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사명당의 보령관련설

구슬뫼 2007. 10. 6. 20:28
 

 사명당의 보령관련설


1 사명당의 보령관련설 내용

 사명당(四溟堂)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사명당은 경남 밀양(密陽)사람으로 속성은 풍천임씨(豐川任氏)요, 이름은 응규(應奎)라고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승병(僧兵)을 이끌고 왜적(倭賊)을 무찌르는데 많은 공을 세웠고 난리가 끝난 후 사신으로 왜국(倭國)에 건너가 성공적으로 강화를 맺고, 포로 3,000여명을 데리고 돌아 온 훌륭한 인물로써 역사에 길이 빛나는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일부에서 우리 보령지역과 사명당이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 과연 보령과 관련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만약 관련이 있다면 이에 대한 심층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웅천읍(熊川邑) 수부리(水芙里) 가늠자골에 있는 관음사(觀音寺)라는 절이 바로 사명당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절을 옛날에는 신흥사(新興寺)라고 불렀는데 창건문(創建文)를 보면 신라(新羅)시대부터 있던 고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신(燒燼= 모두 불타 버림. 消盡)되어 폐허로 전해 오던 중 1948년 작은 절을 짓고 신흥사(新興寺)라 하였으며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사명대사(四溟大師) 두 분의 화상(畵像)을 산신각에 모셔 놓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중창(重創)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65년 관음사(觀音寺)라고 절 이름을 바꾸었는데 먼 옛날 이곳에 있던 절에 사명당이 머물렀다는 주장이 있으며 더구나 신흥사로 부르던 1965년경까지 이 절을 사명당절이라고 병행하여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서산, 사명 두 대사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2 사명당과 보령의 관련을 나타낸 기록들

○권선문(勸善文): 신흥사(新興寺) 중창을 위해 각계의 찬조를 받은 글(1949년 1월)

○송운대사(松雲大師=사명당)기념사업위원회취지서(1949년 1월)

○신흥사 창건문(1948년)

○보령군지(1991년 발행)


 1) 권선문(勸善文)속의 사명당 관련문구

 1949년 신흥사(新興寺, 후에 觀音寺로 改稱)를 크게 중창(重創)하고자 권선문을 지어 각계 인사를 두루 찾아다니며 120여명의 저명인사로부터 찬조(贊助)를 받은 문서가 발견 되었는데 그 권선문 중 “玉馬之南 觀音洞 新興寺는 新羅 元曉大師 創建遺址오며 麗季 指空和尙이 修練한 處이요, 李朝 四溟大師의 圓覺寺 이옵드니”라는 문구가 있다. 과연 원각사라는 절이 이곳에 있었는가, 있었다면 사명당과는 어떤 관련이 있기에 ‘사명당의 원각사’라고 하였을까 하는 의문점을 가져본다. 그러나 원각사(圓覺寺)라는 절의 이름이 옛 지도나 문헌에 나타나지 않고 전하는 이야기도 없다. 또한 사명당의 행적을 추적해보아도 원각사가 나오지 않고 우리지역에 다녀갔음을 기록한 문헌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곳 신흥사(新興寺)터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절터임을 시사하는 증거들은 있다. 아주 먼 옛날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편이 출토되고 있음은 물론 1970년대 절을 중창(重創)할 때 축대공사를 하는 중, 기왓장 밑에서 금속으로 만든 작은 불상(佛像)이 출토된바 있는데 전문가의 판정에 의하면 약 1300년 정도 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1971년 발간한 구 보령군지에 이곳 관음사는 “상고 신라시대(上古新羅時代)에 관음사(觀音寺)라는 대사찰(大寺刹)이 있었다가 임진왜란에 전소(全燒)되고 유지(遺址)만 남았던바 1949년에 임덕호(任悳鎬)가 중건(重建)하였고 . . .”라고 하여 이곳 관음사 터가 오래 된 절터임에는 틀림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권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붓을 사용하여 내려 쓰기 한 것을 옆으로 쓰기로 고쳤으며 원본대로 쓰기 위해 맞춤법은 정정치 않았고 날짜는 편의상 아라비아 숫자로 고쳤다. 찬조(贊助) 및 경앙(敬仰)등의 문구와 직 성명(또는 성명)은 모두 자필(몇 명은 펜글씨이고 대부분 붓글씨)로 받았으며 서명 끝에 직위가 있는 자는 직인, 개인은 사인을 받았다.


勸         善        文

 古史를 按컨 대 歷代의 盛衰와 人物의 賢哲과 地方의 變革을 大畧可記로다. 玉馬之南 觀音洞 新興寺는 新羅 元曉大師 創建遺址오며 麗季 指空和尙이 修練한 處이요, 李朝四溟大師의 圓覺寺이옵드니 壬辰倭賊의 燹禍로 三百餘年間 鐘聲이 寂寂하엿슴니다.

 壬亂에 當하야 國勢가 一髮같이 危急함으로 西山四溟 兩大師가 上疏創義할 새 三南都統使를 命하시니 兩大師가 舊忠大義로 倭賊을 討滅하야 頭緖를 畧定함에 西山은 上歸疏老于法興寺하고 四溟은 軍務를 專任하야 各部에 方畧을 指揮하며 三次 加藤淸正陣에 入하야 銳氣를 抑壓하며 終末에 賊國에 入함에 賊國이 大師의 奪天造化之道術를 畏服하야 降書를 올리는지라 大師가 朝鮮人捕虜된 者 數千名引率하고 還國하야 三百餘年을 賴而安過하엿으니 진실로 壬亂에 元功이요 朝鮮에 百世模範이라 當時忠烈이 多數하지만 여러분은 但人力可及者를 行하였고 四溟大師는 人力所不能을 單獨成功하얏으니 大哉라 四溟이여 昭如日月하고 巍如泰山하야 朝鮮이 업서지지 안하면 其功이 업서지지 안할것이요, 朝鮮人으로써 儒釋을 勿論하고 家戶而戶祝이라도 末位不可함으로 去冬에 任德鎬氏가 單獨誠力으로 圓覺寺故址에 數三間 建築하야 寺名曰新興寺라 하고 西山四溟眞影을 奉安하고 또 各位佛像을 奉安하였으나 但寺儀未具함으로 도히려  未安하고 惶恐함을 不堪하와 左記工事를 經營하되 財力不足에 奈何乎잇가. 不得己하야 期成會를 組織하고 勸善文을 題定하야 僉位座前에 仰呈 하오니 伏願薺誠合力하시와 兩大師의 如山如海한 功烈를 讚揚하시와 後人으로 愛國心을 効則케 하소서.

草草敬具

檀紀 四二八二年 己丑 正月 日

                        新興寺 期成會長 白

僉位座前

凡例

1. 大雄殿瓦家五間竣工事 / 1.西山四溟兩大師 眞影과 各位佛像佛畵을 奉安事 / 1.紀念碑建立事 / 1.二千圓以上讚助僉位는 善爲懸板하야 永世傳之無窮事

計劃書

1.大雄殿壹百五拾萬圓 / 1.紀念碑八拾萬圓 / 1.道路修築費五拾萬圓

新興寺期成會 部員名簿 會長 田羲均, 理事 任孝彬,  專務 林仁圭

           出張員 任旭淳, 李昌雨, 任基鎬, 金德洙, 任世爀, 金壽濟, 任龍宰, 田五鎭, 金孝元

事務所 忠南保寧郡熊川市


※찬조를 받은 기간: 檀紀4282年 2月 10日-4283年 2月 13日

찬조하여 날인 한 사람: 충청남도지사, 전라북도지사, 숙명여자대학장, 군산대학장, 천안, 아산, 예산, 당진, 홍성, 보령, 서천, 논산, 대전, 군산, 옥구지역의 시장군수, 경찰서장, 공립국민학교장, 공립중학교장, 기타 저명인사


 2)송운대사(사명당)기념사업위원회취지서속의 관련문구

 1949년 신흥사를 확장, 신축하기 위한 일(권선문찬조받기, 공사시행)과 병행하여 송운사(松雲祠: 松雲은 사명당의 다른 號)와 기념비(記念碑)를 세우고자 송운대사(사명당)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취지문을 만들어 각계에 배포코자 하였던바 그 취지문 중에

“(전략)우리의 향토에 大師의(중간생략)修道하신바 靈跡이러니  (중간생략)修道遺趾 . . . .忠南保寧郡熊川面水芙里에 松雲祠와 記念碑비를 빛나게 建立하자 하옴이니(후략)” 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대사의 수도유지라 한 것은 관음사 옛터에 있던 절(圓覺寺?)에 한동안 수도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신흥사 창건문에 명기한 사명당 관련문구

 신흥사에는 應化二千九百七十六年 己丑 六月  日(1948년 6월)에 주지 추교철(秋敎哲)과 처사 임덕호(任德鎬)가 신흥사를 지은 창건문(목판에 붓글씨)이 걸려 있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있다.

“(전략)新羅元曉祖師觀音者創建以來 麗朝指空和尙見性之處, 漢陽朝四溟大師見牛圓覺之寖也(후략)


 4)보령군지(1991년 발행)에 기록한 관음사와 사명당 관련기록

 觀音寺: 創建年代는 未詳이나 朝鮮時代에 四溟大師가 修道하였던 寺刹로 전해온다. 壬辰倭亂前에는 新興寺 라고 불러오던 절로서 1943년에 重創하고 1965년에 觀音寺라 寺名을 改名하였다.


 3 풍천임씨(豐川任氏) 족보와 사명당

 풍천임씨 족보에 의하면 사명당은 풍천임씨 제12세손이라고 하며 그의 고조(高祖)인 임향(任珦)의 묘가 웅천읍 평리 동막동(東幕洞)에 있다. 임향은 고려조정에서 벼슬을 하던 중 홍주(洪州)지역으로 유배되었다가 남포현 오상동(藍浦縣 五相洞= 현 보령시 주산면 동오리 오상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나타나는 인물이다. 사명당의 증조(曾祖)인 임효곤(任孝崑)은 그 때 밀양(密陽)지역으로 유배되어 그쪽 지방에 자손들이 퍼지게 되었다고 하며 그래서 사명당이 밀양에서 태어난 원인이 된 것이다. 한편 임향의 다른 아들인 임안길(任安吉)을 직계로 하는 후손들이 웅천, 주산, 미산지역에 오랜 동안 대를 이어 세거(世居)하고 있다.


  풍천임씨 세계도 속의 사명당


溫(온)

可珪(가규)

備(비)

徒(도)

天裕(천유)

澍(주)

            ----------------------------

            ↓                                ↓

            子順(자순)                     子松(자송)

           ---------------------

           ↓                       ↓ 

          瑨(진)                   珦(향)

                              --------------

                              ↓               ↓ 

                          孝崑(효곤)         安吉(안길)

                              ↓          

                          宗元(종원)

                              ↓

                          守城(수성)

                          -------------

                         ↓               ↓ 

                   應奎(응규: 사명당)   應箕(응기)


 임향의 묘는 웅천읍(熊川邑) 평리(坪里)에 있으므로 사명당은 자신의 고조부(任珦) 산소가 있고 일가들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 이곳 남포현(藍浦縣)의 웅천에 다녀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만약 다녀갔다면 당시는 교통이 불편하였던 시절이었기에 한번 오면 오랫동안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한달을 묵었는지? 1년을 묵었는지? 그리고 단순히 머물렀다 갔는지? 또 왔었다 해도 머무르는 동안 인근의 사찰(寺刹)이나 불교신도(佛敎信徒)들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주는 활동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대의 고승(高僧)인 사명당이 한동안 머물렀다면 지역의 큰 관심사였음은 물론 많은 불제자(佛弟子)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명당이 이곳에 왔을 때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잠시 다녀만 갔었음에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행적을 과장하여 전하여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한편, 풍천임씨 종중에서는 사명당과 보령의 관련설을 토대로 1976년 유정사명대사기적비(惟政四溟大師奇蹟碑)를 당시 대천고등학교(大川高等學校)교정에 세웠고 그 후 학교의 이전으로 인하여 보령도서관(保寧圖書館)정원에 옮겨 놓았다.


4 구전(口傳)으로 전하는 사명당 관련설

 필자가 1970년대 중반에 웅천면사무소에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하던 임명순씨(任明淳, 수부리 출신, 당시 40대 초반, 1992년 국민의료보험조합 총무부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사)의 말에 의하면 “관음사에 사명당이 다녀갔다더라.”는 말을 들었고 웅천읍 수부리를 비롯한 인근지역의 나이가 지긋한 분들 중에는 사명당이 수부리에 다녀갔음을 구전으로 들었다고 하는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김효기(웅천읍 평리 출신, 죽정동 거주): 수부리 부당에 사명당이 다녀갔다는 말을 들었다

●김기홍(웅천읍 수부리 거주): 수부리 부당에 사명당이 다녀갔다는 말을 들었다.

●김수열(웅천읍 수부리 출신, 대창리 거주): 수부리 부당에 사명당이 다녀갔다는 말을 들었다.

●현창화(주산면 창암리 출신, 현 수부리 거주, 이장): 부당에 사명당이 다녀갔다는 말을 들었고 사명당이 우리지역에서 활동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박정순(화산동 거주): 사명당이 우리지역에서 활동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고 그래서 옛날에는 사명당이 우리지역 출신인줄로 알았다. 이야기들이 많은 걸로 보아 사명당이 우리지역에 상당한 기간 머무르면서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임경희(관음사 주지): 사명당이 관음사 옛터에 있던 절에 다녀갔다고 들었으며 1960년대에는 이 절을 사명당절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명당이 다녀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 하고 있다.

(사명당절이라고 부른 것은 그분이 머물렀다거나 특별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단순히 종교적으로 훌륭한 분의 화상을 모셔놓고 치성을 드리는데 그 대상이 사명당이기 때문에 사명당절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5 사명당 어록집속에 나타나는 보령관련 문구

在竹島有一儒老譏山僧不得停息以拙謝之

(죽도에 있을 때 한 늙은 선비가 조롱하기를 “山僧은 쉬지 못 한다” 하므로 옹졸한 게송으로 대답하면서)

西州受命 任家裔 庭戶堆零苟不容

無賴生成逃聖世 有懷愚拙臥雲松

山河去往七斤衲 宇宙安危三尺笻

是我空門本分事 有何魔障走西東

(서주에서 태어난 풍천임씨 가문의 후예로서 문호가 빈약하여 몸 둘 곳이 없음이로다./ 의지 할 사람이 없어 성인은 세상을  도피함이니 어리석고 옹졸한 생각에 구름과 소나무에 누었음이로다./ 山河에 가고 멈춤에는 七斤의 장삼이니 우주가 편안하고 위태로움은 석자(三尺)의 주장자로다./ 이것이 우리 공문(空門)의 본분사이니 어쩌다 무슨 마귀의 장애가 있어 동서로 달림이로다.)


※필자주

竹島:(西州와 연결지어)남포면 월전리에 있는 죽도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죽도는 사명당의 고조, 임향(任珦)이 고려말 유배된 지역이라 전하는 바 사명당이 조상의 흔적을 찾아봤을 가능성이 있다.

一儒老(한 늙은 선비): 죽도 옆의 보리섬에 崔致遠遺跡이 있는바 이를 둘러보고 읊은 시가 아닐까?

西州受命任家:서쪽지방 즉 충청도에 태어난(살고 있는)임(豐川)가

無賴生成 : 의지할 부모가 없는 자신(사명당은 15세에 어머니를 잃고 16세에 아버지를 여읜 후 출가하였음)

七斤衲 : 스님들이 걸치는 장삼

三尺笻 : 짧은 대 지팡이


6 맺는 말

 위와 같이 몇 가지 기록이나 구전을 통하여 사명당과 우리지역의 관련설을 살펴보았다. 왜, 사명당의 이야기가 웅천지역에 구전되고 있을까? 관음사와 관련한 창건기나 권선문 등에 왜 사명당의 원각사라고 하였을까? 또 이절을 가리켜 왜 사명당절이라고 하였을까?

과연 사명당이 우리지역과 관련이 있을까? 혹시 관련이 있는데도 우리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관련이 있는데도 모르고 있다면? 그 분에게 참으로 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공식적인 문헌 속 사명당의 행적에 우리지역이 나타나지 않고 원각사라는 절 이름도 찾지 못하고 있다. 유림(儒林)들의 행적은 역사적 기록뿐 아니라 문집(文集)이나 개인간의 편지왕래 등 여러분야로 특정인물의 행적을 알기 쉽지만 불자(佛者)들의 행적을 알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抑佛政策)탓도 있고 산속에 들어 앉아 속세(俗世)와 인연을 끊고 사는 스님들의 생활방식 또한 그들의 행적을 찾는데 어려운 원인일 것이다. 우리 모두 사명당과 우리지역의 관련성 여부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역사에 길이 빛나는 훌륭한 사명당(四溟堂)이 우리지역과 관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보면서 졸고를 맺는다. 끝


[참고문헌: 권선문, 신흥사 창건기, 송운대사 기념사업회 취지서, 보령군지(1991년 발행), 구보령군지(1971년 발행),

四溟大師 語錄緝(2005년, 발행인: 無二巨芙, 발행처: 무이정사)

四溟堂의 生涯와 思想(1994년, 申鶴祥 著, 도서출판 미리벌 발행)

※실은 곳: 2005년 발행 보령문화 제 14집 ,2006년 발행 향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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