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이철원 등
18명의 애국지사들이 주렴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른 운동이다. 이에 참여한 애국지사 18명 중 11명이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1919년 4월 20일 보령경찰서장의 즉결처분 받은 기록이 전한다.
한편 향토지와 한국독립운동사,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등에서 본 운동을 기록하면서 거사 일을 1919년 3.16.일, 3.17일, 4.17일 등으로 각기 다르게 기록함으로서 사람들의 혼선을 빚고 있다.
과연 거사일이 언제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3월16일에 대한 생각
가. 간재장날과 관련한 거사일 추측.
당시에는 5일장을 음력을 기준으로 하였다. 간재장은 음력 2월16일(양력 3월15일)인데 그날 장터에서 거사하려다가 기밀누설로 왜경 경비가 삼엄하여 다음날 저녁 주렴산에 올라가 불렀다고 향토지에 기록하고 있으니 음력 2월17일이고 그날이 양력으로는 3월 16일이다.
나. 즉결처분날짜를 토대로 한 거사일 추측
향토지에 거사 후 체포된 애국지사들이 33일 만에 즉결처분을 받고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거사일이 3월16일 경우 33일후면 즉결처분날짜 즉, 4월 20일과 일치하므로 그날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구전(口傳)들은 구속기간이 두어 달 정도로 길었음을 증언한다. 구속되어 조사받은 기간이 33일간이면 두어 달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손 이○(이철원지사 후손/서울거주)의 메일에 나오는 증언
“저도 체포 기간과 조사 기간은 더 길고 특히 어른들의 구전에 따르면 2개월 정도 경찰서에서 혹독한 조사와 생명을 위협하는 가혹 행위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데요. 그래서 실제 불구가 되고 평생을 고통스럽게 천수를 다 하지 못하고”
○후손 이○(이홍규지사 후손/ 서울거주)의 글에 나오는 증언
“나의 조부 이홍규님께선 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당시 23세로 충남에서 최초로 일어났던 보령군 주산면 주렴산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18명의 일원으로 검거 투옥되어 일경의 잔인하고 모진 고문으로 방광과 다리뼈가 부서지는 등 가혹한 고문을 받고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불구로 사시었다. 그런 아들을 증조부는 정성으로 보살피고 안방을 내어 주셨으며 자식이지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7.8세인 나에게 당시의 얘기를 푸념 섞어 하시곤 했다. 괜히 그런데 나가서 매 맞고 감옥살이 했다고, 잡혀가신지 두 어 달 뒤 데려가라고 해서 가마로 모셔왔는데 다리와 엉덩이뼈가 부러지고 반송장이었다. 입은 솜바지저고리에 피와 살이 엉겨 붙어 아주까리기름을 데워 붓고 가위로 오려내며 며칠을 떼어냈다.”
○이밖에도 그 지역 노인들은 한 결 같이 두어 달 만에 풀려났다고 증언하고 있음.
2. 3월17일에 대한 생각
당시에도 현재와 같이 5일장을 양력으로 기준한 것으로 생각하고 간재장날 즉, 3월16일 부르려다 못하고 다음날 저녁에 불렀다고 하니까 3월17일이라고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5일장을 음력을 기준으로 하였으므로 위 '1-가항'과 같이 3월16일이 맞다 고 본다.
3. 4월 17일에 대한 생각
가. 음력과 양력의 혼동일 가능성이 있다.
3월17일(위2항)을 음력으로 보고 그날의 양력날짜인 4월17일이라고 했을 것.
나. 조사기간이 너무 길어(33일) 이해가 안 된다며 4월17일일 거라는 주장에 대하여
1) 애국지사들이 한꺼번에 잡힌 게 아니다.
3월16일 거사 후 애국지사들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으므로 왜경의 체포 작전은 밤부터 다음날로 이어졌을 것이다. 쉽게 붙잡힌 일부 애국지사도 있겠지만 대부분 도피하여 체포 작전은 장기화 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애국지사 18명 이외에도 직접, 간접가담자가 있었을 것임으로(예: 이철원댁 머슴<순득아범>은 짚단과 징 등을 짊어지고 거사장인 주렴산에 올라갔으며, 주야리 박용규라는 사람은 조사기간 동안 불려가 매를 맞고 왔다는 증언<박성태씨 증언>이 있고, 이철원지사의 수기에 주렴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면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주변마을에도 이를 선도하기로 한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음) 광범위한 조사를 벌여 많은 사람을 잡아다가 조사, 닦달 하고는 단순가담자는 내보내면서 핵심인물들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애국지사들이 하나씩 둘씩 잡혀왔을 것이고 특히 주도자인 이철원과 또 한사람 윤천영은 끝내 잡히지 않았으므로 그 조사가 오래 진행되었을 것이고 주도자를 잡지 못한 채 그동안 조사한 애국지사들에게 즉결처분을 내림으로서 사건을 마무리 하느라 33일이나 걸렸다고 볼 수 있다.
2) 주요사건의 조사기간이 그렇게 짧을 수(2-3일)는 없다.
(가)설령 애국지사들이 한꺼번에 모두 잡혔다고 하더라도(한꺼번에 잡혔을 리도 없지만) 경범들도 아닌 독립만세운동사건을 2-3일 만에 조사완료하고 즉결처분할 수 있는가? 더구나 박윤화지사는 잡히지 않고 다음날 밤 또다시 복개봉에 올라 홀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그분까지도 4월20일에 같이 처분했으니 그분은 불과 1-2일 조사하고 즉결처분으로 끝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피의자가 1-2명도 아니고 단순가담자까지 합하면 수 십 명이 연루된 사건을 어떻게 2-3일 만에 조사완료하고 즉결처분할 수 있는가?
4. 이철원지사의 수기에 날짜가 명시되지 않아 아쉽다.
수기에는 간치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려고 한 것을 그날 밤 주렴산으로 바꾸어 부른 것으로 되어 있어 그렇다면 간재장날인 음력 2월16일 밤, 즉 양력 3월15일 밤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나는 그길로 故鄕을 나려갔다. 나는 이때 굳은 決心을 하였다. 獨立運動을 하는대로 하여보다가 잡혀갈 작정이였다. 數十數百의 同志들이 犧牲을 하는데 나도 當然히 犧牲을 당하여야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야 艮峙에 到達하야 이곳에서 萬歲를 부르랴고 計劃을 하고 機會를 였보았으나 聯絡이 미처 되지 안앗고 警備가 森嚴하야 圓滿이 되지 못하게 되어 計劃을 變更하야 그날밤 珠簾山上峰 烽火불을 信號로 하야 珠簾山周邊部落 人民들이 萬歲를 부르기로 하였다. 그날밤 珠簾山上峰에 多數의 群衆이 모였다. 나는 獨立의 重要性과 運動의 略史를 보고하고 獨立宣言書를 朗讀한 後 太極旗를 놉히 들고 萬歲를 힘껏 불렀다.“
끝내는 말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날짜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애국지사들을 추모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의 거사일은 각 향토지에 기록 된 1919년 3월 16일이 맞다 고 볼 수 있다. 다만 이철원지사의 수기 중 ‘간치(간재장터)에서 부르려다 그날 밤 주렴산에서 불렀다’는 부분이 있어 3월 15일일 가능성이 있다.
관련기관과 후손들의 적극적인 관심, 그리고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연구로 올바른 날짜를 정립하여 줄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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