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우리나라 강점기에 동화정책(同化政策)의 일환으로 유력인사들로
유람단을 만들어 3주∼1개월 동안 일본의 명승고적, 공장 등 산업시설, 병원, 농사시험소 등을 구경시킨 후 돌아와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하여 제출케 하며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주민(가까운 읍·면)을 대상으로 순회강연을 시켜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유람단은 군수, 면장, 공무원, 덕망가, 재산가 등에서 선정하였는데 1926년 이 유람에 참여했던 심복진(沈福鎭)이란 사람이 쓴 동유감흥록(洞遊感興錄)이라는 책이 전한다.
그는 당시 주소를 보령시 청라면 소양리에 두었고 웅천우편국장을 역임한 분이다.
책에 의하면 그는 일본 각지를 돌아보며 발전한 일본의 실상들을 접하면서 놀라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우리나라 동포들이 돈벌이 하려고 일본에 가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측은하고. 울적한 기분을 쓴 부분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그런 부분만 발췌하여 저자의 애국 애족하는 마음을 짐작해 보고자 한다.
옛 말과 구한글체로 쓰고 한자로 토를 달은 것을 현재의 말과 현 맞춤법으로 바꿔서 싣는다.
1.연락선(昌慶丸)내에서
ㅡ(전략)ㅡ
3등실 내려가니/ 한구석에 모여 앉은
흰옷 입은 조선사람/ 자탄가(自歎歌)를 부르는데
반갑도다. 반갑도다./ 그대들은 어디가나.
머리위에 수건 쓰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말도 쓰지 못하면서/ 맨손 쥐고 어디가나
만리(萬里) 동행 하는 터에/ 말 좀 들어 보고지고
한 사람이 썩 나서며/ 내 설음을 들으시오
박토(薄土)나마 논 밭떼기/ 지주농사 지어주고
게딱지의 집 간 조차/ 고변악채(高邊惡債)집행(執行)만나
쪽박살림 파산하고/ 부모처자 갈라서서
유리(流離)구걸 다니다가/ 모진 목숨 끊지 못해
극락세계 일본으로/ 돈을 벌려 가려하오.
한숨 쉬고 눈물지며/ 목이 막혀 말이 없네.
어림없네. 될 말인가/ 바삐바삐 물러가소.
그대들은 내 땅에서/ 이것저것 다 뺐기고
산도 설고 물도 선데/ 누가 돈을 먹일 텐가
신세 생각 가련치만/ 우리 갈 곳 바이없네.
울지 마소 울지 마소/ 권고(勸告) 할 제 울지 마소.
그대 뿌린 붉은 눈물/ 검은 바다 적시 운다.
처소로 돌아와서/ 초인종 얼른 눌러
삼편(三鞭) 한 병 갖다놓고/ 통음삼배(痛飮三盃)하고나니
벽상에 걸린 괘종/ 오전 칠 점 몰아친다.
※필자 주: 저자는 동포들의 눈물겨운 광경을 보고 기분이 울적해서 처소로 돌아와 술을 먹고 잠 못 이룬 것 같다.
2.하관해협부두의 초라한 동포들
-전략-
어깨를 비비면서/ 분주(奔走)불가(不暇) 하는 중에
한편을 바라보니/ 갈 곳 없는 백의들(白衣人=조선인)들
촌계(村鷄)관청(官廳) 모양으로/ 선창위에 헤매 인다.
-후략-
※필자 주: 정처 없이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 간 동포들이 배에서 내려 갈 곳 없어 불안하게 서성이는 광경을 보면서 저자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서 마중 나온 일본 측 관계자들을 따라가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3.복강현과 조선의 교육비교
-전략-
조선사람 안목으로/ 엄청나고 기차 차데
유치원이 23인데/ 유아 수는 914
소학교가 617/ 생도 296,000
사립학교 444/ 생도 49,000여
대학교가 하나인데/ 생도 650여라
학교 수를 합계하면/ 1,400여 군데요
생도수를 합계하면/ 347,000여라
대정 8년 5월 현재/ 조선전국 통계 보면
학교 수는 508/ 생도 수는 92,000
복강이라 하는 데는/ 일본 지방의 일원으로
호수(戶數) 380,000이니/ 조선의 한 도(道)에 불과하고
3천리의 지방이요/ 2천만의 인구인데
조선전국가지고서/ 1개 복강현과 비교하면
학교의 수효는/ 반수에 차지 않고
학생의 수효는/ 1/4에 불과하다.
어화 우리 동포들아/ 이내 말씀 들어 보소
모든 정도 이 같으니/ 조선사람 어찌하오.
통곡(痛哭)함이 이것이니/ 꿈을 깨고 정신 차려.
교육가는 힘 더 쓰고/ 재산가는 돈 좀 쓰소.
-후략-
4.대판(大阪)공장지대에서
-전략(前略)-
여러 공장 남녀직공/ 수십만 명 되는 중에
조선동포 조사하면/ 2만 명이 있다하네.
그 사람들 생활정도/ 간신(艱辛)하고 가련하다.
매일 노동 품 판 돈이/ 1·2원씩 되건 만은
물가고등(物價高等) 대도회지라 / 입장사만 겨우 되네.
상업가를 치자 하면/ 엿 장사가 거갑(居甲)인데
불정(不精)하다 지목받아/ 이익보기 어려우며
어떤 사람 내외간에/ 수 삼 칸 집세를 얻어
수 십 여명 밥해주고/ 낙정미(落鼎米)를 얻어먹고
어떤 사람 포부 있어/ 언문편지 대서하고
여러 사람 수렴하여/ 5·60원 월급 받데.
한군데를 지나가니/ 조선사람 많이 모여
술잔들을 준비하고/ 하루 소창(消暢) 잘 노는데
취흥이 도도하니/ 타향 객회(客懷) 절로 나서
처자생각 하여가며/ 눈물 흘리는 자도 있고
육자백이 신세타령을/ 제법 하는 자도 있어
슬픈 사람 술 먹으니/ 취중 진정 없을 소냐.
제 각각 제 사정들/ 신세타령이 나온다.
받고 주기 수작하며/ 눈물보가 터지는데
동포1
한 사람이 썩 나서며/ 애고애고 슬픈지 고
네 슬픔은 무엇이냐/ 내 슬픔을 들어보소.
내 슬픔을 말하자면/ 목이 막혀 안 나오네
내 신분이 미천하여/ 군노사령(軍奴使令) 직업이라
장무청(掌務廳) 수옥쇄장(首獄鎖匠)이/ 억개차례
기와 골에 콩을 심어/ 먹고 살기 걱정 없데
안 올린 깃 벙거지/ 황금용자(黃金勇字) 떠억 붙이고
아청군복(鴉靑軍服) 세 자락을/ 펄렁펄렁 널리면서
패지(牌旨)한 장 손에 들고/ 촌간(村間)으로 나아가면
장사축와(長蛇逐蛙) 이것이요/ 맹호(猛虎)출림(出林) 그 아닌가.
나는 보고 어느 사람/ 실혼상백(失魂喪魄) 안 될 손가
닭도 잡고 돗도 잡아/ 사발풍잠(沙鉢風簪) 붙여준 후
쾌돈 받아 입수시어/ 허리에다 둘러차니
재백궁(財帛宮)이 훨씬 틔어/ 엉덩춤이 절로 추어진다.
이러한 좋은 세월/ 가지 말라 하였더니
경찰권이 인계된 후/ 칼 찬 친구 보기 싫다
미역국을 먹고 나니/ 하루아침에 거지되는구나.
주린 창자 채우려고/ 동서표박(漂迫)다니다가
만리타국 건너와서/ 노동생활 하자하니
놀고먹던 굳은 뼈가/ 육신고통 어렵구나.
애고 애고 서러워라/ 이 신세를 어이하리.
동포2
또 한사람 썩 나서며/ 네가 무슨 슬픔이냐
진정 슬픔 들으려면/ 내 슬픔을 들어보라.
내 근본은 네 알지니/ 홍문(紅門)안의 사대부라
육방공형(六房公兄)요임(要任)들을/ 세세(世世)상전(相傳)하여 갈 제
상주(上主)되는 이호장(吏戶長)과/ 결총(結總)맡은 도서원(都書員)과
사송(詞訟)맡은 수형리(首刑吏)는/ 꺾을 손 권리(權利)로다
은결작부대동(隱結作伕大同) 받자/ 남이 알가 무서우며
살옥발미보장초(殺獄跋尾報狀草)는/ 일자천금(一字千金) 뉘 안주며
일읍권한(一邑權限) 쥐었으니/ 뇌물인들 적을 소냐.
영리번(營吏番)을 들 적에는/ 책임사무 중대하다.
일도(一道)의 전곡(錢穀)갑병(甲兵)/ 모들 일은 맡아 있어
수령선악염문(守令善惡廉問)하고/ 생살판단(生殺判斷)간섭하니
병마수군절도사는/ 내 장중(掌中)에 들었도다.
내 수단(手段)이 이러하니/ 세도(勢道)재상(宰相)부럽지 않고
연만하여 퇴리(退吏)되면/ 직함탕건(職銜宕巾) 영광일세.
협수전립호풍도(挾袖戰笠好風度)는/ 장막(將幕)안의 군관이요
폐포파립초솔(幣布破笠草率)함은/ 아행어사 추종이라
마패(馬牌)찍은 비관(祕關) 한 장/ 산천초목 떠는구나.
조선이라 하는 데는/ 이서지국(吏胥之國) 이 아니냐.
언청계용(言聽計用) 하여주니/ 호가호위(狐假虎威) 절로 되어
한마디에 천금이요/ 한 글자에 만금이라
이리가나 저리가나/ 움직이면 돈이 생겨
고대광실 좋은 집에/ 금의옥식 지내더니
개명(開明)인지 쇠명인지/ 주사(主事)인지 급사인지
구상유취(口尙乳臭) 어린것들/ 내 직업을 뺏어가니
속수무책 할 일 없이/ 등루거제(登樓去梯) 되었구나.
이날 가고 저날 가니/ 허구한 날 곤란하여
너와 같이 이곳 와서/ 너와 같이 품을 파니
애고 애고 서러워라/ 이 신세를 어이 하리
동포3
또 한사람 썩 나서며/ 네가 무슨 슬픔이냐
진정 슬픔 들으려면 내 슬픔을 들어보라.
네 슬픔을 들어보니/ 구곡간장 다 녹는다.
네 나 나나 저 동무나/ 처지는 다를망정
끝장 뽑아 무대 잡긴/ 네 나 나나 일반이라
내가 이곳 들어와서/ 장종비적(藏踵秘跡) 하였지만
언어 행동 살펴보고/ 대강 짐작 했으리라
부끄럽고 원통하여/ 말하기도 중난(重難)타만
너는 조선 양반 중에/ 세세(世世)공경(公卿) 갑족(甲族)이라
오백년간 흔천동지(掀天動地)/ 조상세덕(勢德) 그만두고
내 평생의 경력이나/ 대강 설명 하여보자.
내아(內衙)에서 젖 먹을 때/ 기생 등에 잔뼈 굵고
선화당(宣化堂)에 근친(近親)할 제/ 기생 품에 꿈을 뀌며
관례(冠禮)잔치 하던 날에/ 승전처분(承傳處分) 물어내어
계방(桂坊)벼살세 마(馬)나으리/ 초립(艸笠) 써 볼 여가 없고
과거(科擧)하면 초입사(初入仕)는/ 분향(焚香)한림(翰林)마다하되
규장각의 대교직각(待敎直閣)/ 공론(公論)으로 돌아오며
참판 판서 감유수(監留守)는/ 어깨돌림 얻어 한다.
안하무인 절로 되니/ 교만인들 없을 소냐.
무변(武邊)남행(南行)인사(人事)하면/ 처다 보고 답례 않고
남통북곤아장(南統北梱亞將)네와/ 나이 상관없이 담배 피우고
식사(食事)로 말하자면/ 입맛이 본래 없어
잣죽에도 체증(滯症)나며/ 생선구이 씹어 뱉어
생강귤병(生薑橘餠)차 탕관(湯罐)은/ 식을 사이가 별로 없다.
살림으로 말하자면/ 남전북답(南田北畓) 안 사두되
붉은 당지(唐紙) 한 조각이/ 화수분이 그 아니냐.
호조(戶曹)가 돈이고/ 선혜청(宣惠廳) 쌀광이며
오강부자(五江富者) 시량(柴粮) 대고/
팔도수령(八道守令)봉물(封物)주어
장안갑제(長安甲第) 넓은 집에/ 부귀(富貴)행락(行樂) 누리더니
난데없는 대포소리/ 산벼락(날벼락)을 맞은 후에
모든 일이 틀려가니/ 떼거지가 나는구나.
큰집 팔아 전세 들다./ 사글세 곁방살이
묘막위토(墓幙位土) 전당잡혀/ 발등 불 대강 끄고
서화(書畫)금기(琴棋) 파는 대로/ 목구멍에 풀칠하니
불천지위(不遷之位) 신주들은/ 선산(仙山)계하(階下) 매안(埋安)하고
마누라는 친정으로/ 자식들은 외가로
각기 갈라 헤어지니/ 나 갈 곳은 바이없다
목구멍이 포청이요/ 구복(口腹)이 원수 되어
연인가(連姻家)의 눈칫밥을/ 게눈 감추듯이 하고
친구 집에 윗목 잠을/ 상방(上房)거처(居處) 하듯 하며
노름판에 개평 얻어/ 잔돈푼을 만지다가
유리구걸(流離求乞) 할 수 없어/ 이곳으로 들어오나
곱게 자란 사지형해(四肢形骸)/ 무럼생선(生鮮) 시라소니
노동 품도 팔 수 없어/ 언문대서 하여주고
돈냥 수렴(收斂) 거둠질로/ 모진 목숨 부지하니
꿈속인지 생시인지/ 기막히고 어이없네.
애고 애고 서러워라/ 이 신세를 어이하리.
동포4
또 한사람 썩 나서며/ 그게 무슨 슬픔이냐
진정 슬픔 들으려면/ 내 슬픔을 들어보라.
너의 슬픔을 들어보니/ 슬픔인지 호강인지
내 슬픔을 알자 하면/ 일평생의 슬픔이라
내 처지는 이상하여/ 섬 중에서 출생하니
사농공상 할 수 없고/ 고기잡이 직업이라
물살 센데 주벅 매기/ 사리 들 때 살 매기와
낙배(거룻배) 타고 주낙 놓기/ 중선 타고 그물처서
영광, 법성, 강경, 논산/ 시세 쫓아 찾아가며
한식(寒食)때 녹도가고/ 곡우 때 칠산 가며
늦은 봄에 영평(永平)가서/ 조기잡이 대목 볼 제
좌우그물 아가리로/ 들기 시작 하고 보면
선(先)머리가 들어오자/ 뒤 따라서 몰려들어
잠시(暫時)간의 그물코가/ 물결위에 솟아 뜬다.
북을 치고 뛰어들어/ 사가라고 외치 면은
중류(中流)에 떴던 상선(商船)/ 모여들어 사고 갈 제
돈을 받아 집에 보내/ 일 년 생활하노라니
사자(使者)밥을 싸 가지고/ 만경파도 떠다닐 때
고생인들 어떠하며/ 위험인들 없을 소냐.
세치 밖이 저승이되/ 이 노릇을 못 면하더니
어업령이 실시되어/ 자유생애(生涯) 못한다네.
기술 있고 경험 있고/ 권리 있고 자본 있는
머리 깎은 작자들이/ 삼삼오오 몰려와서
해상측량 하고나며/ 허가장을 맡은 후에
비늘하나 못 만지게/ 각기 구역 금단(禁斷)하니
사생결판 방색(防塞)하나/ 그 세력을 당할 소냐.
백사지(白沙地) 섬 중에서/ 무엇 먹고 살잔 말인가
직업을 빼앗기니/ 탕패가산(蕩敗家産) 절로 되어
이곳으로 들어와서/ 공장노예 되었으니
애고 애고 서러워라/ 이 신세를 어이 하리
동포5
또 한 사람 썩 나서며/ 그게 무슨 슬픔이냐
진정슬픔 들으려면/ 내 슬픔을 들어보라
나는 신수(身數) 기구하여/ 심산궁협(窮峽) 태어나서
낫 놓고 ㄱ 모르니/ 일자무식 그 아니며
장출입(場出入)이 박람(博覽)이니/ 고루하기 짝이 없고
책력 한권 없었으니/ 철가는 중 어이 알리
꽃이 피면 봄이 온 듯/ 눈이 오면 겨울인 줄
생애(生涯)는 담박타만/ 나 할 일은 분분(紛紛)하다
싸리 베어 바자 틀기/ 가마 묻어 숯 굽기와
솔을 비어 송판(松板)내기/ 잡목베어 목신파기
덤푸사리 불을 놓아/ 따비밭을 일궈놓고
무른 데는 담배 심고/ 비탈진 데 스속 심어
굴피지붕 오막살이/ 고루거각(高樓巨閣) 부럽지 않고
산채 죽과 스속 밥은/ 고량진미(膏粱珍味) 마침이라
지독히 버는 덕에/ 호구지계(糊口之計) 되었더니
어인 놈의 사주팔자/ 이 생활도 과만타고
임야령(林野令)이 실시되어/ 국유림을 사정(査定)하니
수삽십리(數三十里) 산판(山坂)덩이/ 난데없는 임자 나서
일초일목(一草一木) 엄금하니/ 산중 생활 없어지며
미간지(未墾地)를 취체(取締)하니/ 화전(火田)하나 팔 수 없고
전매 령이 실행되니/ 담배 한포기 못 심으며
수렵법이 절엄(截嚴)하니/ 총 한방을 놀 수 없어
껄껄 우는 꿩 떼들과/ 펄펄 뛰는 산 도야지
사람보고 없인 여겨/ 쫓아내면 이마 받고
밭에 와서 간친회(懇親會)를/ 기탄없이 자주하니
도야지의 작인 노릇/ 그 아니면 분통하랴
은급(恩給)금수(禽獸) 했다마는/ 솔수식인(率獸食人) 그 아니냐.
어둡다던 산촌생활/ 말쑥하게 되었으니
손발톱이 젖혀지되/ 호구(糊口)할 수 과연(果然)없어
파(破)세간을 하고나서/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곳으로 들어와서/ 철공장의 노예 되니
애고 애고 서러워라/ 이 신세를 어이 하리
동포6
또 한 사람 썩 나서며/ 그게 무슨 슬픔이냐
진정 슬픔 들으려면/ 내 슬픔을 들어보라
내 팔자는 기박(奇薄)하여/ 조실부모 하고 난 후
머슴방에 자라다가/ 머슴노릇 천(薦)을 틀 새
무의무탁(無依無托)고용살이/ 부지런 이 밑천이라
가진 농역(農役) 세찬 센 일/ 하나 못할 것이 없어
오 유월 짧은 밤에/ 짚신 삼고 멍석 틀고
동지섣달 설한풍에/ 새벽에 나가 오줌주어
잠시 놀 덜 아니하니/ 상상(上上) 머슴 공론 돌아
예서 오라 제서 오라/ 사경(私耕)돈 점점 늘어
사오필(四五匹)의 도조 소(牛)와/ 수 십 석의 장리(長利)벼를
여기저기 늘어놓아/ 이 소문이 절로 나니
딸 둔 사람 정두(爭頭)하여/ 사위삼기 자청하여
주단(柱單)거래 한 연 후에/ 전안(奠雁)초례(醮禮)하고나서
화촉동방 늙은 신랑이/ 좋은 마음 어떠하랴
하루지내 바로 신행/ 세간살이 시작하고
일가창립 하고나니/ 호별할(戶別割)을 무는구나.
착실근농(着實勤農) 선성(先聲) 높아/ 전답 얻기 용이하다.
논 섬지기 첫해 농사/ 남과 같이 되었건만
구실도조(賭租) 다 제하니/ 나 먹을 게 하나 없어
타작마당 개상머리/ 빗 자락 만 들고 나네
내년이나 후년이나/ 조금 날까 바라노라
식구대로 희생되어/ 지주농사 지어주니
구실이며 일 년 소입(所入)/ 찾을 곳이 바이없다
열다섯 해 머슴 살며/ 개미 금탑(金塔) 모으듯 한 돈
사년 농사뒷바라지로/ 호박씨 까 한입에 넣고
빚쟁이에게 정장(呈狀)만나/ 가산(家産)집행(執行) 되었단 말가
천하대본 농사짓다/ 패가망신 웬일이냐
지원극통(至冤極痛) 뼈아프니/ 까닥이나 알고 보자
전답매매 자주 되어/ 파는 대로 가도(加賭)하고
인심 좋게 감해주되/ 소출대로 다 뺏으며
도량형법 실행하니/ 갓모받자 저울질로
이백 여근 받아가니/ 한 섬이면 삼십 두요
지세(地勢)령은 지주에게/ 세금부담 시킨 다데
작인에게 횡징(橫徵)함을/ 수수방관 취체(取締)없고
답주(畓主)나 사음(舍音)에겐/ 구(舊)상전(上典)을 섬기듯이
산채나물 애호박에/ 엿 동고리 연계(軟鷄)닭을
제철 찾아 진상하고/ 노안비슬(奴顔婢膝)업처 뵈되
태산이나 떠다 준 듯/ 권리사용 너무 하여
배짐 삯과 두렁 세는/ 포도군관 요패(料牌) 떼 듯
가뭄 끝에 비오시면/ 먼저 불러 모심기기
채종(菜種) 한 홉 나누어주고/ 벼 한말 식 거두어 먹기
도조 실어 가져가면/ 풍구 키질 실컷 한 후
마량(馬粮)먼저 떼어 놓고/ 술 한 잔도 안 주기와
시세 쫓아 출포(出浦)시켜/ 4∼5십리 가게 하니
항우 같은 용맹(勇猛)인들/ 헤어나기 바이없다.
유유창천(悠悠蒼天) 하나님아/ 이것 하감(下鑑)하옵소서
그럭저럭 탕패(蕩敗)된 후/ 젊은 아내 이별하고
다시 돈을 잡아보려/ 이 고장에 들어오니
애고 애고 서러워라/ 이 신세를 어이 하리
잇달아 나서면서/ 슬픔타령 한이 없다
이루 기록하자 하면/ 시간관계 그만두고
본국사람 많이 보니/ 반가운 맘 측량없다
-후략-
끝내는 말
저자가 발전한 일본의 모습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부러움도 느끼며 한편으로 낙후된 우리나라와 비교하면서 마음속으로 우리도 어떻게 하면 그들과 같이 발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포들의 고생스런 광경을 목격하면서 애끓는 애국애족의 심정을 느꼈으리라.
많은 사람들의 노래를 일일이 따라 적을 수도 없고 녹음도 어려웠던 시절이기에 저자가 여러 사람의 사정을 듣고, 또 전에 들었던 이야기들과 합하여 그에 맞는 가사를 지어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저자의 울분들을 토해냈다고 하면 너무 비약적인 짐작일까?
아무튼 당시 서릿발 같은 일제치하에서 그런 심정을 적나라하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물설고 낮 설은 타국까지 굴러 와서 삶과 싸우는 측은한 동포들이 부르는 자탄가를 빌려 쓰는 방식으로 글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울분을 표시하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사 중에 녹도, 칠산, 영평(연평도) 등 우리 보령지역 어민들과 관련한 서해안의 섬 이름이 나오는 것이 흥미롭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