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이야기/공직과 관련한 이야기

퇴직금 이야기

구슬뫼 2012. 7. 10. 22:17

 

 1980년대에는 은행금리가 높았기 때문에 공무원 퇴직자들이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받아 은행에 맡겨 놓으면 매월 나오는 이자가 쏠쏠하여 연금으로 받는 것보다 오히려 나았고 또한 경우에 따라서 급하면 목돈을 빼서 활용할 수 있으므로 퇴직금을 전액 일시금으로 타는 경우가 많았고, 어떤 사람들은 공무원 경력 중 20년분은 연금으로 신청하고 나머지는 일시불로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쯤 해서는 은행금리도 점점 떨어져 연금으로 신청하는 퇴직자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더구나 퇴직금을 전액 일시금으로 수령한 사람들은 이래저래 자식들에게 뜯기거나, 어설프게 사업을 한다고 날리거나, 심지어 사기꾼들에게 걸려 돈을 잃는 경우까지 생겨 그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90년대 후반을 지나며 퇴직금을 전액 일시불로 타는 사람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요즈음은 금리가 낮아 목돈을 은행에 넣어봐야 생활비는커녕 화폐가치가 떨어짐을 걱정해야 하는 실정으로 대부분의 퇴직공무원들이 전액연금제로 신청하여 매월 연금을 수령하기 때문에 옛날처럼 퇴직금을 뜯기거나 잃을 염려가 없어졌다. 1980년대 퇴직금을 일시금으로 타느냐 연금제로 하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퇴직자들, 이제 흘러간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몇 가지 실화를 기록해 본다.

 

1

1980년대 초 라는 퇴직자가 있었다. 그는 퇴직금을 전액 일시불로 타서 일부는 활용하고 700만원(당시에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음)을 은행에 넣어 놓고 매월 나오는 이자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자녀 중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큰아들이 대위로 예편하여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 퇴직금 받으신 것 은행에 넣어놓고 계시지요?”

, 그렇지

한 달에 이자가 얼마씩이나 나와요?”

, 한 달에 0만원씩 나온다. . . ?”

제가 그동안 살던 집을 팔고 좀 더 큰집을 마련하려고 하는데요, 돈이 좀 모자라네요. 아버지께서 그 돈을 주시면 제가 집사는 데 보태어 쓰고 그 대신 은행에서 나오는 이자만큼 씩 매월 드릴게요. 그렇게 해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씨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들이 좋은 집을 산다는데 아버지로서 도와주는 셈도 되고 또한 은행에서 나오는 이자만큼 준다고 하니 생활에도 지장이 없을 것 같아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그래서 흔쾌히 승낙하고 아들에게 돈을 몽땅 돌려주었다. 아들은 매월 꼬박꼬박 이자를 보내왔고 씨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일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1년쯤 지나니 아들에게서 지정된 날짜에 이자가 오지 않았다. 한 달여를 기다리던 씨는 마침내 아들집을 찾아갔다.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이자 보내드리는 걸 깜박 잊었네요.” 하면서 이자를 드렸고 그 후로는 이자를 보내지 않아 받으러 다니게 되었다. 그런 세월이 얼마간 흐르니 이젠 아버지가 찾아가도 이자 드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아들집에 찾아가서 이자를 달라고 하게 되었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자 달라고 해도 핑계를 대면서 미루더니 나중에는 아예 이자를 드리지 않게 되었다.

씨는 퇴직금 외로는 재산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자가 나오지 않으면 생활이 아주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는 인생말년을 어렵게 살다 세상을 떠났다.

 

2

 1980년대 말의 이야기이다. 씨는 정년퇴직을 3개월쯤 앞두고 있었다. 5남매 자녀들은 막내아들을 빼고는 모두 결혼하여 제각각 잘들 살고 있으니 이젠 돈이 크게 들어갈 일도 별로 없고 해서 퇴직금을 일시불로 타 어떻게 운용할까 궁리를 하던 참이었다.

마침 자신의 생일이라서 분가해 따로 사는 큰아들, 작은 아들, 출가한 두 딸까지 모두 모여 아침밥을 푸짐하게 먹고 나니 함께 사는 막내아들까지 5남매가 대청에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씨는 자녀들끼리 이야기 하는데 어른이 같이하기도 그렇고 해서 안방에 들어 누워 잠을 청하는데 잠은 오지 않고 대청마루에서 하는 이야기소리들이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왔다. 한창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중에 갑자기 작은 딸년이 하는 소리가 귀에 번쩍 했다.

아버지가 이번에 퇴직하시는데 퇴직금 얼마나 받으시나? 내가 지금 급히 쓸데가 있어 그러는데 200만 원 정도만 쓸 수 없을까?”

큰딸이 하는 말

, 사실은 나도 한 300만 원 정도 있으면 좋겠는데 . . .”

큰아들이 하는 말

너희들도 돈이 필요하냐? 아이고 나도 요즈음 많이 힘들어 죽겠다. 250정도만 있으면 좋겠는데 . . . ”

작은아들 하는 말

아이고 형님, 누나들, 말두 마슈, 내가 요새 죽을 맛이유, 왜 그렇게 째는지 원, 200은 있어야 급한 불은 끄게 생겼시유.

씨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 아들딸들이 말하는 금액을 모두 합해보니 자신의 퇴직금 수령액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게 아닌가? “아니 내가 죽도록 고생해가며 저희들 키워서, 가르쳐서, 결혼시켜 잘 살게 해주었더니 이제 퇴직금 받는 것까지 쓰려고? 이것 참 큰 일이로 구나

그는 잠자는 척 누워 있다가 점심때가 되자 일어나 아들딸들을 모두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선언했다.

너희들 잘 들어라. 이번 퇴직금은 전액 연금으로 신청한다. 퇴직금 외로 퇴직수당이니 행정공제회비니 해서 좀 나올 것이다. 그 돈은 아직 결혼 전인 막내가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줄 생각이다. 그렇게 알아라.”

그 후로 씨는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에게 무조건 전액연금으로 하라고 권유하고 다녔다.

 

3

씨는 학교선생님으로 근무하다 1980년대 중반에 정년퇴직하였다. 자녀 중, 아들 하나는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중앙행정부에 근무하고 나머지도 모두 잘 살고 있으니 별로 걱정꺼리도 없었다. 그는 아직 건강하였고 사업도 잘 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일시불로 탄 퇴직금을 활용하여 적당한 사업을 하기로 하였다.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동업할 사람이 나타나자 그는 주저 없이 투자하였다. 그러나 한평생 교직에만 있던 그는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다. 사업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박살이 났다. 퇴직금 뿐 만 아니라 그동안 조금씩 모아 놓았던 재산까지 몽땅 날리고 말았다. 간신히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 작은 농가가 딸린 밭 400평을 사서 밭을 일구고, 바다에 나가 맨손 어업으로 조개, 굴 따위를 채취하면서 근근이 살았다. 10년 동안 전화도 놓지 않고 외부와 연락도 끊은 채 그야말로 철저히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조금 씩 조금씩 땅을 사서 소유지를 넓혔다. 다행이 10년 정도 지나자 이 바닷가 마을이 인기가 좋아지면서 땅값이 마구 올랐다. 그는 자기가 산 논을 메워 민박을 지었다. 그래서 사업에 실패하고 은둔한지 10년 이상 흐른 뒤에야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그의 나이는 이미 70대 후반, 반백이었던 머리칼은 백발이 되었다. 연금으로 신청한 친구들이 여유롭고 평안한 세월을 즐기는 동안 그는 가진 고생을 하며 살아야 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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