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시루뫼 이야기

구슬뫼 2007. 8. 20. 17:33
 

 시루뫼 이야기


 충남 보령시 주산면에 있는 증산리(甑山里)의 증산은  시루뫼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증산리의 중심되는 대표적인 마을이 시루뫼인데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증산리라고한 것이다. 시루뫼란 무슨 뜻일까?

 이 마을을 왜 시루뫼라고 하였을까?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무척 궁금하게 생각해왔고  일부 사람들이 마음대로 짐작하여 그럴 듯 하게 유래를 대는 등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어 전하기도 하므로 이를 바르게 잡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1 시루뫼 주변의 마을들과 주위환경

 증산리는 1리부터 4리까지 네 개의 행정리(行政里)로 이루어져 있는데 1리는 시루뫼, 2리는 성너머, 방죽굴, 3리는 송림, 4리는 돌고개와 새터말 등의 자연마을들로 이루어져 있는바 주렴산(珠簾山)의 주봉인 국수봉(國帥峯)을 등지고 앞에는 확 트인 서해바다를 바라보는 곳이었으나 1960년대 1차 간척공사(干拓工事)로 마을 앞 대부분의 바다가 간척지로 변하고 1990년대에는 부사간척공사(熊川邑 小篁里 - 舒川郡 西面 扶砂里를 잇는 간척공사)로 인하여 나머지 바다도 완전히 간척지로 바뀌면서 6km정도 나가야 바다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변해버려 드넓은 평야만 바라다 보일뿐 바다는 내음까지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이제는 서해안고속도로가 통과하여 수많은 자동차들이 오가는 마을이 되었다.


2 시루뫼의 역사적 고찰

 이곳마을은 먼 옛날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정착하여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인류의 정착이 대개는 바닷가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보편적인데 이곳 시루뫼도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인류의 정착이 꽤나 일찍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패총이나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고 백제시대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토성(土城)의 흔적이 있을 뿐이다. 한편 조선조 인조(仁祖)때 이덕온(李德溫)이라는 사람이 낙향하여 살음으로서 그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시루뫼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이덕온은 전주(全州)이씨로서 선조(先祖) 18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24년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공신과 관련이 있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호성공신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의 대가(大駕)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는 데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공신 훈호(勳號). 원종공신(原從功臣)은 공신의 자손이나 임금의 친척에게 내리는 특전으로 죽을죄가 아니면 항쇄(項鎖;목에 칼을 씌우는 것)를 하지 않았으며, 또 공신의 자손으로서 윤상(倫常)이나 장도(贓盜)에 관한 죄로 장(杖)·류(流) 이하일 때에는 속죄(贖罪)했다.>에 책록 되었고 좌승지(左承旨)에 올랐다. 후원(喉院)에 재직시 학정(虐政)을  간(諫)하다가 삭출(削黜)되었고 이곳 시루뫼에 낙향하여 살았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1623년 光海君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仁祖)을 옹립한 사건, 李貴, 金自黙, 김류, 李适등이 주도하였음.>후 복원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여 살았다. 충청수군절도사영(忠淸水軍節度使營=오천에 있었음)의 성안(城內)에 있던 영보정(永保亭)< 忠淸水使營안에 있던 亭子>

에 걸어 놓았던 영보정효등왕각체계해현판(永保亭効藤王閣體癸亥懸板)은 그가 지었던 것으로 상당한 명작이라고 하는데 1901년 영보정이 헐릴 때 이 마을에 사는 후손이 거두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3 시루뫼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

 이 마을 사람들은 떡을 찌는 시루를 마을이름과 연관 지어 말한다. 마을이 둥그스름한 떡을 찌는 시루와 비슷하다하여 시루뫼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마을 뒷산(주렴산)의 줄기 중 바위가 많은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둥그스름하니 떡시루 같다 해서 시루봉이라고 하며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서 시루뫼라고 하였을 것이라고도 한다. 또 이미 고인이 된지 10년이 넘은 이 마을 지식인 한분은 주렴산의 이름을 따서 구슬뫼(珠山)라고 부른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구자를 빼고 슬뫼라 하다가 스르뫼로 변하고 다시 시루뫼로 변한 것 아닐까라고 추론하기도 하여 그게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시루라는 것은 성과 같은 의미로 쓰여 졌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시루증(甑)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무수히 많은데 그곳에는 반드시 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 보령관내만 해도 청라면(靑蘿面) 향천리(香泉里)에 시루생이(甑城)가 있는데 이곳에 향천리 산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 시루뫼에도 토성의 흔적이 있다. 성넘어 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길고 작은 산줄기가 바로 토성인 것이다. 마을 이름이 성너머인 것은 토성의 너머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이다. ‘시루뫼’는 성이 있는 산(마을), 성을 넘으면 ‘성 너머’ 마을 얼마나 자연스럽고 정학하게 들어맞는 이름인가.


4 이웃마을 돌고개의 유래

 돌고개라는 이름도 석현(石峴)이라 하여 돌이 있는 고개에 있는 마을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돌고개마을에도, 돌고개재에도 돌이 거의 없다. 한마디로 돌이 귀한 곳이다.

옛날 간척지가 막아지기 전에는 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고 염전도 있었으며 길게 바다로 내민 곶(작은 반도)이었던 이 마을은 크고 작은 고깃배의 정박지였고 배에서 사용하는 돛을 보관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수많은 돛을 보관하는 곶, 즉 돛곶 이었던 것인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돛고개로 변하고 다시 돌고개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지금은 바다의 흔적조차 없어져 20대 이하 젊은이들은 이곳이 바닷물이 들어오던 곳이고 고깃배의 정박지였다는 걸 상상조차 못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는 돌고개라는 이름에서 돌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돌과는 관계없는 이름인 것이다.


5 전설

 마을앞 넓은 간척지평야는 옛날에는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였음은 앞에서 밝힌 바 있는데 마을 앞에는 모형이 소가 앉아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쇠섬, 소이섬, 우도(牛島) 등으로 부르는 섬이 하나 있다.

 아주 먼 옛날 서해바다에서 커다란 소 한 마리가 둥둥 떠 마을로 밀려오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이를 발견하고 “야- 소가 떠밀려 온다”하면서 큰소리로 외치니 소가 깜짝 놀라 몸을 돌려 웅천읍(熊川邑) 황교리(篁橋里)쪽으로 향한 다음 그 자리에 머물러 앉으면서 섬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 마을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소가 시루뫼에 들어왔거나 아니면 시루뫼를 향하여 앉았거나 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다면 시루뫼가 부자마을이 되었을 텐데 황교리를 바라보고 앉는 바람에 황교리가 부촌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황교리는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고 백합양식으로 소득을 올리는 등  부자마을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쇠섬에서 시루뫼 방향으로 자갈로 된 구불구불하고 긴 장불이 있어 사람들은 이를 소를 묶어놓은 밧줄이라고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 장불은 길게 이어져 동구섬이라고 하는 작은 섬에 닿았고 이 섬을 소를 매어놓은 말뚝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이 자갈로 이루어진 줄은 언젠가 끊어질 것이며 그러면 소가 뛰어나게 되고 소가 뛰어나면 황교리는 망하고 증산리가 부자마을이 된다는 것이다.

 묘하게도 1960년대 1차 간척공사와 1990년대 2차 부사간척공사로 인하여 바다는 없어지고 황교리는 공군 사격훈련장이 이웃마을인 소황리에 들어서는 바람에 소음피해가 심하여 대부분 외지로 이주하고 몇 가구 남지 않은 상태로  변하였고  증산리는 넓은 간척지평야로 인하여 옛날보다 훨씬 부자마을이 되었으며  쇠섬은 업자가 토석을 채취하는 바람에 섬의 반 정도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나무들도 대부분 훼손되어 볼 상 사납게 변했다.

 소를 맨 밧줄(장불)도 소를 매어 놓은 말뚝(동구섬)도 없어지고 쇠섬은 훼손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니 “소가 떠나면 황교리는 망하고, 증산리는 부자가 될 것”이라는 사람들의 입방아가 현실로 나타난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6 맺는 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처럼 자연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아니 10년은 옛말이고 요즈음에는 5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해야 될 정도로 자연의 변하는 속도가 빠르다. 토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왜구나 해적들로부터 방어를 맡았던 중요한 지역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시루뫼마을이 조선시대 중기에는 좌승지를 지낸 한양양반의 낙향으로 인근에서 주목받는 마을로 변하고 후에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로, 또다시 넓은 간척평야마을로 변하더니 이제는 고속도로가 개설되어 수많은 자동차들이 통과함으로서 고요한 시골의 적막마저 깨트리는 환경으로 변하였다.

 그런 변화 속에서 마을이름도 자연스럽게 지어지고 불리 워 지면서 세월 따라 변하기도 한다. 우리가 쓰는 말도 세월 따라 변한다. 언제인가 성을 시루라고 불렀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부르질 않는다. 시루라고 부를 때 지어진 ‘시루뫼’가 시루라는 말이 성으로 통하지 않는 오늘에 와서는 엉뚱하게도 떡찌는 시루로 잘못 해석하여 마을이름의 유래를 떡시루와 연관 짓는 것이다.

 앞으로 50년 후, 100년 후에는 우리의 환경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우리가 쓰는 말은 얼마나 변할까? 마을이름은 또 어떻게 변할까?


(참고문헌: 보령군지, 대보문화 창간호, 도움말씀 주신 분: 구자원, 이현호, 윤용희, 이진수)

※실은 곳: 2005년 발행 구슬뫼 이야기/ 2006발행 향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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