 지금은 자동차가 수시로 넘나드는 편리하고도 중요한  도로를 머리에 이고 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 잠시 차를 멈추고 내려다보면 눈앞에 그득하게 넘실대는 푸른 보령호가 그림같이 펼쳐져 답답했던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옛날 고생하며 허이허이 넘든 고개의 추억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것이다.

 

6) 구듬재(아리랑고개)

 야룡리(野龍里) 송섬말 앞을 지나 수산굴을 거쳐 신구리(新九里) 구산(龜山)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구듬재라고 불렀는데 1950년대 말경부터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이 생겨나더니 이제는 완전히 아리랑고개가 되어 구듬재라 하면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른다.

 구듬재는 신구리와 서천군(舒川郡)의 비인면(庇仁面), 서면(西面)사람들이 주산면 소재지나 웅천장, 간치역을 다니고 그쪽 방향에 사는 학생들이 주산소재지로 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넘나들었고 주산면이나 웅천의 주민들이 비인장이나 서면쪽으로 나들이 할 때 이용하던 고개이다. 구듬재라는 말도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데 어느 족보에 구음치(九音峙)라고 기록한 것이 있긴 하지만 한자로 표기하기위해 억지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득이 구음치라 한다면 차라리 고개 너머에 거북뫼(龜山)가 있으니 거북구(龜)자를 써서 구음치(龜音峙)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거북이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니 그도 역시 맞다 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아리랑 고개는 어떻게 생겨난 이름일까? 1950년대에는 사람들이 아리랑을 곧잘 부르곤 하였는데 그중에 ‘아리랑고개 열두고개’라는 노래가 있어 그 가사를 보면(원래 가사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 사람들이 부르던 가사를 그대로 적었음)

“꼬불꼬불

첫째 고개 첫사랑을 못 잊어서 울고 넘든 이고개요 꼬불꼬불

둘째고개 둘도 없는 임을 따라 스리 슬쩍 넘든 고개 꼬불꼬불

셋째고개 셋방살이 삼년 만에 울고 넘든 이고개요 꼬불꼬불

넷째고개 네가 내가 내 간장을 스리 슬슬 녹이던 고개 꼬불꼬불

다섯째 고개 다홍치마 입에 물고 스리 슬쩍 넘든 고개 꼬불꼬불

여섯째고개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두 고개-아리랑”

이라고 하는 내용의 노래인데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 노래를 아이들도 곧잘 흥얼대며 다녔다.

 구듬재는 서천군계(舒川郡界)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하여 구산마을을 지나 고갯마루까지 오르려면 약 1km의 길찬 길이다. 이 긴 길을 어린학생들이 책봇따리를 짊어지고 꼬불꼬불 걸어 오르노라면 얼마나 어렵고 지쳤겠는가? 그늘이 없어 뙤약볕이 쨍쨍 내려 쪼이는 고갯길을 오르면서 아이들은 ‘아리랑고개 열두 고개’를 흥얼거리다보니  굽이굽이(열두굽이는 아니지만) 돌아가는 산길이 마치 열두 고개를 넘어가는 아리랑고개 노래가사와 흡사함을 느끼고는 “야 이곳이 아리랑고개 열두 고개다, 아리랑고개야”라고 말하기 시작하였고 하나 둘 아리랑고개라고 부르다 보니 그 수가 늘어나고 오랜 세월을 지나다보니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그 밑의 아이들이 또 그렇게 부르다가 어른이 되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아리랑고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은 구듬재라고 하면 40대 이하에서는 알지 못하는 옛 이름이 되고 말았다.

 

7) 짓재

 짓재는 큰짓재와 작은 짓재가 있다.

 큰짓재는 주야리(珠野里) 답박굴에서 수랑굴 뒷부분 산을 통하여 유곡리(柳谷里) 버들마을로 통하는 고개로서 버들마을 사람들이 웅천장이나 간치역을 다닐 때 이용하던 고개이다. 기차를 이용하여 운송하는 비료, 시멘트 등의 각 부락 운반이나 역 앞 농협창고에서 수매하는 보리, 벼 등 양곡을 집하시키기 위해 몰려들기 때문에 열차 승객 외에도 가끔씩 사람들의 왕래가 붐볐다. 그래서 유곡리 사람들이 양곡이나 비료 등을 지게에 짊어지고 이곳 큰짓재를 수십 명씩 줄지어 넘기도  하였다.

 작은 짓재는 유곡리에서 야룡리 송섬말로 이어지는 고개로서 유곡리 학생들이 주산소재지로 학교에 다닐 때, 그리고 그곳 주민들이 간재장을 다니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이다. 수많은 주민과 학생들이 아침저녁으로 넘든 작은 짓재도, 보리 가마와 벼 가마를 짊어지고 긴 행렬을 이루던 큰 짓재도  교통발달에 따라 이제 사람들의 발길은 뚝 끊기고 옛길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발길이 완전히 끊어진 그 희미해지는 길의 흔적을 잡풀들이 자꾸만 자꾸만 덮어가고 있다. 이름이 왜 짓재일까? 어떤 기록을 보면 지치풀이 많아서 그리 불렀다고 하기도 하는데 맞는 말일까?

 

8) 팽나무재

 야룡리 산조개마을 앞을 거쳐 회룡(回龍)마을에서 고갯마루를 이루고 초석굴을 지나 괴벵이 마을 앞 삼거리로 이어지는 고개다. 구듬재를 넘어 주산 소재지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괴벵이, 보검동, 송섬말, 수랑굴, 답박굴마을 사람들이 간재장을 보거나 학교를 다닐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고갯마루에 커다란 팽나무 한 그루가 서있어 팽나무재라 하던 것이 국도21호가 확장 되면서 약 20년 전에 나무를 베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이 고개가 왜 팽나무재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2003년 주산면사무소에서 옛날 나무만은 못하지만 약 50년 수령의 팽나무 한그루를 고갯마루에 심고 조그만 가로공원을 조성함으로서  이름에 걸 맞는 팽나무재가 되었다. 

 

9) 함정고개

 주산초등학교(珠山初等學校)에서 철도를 건너 금댕이(金堂) 마을을 지나면 이 고개가 나오고 황율리(篁栗里)로 이어 진다. 월현고개와 더불어 주산에서는 가장 넘나드는 사람이 많은 고개이다. 고개라고 해야 야트막한 구릉에 불과하지만 황율리, 삼곡리(三谷里), 화평리(花坪里), 동오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곰재와 영어리재를 넘어온 미산면 사람들이 주산면 소재지를 왕래하기 위해 수도 없이 넘나들던 고개이다. 지금은 2차선으로 포장된 군도1호로 관리 하고 있어 자동차의 왕래가 빈번하지만 아직도 가까운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걸어서도 곧잘 넘나든다.

 옛날 이곳 산줄기를 타고 산짐승들이 많이 이동하였기 때문에 고갯마루부분에 함정을 파놓고 빠지는 짐승을 잡았다고 하며 그래서 이름을 함정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10) 월현고개

 황률리에서 삼곡리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로서. 함정고개와 마찬가지로 야트막한 구릉이다.

고개를 넘으면 중간부분에 월현(月峴)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 남전마을 쪽으로도 길이 이어지는데 남전마을에 다달으면 다롱고개(달은고개)라는 곳도 나온다. 이 다롱고개와 월현마을 모두가 달(月)과 관련된 지명으로 보여 지며 이곳 월현마을에서 건너다  보이는 영월이재(영어리재)와는 이름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11) 용가마재

 두란이 마을 앞들을 건너면 작은 산이 시작된다. 산과 논사이로 된 길을 따라 오르면 용가마재로 이어지고 이 고개를 넘으면 새태말이 나온다. 두란이마을과 장작굴마을 사람들이 간재장을 오가거나 학생들이 소재지의 학교에 다니고자 이 고개를 많이 이용하였지만 지금은 어쩌다 한 두 사람씩 오갈뿐 대부분의 학생도 일반인도 제배마을 앞으로 돌아서 21호 국도를 이용한다. 고개정상에는 서낭당이 있어 서낭댕이 고개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오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도 하고 가끔씩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조금은 남아있다. 왜 용가마재라고 하였을까? 어느 기록에는 산의 모양이 가마처럼 생겨서 그랬다고 하는데 가마는 무엇일까?

한편 야관이, 새태말, 산조개, 회룡마을 등을 합해서 회룡부락이라고 하는 바 이 부근을 용과 관련지어서 이고개가 용의 가마(머리가마)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12) 서낭댕이재

 갓주렴산마을 뒷산에서 송림(松林)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송림마을 사람들이 간재장을 다니거나 그곳 학생들이 주산소재지의 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넘었고 갓주렴산 마을사람들이 땔나무를 하기위하여 넘나들던 고개다. 송림마을에서는 가첨재 또는 가침재라고도 한다. 산길이 너무 멀어 이제는 이용하는 사람이 전혀 없고 잡목과 풀들이 길을 가로 막아 옛길의 흔적마저 사라져가고 있다. 서낭당도 없어진지 오래여서 그런 게 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따름이다.  최근 갓주렴산 마을에서부터 이곳 고갯마루를 거쳐 주렴산의 긴 능선을 타고 국수봉(國帥峯)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가끔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13) 한치재

 송림마을에서 마을 북쪽에 있는 이곳 한치재를 넘어서면  웅천지역이 나온다. 산길을 따라 계속가면 절굴을 지나 접동굴을 거쳐 웅천 소재지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옛날 송림마을사람들은 웅천국민학교(熊川國民學校)를 다닌 사람도 있고 웅천장과 가까워 생활권이 그쪽임을 이유로 웅천면에 편입을 원하는 사람까지도 있었다. 산업도로가 나있어 자동차들이 왕래함으로서 지금도 이곳 한치재는 많이 이용되고 있다.

 

14) 그 밖의 고개들

-금암리: 공판재, 뒷굴재, 바람재, 용산재, 음동말재

-야룡리: 방죽안재, 벼락재, 보금동재, 불은골재, 수랑굴재, 수박    재, 야관이재, 참나무재

-주야리: 답박굴재, 장작굴재(두란재), 목넘어재, 진등재, 함박굴재

-신구리: 뒤재빼기, 매봉재, 소재, 안터재, 안터재빼기, 재룡고개,   중낭굴재빼기

-유곡리: 두리재, 둥구재, 말무덤재, 솔재, 윷판재, 장굴재

-증산리: 돌고개재빼기, 동산재, 망굴재, 매바위재, 매봉재, 사청    재, 육판재

-창암리:도롱굴재(제배재), 불무재(진등재), 성재, 숯굴재, 지정이재

-화평리: 뒷굴재, 삿갓재, 상강재

-동오리: 당산재, 두밭재, 수문재(수멍재, 무네미) 보두막재, 불걱   재, 산맥이재

-삼곡리: 샘실재, 소리개재, 쇠꼬지재, 시그내내, 신전재, 즉은 말   재빼기

-황률리: 가나무재, 공판재, 소리개재

 

3 맺는 말

 고개는 산을 모태로 한다. 산이 유달리 많은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산을 넘나드는 크고 작은 고개가 많았다. 교통이 수월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산을 넘어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고 마을과 마을을 질러 갈 수 있는 산등성이의 낮은 부분, 즉 '고개'를 사람이 다니고 우마차가 물자를 싣고 넘나들었다.  고갯마루에 사람들은 서낭당을 세워 민속신앙의 대상지로 삼기도 하였고 그곳 돌탑에 오가는 길손들이 돌멩이를 던지며 안녕을 빌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고개 하면 높고 험준한 느낌보다는 완만하고 무엇인가 정감이 가는 듯 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산줄기의 가장 낮은 안부를 이용하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고갯길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뙤약볕을 받으며 넘을라치면 그 어려움이야 겪어본 사람이면 다 아는 것이고 더구나 배라도 고플 때 넘어가려면 터덕터덕 발걸음이 천근이나 되는 듯 무겁기도 하였으니 고개야말로 힘들고 어려움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고개를 오르내리는 것을 인생에 비유하기도 했다. 구비 구비 넘어가는 우리네 인생살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눈물을 뿌리며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를 열두 고개로 표현하는 것도 시련과 고난의 연속인 인생 고개를 표현한 것이다. “고개 중에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는 보리 고개”라는 속담도 그래서 생긴 것 아니겠는가,

 이제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갯길을 넘어야 할일도 없어졌다. 시련과 고난의 인생고개도 희망과 행운이 가득한 탄탄대로로 바꾸어 고급승용차를 타고 휘파람을 불며 즐겁게 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도움말 주신 분: 임시재 임명재, 임승관, 임승춘, 이상응, 김윤흠, 임택순, 이재해, 이진수,)

※실은 곳: 2005년 주산면발행 구슬뫼 이야기 /2006년 임근혁발행 향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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