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전라남도 문화유적답사기

구슬뫼 2009. 7. 30. 19:04

전라남도 문화유적 답사기

 

  대천문화원에서는 향토유적의 올바른 복원과 관리방안 등을 구상하고자 우리지역의 향토유적과 비슷하거나 관련이 있는 전남지역의 문화유적을 돌아보았는데 회원으로  동참하였다.

 첫째 오천에 있는 충청수영성의 복원과 관련하여 전라우수영과 남도석성,

 둘째 성주사지와 같이 통일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가지산의 보림사를 목표로 하였고,

 인원은 42명, 답사일정은 2009.7.25(토) 하루였다. 


출발

 간밤에 내리던 비가 멎고 흐리기는 하였으나 쉽게 다시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시간들을 잘 지켜주어 관광버스는 정확하게 07:00에 출발하였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우수영은 해남군 문내면에 있었다. 


우수영 옛터

 현지에 도착하니 우수영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유스호스텔, 주유소, 식당이나 점포 등 상호에까지 우수영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간판이 간간히 보여 면(面) 이름이 우수영면인가 하였으나 그렇진 않았다. 우수영이란 이름을 내세워 지방의 특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수영관련 유적은 성곽이 동쪽부분에 20여m나 남았을까? 그나마도 위에 민가의 시멘트담장을 처 놓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훼손되고 옛 건물들도 보이지 않고 수사영 건물지에는 문내면사무소가 자리하는 등 우수영관련유적은 거의 사라졌다. 이곳에 비하면 우리 충청수영성은 원형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면사무소마당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바다를 망보았다는 해망루가 있었다.          

 

                      

우수영항

 바닷가로 나오니 우수영항이 있었다. 거북배 터미널이라고 하는 유람선 터미널이 있었으나 문을 닫아놓았다. 거북선모형의 유람선을 타고내리는 곳이다. 부두에는 일본의 판옥선 모형을 한척 만들어 띄워놓았다. 거북배를 타고 울돌목 다녀보는 투어가 있다는데 당분간 운영하지 않는 모양이다.

 

       

우수영관광지

 진도대교(해남과 진도를 연결)의 북쪽에 위치한 우수영관광지는 임진왜란 당시 3대 수군대첩 중의 하나인 명량대첩(1597. 9. 16)의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부수어 버린, 세계해전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11의 대승첩을 기록한 곳이다. 이 해협은 해남과 진도를 잇는 수로로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이 325m, 수심 25m 미만으로 격류가 부딪쳐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므로 명량 또는 울돌목이라고 불린다.

 이곳 울돌목을 성역화하여 이충무공과 휘하 장병 및 전투에 참여한 지역민들의 구국충절을 민족혼의 상징으로 길이 보전, 관리하고자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 1990년 명량 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공원에는 명량대첩탑, 명량대첩  의의비, 어록비, 수변무대 등 여러 시설물이 있으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명량해협의 경관과 진도대교의 위용이 일품이다.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울돌목과 함께 전적비, 사당, 비각과 당시의 군창, 객사, 토성, 전적지 등은 전투상황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특히 전시관은 거북선의 실제모형과 절개모형, 당시에 사용되었던 판옥선의 모형, 무기류 등이 전시되어 당시의 전황을 짐작하게 하고 있으며, 보물 제503호로 지정된 명량대첩비의 탑 본과 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된 강강술래의 배경화가 전시되어 있다. 7분짜리 홍보영화를 보고나니 여직원이 나와 이순신과 명량해전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수변무대 위에서 


남도석성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군 임회면에 있는 남도석성을 갔다. 이곳 남도포에는 삼국시대부터 해안경비에 이용된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삼별초가 제주도로 떠나기 전까지 항전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그 지휘관인 종4품인 만호를 배치하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남도석성을 축성하였다고 한다. 비교적 성곽을 잘 복원하였다. 우리지역의 충청수영성을 복원하려면  이곳 남도석성이 참고가 될 것 같다.              

   

       

대흥사

 서산대사의 의발을 보관하였다고 하는 대흥사를 갔다. 대웅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李匡師)가 썼다고 하며 대웅전 앞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無量壽殿)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황의천회원의 설명에 의하면 김정희가 귀향을 가던 중 이 절에 들러 대웅전의 현판을 이광사가 쓴 것을 보고 크게 화를 내며 자신의 글씨로 바꾸어 걸었으나 귀향에서 풀려나 돌아갈 때에는 다시 이광사의 글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보물 제320호인 대흥사응진전전3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과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인 천불전,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옥돌로 만든 천불상,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 용화당(龍華堂), 전남 유형문화재 제94호인 대광명전, 전남도 기념물 제19호인 표충사 등의 문화재가 있는데 표충사에는 서산대사·사명대사·처영(處英)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라고 한다.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사중유물(寺中遺物) 총 24종을 보관하고 있는 보장각(寶藏閣)도 있다. 서산대사부도(전남 유형문화재 제57호)를 비롯해 대흥사 대종사 13명과 대강사 13명의 부도 및 비가 있다.


보림사

 가지산문의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860년경 지었다고 하며 통일신라시대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제1의 절이라고 자랑하는 보림사를 갔다. 국보 제44호인 3층 석탑,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군,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군, 보물 제157호인 보조선사창성탑(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8호인 보조선사창성탑비 등이 있다.

 주목할 것은 우리지역의 성주사지 및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것,

우선 성주사도 이곳 보림사와 같이 통일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이며 사지의 규모로 보아 보림사보다 성주사가 더 큰 절이라고 짐작이 된다.

 둘째로 보조선사 창성탑과 탑비가 성주사지의 백월보광탑과 탑비의 만든 때와 3-4년 차이 밖에 나지 않는데 백월보광탑은 일부 조각만 남아있어 규모는 알 수 없으나 그 양식은 똑 같을 것으로 짐작되며 탑비의 글자 수는 오히려 백월보광탑비가 더 많을뿐더러 창성탑비는 보물로 지정되었고 백월보광탑비는 국보로 한 단계 더 중요하게 지정되었다.

 사지의 규모로 보나 탑비의 글자 수와 중요도로 보아 성주사가 보림사보다 더 크고 중요한 절임에도 오늘 날 사지는 페허가 되고 백월보광탑은 없어졌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답사후기

 하루일정으로 많은 유적을 돌아보기란 힘든 일이었다. 시간을 아끼고자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어가며 답사시간을 최대한 늘렸지만 당초 가려고 했던 한 곳(운주사)은 포기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래도 이번 답사의 핵심인 두 곳은 찬찬히 잘 보았고 참여한 회원들이 모두들 좋은 답사를 하였다고 흐뭇해하니 행사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앞으로 충청수영성의 복원과 성주사지 및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의 관리에 많은 참고가 되고 향토유적들의 중요도가 더욱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