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6.25 한국전쟁과 주산 전투

구슬뫼 2025. 1. 26. 13:59

1950.6.25. 북한남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 때 우리 주산에도 적은 규모지만 전투가 있었다.

물밀 듯이 처내려오는 인민군(6사단)이 예산까지 점령하였다는 713

보령경찰서에도 후퇴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내륙에 배치된 경찰은 부여로 집결, 후퇴하고 해안에 배치된 경찰은 어항에서 배를 타고 군산으로 후퇴하라는 것이었다.

보령경찰들이 군산에 도착하니 그곳에 주둔해있던 해병대가 경찰들을 모두 장항으로 보내 714일 장항에는 많은 경찰들이 집결하게 되었다.

 

이들 중 충남 서해안지역 7개 경찰서 소속 경찰들은 비인으로 이동, 노숙을 하였고 715일 오전 7시쯤 인민군이 대천과 남포 북정자 부근에 돌아다니니 그들의 남하를 저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지리를 잘 아는 보령경찰들이 자동차(쓰리쿼터)로 앞장서 올라오던 중 비인고개(비인과 주산사이/지럭재?)에서 엔진고장이 나는 바람에 정지하여 고치게 되었다.

이에 뒤따르던 철도경찰대 소속 경찰차 2(54/인솔자 정철모경감)가 비키라면서 앞장서 올라오게 되었고 제일먼저 주산지서에 도착하였다.

지서에는 치안대원 2명이 있어 물어보니 인민군은 광천까지 왔다고 하며 주산에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공산당들었으며 거짓말을 한 것이었고 전투과정에서 인민군편을 들며 우리 경찰에게 방해를 부렸다고 한다.

 

아무튼 이미 진입한 적들은 주산초등학교 뒤 철로 변 즉, 지대가 높은 위치에 있었고 따발총 등 화력에서 훨씬 우세하였으며 우리 경찰들은 아직 대오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낮은 위치, 그리고 칼빈총과 수류탄 등 빈약한 무기로 전투를 하였으니 큰 낭패를 당했던 것이다.

일부는 산조개마을 방향으로 뛰고 일부는 판교방향으로 뛰었는데 시야가 탁 트인 산조개 방향으로 뛴 경찰들만 대부분 희생되었다.

이때 현장에서 전사한 경찰이 6, 생포된 경찰이 10, 죽은 적이 23명이었다. 사로잡힌 경찰들은 웅천지서에 감금했다가 727일 이어니재에서 총살하였다고 한다.

 

6구의 시신은 마을사람들이 마을근처 산기슭에 묻어주었고, 10구는 총살현장부근에 묻었던 것을

후세에 이어니재 고갯마루에 한데 모아 '경찰관 합동묘소'를 설치하여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으며

2007년에 '만세보령지킴터'라 명명하였고,

경내 관련시설 중 1966.6.25 설치한 '순국경찰관추념비'가 낡고 초라하여

2022.7.17. 보령참전경찰국가유공자회 주관으로

'구국경찰관추모비'로 새롭게 만들어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보령문화 제14집(2005년/보령문화연구회)

 

순직경찰관 합동묘역에 있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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