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녹도 항일의거 이야기

구슬뫼 2017. 11. 23. 14:37

     정미의병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한국군대를 해산시켰다.

군대를 해산하던 날인 1907년 81일 시위대 대대장인 박승환이 자결하고 서울의 시위대 소속 한국군 1,600여명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임으로서 시작된 정미의병은 원주, 강화, 홍천, 진주, 안동 등 지방으로 번져 각지에서 일본군과 맛서 싸웠으며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서울로 진격하기도하였다.

이때 충남지역에서는 같은 해 810일 홍주분견대가 봉기하였으나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녹도의병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편 오천군 하서면의 소재지였던 녹도는 해산물이 풍부하여 풍요로운 섬이었던 관계로 화적들의 출몰이 심하여 오천군에 경비병을 보내달라고 했고 이에 5명의 군인(패잔병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진압된 정미의병의 일부일 것으로 짐작함)을 지원받아 화적들로부터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있었다.

또한 다른 기록에 의하면 정미의병 중 항거하던 진위대원(鎭衛隊員) 6명이 일시 녹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녹도의거

 이들 5-6명의 의병들이 녹도에 머물던 중 인근을 지나가는 일본인의 상선을 습격하여 소금과 쌀을 빼앗아다가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때 재물을 빼앗긴 상선의 일본인들이 군산 수비대에 신고하면서 도적들이 녹도로 들어가더라.”고 함으로서 190798일 일본인 조사단(순사1, 수비병3<草野上等兵 >, 통변2, 한국인선부4)이 섬을 찾아 현장을 답사하고 산에서 탄피까지 1개 발견하였지만 주민들이 의병의 소재를 모른다고 할 뿐 아니라 말들이 서로 엇갈려 조사가 늦어졌다.

 

 조사단은 날이 저물자 다음날 다시 조사키로 하고 마을에서 200m정도 떨어진 설바탕에 배를 세우고 그곳에서 하루 밤을 자려고 했다. 그러나 높새바람(동풍)이 강하게 불면서 닻줄이 끊어져 배가 선창가로 밀려왔고 일본인들이 배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때 의병들은 2개조로 나누어 1조는 돌컷이라는 곳의 팽나무 뒤에 매복하고 1조는 노랑배라는 바위 뒤에 매복해 있다가 일제히 사격을 했다. 일본인들도 마주 총을 쏘면서 저항했지만 모두 사살하여 한 곳에 매장했으며 그들이 타고 온 배는 불살라 버렸다. 기록에는 10명을 죽였다고 되어 있으나 섬 주민들은 한결같이 7명을 죽였다고 하고 있음으로 한국인 선부는 살려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의병들은 주민들에게 일본군이 쳐들어 올 터이니 빨리 피하라고 하고는 자기들도 섬을 떠났으며 주민들도 다른 섬이나 타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피신하고 이장(○○)과 청년 3(박창선, 최승룡, 이름미상), 그리고 나이가 많은 노인 몇 사람만 섬에 남았다.


      녹도의 피해

 이 의거가 있자 같은 해 914일 일제의 군산 수비중대(대장:浮須)와 의용군 등 다수의 병력(이하 토벌대라 한다)이 쳐들어와 피하지 않고 있던 이장에게 의병의 행방을 물었으나 모른다고 답하자 단칼에 베어 죽였다. 그리고 섬의 집과 배와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림으로서 섬은 완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섬에 남았던 노인 몇 분의 생사여부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청년 3명은 바다에 뛰어 들어 가까운 섬인 호도로 헤엄쳐 도망가서 당산에 숨어들었다. 이에 뒤쫓아 온 토벌대가 당집에 불을 지른 후 불을 피해 달아나는 청년들을 쫓는데 그중 박창선이라는 청년은 도망가서 어느 집으로 들어가니 한 아낙네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다급한 김에 살려 달라며 치마 속으로 들어갔고 뒤쫓아 온 일본군이 방문을 열어보니 여자 혼자 바느질을 하고 있음으로 그냥 돌아가 버려서 그 후 청년은 생명의 은인에게 자기 딸을 며느리로 시집보내 사돈을 맺어 살았다.



       녹도의병 이야기가 실린 기록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데이터베이스(고종시대사/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19081911년 대한제국 농산공부발행(일본인이 우리 바다를 조사하여 쓴 책)

군산시사(群山市史, 1975년 군산시 발행)

도서지(1997년 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발행)

보령문화 제25(2016년 사단법인 보령문화연구회 발행)

 

          鹿島抗日義兵戰蹟碑

세운 때: 2017.11.21. 제막

세운 곳: 보령시 오천면 녹도리

비문내용: 이곳 녹도는 주벅어업으로 예부터 풍요의 섬이었는데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저항해 일어난 정미의병의 역사적 장소가 되었다. 19078월 해산군인들이 주도한 의병이 봉기한 상황에서 보령의 이웃고을인 홍주의 분견대가 봉기했고 그들 중 4-5명이 오천을 통해 녹도에 들어와 도적으로부터 녹도의 풍요를 지키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첫 투쟁으로 군산과 인천을 왕래하는 중 섬 주변을 지나는 일본 화물선을 공격하여 쌀과 소금을 빼앗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사건 후 군산의 일본군 수비대병력 10여명이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녹도에 들어와 의병이 숨은 곳을 찾으려고 주민들을 가혹하게 조사하였다. 주민들은 보복과 고초의 위험을 무릅쓰고 협조하지 않았다. 이에 의병들은 포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의 배가 밤에 동풍에 밀려 해안으로 떠밀리자 190798일 포구의 돌끝노랑바위에 은신하여 사격을 가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고 배를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의병들은 보복을 피해 주민들에게 섬을 떠날 것을 권고하고 주민들과 함께 섬을떠났다. 그후 914일 군산에서 의병 진압을 위해 일본군과 경찰이 들어와 이장과 남은 주민들에게 의병의 소재와 상황을 조사하려 했으나 협조하지 않자 이장을 살해하고 녹도를 초토화 했다. 남은 사람들은 호도로 헤엄쳐 피신했는데 추격해 온 일본군에 의해 호도와 삽시도 당산이 화재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초토화 된 녹도의 주민들은 잠시 섬을 떠났으나 다시 돌아와 섬과 주벅망을 복구하고 평화롭고 풍요한 섬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녹도에 항일 의병 활동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협조한 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온 녹도의병 상황을 보령문화연구회에서 2016년 자료수집과 주민 증언을 바탕으로 그 전모를 파악하게 되었고 일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항일 투쟁에 나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병과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고초를 무릅쓰고 의병활동에 협조한 녹도 주민의 애국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기에 여기에 그 사실을 새겨 세우게 되었다.

2017.11     보령시장


                 참고사항

헤이그 밀사사건: 1907(광무 11)년에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등의 밀사를 보내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려던 사건.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준은 그곳에서 자결하였다.

오천군 하서면: 오천군은 충청수영이 폐영되면서 1901년 오쳔군이 설치되어 천동면, 천북면, 하남면, 하서면 등 4개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보령군에 통폐합되었고 하서면은 오천면에 통폐합되었다.


제막식 모습

제막식을 마치고 전적비 앞에서

녹도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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