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생활민속

옛날 부업들

구슬뫼 2018. 8. 25. 18:57

1.들어가는 말
 1950∼60년대의 농촌소득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논에서 나는 쌀의 수확량은 한마지기 당 2섬 꼴로 적을 뿐 아니라 밭작물은 거의 자급자족용 잡곡이나 채소수준으로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농가마다 소, 돼지, 토끼, 닭, 염소 등 가축을 길러 농외소득(農外所得)을 올리려는 노력들이 대단했다. 정부에서도 유축농업(有畜農業/ 작물재배와 가축사육을 결합한 농업형태로 가축을 기르면서 그 노동력을 경작에 이용하고, 배설물을 비료로 이용하며, 수확의 일부를 사료로 이용하여 비료와 사료의 비용을 절약한다)을 적극 권장하고 농가부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나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그 실효성은 별로였다.
농번기에는 일손이 딸려 어려움을 겪지만 농한기에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어 빈둥빈둥 놀아야만 했다.

가까운 곳에 공사판이라도 있으면 품팔이를 할 수 있겠으나 당시에는 그런 것도 별로 없었으며 짚을 이용하여 가마니를 치고 새끼를 꼬는 등 부지런히 해봐도 역시 한계가 있었다. 그 당시의 부업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했나? 짚어보고자 한다.


2.부업에는 무엇이 있었나?
 가. 가축 기르기

 지금은 크게 축사를 지어 소나, 돼지, 닭 등을 대단위로 기르는 축산업이 성행하지만 옛날엔 소는 부잣집에서나 길렀고 보통은 집집마다 돼지 한 두 마리, 염소 몇 마리, 닭 10여 마리씩 길러 농외소득을 올렸고 어린 학생들도 토끼 몇 마리씩 길러 학용품대를 마련하곤 했다.
요즈음처럼 대단위로 가축을 기르는 것은 엄두도 못 냈으니 그 이유는 우선 시설을 크게 짓고 가축을 많이 들여올 자본이 없고, 전문적인 기술이 없으며 생산량을 출하할 유통망도 없는 등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연도별가축사육현황(출처: 보령시청소장 통계연보)

                                                                                                                               단위: 마리

연도별

젖소

돼지

오리

(염소)

토끼

1961

4,932

-

8,600

963

72,518

-

8,777

1962

5,901

-

10,893

347

83,230

-

8,809

1963

6,456

-

10,623

392

81,593

-

7,775

1964

6,464

-

8,910

303

66,586

-

5,419

1965

6,452

-

8,627

270

76,167

-

5,463

1966

6,074

-

8,694

817

83,053

1,340

6,466

1967

6,097

12

8,701

972

113,879

1,290

6,377

1968

6,079

10

4,930

395

145,241

922

3,980

1969

6,080

11

7,690

537

129,525

1,455

4,392

1970

6,157

-

6,532

848

143,266

1,395

4,746

1971

6,778

-

7,932

523

127,473

2,726

3,845

1972

7,696

-

5,779

254

104,233

3,375

5,233

1973

9,403

150

6,926

334

105,073

3,275

5,635

1974

10,022

191

7,132

1,001

56,358

5,043

7,456

1975

9,600

-

5,156

507

70,496

1,925

5,355

1976

9,481

-

6,482

554

90,962

5,056

5,828

1977

9,980

-

6,222

820

99,753

4,587

6,170

1978

10,977

-

7,936

2,213

112,728

4,424

4,063

1979

10,110

267

15.365

446

111,347

3,509

3,751


수가 불분명한 것은 ‘-’표를 하였고 적은 숫자인 말과 칠면조 그리고 개(가축?)는 제외.


  위 표를 보면 꾸준하게 유축농업을 위해 가축들을 많이 길렀음을 알 수 있고 1960년대 말부터는 닭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대 말에는 소의 수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80년대에는 전업 축산의 꿈을 꾸며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축산업이 아닌 농가부업으로서의 유축농업에 대한 글이므로 규모가 큰 축산이나 특수한 가축은 제외하고 순수한 부업으로 기르던 것만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자 한다. 



  1) 소
 소는 가축이지만 길러서 팔기위해 기르는 농가보다는 대개 논밭갈이용 일소로 기르기 때문에 선일 (제 논밭을 소와 쟁기로 갈거나 남의 논밭을 갈아주고 갈이삯을 받는 일)을 하는 집에서 길렀다,


순수하게 가축으로 기르는 집도 있긴 했지만 너무 값이 비싸서 가난한 집에서는 소를 살 엄두를 못 내고 돈 많은 부잣집에서 사주는 소를 길러 나중에 이익을 반으로 나누는 속칭 ‘먹일 소’를 기르기도 하였다.  소가 비싸기 때문에 농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찌나 큰지 대개의 집은 소가 재산목록1호를 차지하였고 소 팔아서 아들을 가르친다는 뜻으로 대학교를 가리켜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도 생겼었다.

소는 비싸지만 기르기가 쉽고 1년 정도 키우면 많은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으며 새끼라도 한 마리 낳으면 크게 이익이므로 농가수익에 큰 역할을 하였다. 

소는 아침저녁으로 여물을 쑤어 먹였는데 짚을 짧게 썰어 가마솥에 푹 삶아 쌀겨 따위를 섞어서 주었고 낮에는 풀이 많은 냇가나 산에 내다 매어 싱싱한 풀을 뜯어먹도록 하였으며 일거리가 없는 한가한 시간에는 소를 끌고 풀이 많은 곳으로 돌아다니며 좋은 풀을 뜯어먹도록 하였다, 이를 소 뜯긴다고 한다.
 또한 저녁이나 외양간에 넣어두는 시간에도 소를 끊임없이 먹이기 위해 매일같이 꼴(가축에게 먹일 풀/우리지역에서는 깔이라 하였음)을 베어다 주어야 하는데 돼지와 토끼 염소도 꼴을 베어다 주어야 함으로 저마다 매일같이 베다보면 벨 곳이 마땅치 않아 애를 먹었다.

아무리 일이 많아 바빠도 풀을 베어오지 않으면 당장 소가 굶어야 할 판이므로 짬을 내어 풀을 베어 와야 했고 더구나 비라도 구질구질 오는 날에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오죽하면 “깔(꼴)베기 싫으면 소 팔아라.“라는 속담까지도 생겼을까? 직장에서도 맡은 일을 하기 싫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에게 차라리 직장을 그만 두라는 뜻으로 곧잘 이 속담을 써먹곤 했다.


   2) 돼지
 소 다음으로 비중을 차지하는 게 돼지다.
돼지새끼를 사다가 1년 정도 기르면 상당한 값을 받을 수 있는데 수퇘지를 사서 거세를 하면 잘 자라고 고기 맛도 좋다고 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고 암퇘지를 길러 새끼를 낳게 하면 한번에 10∼12마리씩 낳기 때문에 수입이 짭짤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도 돼지 새끼를 내었는데

12마리를 낳아서 부모님께서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돼지는 먹성이 좋아 아무거나 잘 먹는다. 음식물찌꺼기에 겨를 섞어 먹였는데 지금처럼 음식물쓰레기가 많이 발생하면 좋았으련만 당시에는 음식물찌꺼기라 해도 솥을 씻은 구정물이 고작이라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먹이가 부실하니 할 수 없이 매일같이 싱싱한 풀을 넉넉히 베어다 돼지우리에 넣어주면 돼지가 실컷 먹고 남는 것은 배설물과 함께 섞여 훌륭한 유기질비료가 되었다.

소도, 토끼도, 염소도 두엄이 생산되긴 했으나 돼지두엄이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또한 질 좋은 유기질 비료였다.

 

  3)닭
 대개의 농가는 닭 몇 마리씩을 길렀다.
닭은 집주변에 흩어진 모이를 주어먹고 지렁이와 풀벌레들을 잡아먹으며 풀잎도 뜯어먹기 때문에 몇 마리정도는 사료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쉽게 기를 수 가 있었다.

닭의 마리수가 늘어나거나 겨울 같은 때는 쌀겨나 보릿겨를 버무려서 사료로 주고 급한 때는 알곡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정월 맡 배로 병아리를 깨어 기르면서 앙증맞은 병아리들 커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있고 어미닭이 하루에 한 개씩 달걀을 낳으면 모았다가 5일장에 나가 팔아 쓰는 재미도 쏠쏠하였지만 그저 가용 돈을 보태 쓰는 정도이지 농가에 큰 수익은 못되었다.
 가난한 시절이었으므로 어머니들은 달걀을 알기를 닭 한 마리처럼 아꼈다.

어떤 부잣집(도시로 아들 유학을 시킬 만큼 부자)에서는 서울에서 공부를 하는 아들이 여름방학 때 집에 와서 달걀을 먹으려고 둥지에서 꺼내가지고 달아나면 어머니나 누나는 “야 그게 닭이 한마린데”하면서 빼앗으려 쫓아다니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고 소풍을 갔을 때 삶은 달걀을 싸가지고 온 부잣집(?) 친구들이 그렇게 부럽기도 한 시절이었다.


  4)염소
 염소는 별도로 사료를 주지 않고 풀을 베어다가 주며 낮에는 풀밭이나 산에 내어다 매고 저녁때 들여오곤 하였다. 부녀자들 또는 청소년들이 한가한 시간에 소를 풀 뜯기는 것처럼 염소도 연하고 싱싱한 풀밭으로 끌고 다니며 풀을 뜯어먹도록 뜯긴다.

기르는 데 사료나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내다 매고 들여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아이들이 많거나 일손이 많은 집에서 몇 마리씩 길렀다. 봄에 새끼염소를 사다가 길러 겨울이 오기 전에 약용염소로 팔아 가용 돈에 보태 쓰고 또 다시 봄이 오면 새끼염소를 사다 기르기를 반복함으로서 사료가 필요한 겨울을 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끼를 내어 마릿수가 늘어나거나 풀이 없는 겨울철 등에도 계속 기를 때에는 콩깍지, 건초 등을 준비하여 먹이거나 보릿겨. 쌀겨 등을 사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염소는 물을 싫어해서 물 묻은 풀을 주거나 환경이 습하면 쉽게 병이 남으로 주의가 필요했다.
 
  5)토끼
 토끼는 어린 학생들이 주로 길렀다.
풀만 뜯어다 주면 되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주로 길러서 나오는 소득으로 학용품을 사서 쓰곤 하였다. 말하자면 청소년들의 독립된 경제활동(?)이랄까?

헌 사과상자(옛날엔 사과상자를 얇은 판자로 만들었음)를 이용하거나 판자, 또는 지름 3cm정도의 곧은 막대기를 이용하여 사각형의 토끼장을 만들어 그 속에 토끼를 넣어 길렀다.  염소와 마찬가지로 물을 싫어해서 물이 묻은 풀을 먹이거나 토끼장이 습하면 설사병에 걸려 죽기도 하므로 토끼를 기르는 어린이들은 특별히 신경을 써야했다.


   6)기타
 이 밖에 오리는 물고기를 잡아먹기 때문에 시냇가, 저수지주변 등 특정한 지역에서만 길렀고 거위도 있었으나 기르는 집이 별로 없었으며 젖소는 부업이라기보다 전업축산에 속하므로 생략한다.


 나. 모시
 미산, 주산, 웅천지역은 모시가 생산되던 한산모시시장을 중심으로 한 저산팔읍(苧産八邑/저포 즉 모시가 생산되던 충청도의 여덟 개의 읍을 말하는 것으로 부여, 임천, 한산, 홍산, 서천, 비인, 남포, 정산을 말한다. 저포팔읍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의 시장 권역에 속하여 예로부터 모시를 많이 하였다.
농한기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농번기에도 낮에는 밖에서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다가도 저녁에는 등잔불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모시를 째고, 삼고, 하였던 것이다. 모시 한필을 만들어 내려면 혼자서 약 한달 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쏠쏠한 수입에 집집마다 아낙들이 모시를 경쟁적으로 하였고, 시어머니, 며느리, 딸 등 여자들이 많은 집안에서는 수입이 만만치 않았다.
 어떤 집에서는 큰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다행히 좋은 부대에 배치되어 고생을 안 하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 휴가와 외출, 외박을 너무 자주 오는 바람에 모시 한필을 해 놓으면 휴가 와서 쓰고 가고, 또 한달 쯤 되어 한필을 해 놓으면 외박 나와서 쓰고 가고를 반복한다고 한탄하는 부모도 있었다.
 
  1)태모시
 모시풀의 껍질을 벗겨 겉껍질을 제거하고 속껍질만을 모아 놓은 것이 태모시이다. 태모시를 생산하는 전문가(?)들은 모시풀을 가꾸는 농가에서 모시 대를 사다가 껍질을 벗긴 다음 겉껍질과 속대는 버리고 속껍질만 물에 4∼5회 담갔다가 말리는 등 일정 절차를 거쳐 태모시로 가공하여 시장에 내다 판다.


  2)모시하기
 모시 째기, 모시삼기, 꾸리감기, 모시날기, 모시매기, 모시짜기 등 전 과정을 모두 모시하기라 한다.

 

  ①모시 째기
 쩐지(쩐지대와 목항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쩐지대는 지름3cm, 길이40-45cm의

대막대기 윗부분을 10cm정도 쪼개어 V자형으로 깎아 만들고, 쩐지목항은 지름 12-15cm의 통나무를 길이 15cm정도로 잘라 반으로 쪼갠 다음 둥근 부분에 적당히 구멍을 파서 만든다. 쩐지목항의 구멍에 쩐지대 아래 부분을 끼우고 V자 부분이 위로 가도록 세우면 쩐지가 된다.)에 걸어 놓은 태모시를 한 가닥씩 빼어 이빨과 손을 이용해 가늘게 쪼개어 또 다른 쩐지에 건다. 이 때 모시의 굵기가 일정해야 품질 좋은 모시를 만들 수 있다. 여자들은 늙으나 젊으나 심지어 10대 소녀까지도 모시째기를 하였는데 너무 늙어 이가 없는 할머니들은 할 수가 없었다.

 

  ②모시삼기
 가늘게 짼 가는 모시를 쩐지에 걸어놓고 한 가닥씩 빼어 손바닥과 침, 그리고 무릎을 이용해 길게 잇는데 방법은 모시가닥을 한 올 빼어 무릎에 올려놓고 다른 모시 올을 겹쳐놓은 다음 침을 묻힌 손바닥으로 쓰윽 한번 비비면 이어진다. 여자들이 허벅지를 내어 놓고 모시를 삼기 때문에 외간남자들은 출입을 삼간다. 이렇게 이어 만든 한 줄의 긴 모시실을 이어 광주리에 서려 담는데 적당량씩 묶어 한 굿(모시 굿)이라 정하며  20굿을 가져야 모시 한필을 짤 수 있다.


   ③꾸리감기
 모시 굿을 하나씩 가져다가 광주리에 넣고 적당한 크기로 꾸리를 감는다. 모시짜기의 씨줄용 모시실을 만든 것이다. 꾸리는 길이 10cm정도의 길쭉한 모양으로 감는다.


   ④모시날기
 10개의 모시 굿에서 젖을 대의 구멍으로 모시실을 꿰어 한 묶음으로 하여 날틀에 걸어 한필의 길이에 맞추어 날실의 길이로 날고 새 수에 맞추어 날실의 올수를 맞춘다.

 

   ➄모시매기:

 모시실에 콩가루와 소금을 물에 풀어 만든 풀가루를 솔에 묻혀 모시실에 골고루 먹이는 일이다.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없는 날을 택한다.


   ➅모시짜기
 모시꾸리를 베틀에 올려 베를 짠다. 다 짜면 한필씩 감아서 시장에 내다 판다. 베틀이 있는 집은 동네에서도 2-3집에 불과하므로 없는 집들은 베틀주인이 베를 짜지 않는 기간 동안을 이용하여 짠다.


 다. 청올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여자들이 하던 부업이다.
청올치는 칡덩굴의 겉껍질과 속대를 없애고 속껍질만 남긴 것을 모시를 째서 잇듯이 가늘게 쪼개어 길게 잇는 것으로  속껍질만 빼낸 원료를 대주는 업자(?)가 따로 있다. 가정에서 그것을 받아다 가늘게 쪼개어 이은 다음 적당한 크기로 꾸리(모시꾸리는 10cm정도의 길쭉한 모양이지만 청올치꾸리는 그보다 약간 더 길고 다 자란 누에 모양으로 생겼다)를 감아서 벽지공장에 납품하는 것이다.
쪼개기도 모시처럼 너무 가늘게 쪼개지 않고 폭이 2∼3mm정도로 쪼개며 잇는 방법도 모시와 달리 쪼갠 두 개의 끝을 잡아 독특한 방법으로 묶어서 잇는다,
 모시는 짜야 되므로 베틀이 없는 집은 남이 베틀을 사용하지 않을 때를 이용해야 하고 날기, 매기. 짜기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완성품도 시장에 나가 팔아야 하는 등  번거로움이 많지만 청올치는 꾸리까지만 감아서 갈포공장에 갖다 주기만 하면 등급도 없이 바로 돈을 주는 바람에 각 가정에서 선호했던 것 같다. 각 읍면소재지에는 대개 1개소 정도 갈포벽지공장이 있었다. 청올치가 생기자 모시는 차츰 사라져 갔다.


 라. 가마니 짜기
 ‘가마니 짠다.’ 또는 ‘가마니 친다.’라고 제작과정을 말하는데 70년대까지만 해도 농가에서는 물론 정부 양곡을 취급할 때  가마니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의 수요가 엄청나게 많았으며 따라서 가마니치기는 농가의 겨울철(농한기) 부업으로 짭짭한 소득원이 되었다. 가마니 공판(정부에서 가마니를 사들이는 일)날이면 우마차, 지게, 트럭으로 가마니를 날라다가 넓은 공판장에 꽉 차게 쌓아놓고 수매하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줄줄이 쌓아놓은 가마니사이를 검사원이 돌아다니며 등급을 매기는데, 좀 더 좋은 등급을 받으려고 조마조마한 농민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정한 검사원들은 슬쩍슬쩍 보고서 등급을 매기고는 등급도장을 팍팍 찍는데 그 정확도는 어떻든지 간에 낮은 등급을 받은 사람은 적지 않은 가격차이 때문에 검사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도 간간이 있고......
 어찌나 검사원의 소행이 얄밉고 검사를 대충한다고 생각했던지 무슨 일을 찬찬히 하지 않고 대충대충 하는 경우에 “가마니 검사하듯 한다.”는 속담이 생기기도 하였다.
 가마니를 짜려면 가마니틀이 있어야한다. 우선 틀에 가는 새끼를 세로로 촘촘히 날아야 되는데 구멍이 규칙적으로 나란히 뚫린 바디라고 하는 부분에 새끼줄을 일일이 끼워서 단단히 고정시킨 후 바디를 위로 올려 손잡이를 앞으로 당기면 씨줄(새끼줄)중 1,3,5,7...... 등 홀수 줄이 앞으로 나오고 2,4,6,8...... 등 짝수 줄은 뒤로 젖혀져 홀수 줄과 짝수 줄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옆에 사람이 가마니 바늘대(대나무를 쪼개서 길게 다듬은 것)를 이용하여 짚 2매를 맛 방구 쳐(아래 윗부분을 서로 엇갈리게 하다.)  그 틈새에 집어넣으면 바디를 힘 있게 아래로 내려친다. 바디를 다시 올려 이번에는 손잡이를 뒤로 재끼면 짝수 줄이 앞으로 나오고 홀수 줄이 뒤로 젖혀지게 된다. 또다시 볏짚 2매를 맛 방구 쳐 틈새에 집어넣고 바디를 다시 내려친다. 이렇게 씨줄을 교차하면서 짚을 넣어 바디로 내려치기를 계속하면 가마니때기가 짜지게 되고 이것이 완성되면 떼어내어 양쪽 가에 빠져나온 짚의 밑 부분을 예쁘게 우겨가며 마무리를 한 다음 반으로 접어 가마니바늘(쇠로 만듦)을 이용하여 새끼로 양쪽을 붙여 꿰매면 가마니가 완성된다. 이렇게 만든 가마니는 그 용량이 곡식 5말(소두 10말) 들이이며 각종 곡식을 넣어두는데 쓰였고 헌 가마니는 모래, 흙 등을 넣어 허물어진 제방을 복구하는 등 수방자재(水防資材)로 쓰기도 하였으며 뜯어서 가마니때기로 만들어 축사, 온상 등 각종 보온 덮개로도 사용하였는가 하면 뒷간이나 잿간입구에 문으로 걸쳐 사용하는 등 그 용도가 다양하였던 것이다. 이 가마니들은 1960년대 후반쯤 기계 가마니가 등장하여 대량 생산이 됨으로서 가마니치기를 하는 부업 농가에 큰 타격을 주는가 싶더니 1980년대에는 마대가 보급되어 가마니를 대체하게 되어 오랜 세월 곡간을 지켜오던 가마니는 스르르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마니 치기 말고도 새끼 꼬기, 멍석, 맷방석, 삼태기, 짚신 등 짚을 이용한 가공품들을 만들기는 했으나 집에서 쓰는 물품들을 직접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수입원으로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마. 떡갈잎채취
 떡갈나무는 예로부터 떡을 찔 때 사이사이에 넣어두어 달라붙는 것을 막고 잎 향기가 떡에 스며들게 했다고 해서 떡을 찔 때 넣는 참나무, 즉 ‘떡갈이나무’란 뜻이라고 한다. 떡갈잎으로 떡을 싸서 두면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는다고 하며 실제로 냉장고에 떡갈잎을 넣어두면 잡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1970년대 말경부터 1980년대 초 떡갈나무 잎을 채취하는 부업이 있었다. 어른 남녀는 물론이요 아이들까지도 떡갈잎 채취에 나섰다.
일본 사람들은 단옷날 떡갈나무의 잎으로 싼 떡을 먹기 좋아하는 풍속이 있다고 하며 그래서 떡갈나무 잎을 따서 삶고 찌는 가공과정을 거쳐 일본에 수출했던 것이다.
 떡갈잎을 사들여 삶고 찌는 과정은 산림조합에서 맡았으므로 사람들은 싱싱한 떡갈잎을 많이 따다가 일정장소에 가져가면 산림조합 직원들이 나와서 돈을 주고 사가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농촌의 중요한 소득 품목으로 각광을 받았었다.


 바. 가발뜨기
 1960년대 우리나라 총수출의 12%를 가발이 차지하여 수출품목 중 2위를 하였고 순수 외화 벌이로는 1위인 섬유를 제칠 만큼 가발산업이 성행했다. 1964∼1965년부터 시작한 가발수출은 마침 미국이 가장 큰 가발수입국이었던 중국에 대하여 공산권 국가의 가발을 수입금지함으로서 우리나라의 가발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였다. 1960년대 말에는 속눈썹과 머리가발이 미국시장을 석권하여 가발하면 코리안이라는 의식과 함께 가발로 돈을 버는 교포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 즈음 정부에서도 가발기능양성소를 세워 운영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이렇게 가발사업이 발전하자 대단위 가발공장이 활발히 가동될 뿐 아니라 폭발적인 가발수요에 충당하고자 상당량을 일반주부들에게 맡겨 뜨도록 하였고 특히 간편한 속눈썹은 많은 부분을 일반인들에게 맡겨 뜨게 하였으므로 이때 우리지역에서도 많은 주부들이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사. 수예품
  1)시보리뜨기
 시보리는 일본말로서 옷의 소매나 밑단에 사용되는 신축성 있는 편성물을 말하며 우리말로 순화한 말은 ‘조르개’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이 전통의상의 기초 작업인 시보리를 임금이 싼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갔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시보리 뜨기가 여자들의 부업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읍면소재지에 있는 시보리전에는 시보리를 떠서 돈으로 바꾸러온 사람과 일감을 가져가기 위해 온 사람들로 붐비기도 하였지만 농번기 등으로 시보리 뜨는 사람이 줄어들거나 뜨기 어려운 일감이 있을 경우에는 시보리 장사가 직접 마을을 돌아다니며 일감을 맡기기도 하였다.
 시보리는 하얀 명주천에 검은 점으로 여러 가지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홑시보리’와 ‘겹시보리’로 나뉘고 시보리를 뜬다고 하는 것은 이 시보리에 새겨진 꽃무늬를 이루는 점을 작은 바늘로 잡아당겨 실로 모두 옭아매는 작업이다. 시보리 한 필에 수천 개의 점이 그려있어 그 점을 모두 옭아매는 일은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
시보리 길이는 대개 1m정도 되지만 긴 것은 2m∼3m정도 되는 것도 있었다. 이런 시보리를 한 필 다 뜨려면 숙련된 사람이라도 보름이나 한 달 이상 떠야 한다.
 
  2)뜨개질(편물/編物)
 털실을 가져다가 스웨터를 비롯하여 조끼, 셔츠, 가운, 드레스, 원피스 등 뜨개질로 만들 수 있는 여러 가지 옷들을 손 뜨게 질로 떠서 납품하는 부업이었다.
 이것 역시 임금이 비싼 선진국에서 우리나라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뜨개질 수예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중간상인이 뜨개질용 털실을 실어다 놓고 주부들을 불러 뜨개질 요령을 간단하게 교육시킨 다음 한 뭉치씩 나누어주면 각자 집으로 가져가서  뜨개질을 완성하는 대로 가지고 온다. 일감의 주문 양에 따라 한차례 일감을 완성하는데 열흘∼한 달 정도 걸렸고 그 수입이 짭짤하여 주부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서로 한 개라도 더 뜨려고 경쟁이 대단하였다.


3.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들
 농한기에 작은 공사판이라도 생기면 너도나도 앞장서 품팔이를 다녔고, 그게 없으면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다가 장터에 나가 팔기도 하였으며, 어린이들은 이삭줍기를 하고 늦은 봄에는 산에 가서 지네와 반묘(斑猫=가뢰/ 우리지역에서는 발매라고 하였음)를 잡아다가 한약방에 팔아 학용품대를 마련하였다.
 1960년대 말에는 산 다람쥐를 쳇바퀴 돌리는 작은 상자에 넣어 일본에 수출하는 바람에 수집상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다람쥐를 샀으므로 일부 마을에서는 이를 생포하여 수집상들에게 넘겨 짭짤한 수익을 올릴 때 도 있었고, 1970년대 말에는 담배꽁초를 줍는 사람도 보았는데 필터부분을 모아서 팔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지역에는 없었지만 과수원이 있는 부근에서는 과일 씌우는 봉지를 접어 돈을 벌기도 하고, 도시근교 공장이 있는 부근에서는 인형의 눈썹을 부치는 일 등 공장과 연계한 부업들이 많이 있었다.
 이와 같이 농어촌뿐 아니라 도시지역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푼이라도 모으기 위한 노력이 대단한 시절이었다.


4.끝내는 말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려 하였으나 농번기를 제외 하고는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던 그 시절엔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크게 생각하여 식전(기상하여 아침 먹기 전까지)내내 부잣집에 가서 논두렁 깎기 등 허드렛일을 해주고 겨우 아침밥 한 끼 얻어먹는 일도 있었고, 어떤 집이든 제삿날에는 색다른 음식을 준비하기 마련이니까 어느 집 제삿날이 언제인가 기억하였다가 다음날 아침밥 먹을 시간에 슬그머니 방문하여 음식을 얻어먹는 얌체(?)같은 아낙네도 있었다.
 내가 10대 소년시절 친구들끼리 낄낄대며 나누던 우스갯소리가 하나 생각나 소개한다, “어느 마을에 각 가정의 제삿날을 적어 놓고 제삿날 아침 마다 찾아다니며 술을 얻어먹는 얌체가 있었는데 어떤 집에서 일부러 그를 골탕 먹이려고 쉰 술을 대접했더니 배탈이 나서 설사를 했다는 것. 그가 아픈 배를 문지르고 있다가 제삿날을 적은 장부를 훑어보고 있는 아들 녀석에게 ‘야! 아무개네 제삿날은 흐려라(지워라)’라고 하였다.”는 이야기인데 두고두고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었다.

오죽하면 남의 집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을 농담으로 ‘사발농사를 짓는다.’고 표현하기도 하였을까?
 요즈음 젊은이들이 생각하면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나 할까? 무슨 동화나라의 이야기처럼 신기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것들은 불과 50∼60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연간 국민소득이 1953년 67$, 1960년 80$, 1970년 286$, 1980년 1,686$, 1990년 5,893$이라고 한다. 연간 100$도 못되던 국민소득이 천$, 5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2000년대는 1만$과 2만$을 거쳐 이젠 3만$시대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국민소득이 빠르게 증가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우리의 선대들과 현재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세대들이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가난의 굴레를 벗고 풍족한 오늘을 이룬 것임을 젊은이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자료수집에 협조해준 보령시청 김현 통계담당에게감사를 드립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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