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보령문화연구회가 태동한지 30년을 지나면서 회지만 해도 올해 26집을 내게 되었고,
보령시지를 비롯한 20여 가지의 향토지 집필을 주도하였으며
그밖에 크고 작은 향토사관련 교육이나 행사를 주도하여 왔다.
지역 역사문화 연구를 위해 관내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민속을 조사함은 물론
우리지역문화와 관련이 있는 타 시군, 시도의 유적을 답사하고
멀리 중국의 절강성과 일본의 돈다바야시 까지도 답사의 발길을 넓히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서 이제 우리고장뿐만이 아니라
충청남도 나아가 전국적으로도 알아주는 유력 문화연구단체로 그 위상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회원모두의 피나는 노력과
관심 있는 많은 문화계인사를 비롯한 시민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30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2. 보령문화 연혁
1)준비과정과 출발
○1987년 10월, 문화의 불모지였던 우리고장에
문화연구모임을 만들어보자는 원로(황영주, 허준, 이강원) 선생님들의 창립제안에 이어
○1988년 1월 가칭 ‘대보문화’창립준비모임(황영주, 허준, 이강원, 임기석)을 가지고
고문 및 자문 위촉대상과 각 지역별(면, 동) 위원선정, 운영방안 및 정관 구상 등 준비과정을 거쳐
○1988년 5월 고문, 자문, 위원이 모두 참석하는 회의를 가진 후
그해 10월 신성문화연구소라는 이름으로 힘찬 출발을 하였다.
○한편 1990년 6월∼1991년 4월까지 황영주, 박정순 등 원로회원들의 주관으로
금요강좌(대보강좌라고도 하였음)라는 한문강좌를 매주 금요일 실시한바
그 회원 대다수가 연구회에 참가하면서 세를 더욱 든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2)연구회 이름의 변천
(1)신성문화연구소(新城文化硏究所)
1988.10 연구회의 이름을 신성문화연구소로 짓고 이강원 초대 소장이 취임하였다.
신성이라는 이름은 보령현의 소재지였던 주포면 보령리의 옛 이름이 신성리였다는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1990년 2대 조배환소장 취임하였다.
(2)대보문화연구소(大保文化硏究所)
1991.1.5. 대천시와 보령군의 앞 글자를 따서 대보문화연구소라고 개칭하였고
같은 해 12월 ‘대보문화’ 창간호를 발간한데 이어 매년 1회씩 발간하여 왔다. 조배환소장.
(3)대보문화연구회(大保文化硏究會)
1994.1. 대보문화연구소라는 이름이 행정기관 같은 인상을 주므로
순수한 민간단체임을 나타내도록 대보문화연구회로 고쳤다. 조배환회장, 김효기회장(1996∼1998)
(4)보령문화연구회(保寧文化硏究會)
1999.1, 보령시로 통합(1995.1.1.)하였으므로 이름도 보령문화연구회로 고치고
회지의 이름도 ‘보령문화’로 했다.
임기석회장(1999∼2000), 최철한회장(2001∼2002), 송하순회장(2003), 최철한회장(2004), 전윤수회장(2005)
(5)사단법인보령문화연구회
2005.10.5 사단법인으로 등록함으로서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지역문화 창달에 앞장서 오고 있다.
전윤수회장(2005∼2008), 임근혁회장(2009∼2012), 이춘호회장(2013∼2016), 임창순회장(2017∼현재)
3. 매년 회지에 발표한 연구결과들
창간호: 우리고장의 연혁/김효기외 14편
제2집: 유격장군 계공 청덕비(해역)/황영주외 17편
제3집: 보령에서 발견된 매장문화재/김영한외 18편
제4집: 敬順王의 離宮과 保寜과의 關係/김효기외 12편
제5집: 충청수영의 기능 변천/이호주외 8편
제6집: 보령지방의 性理學 受容과 學派/최근묵외 18편
제7집: 남포현 治所의 이동에 관한 연구/황의천외 11편
제8집: 가리티 마을 동제(洞祭)/황의호외 10편
제9집: 東學農民革命 過程에서 保寧과 周邊의 狀況/김효기외 11편
제10집: 보령의 마지막 儒學者 敦庵 李應復 先生/오현규외 11편
제11집: 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保寧地方의 自然災害/양화목외 8편
제12집: 조선시대 재판제도와 보령지역의 사례소개/이선행외 15편
제13집: 왕봉산과 이괄네 묘/임근혁외 18편
제14집: 崇巖山聖住寺事蹟記(해역)/최영성외 15편
제15집: 可笑亭/이봉규외 10편
제16집: 충청수영의 설치배경/민병선외 11편
제17집: 보령지역의 최근 주민 집단시위 사건/전윤수외 11편
제18집: 輪示通文 해역/이덕영외 14편
제19집: 오함사(烏含寺)와 오간지(烏合寺) 개찰의 시대 배경 고찰/임창순외 14편
제20집: 조선시대 남포현의 통치공간 구성원리/김명래외 13편
제21집: 藍浦烏石의 역사적 위상/황의천외 13편
제22집: 미산면 평라리에 조성되는 천주교 성지(聖地)/윤인희외 11편
제23집: 인문학과 지역재생/엄승용외 13편
제24집: 일본속의 보령회(保寧會)/강종선외 11편
제25집: 청라 귀학정/신재완외 12편
4. 주요활동
1)탑동에 있었다는 석탑의 소재를 찾아내다
보령시 남곡동에 있던 탑을 1910년대 고노(인천부 의원)라는 일본인이 불법으로 반출하여
인천 자신의 집 정원에 옮겼으나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해방을 맞았다.
이렇게 사라진 탑은 해방 후에는 자유공원 을 거쳐
1992년 인천시립박물관 정원에 옮겨 놓고 충남 대천시 남곡동에서 왔다는 안내판을 세워 놓았다.
한편 보령문화연구회 황의천회원은 한국문화재비화(韓國文化財祕話/1973/이구열지음)에서
이 석탑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했고 황의호회원이 학생들에게 향토사강의 중 이 석탑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던바
한 학생으로부터 아버지가 인천 어디선가 남곡동에서 가져왔다는 안내판의 석탑을 보았다는 제보가 있었다.
이에 황의천회원은 인천시의 곳곳을 뒤져 마침내 그 소재를 알아 내었고
사진과 함께 자세한 내용을 보령신문에 게재함으로서 보령시민과 관심 있는 사학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1999년 4월 11일에는 보령문화연구회원들과 남곡동 주민 10여명이 관광버스 편으로
석탑이 있는 인천시립박물관 현지를 방문하였다.
그 해 12월 보령시의회에서 인천시장과 인천시의회의장에게 본 석탑을 돌려달라는 공문서를 보냈고 재 인천 보령향우회와 협조하여 석탑반환운동을 전개하였다.
인천시의회에서는 관련 상임위원회를 열어 이에 대한 토론회를 벌였고
이 자리에 보령시의회 대천5동 소속 시의원과 전문위원, 향우회장단이 참석하여 시의원이 참고발언을 하는 등 열띤 공방을 벌였으나
석탑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후 인천시에서는 반환불가입장을 고수하면서
충남 대천시 남곡동에서 가져왔다는 안내판을 아예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 버렸다.
2016년 남곡동 주민들은 탑이 있던 자리에 인천에 있는 석탑의 모형대로 3층 석탑을 한기 만들어 세웠다.
2)일본 오간지(烏含寺)유적 답사
성주사가 있기 전에 오합사(烏合寺)가 있었다.
백제 28대 법왕의 왕자가 전쟁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었다는 오합사와 똑같은 건축양식의 오간지(烏含寺)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도 지어졌다고 해서 보령문화연구회가 2010년 2월21일 답사하였고
관계자들과 수년간 자료를 주고받으며 교류하고 있다.
오사카부 돈다바야시(富田林市)에 있는 이 유적은
오간지터(新堂廢寺=신도하이지), 구석고분(龜石古憤), 오간지이케(오간지 연못), 와요(瓦窯)터 등으로 나뉘어 있다.
(1)오간지터
1800년 후반부터 많은 기와 등이 나와 유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중
1936년 이시다(石田茂作)라는 사원(寺院)연구가가 아쓰카(飛鳥:7세기 전반)유적이라고 발표하였고
1959년 오사카부에서 부영(府營)주택을 짓고자 조사하다가 사찰기단을 발견, 건축취소 후
1960년 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으로 된 건물지 발굴, 그러나 서편 나라유적만 확인하고
동편의 아쓰카유적은 이미 주택이 들어 있어 발굴 못하고 있다가
1992년 동편의 아파트 재개발사업으로 발굴추진,
시텐노오지(四天王寺)식 가람이 있었음을 확인, “신도하이지식(新堂廢寺)"가람이라고 명명하였다.
(2)구석고분(龜石古憤)
오간지의 북서쪽 산자락에 돌로 만든 횡혈식(橫穴式) 고분이 있는데 일찍 도굴된 흔적이 있어 유물은 없었지만 오간지터와 와요터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기와들로 무덤 내부 벽을 만들어 오간지와 관련이 깊은 인물의 무덤으로 추측하며 무덤 속에 기와를 깔고 석관을 놓는 형식은 일본의 다른 무덤에는 찾아볼 수 없고 백제의 무덤형식과 같다는 것이다.
(3)오간지이케, 와요터
오간지에 딸린 연못과 기와, 벽돌을 굽던 터로서 1969년 기타노 고헤이(北野耕平)교수가 오간지이케(御觀寺池)를 발굴조사하면서 나라(奈良)시대의 와요를 발견하였는데 이곳에서 오간지에 사용된 백제식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들은 1948년-1949년까지 조사하여 오간지라 명명하고
1959년 후지사와라는 역사학자가 백제의 오합사와 관련된다는 보고서를 냈으며
1985년 조사반이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에 오합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까지 조사하고 돌아갔다는데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합사와 오간지가 가람형식이 똑 같고 사용한 기와가 같다는 것,
그리고 백제의 오합사는 615년에, 일본의 오간지는 620년에 지었다고 창건연대까지 밝히고 있는 것이다.
3)다카하마쵸 문화교류
2010년 2월 18일 다카하마쵸 문화회관에서 보령의 홍보사진전을 가졌던바
행사사진 10매/ 역사사진 13매/ 관광홍보사진 13매/ 민속사진 15매/ 산업사진 6매/ 생활문화사진 4매 등 61매를 전시하는 사진전을 가졌다. 개막식에 보령문화연구회에서 36명, 다카하마쵸 측에서 쵸장, 의회의장, 교육장, 교류협력단장을 비롯한 내빈, 학생 등 200여명이 참석하였고 그 후 한 달간 전시했다.
일본의 다카하마쵸는 보령시와 우호도시를 맺고 교류를 활발히 하는 도시로서
홍보사진전 이후 보령문화연구회의 일본 내 백제유적 탐방에 적극적인 안내를 맡아주었고 우리보령문화연구회에서 그들이 보령을 방문하였을 때 문화유적 안내 등 상당부분을 맡아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4)중국절강성과 문화교류
임진왜란 때 중국의 수병 3쳔 명을 이끌고 원군으로 왔던 유격장군 계금(季金)은 충청수영에 도착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후 이순신의 해전에 참여하였고 다시 충청수영에 돌아와 머물다가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덕을 기리는 계금장군청덕비(欽差統領折直水兵遊擊將軍季公淸德碑)가 충청수영성안에 지금까지 서 있다.
보령문화연구회에서는 본 비문내용을 해석하여 보령문화 제2집에 싣고 이에 대한 연구를 해왔으며
계금이 태주부 송문현 사람이라는 비문의 내용에 따라 그곳이 지금의 절강성 태주시에 있는 온령시 송문진임을 밝혀냈다.
그 후 그들 지방정부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다가
2009년 2월 20일 태주시와 온령시 송문진을 방문하여 계금에 대한 자료를 교환하고 관련유적들을 안내받았으며
계금의 후손들이 조상의 발자취를 찾아 우리나라에 왔을 때 유적을 안내 하는 등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다.
5)최상집열사 행적발굴과 홍주9열사의 유배지 대마도탐방
최상집열사는 1849년 웅천읍 소황리에서 태어나 1906년 1월 민종식의 광시의병에 참모로 같이 하였고
같은 해 3월 홍산지티의병에 좌우소모장으로 참여하여 4월 서천, 보령을 거쳐 홍주성을 공격하는 홍주의병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붙잡힌 사람 중 주요인물 9명(이하 홍주 9열사라 한다)이 대마도로 유배를 갔으며 최상집열사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관련기록을 토대로 1995년 홍주9열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나
최상집열사의 후손을 찾지 못하여 훈장을 보훈처에 보관하던 것을
보령문화연구회에서 그동안 연구한 결과와 소황리 원로들의 증언, 강릉최씨 족보 등을 확인하여
마침내 2002년 열사의 후손이 훈장을 수령하도록 주선하였다.
또한 보령문화연구회에서는 2013.8.12.-8.14까지 홍주 9열사의 유배지를 찾아 대마도 답사를 실시한바
열사들이 인치(引致)되어 유배생활을 하였다는 이즈하라(嚴原)의 경비대의 흔적을 더듬고
열사들이 행사(八幡宮祭)를 구경하며 시를 썼다는 배경의 하치만궁신사 등을 돌아보며
열사들의 애국혼을 느껴보기도 하였다.
6)충청수영의 역사와 문화학술세미나
오천면에 있는 충청수영성은 조선시대 충청수영의 총 본영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대단히 큰 유적지였으나 이름도 오천성이라 부르고 충청남도 문화재로 관리하던 것을 보령문화연구회에서 끊임없이 충청수영의 역할과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이름을 충청수영성으로 바로 잡을 것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추구해왔던바 마침내 2009년 이름을 충청수영성으로 고치고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시킴으로서 양질의 관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리 연구회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한편 복원 등 활발하고 발전적인 보전 및 활용방안 등을 모색하고자
‘충청수영의 역사와 문화 학술세미나’를 2009년6월 24일 가졌던바
이 행사에는 5명의 대학교수 등 전문가 7명이 발표 및 토론하고 200여명의 문화계 인사가 참여하였다.
7)향토사 책자발간
(1)보령의 고인돌
보령은 예로부터 선사 유적인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많이 분포하는 지역이다. 관내 전 마을 구석구석을 답사하여 흩어져 있는 300여기의 고인돌을 조사하여 위치도, 평면도, 사진과 함께 설명문을 수록한 『保寧의 고인돌』을 2000년 12월 대천문화원, 보령문화연구회 공동으로 간행하여 충청도 지역 그 어느 곳보다 많은 고인돌 분포지 임을 부각시켰다.
(2)보령의 등과유생
우리 보령지역은 타 지역에 비하여 과거 급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사마시 합격자의 예를 들면 보령현 132명(전국 54개 목, 현, 군 지역에서 6번째로 많이 배출) 남포현 55명(전국 36위), 보령지역 연고자중 사마시 합격자 62명, 문과 합격자 87명 등 346명의 방목(합격자명단)과 이들 합격자들의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부분을 정리하여 수록한 『보령의 등과 유생』을 2001년에 보령문화연구회에서 발간하였다.
8). 외부기관 발간한 향토사 책자 집필
(1)보령시지
2010년 보령시에서 발간한 『보령시지』의 집필을 맡아 상, 중, 하 총 3권 2,500여 쪽의 책자를 집대성하였다.
그동안 발간한 구 보령군지나 대천시지는 대부분의 집필위원을 대학교수 등 외부인사로 위촉하여 책 내용이 개괄적이거나 지역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들이 있었으나 이번 보령시지는 특수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보령문화연구회원이 주축이 된 지역인사들이 집필함으로서 기존 시군지 또는 타 지역 시군지에 비하여 지역성이 구체적으로 들어났다는 호평을 받았다.
(2)보령의 지명
1998년 보령시에서 발간한 『보령의 지명』(상, 하)은 2년여 동안 관내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원로 주민과의 대화를 통한 현장 자료수집과 과거의 여러 문헌 자료를 종합하여 편찬한 책자로,
주변에서 보기 드문 뛰어난 자료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3)관광보령의 명산을 찾아서
2005년 보령시에서 발간한 『관광보령의 명산을 찾아서』의 집필을 맡아 관내 오서산과 성주산을 비롯한 16개의 산들을 오르내리며 자연과 문화 환경을 조사하여 위치와 특징, 등산로, 찾아가는 길, 주변마을현황, 가볼만한 곳, 전설야화 등으로 정리하여 등산객이나 관광객, 나아가 산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책자로 만들어 냈다.
(4)보령의 금석문
2010년 대천문화원에서 발간한 『보령의 금석문』의 조사, 탁본, 해역까지 맡아서 처리하였다.
1910년 이전에 세워진 사적비, 묘비 및 신도비, 송덕비, 기타 등 209개의 석비를 2년여 동안 찾아다니며 일일이 탁본하여
그 사진과 원문, 그리고 내용을 해석하여 알기 쉽게 정리한 728쪽의 책을 만들어 냈다.
(5)기타 향토사 책자 집필에 보령문화연구회원들이 참여한 사례
제목 | 발간처 | 발간연도 | 내용 |
보령의 동제 | 대천문화원 | 2001 | 23개 마을 동제를 실 조사하여 행사사진과 문서 등 수록 |
보령의 봉수대 | 대천문화원 | 2004 | 현존 육지봉수와 과거 이전상황 및 권설봉수 |
홍경일기 | 대천문화원 | 2004 | 홍주의병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 洪京日記 발굴연구 해석 |
구슬뫼 이야기 | 주산면 | 2005 | 주산면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이야기와 마을 소개 |
보령의 수리계 | 대천문화원 | 2007 | 웅천천 유역 성동, 노천, 화평, 동오,, 삼곡리 보에 대한 고문서 해석 수록 |
보령의 석공업300년 | 대천문화원 | 2012 | 보령석공업의 발달과정과 남포오석의 위치 등 |
마지막 보부상육군상무사 | 대천문화원 | 2012 | 원홍주 등 육군상무사의 개요 보존문서류 사진과 해설, 유적 소개 |
보령의 홀기, 축문집 | 대천문화원 | 2013 | 향교, 서원, 사우, 문중의 홀기, 축문, 동제 홀기 |
효자도리 | 대천문화원 | 2013 | 효자도리의 자연, 환경, 역사, 경제와 유, 무인도현황 |
남포대천장과 주변의 문화 | 대천문화원 | 2013 | 조선시대 남포 대천장의 지리적 위치와 치소의 이동에 따른 장시의 이동 |
남포현의 삶터 공간구조 | 대천문화원 | 2014 | 남포읍성과 도성의 구성원리, 남포읍성의 관아배치 공간변화, 재정규모 등 |
보령의 사투리 | 보령문화원 | 2016 | 일반적인 사투리, 특수한 사투리 1,450여개와 표준말로 찾아보기 수록 |
※이 밖에도 1991년 발간한 보령군지와 1994년 발간한 대천시지의 집필, 교정, 편집에 회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향토사관련 강좌주도
(1)내고장 바로알기 강좌
문화원에서 2007년부터 매주 목요일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우리고장 바로알기” 강좌의 강사를 2014년까지 우리회원들이 대부분 맡아 향토사, 지리, 자연환경 등을 교육함으로서 시민들에게 우리고장을 바로 알게 하고 애향심을 가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2)오감보령강좌
2015년부터는 문화원에서 실시하는 “오감보령” 강좌를 주관하여 2015년 20강, 그리고 2016년 20강을 실시하였고 2017년도에는 장소를 웅천읍 복지관으로 옮겨 남부지역 시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연간 25강을 실시계획이다.
(3)각종 향토사관련 주민교육
각급 기관단체, 학교 등에서 요청이 있을 때 마다 회원들이 향토사관련 강의를 함으로서 범시민 우리고장 바로 알리기와 애향심고취에 적극 앞장서고 있다.
10)이 밖의 주요활동상황
(1)서해안고속도로부지 및 보령댐 부지에 대한 문화유적 발굴실현
서해안고속도로와 보령댐건설 등 관내 대단위 개발사업 부지에 대하여 문화유적을 철저히 조사해달라는 청원서를 문화관광부를 비롯한 관계기관에 청원함으로서 발굴을 실현시켰다. 발굴결과 상당수의 유구와 유물들이 출토됨으로서 대단위 공사로 문화유산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우리고장이 유서 깊은 곳임을 재삼 확인하기도 했다.
(2)건전한 문화정책 건의
문화재주변의 훼손, 고증이 부족한 성곽의 보수공사, 섣부른 봉수대의 복원, 문화재 안내판의 오기 등
문화재관리나 문화관련 업무에 문제점이 있을 때 적극적인 건의로 올바른 문화재관리, 건전한 문화정책에 기여하고 있다.
(3)독립군유적, 고구려유적, 백두산 탐방
2012년 8월 6일부터 8월 12일까지 6박 7일간 연변, 용정, 여순감옥, 관동법원 등 독립운동관련 유적지와 광개토대왕비, 국내성, 졸본성, 환도산성, 박작성 등 고구려 유적, 그리고 압록강변과 두만강변, 백두산 등지를 돌아보는 문화탐방을 실시하였다.
회원 및 가족 15명이 참여하였고 충남지리교육연구회원, 교사, 학생들이 함께했다.
(4)개성지역문화탐방
2008년 5월 25일 박연폭포, 선죽교, 숭양서원, 관음사, 고려박물관 등을 돌아보는 개성지역 문화탐방을 실시하였다.
회원 및 가족 등 36명이 참여하였다.
5. 어려움을 겪었던 일
1)지역 향토사 관련한 갈등
(1)보령 5열사와 관련한 갈등
1948년 9월 충청남도지사 서덕순, 보령군수 이상락과 지역의 여론을 주도하던 지식인 유림들이
추강 백낙관, 지산 김복한, 우록 류준근, 만취 황재현, 옥재 백관형 등 5인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를 지낸 후
60년 동안 이들을 보령 5열사라 칭하여 왔다.
그 분들의 기적비, 사적비, 기의비, 묘비 등이 묘역 또는 연고지에 산재해 있어
그 현장을 일일이 조사하여 사진, 원문, 해석 문을 보령문화 제15집에 실었는데
일부에서 5열사의 선정과정도 석연치 않으며 그 중 문제점이 있는 인물도 있는데
보령문화연구회에서 이를 책에 실어 알림은 역사왜곡이라면서
시군, 도, 중앙의 관계부서에 전화와 편지로 바로잡아달라는 요구를 하고
관내 기관단체장에게 서신을 보내는가 하면 보령지역신문, 충청지역 신문과 방송을 통해 대대적인 비난 활동이 있었다.
이에 우리 연구회에서도 지역신문을 통해 반론을 게재하고 본건 시비의 전말과 본회의 의견을 보령문화에 싣는 등 대처하였다.
(2)보령의 사명당 관련설과 관련한 갈등
웅천지역에 구전하는 '사명당이 수부리에 있는 절에서 수행했다'는 전설과 그 절터에 세워졌다는 관음사의 전신인 신흥사 창건당시(1949년) 만들어진 문서, 풍천임씨 족보, 사명당 어록 중 일부를 토대로 ‘사명당의 보령관련설’을 보령문화 제14집에 실었다.
그러나 신흥사 창건당시 만든 문서의 증거력이 떨어지고 족보, 사명당 어록, 기타 문헌에서도 사명당의 보령 관련설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사명대사 보령관련설의 재검토’를 보령문화 제16집에 실었다.
이에 사명당의 방계후손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을 하였다고 연구회장과 편집위원 전원, 보령시장까지 고소하였으나
무혐의 처분을 받은 사실이 있었다.
2)이웃 시군 향토사연구단체와 갈등
통일신라시대 대학자인 최치원선생의 묘가 홍성에 있다는 논문(이하 논문이라 함)이 1997년 12월 4일 전국 문화원연합회에서 실시하는 전국 향토문화 연구발표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우리지역은 아니지만 보령문화(대보문화)연구회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1998년 1월 18일 회원 9명이 현지를 답사하였으나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 후 문제의 논문을 입수하여 정독한 회원 한분이
보령문화(대보문화) 제7집에 “최치원의 묘가 홍성에 있다는 주장에 대한 견해”라는 글을 실어
논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최치원의 묘라고 볼 수 없음을 주장했다.
이에 화가 난 논문의 필자는 우리 연구회장과 반론을 주장한 글을 쓴 회원을 걸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고
4년여의 긴 다툼 끝에 결국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피소 자들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6. 글 나가기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나아가 세계적인 역사나 문화연구는 방대한 자료와 예산의 뒷받침, 그리고 대학 등 전문기관과 수많은 전문가들의 유기적인 협조 등이 있을 수 있지만
지역문화연구는 자료, 예산, 전문기관이나 연구인력 등 모든 게 부족하고 열악하여 연구하는 데 애로가 많다.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보령문화연구회가 지난 30년 동안 우리고장의 전통문화유산을 바르게 파악하고 보존하며 이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묻혀있는 역사자료를 찾아내며, 지역출신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하면서 지역민들에게 이를 전파하는 교육까지 병행하여 큰 성과를 거두어 왔다.
이에 힘입어 시민들의 문화에 관한 관심이 점점 높아져
보령은 그 어느 지역보다 수준 높은 문화의식의 고장이 되었다.
이렇게 높아진 시민의식에 걸맞게
우리 연구회는 지금까지보다 더 열심히 더 신중하게 연구 활동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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