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김성우장군 재조명 학술대회를 보고

구슬뫼 2010. 9. 12. 19:51

김성우장군 재조명 학술대회를 보고

 

1. 학술대회의 목적

신안읍지를 비롯한 각종 향토지 기록에 의하면 김성우장군이 고려 말 보령지역에서 대대적으로 왜구를 물리쳤다고 되어 있다. 또한 그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며 관련 지명들이 청라면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산재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후손들을 중심으로 1980연대 후반부터 활발한 선양사업을 펼쳐 여러 곳에 추모비, 유적비 등을 세웠고 수년 전부터는 문화원에서 주관하여 매년 장군을 추모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 등 역사기록에서 김성우라는 인물을 찾지 못하고, 고려 말 보령지방에서 대대적인 왜구와의 전투사실도 확인할 수 없어 김성우장군의 실체를 의심, 또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어 2010.9.3. 충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주관으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 것이다.

 

 

2. 학술대회 참여자

. 기조발표

고려절신 김성우장군과 보령:

   충남대학교 최근묵

 

 

. 영상 및 금석문으로 보는 김성우장군

1)영상으로 보는 김성우장군:

    청양대학 곽호재

2)청라 광산김씨 묘비의 위상:

    충남향토연구회 조중헌

3)보령 향천리 시루성의 성격:

   국방문화재연구원 이 재

 

. 연구발표

1)고려 말 보령지역의 왜구와

 김성우장군  공주대학교 윤용혁

2)금석문 사료에 나타난 김성우장군 행적서천여자고등학교 황의천

3)김성우장군의 후예 우정 김극성의 관료생활과 경세관:     한남대학교 한기범

4)보령광산김씨 사적과 그 문화사적 성격   공주대학교 이해준

 

. 종합토론

1)좌장: 충남대학교 최근묵

2)토론자: 경기대학교 이재범, 공주대학교 이해준, 충남대학교 송봉현, 대천문화원 송하순, 공주대학교 윤용혁, 서천여고 황의천, 한남대학교 한기범, 한밭대학교 김영모

 

3. 17세기까지 나타나는 김성우장군의 왜구 및 보령관련 기록발췌

. 1501년 김남호(金南浩)묘비 . .以王命討海寇. 師過保寧. 見樂土爲墟 . . .(김극성 지음)

해설: 왕명에 의해 왜구를 토벌하러 가는 길에. 보령을 지날 때. 좋은 땅을 보고 터로 삼았다.

 

. 1550년 경 김극성(金克成)행장 . .嘗以王命討倭寇. 過保寧. 樂其土. 因家焉. 遂爲縣人  . . .吾平生無德可紀. 累鏕倭寇. 彼雖醜類. 殺戮過多. 道家所忌 . . (이언적 지음)

해설: 일찍이 왕명을 받들고 왜적을 토벌하러 가는 길에 보령을 지나다가 그 땅이 좋아서 그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어 드디어 보령사람이 되었다. . . . . 내 평생 기록할 만한 덕이 없구나. 여러 차례 왜구를 무찔렀으니, 저들이 비록 추한 무리라 하나 살육을 너무 많이 하였구나. 살육은 도가에서 꺼리는 것이니 . . .

 

. 1607년 김성우(金成雨)묘비. .嘗以王命討倭寇過保寧樂其土因家焉遂爲縣人 .(김경지 지음)

해설: 일찍이 왕명을 받들어 왜구를 토벌하고 보령을 지나다가 좋은 땅을 보고 인거하니 드디어 이곳의 현인이 되었다.

 

. 1619년 김극성(金克成)가장. . 嘗命討倭寇. 過保寧. 樂其土. 因家焉. 遂爲縣人. .(심지원 지음)

해설: 일찍이 왜구를 치라는 명을 받들고 보령을 지나다가 그 땅을 좋아하게 되어 자리를 잡고 마침내 보령인이 되었다.

 

. 1613년 김극성(金克成)신도비. . 嘗命討倭寇. 過保寧. 樂其土. 因家焉. 遂爲縣人. .(이정귀 지음)

해설: 왜구를 치라는 명을 받들고 보령을 지나다가 그 땅을 좋아하게 되어 자리를 잡고 마침내 보령인이 되었다.

 

. 1666년 김해수(金海壽)묘갈. . 樂保寧土俗. 遂居干靑蘿洞. 以討倭功. 號稱將軍. . (송시열 지음)

해설: 보령의 토속을 좋아 하였고 드디어 청라동에 거주하였으며 왜구를 토벌한 공로로 장군으로 불려졌다.

 

. 1678년 김해수(金海壽)묘비. . 始居干保寧靑蘿洞. 子孫因家焉. . .(윤 증 지음).

헤설: 처음으로 보령 청라동에 거주했고 자손이 이로 인하여 집안을 이루었다.

 

. 1656-1673? 동국여지지. .麗季有征倭功賜田保寧子孫因家焉 . . .

해설: 고려말 왜구를 정벌한 공으로 보령에 사전(賜田)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집안을 이루었다.

 

4. 1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김성우장군의 왜구 및 보령관련 기록들

. 향토지 등에 옛 기록(17세기) 이외에 추가한 내용들

1)군대가 보령을 지나갈 때 보령은 오래도록 왜구의 소굴이 되어있었다. 김성우공이 그들을 모두 무찔러 없앴다. 전투를 벌일 때 신령스런 말이 저절로 왔기 때문에 그 봉우리의 이름을 옥마봉이라 하였으며 칼이 저절로 나왔기 때문에 그 골짜기의 이름을 비도봉(飛刀峰)이라고 했다. 군대가 바닷가 포구로 들어오니 군입포(軍入浦)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으며 병사들이 화애(花崖)에 숨어 있어서 복병평(伏兵坪)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포구의 바위에 갓을 벗어 놓은 까닭에 관암(冠岩)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고 적의 시체가 개미떼와 같은 까닭에 의평(蟻坪)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1748년 신안읍지, 1757년 여지도서, 19세기말 충청도읍지, , 1896년 호서읍지)

 

2)신성 남쪽에 지금도 군입 복병 등의 땅 이름이 있다. 이것은 공이 전투하던 장소를 기념하던 명칭이다. 또한 신마(神馬)와 보검(寶劍)이 구한 일도 없이 공 앞에 저절로 들어 왔다는 전설도 있으니 이는 하늘이 공을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조선태조가 여러 차례 불러서 가는 중)스무재 고개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집에서 두어 마장 되는 곳이다. 공은 비장한 마음으로 말에서 내려서 말에게 이르기를 나와 네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구나.” 하니 말도 눈물을 흘리며 땅을 발로 후비적거렸다. 공은 마침내 칼을 뽑아 말을 베이고 공도 자결하였다.(사가집, 조선환여승람)

 

. 최근 발간했거나 세운 김성우장군 관련기록들

1)각종 향토지: 1970년 보령군지, 1983년 내고장 보령, 1990년 보령군지, 1993년 애향지, 1995년 대천시지

2)각종 비문 등: 1987년 달바위 김성우 유적비, 1987년 초토사 김성우장군 추모비. 1989년 김성우장군진수유허비, 1989년 김성우장군 전첩사적비, 1989년 고려 의마암기, 1990년 김성우장군 전첩사적 부비, 1999년 고려충신도만호장군광산김공성우왜구전첩비

 

5. 발표 및 종합토론 결과 학자들의 의견정리

김성우장군이 고려사 등 역사기록에서는 찾지 못하였으나 1501년 김남호비문을 비롯한 16-17세기 금석문, 가장, 행장 등의 기록으로 보아 실존인물이었으며 왜구를 대상으로 싸웠던 장군으로서 보령 땅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해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748년 신안읍지에 옛 기록보다 추가한 내용은 당시 발간에 참여한 인물들이 여럿이어서 함부로 올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그때까지 전하는 전설을 정리하여 수록한 것인지 아닌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전설이나 너무 구체적인 전투상황을 기록하고 사실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사실(17세기 이전의 기록들)까지도 의심받을 수 있다.

 

6. 학술대회를 보고

이번 학술대회를 통하여 김성우장군이 실존 인물이고 왜구를 무찌른 장군이었으며 보령에 정착하였음을 확실히 하였다.

대학교수 등 전문가 여러분이 참여하였기에 좋은 자료들이 나와 김성우장군이 보령 땅에서 활략한 흔적들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기존에 있던 금석문이나 가장, 행장 외에는 나온 게 없어 크게 실망스러웠고 보령 땅에서 왜구를 섬멸하였는지 여부도 밝혀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석학들의 연구가 지속되어 좀 더 새로운 내용들이 밝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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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8  2차 학술대회가 있었다.

기조연설

고려 말 왜구 격퇴의 초기 양상과 김성우 장군---고려대교수 민현구

연구발표

14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동과 김종연.김성우 장군의 왜구 토벌활동---방송대 이영

고려말 김성우 장군의 왜구토벌 전첩에 관한 군사학적 검토---이재준(전 육군8361부대장)

김성우 장군의 전적지명---충남대 송백헌

보령 광산김문의 유적과 유물---한밭대 김영모

김성우 장군 유적의 활용과 정책제언---청운대 김경수

보령지역의 성곽(김성우 장군 전적지 주변을 중심으로)--국방문화재연구원 권순진

종합토론

좌장 충남대 최근묵, 토론자 한남대 이정신, 육군사관학교 이현수, 향토사학자 황의호.

강원대 최복규, 한밭대 심정보, 경기도 박물관장 조유전

 

2차 학술대회 결과: 고려시대 왜구의 출몰과 격퇴, 동아시아 정세 등을 다루면서 당시 활략했던 김종연(김성우의 6)과 연계하여

김성우 장군의 활동상을 유추했을 뿐 새로운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