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
1961년 3월 24일 오전 8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아침, 밥상을 놓고 옹기종기 둘러앉은 가족들은 조용히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면 아버지는 출근하시고 나와 동생 둘이는 학교에 갈 참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우체국에 근무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7형제가 살고 있었다. 21세의 형은 1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땅한 곳에 취직을 못한 상태라서 군대나 일찍 다녀와야겠다며 공군 지원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10여일 후에 입대할 영장을 받은 상태이고, 16세였던 나는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일주일 후면 3학년에 올라갈 차례였으며, 14세였던 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대기하고, 10세였던 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올라갈 참이었으며, 아직 취학 전인 7세, 4세, 그리고 백일이 갓 지난 막내까지 아홉 식구가 아버지의 박봉에 의지하여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사는 평범한 가정이었다.
반쯤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께서 숭늉을 들여오면 밥에 물을 말아 잡수시고자 잠시 숟가락을 놓고 신문을 펼쳐 들었다. 어머니께서 숭늉을 가지러 막 부엌에 나가시려고 일어나는 찰라 아버지께서 갑자기 아! 혀#$%@ . . . 무슨 말인가 첫 한두 자만 발음 하고는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시며 옆으로 쓸어졌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 현기증이라고 하시려는데 혀가 말리면서 발음을 못하신 게 아닌가 짐작 해본다). 깜짝 놀란 어머니와 형이 황급히 달려들어 아버지를 바로 눕혔으나 이미 의식을 잃고 팔과 다리가 뒤틀어지고 있었다. 팔과 다리를 주물렀으나 틀어짐 현상은 해소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빨리 보령아저씨를 모셔오라고 하셨다. 보령아저씨는 고개 너머 장적굴마을에 사시는 집안 아저씨인데 곽란(癨亂) 등 체하였을 때 침을 놓아 낫게 해주는 요즈음으로 말하면 돌팔이 한의원(?)쯤 되는 분이었다.
작은 고개를 넘어 1km 정도 떨어진 아저씨 집을 헐레벌떡 뛰어 가니 마침 개초(초가지붕의 이엉을 거두어 내고 새 이엉으로 덮는 일)를 하려고 일꾼 몇 명을 사서 이엉을 엮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울먹이며 상황을 설명하였고 침구를 갖춘 아저씨와 내가 황급히 집으로 달려오니 여전히 의식을 잃은 아버지를 붙들고 어머니와 형이 허둥지둥 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우선 침을 놓아 음식물을 토하게 만든 다음 “갠찮을 거유. 빈혈루 쓰러진 것 같은디, 이제 토했승게 되았시유. 장적굴 ○○할머니두 이렀었는디 낫었구, 또 이 동네 ○○○두 낫었시유” 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빈혈이라면 뇌빈혈인가? 그렇다면 머리보다 발을 높여야 한다고 학교에서 배운 생각이 나서 그렇게 해드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은 뇌빈혈이 아니라 뇌일혈(腦溢血)이었다. 아저씨가 모르고 뇌빈혈로 말한 것인지 아니면 가망이 없음을 판단하고도 바른대로 말하기 곤란해서 그렇게 말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침으로 응급처치(?)를 하자 면소재지에 있는 병원(시골의 작은 의원)에 빨리 연락해야 했다. 나는 울면서 2.5km정도 떨어진 병원으로 뛰었다. 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대답할 겨를도 없이 한달음에 달려 의사선생님에게 상황을 말씀드리니 의사선생님이 자신은 자전거로 갈 터이니 먼저 가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로부터 고모님에까지 알리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음으로 황율리 고모댁으로 갔다. 고모와 고종사촌 형님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형님께서 아버지가 혹시 코를 골더냐? 고 물었고 그런 것 같으나 잘 모르겠다고 하니 형님은 사태가 심각함을 짐작하였고 고모님의 얼굴은 사색이 다되었다.
허겁지겁 집에 와보니 의사선생님이 이미 도착하여 진찰과 주사 놓기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참이었으며 급보를 듣고 몰려 든 일가친척들이 20여 명이 있었다. 그분들이 의사에게 어찌 될 것 같으냐고 묻자 의사는 “장담은 못하지요”라고 얼버무리고는 허둥지둥 돌아갔다. 한편 당시에는 웅천의원의 오의사라는 분이 인근에서는 가장 용하다는 의사였기에 이종사촌형님이 웅천으로 달려가 그 의사를 모셔왔으나 2km지점인 제배마을 앞에 이르러서 상황을 전해 듣고는 이미 틀렸음을 직감하고 돌아가 버렸다.
아버지는 계속 코를 골면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계셨다. 그것도 들숨은 쉬는지 안 쉬는지 알 수 없고 내쉬는 숨만 코고는 소리를 내었다. 의사도 어쩌지 못하고 돌아가 버린 환자를 어떻게 할 수가 있으랴? 뒷전에서는 틀렸음을 감지한 일가친척들이 수군수군 . . . 이때 고종사촌형님이 하셨다는 “이제 틀렸어, 살어봤자 빙신이여”라는 말을 마침 14세 동생이 들었는데 말하는 모습이 걱정하는 투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 하듯, 어떻게 들으면 잘 된 일이라는 듯이 하더라고 후에 두고두고 서운해 하기도 하였다. 우리와 특별히 가깝게 지냈고 지식인에 속하는 고종사촌형님께서 그런 생각으로 말했을 리는 없지만 어린 마음에 그렇게 들렸던 모양이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형제들, 그리고 고모님과 일가친척들 모두가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흐른 오전11시경, 드디어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멈췄다. 쓸어 지신지 3시간 만에 한마디의 말씀도 남기지 못한 채 아내와 일곱 아들을 두고 숨을 거두신 것이었다. 어머니의 오열과 함께 집 안은 삽시간에 울음바다로 변했다. 이때 통곡하시던 어머니께서 옆으로 쓸어 지면서 까무러졌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정신을 잃었을까? 남편이 죽은 슬픔과 함께 이제 갓 백일을 지난 막내까지 조물조물한 7형제를 어떻게 키울까 눈앞이 캄캄하여 그랬을까? 바로 옆에 있던 나는 얼른 어머니를 안았다. 이때 이상하게도 언젠가 읽었던 소설대목이 번뜻 떠올랐다.
“한강에서 물놀이를 하던 처녀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뛰어들어 구하려는데 여자가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의 유방을 꽉 움켜쥐자 여자가 아픔에 ‘으윽’ 하면서 의식을 되찾았다”라는 대목이었다. 나는 얼른 어머니의 젖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의식을 되찾고 다시금 통곡을 이어갔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올해로 꼭 50년이 되었다. 5세 때 할아버지를 여의고 고생을 많이 하신 아버지, 가난 때문에 학교도 서당도 못 다니셨지만 독학으로 지식을 쌓아 말직이지만 공무원생활을 하셨던 명석한 머리의 소유자, 당신은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들 모두 가르치려고 박봉에 허리띠를 졸라매며 고군분투하시던 아버지,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신 채 5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셨던 것이다.
이로서 우리 집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어머니의 마음고생, 몸 고생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고, 큰 아들인 형님은 열흘 정도 앞두었던 공군입대를 포기하였으며(1년 후 징집에 의한 육군에 입대), 형제들의 학교진학에 빨간불이 켜지고,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은 수 십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오래 사셨다면 우리 형제들은 어떤 사람들이 되었을까? 모두들 순탄하게 자라서 출세하여 잘 사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국가와 사회를 위해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나왔을까? 아니면 고생을 덜하고 자라 강인한 생활력이 부족한 나약한 사람들이 되었을까? 그러나 모두가 부질없는 생각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갑작스런 운명도, 그로 인한 시련도 다 지나가 버린 한 토막의 세월일 뿐,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니까. . .
늘 부지런하시고 검소와 절약을 생활화 하셨고, 자신보다 남의 어려움을 배려하시던 아버지, 문맹이 많던 시절 이웃사람들의 눈이 되어 편지를 읽어주고 또 대필해주던 지식인, 주위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을 들으셨고, 정직하고 부정을 모르신 청렴한 공무원, 비록 인생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일찍 가셨지만 아버지의 인생관, 삶의 철학은 아들들에게 면면이 이어졌다.
형제들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바르고 떳떳하게 자랐고 비록 큰 인물들이 되진 못했지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바람직한 사회인으로 삶을 살아 왔다.
생전에 하셨던 말씀 “너희들은 후재(훗날) 머슴을 살더라도 뻰대(펜)를 든 머슴이 되어야 한다.”<커서 육체노동자가 아닌 사무를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놀음(도박)과 도둑질 두 가지만 빼 놓고는 모든 것을 다 배워야 한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등 가르치심과 “제 밥에 보리 한 톨이 섞인 것을 타박하고 머슴들이 맛있는 애호박나물을 어찌 먹느냐고 빼앗은 오만방자한 천석꾼 집 도령이 부모가 돌아가시자 금방 망하더라”는 이야기 등 교훈적인 선친의 말씀들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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