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보령의 소재지마을들

구슬뫼 2007. 8. 22. 13:44
 

 유서 깊은 마을들을 찾아서

                                                                                                 임    근    혁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오랜 세월동안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글자 그대로 재난이 없이 영원히 편안함을 지켜온 이 고장 「만세보령(萬世保寧)」의 줄기를 이루는 각 면의 소재지는 과연 어떤 곳인가 미욱한 발길이나마 더듬어 보고자 한다.


1 보령의 발상지(發祥地) 주포면 보령리(保寧里)

 보령리의 역사는 먼 옛날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로국(駟盧國)의 일부가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며 백제시대에는 신촌(新村)현, 통일신라시대에는 신읍(新邑)현,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보령현, 1895년(고종 32년)에는 보령군으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보령군 북부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다가 1914년 3개 군 통합, 군청이 대천으로 옮겨지자 긴 세월동안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역사의 장으로 묻은 채 조용한 시골면 소재지로 쇠락하게 되었다.

 보령군청이 있던 시절에는 주포면 읍내리라고 하였으나 행정구역 개편(1914)때 주포면의 원당리(元堂), 사청리(射廳)의 각 일부와 장척면(長尺)의 상리(上), 하리(下) 각 일부를 합하여 보령리라 하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상리(上), 중리(中), 하리(下), 다만, 당산밑, 성재, 역구렁목, 향교말, 생저골등이 있고 산으로는 봉당리로 가는 구상재, 청라면으로 넘어가는 질재, 탑산, 배재산, 진당산(鎭堂山)등이 있고 삼시랑골, 참새골 등의 골짜기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고려 현종 때 쌓았다는 석성(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146호)이 정문부분 일부와 동쪽부분 일부만이 그 모습을 보일 뿐 군데군데 성터의 흔적을 짐작케 하는 주춧돌만이 남아 있으며 그 정문이었던 보령관아문(保寧官衙門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40호)이 보존되고 있는데 인조 때의 건물이라고 하며 그 현판인 「해산루(海山樓)」글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청라면 출신 이산해(李山海)의 친필이라고 구전하고 있다.

 한편 이산해는 선조 때 인물이고 이 건물은 그보다 훨씬 뒤인 인조 때 건물이라고 하니 이산해의 글씨라는 것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향토사가도 있으나 현재의 건물 이전에도 문루는 있었을 것이며 그 현판을 개축한 건물에 다시 걸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연대 자체를 가지고 특정인의 친필이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 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친필 여부를 고증하는 게 어떨까 생각된다.

 이 밖에도 탑산에 세워졌던 것을 1974년 보령중학교 교정에 옮겨 놓은 보령리 5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139호), 조선경종 3년(1723)에 지었다는 보령향교(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135호)등이 있고, 진당산 남쪽 기슭에는 50여개의 백제 고분이 무리를 지어 있는데 그 중 12기를 1984년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는 등 사학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한 해발 351m의 진당산 정상 부분에는 군데군데 옛 산성의 흔적과 건물터가 남아 있고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기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산성 석축 주 1810척 유일정 금폐(唐山城石築 千八白十尺 有一井今廢)라고 하여 약 830m의 돌로 쌓은 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 지방의 진산인 진당산을 등지고 마을 양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좌청룡 우백호처럼)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적으로부터의 천연적인 방어토성을 이룬 이곳은 수 천년동안 한 고을의 소재지로서 큰 몫을 담당하여 왔으나 이제는 선인들의 혼이 담긴 문화 유적만이 조금씩 남아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국도 21호와 장항선 철도가 마을 앞으로 지나가고 오천으로 가는 지방도가 이곳에서 시작되어 교통이 편리하며 면사무소, 중학교, 초등학교, 지서, 농협판매점 등이 있는 소재지 마을이다.


2 새롭게 발전하는 주교면 주교리(舟橋里)

조선시대부터 주포면 주교리였던 곳으로 1989. 4. 1.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면으로 승격, 분리됨으로서 소재지 마을이 되었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 앞에 배다리가 있었으므로 배다리라고 하였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해 주교(舟橋)라고 부르게 되었다.

 국도 21호와 철도가 지나며 보령화력본부로 가는 산업도로가 이곳에서 시작되므로 교통이 매우 편리할 뿐만 아니라 보령화력본부의 규모 확장과 대천시에서 가까운 입지 조건 등을 안고 이 마을의 발전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특히 1989년 주교면 승격 이후 그 발전이 눈에 띄게 가속화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면사무소, 농협, 지서 등이 있는 울개, 참새골, 듬붓골(이상 1리=鳴溪). 배다리, 솔고지, 거어리, 대텃골(이상 2리=舟橋), 궁전안, 팔봉(이상 3리=八峰)등이 있는데 울개는 개울물이 흘러오다가 이 마을 앞에서 갑자기 소리를 내어 흐른다고 하여 울개(鳴溪)라고 하였다하며 거어리(巨於里)는 마을 지형이 거위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라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대텃굴은 대동(臺洞)이라고도 하는데 풍수설에 따르면 명당터가 있다고 하여 부른 이름이라고 하며 이 마을을 둘로 나누어 상대동, 하대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밖에도 개저지들, 유틈보 등의 지역이 있고 배다리에서 대텃굴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성황당이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소원성취를 빌곤 하였으나, 지금은 고개가 낮추어지고 산업도로가 훤하게 뚤려 성황당의 흔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런 것이 있었던가 조차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가까운 주포면 관산리의 농공단지 가동과 추진 중에 있는 50만평 관창공단, 전문대학유치, 그리고 나날이 커져가는 보령화력본부의 규모 확장 등 이 마을의 주위에서 전개되는 활발한 개발사업들로 인하여 이 마을의 앞날이 그 어느 곳보다 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조선시대 충청수군의 총본부 오천면 소성리(蘇城里)

 조선말 오천군 천동면(天洞面)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군서리(群西), 군동리(郡洞), 내웅리(內雄)의 일부를 합하여 이곳 성의 이름 고소성(姑蘇城)을 따서 소성리(蘇城)라고 하였다.

 마을 이름은 역시 성을 중심으로 붙인 게 많은데 성안, 남밖이(또는 남문밖), 서밖이(또는 서문밖), 밤까시, 장터, 시내(이상 2리=新東)등이 있고 이 밖에도 중말, 싱거댕이, 산냇골 등의 마을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기도 한다. 고개로는 교성리로 넘어가는 솟재(작은고개, 큰고개)와 담재가 있고, 산으로는 조서산(鳥棲山), 북배산(北拜山), 남산(南山)등이 있다. 이 곳 오천항은 고려시대에는 회이포(回伊浦)라고 불렀는데 왜구들의 침략이 잦자 조선태조 5년(1395)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설치되었고(당시에는 송도에 설치하였고 후에 이곳으로 이전함), 세종3년에는 그 명칭을 도안무처치사(都按撫處置使)로 고쳤으며 세조대에 비로소 수군절도사로 승격이 되었는데 성곽은 중종5년에 쌓았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허물어지고(수원성 복원 시 이곳 돌을 많이 허물어 갔다는 구전이 있음) 서문문루와 북동쪽부분 약 1km만이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9호로 관리하고 있다.

 옛 수영의 건물로는 장교청(將校廳)1), 진휼청(賑恤廳) 그리고 공해관(公廨館)이라고 현판을 붙혀 놓은 삼문1동이 남아있고 이곳을 거쳐 간 수군절도사와 관리들의 치적을 기리는 송덕비 22기가 보존되고 있으며 마을 뒤 상사봉 중턱에는 신라 진평왕(眞平王)7년 즉 서기680년에 담혜선사(潭慧禪師)가 창건하였다는 선림사(禪林寺, 1860년 개수, 전통사찰 등록필)가 오랫동안 많은 신도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원군으로 우리나라에 왔던 해군 함대 일부가 이곳 오천항에서 얼마간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그 당시 함대의 책임자였던 계금(季金)장군의 청덕비가 세워져(오천초등학교 뒤 언덕) 어민들이 출어하기 전에 이 비석에 안전을 비는 풍습이 근래까지 전해 왔었다고 한다.

 유서 깊은 고장치고 관계된 전설이 많은 법, 이 곳 소성리 역시 애틋한 전설이 여러 가지 있어 대표적인 것 두 가지만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오천앞바다에 쌍오도(雙鰲島)라는 두 개의 작은 무인도가 있는데 조선 초 한양 김대감집 아들이 이곳에 와서 과거공부를 하던 중 정변이 일어나 반대파인 이대감이 김대감의 일족을 멸하고 그 아들을 찾아 죽이려고 이곳에 군선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 대감의 딸은 부모들과는 반대로 김대감 아들과 사랑하는 사이였으므로 그를 피신시키려고 남장을 하고 먼저 이 곳 쌍오도 중 한쪽 섬에 당도하였는데 뒤이어 군선이 저쪽 김도령이 있는 섬으로 다가가고 있는지라. 두 남녀는 서로 마주보며 울부짖다가 물에 뛰어들었고 군선들이 그들을 잡으려 하자 벼락이 치면서 배는 날아가고 두 남녀는 하늘로 올라갔으며 양쪽 섬 쌍오도에는 각각 소나무 한그루씩이 생겨났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옛날 수군 절도사영 수문장인 최장사가 한밤중에 전쟁터에 나간다는 비상 명령을 받고 수사영으로 가던 중 고개에서 커다란 호랑이가 길을 막고 못 가게 하였다고 한다.

 최장사는 평소 싸움터에 나가 자기의 용맹을 떨쳐 보이려고 마음먹었던 차라 집요하게 길을 막는 호랑이를 때려죽이고 출전하여 전공을 세운 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게 되었는데 그가 죽던 날 그가 살던 선림사 부근에 큰 비가 오면서 천둥이 치고 큰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산위에 큰 바위가 솟아오르며 고함소리가 호랑이 울음으로 변해 갔다고 한다.

 그 후 마을 남자들이 까닭 없이 죽어가니 마을 여인들이 산신령이 노했다고 이 바위에 매년 제사를 지냄으로서 무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선림사 옆으로 우뚝 서있는 호랑이 바위는 최장사의 죽을 운명을 가로 막지 못한 한을 안고 묵묵히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좁고 길다란 만(灣)의 중간부분에 자리한 이 곳 오천항은 바다로 나가면 크고 작은 70여개의 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풍랑에도 배들을 안전하게 정박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심이 깊고 입구의 빠른 물흐름 등 천연적인 군사 요충지로써 500년동안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 일대의 수군 총본부로써 그 기능이 대단하였으나 1895년 충청수군절도사영이 폐지되면서 전형적이 어항으로 탈바꿈하였던 것이다.

 이웃 주포면으로 나가는 지방도와 청소면으로 나가는 군도, 영보리로 가는 도로, 그리고 교성리로 넘어가는 도로가 있어 교통은 좋은 편이고 각 유인도를 운항하는 여객선이 운행하고 있어 섬과의 교통을 담당하고 있다. 면사무소, 초등학교를 비롯한 관공서와 수협공판장등 어업과 관련한 시설들이 있어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다. 시원한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 싱싱한 생선회에 소주 한잔 걸치는 낭만을 즐길 수 있고 충청수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선인들의 혼을 느껴 볼 수 있는 곳이 이곳이 아니겠는가. 보령 8경중「오천항 귀범(鰲川港歸帆)」싯귀를 떠올려본다.

漁舟商船戰浸浮    고깃배 장사배가 이에 떴다 잠겼다.

朝發暮歸遠近洲    이곳저곳 바닷가에 왔다 갔다 한다.

帆受順風任自去    돛대는 순풍 받아 미끌 듯 떠나는데

䲔波出沒向鰲頭    큰 물결은 鰲頭향해 들락날락 하누나


4 궁(宮)이 있었다는 천북면 하만리(河滿里)

 조선 말기에는 홍주군(洪州 : 지금의 홍성)지역이었는데 1901년 오천군 천북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 하궁리(河宮), 종평동(宗坪), 주항동(酒缸), 동산동(東山), 동음동(冬音), 두만동(斗滿), 원동(院), 화곡동(禾谷)일부를 합하여 하궁과 두만의 이름을 따 하만리라고 하였다.

 마을 이름으로는 면사무소, 지서, 농협, 우체국, 천북 초등학교등이 있는 하궁, 능재, 담안, 동편, 마룻들(宗坪), 곰새골(이상 1리=河宮), 샛뜸, 아랫뜸, 양편, 작굴(이상 2리=양편), 고만굴, 동음, 두룸개, 선바래기(이상 3리=학포), 대궁, 동산, 뒷들, 세집매. 원둣골(이상 4리=동산)등이 있는데 고만굴은 두만동(斗滿)이라고도 하며 마을 뒤에 높은 산이 둘러 있어 붙힌 이름이라고 하며 능재는 낙동리로 넘어가는 능무고개 아래에 있는바 능(陵)이 있다고 전하는 고개의 아래 즉, 능재(陵峙)아래에 있어 그리 부르며 담안은 옛날 아주 큰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담장 안쪽으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며 두룸개는 학포(鶴浦)라고도 하는바 개(바다)가 둘러 있는 곳이라 부른 이름이라고 한다. 마룻들은 두 냇물이 합해지는 곳에 큰 들을 끼고 있는 마을이라 그리 불렀다고 하며 세집매는 삼가천(三家川)이라고도 하는데 집 세가구가 살게 된 연유로 그렇게 불렀으며 원둣골은 마을 뒷산의 모양이 둥근 머리형이라서 붙인 이름이고 하궁은 조선 제14대 선조(宣祖)의 아우 하원군(河原君)의 궁이 있었던 마을이라서 하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동음마을은 학이 고기를 물고 있는 자세라고 하는데 노학수어형(老鶴守魚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로서 옛날부터 부촌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밖에도 박죽골, 수랑치기, 시름장굴, 당재, 맹이고개, 큰대봉등의 지명들이 전하고 있는 이 곳 하만리는 토질이 좋고 기후가 온화하여 일찍이 채소원예, 작물재배와 낙농의 발달로 선진국의 농촌 못지않은 높은 소득을 올리는 앞서가는 농촌, 살기 좋은 이상향을 가꾸어 온 곳이다.


5 기름진 들녘 청소면 진죽리(眞竹里)

 조선 말기에는 보령군 장척면(長尺)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상리(內上), 외상리(外上), 송암리(松岩), 진목정리(眞木亭), 마참리(馬站), 사동(蛇洞), 죽하리(竹下), 후동(後洞)일부와 청소면의 건정리(乾井)일부를 합하여 진목정리와 죽하리의 이름을 따서 진죽리(眞竹)라 하였다.

 지금은 청소면의 중심지로 면사무소, 지서, 우체국, 농협, 기차역등이 있고 상가들로 이루어진 진죽1리(坪林)와 아방세라믹이 위치한 진죽2리(竹下) 그리고 진죽3리(松德)와 청소국교, 청웅중학교가 있는 진죽4리(蛇洞)등 4개의 행정리로 나뉘어진다.

 자연마을 이름으로는 파리재, 참나무정이, 전마들(이상1리), 대숲말(2리), 덩굴말, 송암리, 평판너머(이상3리), 교동, 마차미, 뱀골, 샘봉, 검은배(이상4리)등이 있는데 이중 파리재는 여덟 사람의 부자가 살았다 하여 팔인재(八人財)라고 하던 것이 변하여 파리재 또는 파르재라고 하였다는 설과 파루(罷漏 : 오경삼점에 쇠북을 33번 치던 일)가 있었던 곳이라서 파루재, 또는 파르재라고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차미는 말에게 참을 먹이던 곳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며 우연의 일치일까? 선인들의 예지일까? 예부터 이름이 전해오는 샘봉에 1989년에 상수도 정수장이 설치되어 지역주민에게 물을 공급하고 있음은 이 지역을 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상념에 젖게 한다.

 한편 전마들과 관련한 설화가 있으니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부인의 설화」의 진원지가 이곳이라는 주장이 나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백제 시대 군용마를 기르던 이 곳 전마들에 개로왕이 순행 나왔다가 목수인 「도미」의 아내가 절세미인임을 듣고는 도미에게 억울한 죄를 씌워 두 눈을 뺀 다음 조각배에 실어 떠내려 보내고 그 아내를 취하려하자 아내는 월경중이니 며칠 만 말미를 달라는 핑계로 도망쳐서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서 눈먼 남편을 찾아 고구려로 망명하였다는 줄거리의 이 설화가 과연 이곳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전마들, 마차미, 도미가 살았다는 도미항, 그 아내가 울면서 물길을 살폈다는 상사봉, 그 아내가 태어났다는 미인도(美人島=永島)등 설화와 관련된 지명들이 주위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보겠으며 전문학자들의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6 원이 있었던 청라면 라원리(蘿院里)

 고려 및 조선시대에 출장하는 관원들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숙식시설인 원(院 )이 있던 지역으로써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기존의 청라면(청라동이라고도 하였음)의 원우리(院隅), 은선동(隱仙洞),상중리(上中), 지천리(芝川), 월치리(月峙)와 주평리(酒坪), 정산리(丁山)의 각 일부를 합하여 靑蘿院의 이름을 따서 라원리라 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원(院)이 있던 원머루(현 청라면 소재지)와 수랑들, 음안, 옹골(이상1리=院隅), 다리티, 새터, 위익랑, 아래익랑, 은선동, 자잣골, 새매(이상2리=上中)등이 있는데 은선동은 신선이 숨은 형국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다리티는 청양군 남양면으로 넘어가는 다리재 아래 있다하여 그 이름을 따서 다리티(月峙=달티)라고 하였다고 한다. 장군봉, 백월산(白月山), 성태산, 문봉산등이 병풍처럼 둘러선 아래 펼쳐진 이 지역은 골짜기가 많아 망매골, 초골, 범박골, 산의산골, 새냇골, 새터골, 쌈박골 등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말 왜군 초토사로 이곳에 주둔하였던 김성우(金成雨)장군이 장군봉에서 가지고 놀았다는 달바위(달걀바위라고도 부름)가 익랑마을에 있다.  한편 김성우의 묘가 익랑마을 뒤 야산에 있고 후손들에 의해 이 마을 도로변에 그의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이곳은 마을 뒷산에 묻혀 있던 많은 석탄으로 일찍이 광산촌이 형성되었고 30여년 동안 그로 인한 경제적 여유를 누렸으며 반면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광산 근로자들 때문에 인구가 늘고 주민성향이 변해 가는 듯 하였으나 이제 모두 폐광되고 외지인들도 대부분 떠나 가버려 다시 조용한 옛 농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산자락 여기저기 검게 쌓인 폐석더미들, 그리고 마을 구석구석에 아직도 묻혀 있는 검은 자국들이 광산촌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7 가장 오래된 소재지 남포면 읍내리(邑內里)

 조선말 남포군청이 있던 군내면(郡內)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중리(中), 동리(東), 남리(南), 서리(西)의 각 일부를 합하여 읍내리라고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냇가말, 동문밖, 성바끼, 성안, 저자거리등이 있는 바, 대개 남포성과 관련되는 이름이며, 냇가말은 냇가에 있다고 붙은 이름이고 저자거리는 옛날부터 시장이 섰던 지역으로 지금의 국도변에 해당하는 곳이다. 기록에는 지사시골 ․ 절터골 등의 계곡과 새현 ․ 도로당산 ․ 장승백이 등이 나타나기도 하나 지금은 어디인지 확인이 안되고 성주면으로 넘어가는 말재에는 성황당이 있어 오가는 길손이 돌을 던지며 소원 성취를 빌기도 하였다.

 옥마산 줄기를 등지고 있는 이 마을은 먼 옛날 백제 시대부터 남포지방(남포, 웅천, 주산, 미산, 성주면)의 소재지 역할을 해 온 곳으로 알려지고 있는바 고려 우왕(偶王)때 쌓았던 나성(羅城)자리에 조선 태조(太祖)때 다시 쌓았다는 둘레 700m, 높이 4m의 석성(石城)2)이 지금도 남아 있어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 10호로 관리하고 있으며, 그 안에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 65호인 남포관아문(藍浦官衙門=鎭西樓, 玉山衙門, 東幹)이 보존 관리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한 고을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하면서 번창하였던 이곳은 1914년 남포군의 폐지와 함께 그 세가 떨어져 지금은 평범한 시골 면소재지일 뿐으로 총 110호에 465면의 인구가 살고 있다. 면사무소, 지서, 우체국, 농업협동조합, 농지개량조합, 남포초등학교 등이 있으며 국도 21호와 장항선 철도가 지니고 있다.


8 읍 소재지를 향한 웅천면 대창리(大昌里) (주,읍이 되기 전에 쓴 글임)

 조선말기 고읍면(古邑)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천리(大川), 방축리(防築)와 습의면(習衣)의 벽동(碧洞)을 합하여 크게 창성하라는 뜻에서 대창리라고 하였다.

 장항선 철도가 개설되고 웅천역이 생긴후 1928.4. 5. 대천리(구장터)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 곳 대창리로 옮기면서 시장(5일장)까지 이전시켜 갑자기 이 지역이 늘어나가 시작하여 지금은 보령군에서 가장 크고 도시형태가 갖추어져가는 소도읍이 되었다.

 마을 이름을 대창리라고 지어서 크게 번창한 게 아닐까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게 한다.

 장항선 철도와 21호 국도를 끼고 있는 이곳은 면사무소, 지서, 상가등으로 이루어진 시장터(1리)와 대창초등학교가 있는 남댕이(南塘), 새터말, 원굴, 육굴(이상2리), 농협, 우체국 등이 있는 소재지일부와 수차, 그리고 동일석재공장이 있는 새터(이상3리)접동굴, 절굴(이상4리), 한내 ․ 어리생이 ․ 농박굴(이상5리), 방죽굴 ․ 웅천초등학교가 있는 학교 앞(이상6리)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마을 뒤로는 운봉산(雲峯山)과 성동리로 이어지는 중재(中峙)가 있다.

 이 마을 남쪽 주산면 경계부근에 철도에 인접한 수십 미터 바위절벽이 있는 바 1960년대부터 이곳에 철도자갈 공장을 설치 20여 년간 철도자갈을 공급해 오고 있다.

 한편 이곳은 도로변에 눈부분이 움푹 패인 돌미륵이 한기가 서 있어 미륵모퉁이라 부르는데 이 돌미륵과 관련한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내용은 앞의 ‘운봉산’편에 있으므로 생략함)

또한 접동굴에서 주산면 증산리쪽으로 가면 한티재라는 고개가 나오는데 그 곳 못 미쳐 말무덤이라는 곳이 있는바 옛날에 황장군이라는 사람이 전쟁터에 나가 죽게 되었는데 그의 말이 주인의 머리를 물고 이곳까지 돌아와 주인의 장례를 지낼 수 있었다고 하며 사람들이 그 말의 충성에 감복하여 말도 후히 장사지내 주었다는 애틋한 설화가 구전으로 전하고 있기도 하며 골짜기 아래에는 말에 물을 먹였다는 갈마수라는 지역도 있고 절골에는 광암에 있었던 황정직(黃庭直), 황유업(黃有業), 두 사람의 효자각을 1990년도에 이전시켜 나란히 세워져있다.

 한편 대창리를 안고 대천리와 노천리를 경계로 흐르는 웅천천은 옛날에는 한내(대천의 한내와 구분하여 남포한내라고 부름)라고 부르던 것을 근래에 와서 하천을 관리하는 행정상 용어로 웅천천이라고 함으로써 변하게 되었는데 이 웅천천은 물이 맑아 보호어종으로 지정된 은어를 비롯하여 참게, 메기, 뱀장어 등 맛좋은 민물고기들이 많이 서식하여 왔으나 무분별한 남획과 간척공사 등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고 멸종된 어종이 많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이곳 하류인 완장내(浣汀浦)는 옛날에는 청연포(靑淵浦)라고 하였는데 제법 항구구실을 해오던 곳으로서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웅천장날에는 광암쪽으로부터 장꾼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드나들었지만 이제는 흘러간 한 토막의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9 교육의 요람 주산면 금암리(金岩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습의(習依)면의 농암(籠岩)과 불은(佛恩)면의 금당(金塘)을 합하여 주산면(습의면+불의면)의 금암(金岩)리라고 하였다. 야룡(野龍)리와 경계를 이루는 복개봉으로부터 동고재(動鼓峙), 간재재(艮峙), 주각산(冑角)으로 이어지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이곳은 면소재지로서 주산초등학교와 중 ․ 농업고등학교, 지서, 농업협동조합 등 관공서(면사무소는 1992년 야룡리에 옮김), 소규모 상가들로 이루어진 장터, 금댕(金塘)이 청석다리(이상1리:艮峙)와 심계골, 안터(이상2리:沈谷洞), 통점, 뒷굴(이상3리:通店)등의 자연부락이 있고 이 밖에도 구렁목 삼거리, 느르실 등의 지명이 있는데 구렁목에는 사당이 있어 매년 정월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제를 지내왔다.

  소재지인 간치는 미산으로 넘어가는 간재재(艮峙)아래에 있다고 해서 부른 이름이며, 심계골은 깊은 골짜기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혹은 새로 생긴 마을 즉 신기골(新基)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청석다리는 마을에 청석다리라고 하는 다리의 이름을 딴것이고 통점은 옛날에 놋점 즉 통점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또한 주각산은 뿔 달린 투구형이라 하여 그리 부르며, 동곳재는 북(베틀에서 실을 나르는 작은 기구)이 움직이는 곳이라 하여 동고재(動鼓峙)라고 하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1928년도에 이 산 밑에 터널을 뚫고 철도가 연결되어 기차가 드나들고 이 기차가 바로 베틀 속(산 밑 터널)을 들랑대는 북(鼓:고)이 아니겠느냐고 신비함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고(鼓)는 농악 등에서 쓰이는 북일 뿐 베틀에서 사용하는 북은 순수한 우리말인데도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은 억지로 만든 말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오래전부터 주산면의 소재지 역할을 해온 이 곳 금암리는 1921년 주산공립보통학교(주산초등학교 전신)가 개교되었고 1933년에는 주산공립농업실수학교(주산중학교 전신), 그리고 1953년에는 주산농업고등학교(현 주산산업고)가 개교되어 주산면, 웅천면, 미산면은 물론이고 서천군의 비인면, 서면, 판교면, 부여군의 홍산면, 외산면 일대까지 학생들이 이곳으로 통학하였으며, 60세 이상 되는 분들 중에는 멀리 남포면, 대천시, 청라면까지도 주산농업중학교 출신이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이곳 금암리가 명실공이 충남 서남부의 교육 요람지로서의 그 기능이 대단하였다고 하겠다.

 이 때문에 1960년대까지만 해도 주산농고 입학시험에 떨어진 학생들이 대천농고(지금의 대천고), 서천고, 장항농고(지금의 장항공고)에 진학을 할 만큼 주산농고가 명문고였으며 기차를 이용하여 대천, 남포, 웅천, 판교, 서천, 마서, 장항등지에서 골고루 학생들이 통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탈 농촌, 도시집중화 현상에 따라 농촌인구가 급격히 줄고 특히 학생들이 농촌학교를 회피하고 도시학교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바람에 이 곳 학교들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

 장항선 철도와 21호 국도를 끼고 있고 미산으로 가는 군도 1호선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한 이곳은 일찍이 북쪽으로 1.5km 떨어진 황율리에 간치역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면소재지(시장, 관공서 등)를 간치역 부근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이 곳 금암리의 유지들이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웅천면 소재지는 구장터에서 대창리로 옮겼기 때문에 그 세가 번창하였고, 주산면은 소재지와 기차역이 떨어져 있어 그 세가 번창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아무튼 면소재지와 기차역이 떨어져있어 매우 불편(그 당시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열차를 이용하였음)하므로 1950년대 말 금암리에 간이역이 설치되어 통학생, 상인을 비롯한 많은 주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여 왔다.


10 그윽한 마음의 고향 미산면 평라리(平羅里)(글을 쓴 후 보령댐 수몰지역이 됨) 

 조선말기 남포군 심전(深田)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평장(平章)리 일부와 자라(者羅)리를 합해 평라리라고 하였다.

 면사무소와 지서, 농업협동조합, 우체국등 관공서와 상가들이 있는 평쟁이(平章), 성재, 서짓골, 윷골, 안뜸, 밭가운데(이상1리:平章), 자라실, 구억말(이상2리:鼈谷)등의 자연부락이 있고 산으로는 주산면 동오리로 넘어가는 곰재를 중심으로 명덕봉(明德峰)과 수문재(水門), 쇠말봉이 있으며 자라실 뒷산은 장군봉이라 하고 냇물로는 도흥리와 늑전리에서 각각 흘러오는 물이 이곳에서 만나 합해지는데 이 냇물을 자라실내, 평장내 또는 도흥천이라고 하며 이물은 다시 용암내로 흘러감으로써 웅천천의 상류가 된다.

 이 밖에도 삼거리, 쇠골모랭이, 좁은목이 등의 지명이 있는데 평쟁이는 소재지 마을로서 고려 제 19대 명종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오른 백임지(白任至)가 출생한 마을이라 그의 벼슬이름인 평장사(平章事)를 따서 평장이 또는 평장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미산중학교가 있는 구억말은 곡식을 구억말(九億斗) 거두어들일 수 있는 갑부가 살 명당터라서 구억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공교롭게도 이곳에 중학교가 자리했기 때문에 아깝게 갑부가 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일부 주민들의 입으로 돌기도 한다.

 또한 자라실은 마을 뒤편이 자라봉이라는 마치 자라등과 같이 펑퍼짐한 작은 산이 있어 이곳 이름을 따서 자라실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 마을에 사는 최부자라고 하는 고약한 지주가 시주 얻으러 나온 늙은 스님에게 생트집을 잡고 곤장을 친후 보리쌀 한줌을 주어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은 사람들에게 자라봉 위 연못 속에 사는 황금자라를 잡아야만 큰부자가 될 수 있다고 일러주고는 사라졌는데 이 말을 전해들은 최부자는 소작인들을 시켜 연못 속의 물을 모두 퍼내고 자라를 잡게 한 다음 황금자라가 나오자 자신이 몽둥이로 때려잡았다고 하며 그 후 최부자가 병석에 누워 많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십년 만에 죽었으며 그가 죽자 다시 연못 속에는 황금자라가 살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마을 사람들이 고루 잘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데 지금도 자라봉 등 부분에 물이 스며 나오는 곳이 있어 이 전설을 실감나게 하고 있으며 실제로 자라실 주변 냇물에 자라가 많이 서식하여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흔히 자라를 잡곤 하였으나 지금은 멸종이 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편 쇠골모랭이의 세바위에 얽힌 전설도 있다. 옛날 평장이와 자라실에 각각 외아들과 외딸을 둔 두 홀아비가 살았는데 그들 두 자녀도 의남매로 친하게 지냈으나 나이가 들자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고 마침내는 아버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산속으로 들어가 동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 사이에서 뱀 네 마리가 태어나므로 그들을 쇠골모랭이에 버렸으나 엄마는 가엾은 생각에 가끔 찾아와 그들을 돌보곤 하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홀아비들은 그 뱀들을 죽이려 했고 뱀의 엄마는 그들을 보호하고자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으며 뱀의 아빠는 그게 싫어 집으로 돌아가 버렸으나 며칠 후 아내가 걱정이 되어 먹을 것을 가지고 찾아와보니 기진맥진해 누워있는 아내를 뱀 네 마리가 둘러싸고 놀고 있으므로 이를 본 남편이 몹시 기분이 상해 먹을 것을 바위위에 던지고는 그곳을 떠나려하였다. 이때 벼락이 치면서 아내는 그 자리에서 죽고 남편은 들 건너로 팽개쳐져 죽고 그를 부르며 달려오던 홀아비는 공중으로 두둥실 떴다 들에 떨어져 죽으면서 아내는 어미바위, 남편은 아비바위, 홀아비는 할아배바위가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이 바위들은 사랑을 위해 어버이를 버린 자식과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워 자식의 행복을 깨는 아버지에게 천벌을 내렸다는 이 애틋한 전설을 간직한 채 쇠골모랭이를 지키고 있다.

 조용한 산골 면소재인 이곳은 인심이 좋은 뿐 아니라 아직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 그리고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 쌓여있어 산업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같이 그윽하고 살기 좋은 곳이며 군도 1호선(주산금암-도화담)이 통과하고 또한 봉성리, 삼계오동, 늑전리로 이어지는 농로(규모는 군도수준)의 분기점으로서 교통 또한 편리한 곳이기도 하다.


11 국보가 있는 성주면 성주리

 성주면 성주리는 조선말 남포군 북외면(北外面)지역이었는데 1914년 미산면으로 되었다가  1986년 성주면으로 분리됨에 따라 성주면 성주리가 되었다. 680.4m의 성주산 주봉인 장군봉을 위시하여 왕자봉(王字峰), 문수봉, 문봉, 화암봉, 꾀깔봉, 칠성봉, 진낭봉, 삼불봉 등 웅장한 산봉우리들이 군락을 이루면서 상아니골(가세골, 천지골) 물당골, 삼적골, 후동골, 적지골, 구매바위골, 두봉골, 토끼바위골, 상여바위골, 중앙골, 바루베기골, 오바위골, 황팽이골, 차돌백이골, 큰장구백이골 작은장구백이골, 뱁재골, 대적골, 부도골, 산제당골, 체비적골, 모이골, 도랑골, 흘태골, 한계골, 노가지골, 바라기골, 독구데기골, 화장골, 도토마리골 등 크고 작은 골짜기들이 이리 찢어지고 저리 갈라져 심산계곡이 이루어지고 상수리재, 수리재, 삼발재, 과남재, 뱁재, 황토백이재, 바라기재, 도토마리고개 등이 사방팔방으로 나있어 이웃 고을인 대천시, 청양군, 부여군, 개화리 등으로 넘나드는 통로 역할을 하였었다. 자연마을로는 심연동, 상아니골(이상1리=深淵里), 백운사입구의 백운마을, 수재민촌(이상2리=白雲里), 장군마을(이상3리=將軍里), 먹방(4리=墨坊里), 성주사지가 있는 탑동(上村), 성주초등학교가 있는 양지뜸, 벌뜸(이상5리=昔聖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이 있는 삼거리, 덕흥, 왕자, 오카브(이상6리=聖住里)내촌, 창터골(이상7리=倉垈里)신사택, 꾀갈림(이상8리=花藏里)등이 있는 바 심연동은 심원동(深源洞)이라고도 하는데 깊은 골짜기에 있는 동네라서 그리부르며 창터골은 창고가 있던 곳이고 벌뜸은 들판에 있어 붙은 이름이며 신사택은 광산개발후 새로 조성된 마을이다. 성주(聖住)라는 이름은 지금부터 천여년전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성주산을 그 전에는 숭암산(崇巖山)이라 하였고, 백제 제 28대 법왕(法王)때 오합사(烏合寺)라는 절을 지어 전하던 중 신라 제 46대 문성왕(文聖王)때 당나라에서 수도를 하고 돌아온 무염국사(無染國師)를 맞아 절을 다시 크게 지은 후 성주사라고 절의 이름을 바꿈으로서 그 후 산도 성주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성주사는 당시 불교계에 크게 유행하였던 선종(禪宗)의 9산 선문중 하나인 큰사찰로서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며 불교계를 대표해온 유명한 절이었으나 아깝게도 임진왜란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8,800평의 넓은 사지에 국보를 비롯한 석탑등 문화재와 몇몇 건물지가 남아 옛날의 영화를 짐작케하고있다. 한편 이곳에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무염국사가 죽자 그의 덕을 기리고자 세운비로서 비문은 유명한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지은것인데 천년(진성여왕 4년 즉 서기 890년 세운것으로 추정)동안 만고풍상을 겪어왔지만 아직도 마모되지 않은 5,000여자의 글씨는 통일신라시대의 생활상과 문화, 특히 우리나라 고대한자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로서 국보 제 8호로 관리하고 있다.

 성주사지에 있는 문화유적은 다음과 같다.

 ․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朗慧和常 白月葆光塔碑) : 국보 제 8호

 ․ 성주사지(聖住寺地) : 국가지정 사적지 제 307호

 ․ 5층석탑 : 국가지정 보물 제 19호

 ․ 중앙3층석탑 : 국가지정 보물 제 20호

 ․ 서3층석탑 : 국가지정 보물 제 47호

 ․ 동3층석탑 : 충청남도 지정문화제 제 26호

 ․ 석등 : 충청남도 지정문화제 제 33호

 ․ 낭혜화상부도, 석불입상, 당간지주, 불대좌, 금당지, 중문지, 회랑지, 삼천불전지, 강당지

 이 밖에도 성주사지 뒤편에는 1978년 경주최씨 종중에서 세운 최치원 신도비가 있는데 그 비문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되어 있으며 성주2리 화암봉 중턱에는 전통사찰인 백운사(白雲寺:신라 때 창건)가 있고 벌뜸에는 조선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趙顯命)의 신도비와 산에 그의 묘가 있는 등 많은 유적들이 남아 전하고 있으며 성주5리와 7리에는 아직도 산제당이 남아 있어 매년 정월보름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산신제가 올려지고 있다. 이렇게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성주는 이에 따른 전설 또한 여러 가지가 있다. 백제의 멸망과 관련한 것으로는 삼국사기에 “여름 5월에 붉은말이 나타나 울면서 오함사를 돌다가 몇일만에 죽었다(夏5月 ․ 馬入北岳烏含寺嗚 ․ 佛子數日死)”라고 기록되었고 삼국유사에는 “백제오회사(또는 오합사)에 크고 붉은 말이 밤낮으로 절 주위를 돌았다(白濟烏會寺亦云烏合寺有大赤馬晝夜時繞寺行進)”라고 기록되어있다.

 성주사의 창건과 관련한 것으로는 어떤 도사가 절을 짓고자 터를 잡고 보니 공교롭게 큰 연못 속에 절을 지을 대지가 있었고 그 속에는 9마리의 용이 살고 있어 수십 가마의 소금을 넣어 용이 모두 도망가도록 한 다음 연못가운데 허수아비를 넣고 사람들이 돌을 던지면 예쁜 색시가 물위에 나타나 까르르 웃고 들어가도록 도술을 부려놓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려고 돌을 마구 집어던져 연못이 메워진 후 절을 지었다는 전설이 구전하고 있으며, 성주사의 소실과 관련된 것으로는 임진란 당시 이곳 성주사에는 3천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식사용 쌀을 씻은 뜨물이 하천을 타고 4km이상 떨어진 개화리까지 흘러내려 이곳으로 들어오던 왜적들이 군량미 씻은 물로 잘못알고 퇴각한 후 첩자를 보내 알아보니 승려들뿐이라서 습격하여 불태워버렸다고 구전하고 있다.

 또한 성주산 기슭의 효자에 대한 전설이 있으니 산 밑에 사는 박씨라는 사람이 병든 아버지의 치료약인 동삼을 찾아 매일 성주산을 헤매던 중 동삼이 없으면 대신 어린 아들이라도 약으로 쓰면 된다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부인과 짜고는 사랑하는 아들을 펄펄 끓는 솥에 밀어 넣고 그 다린 물을 아버지께 드리니 병환이 씻은 듯 나았다고 하며 그 후 아들이 공부하던 초막에 침구 등을 가지러 가보니 아들은 멀쩡하게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박씨의 지극한 효성에 산신령이 감복하여 동삼을 내려줌으로써 오랫동안 잘 살 수 있었다는 이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또 하나 옛날부터 성주산에는 8모란이라 하는 모란형(牡丹型) 명당 8개가 있다고 하여 풍수지리설을 믿는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는데 화장골은 그 중 한자리가 감추어져 있다 해서 화장골(花藏)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일설에 의하면 노가주나무(杜松, 노간주나무)와 바위가 함께 있는 밑에 명당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이 명당을 찾으려고 며칠씩 묵어가며 성주산 일대를 샅샅이 뒤지는 등 긴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까지 그 명당을 찾은 사람은 없어 사람들의 선망 속에 단순한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을 따름이다.

 한편 이 곳 성주는 충남 제 1의 탄전지대이기도 하다. 1930년대 초 일본인에 의해 처음으로 탄맥분포도를 완성하였고, 1948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무연탄은 이 곳 성주면을 중심으로 청라면, 미산면, 부여 외산면까지 분포되어 2억3천만톤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어 호황기에는 50여개의 광산에서 연간 150만톤의 생산고를 올려 전국 석탄 생산량의 10%를 점유하기도 하였으며 이 때문에 대한석탄공사 성주광업소가 신설되고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광부들로 인하여 인구가 팽창하면서 1986년 성주면으로까지 승격하는 등 지역세가 급격히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정된 매장량을 40년 이상 채굴함에 따라 탄층심도가 깊어지고 잔량이 현저하게 줄어 채산성이 맞지 않으므로 폐광이 늘어나게 되었고 마침내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1989년부터 정책적으로 폐광시켜 현재는 10여개의 광산이 가동 중에 있으나 이들 역시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짐작된다. 40년간 수많은 광산업자들의 흥망 속에 보령과 대천지역 경제의 큰 몫을 담당해왔던 이 곳 광산들은 이곳저곳 볼품없이 파헤쳐진 산자락에 검은 폐석들을 널려 놓은 채 역사의 한 장으로 묻혀가고 있다.

※실은 곳: 1992년 발행 대보문화 제2집 /2006발행 향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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