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증기기관차와 추억속의 간치역

구슬뫼 2009. 1. 3. 14:21

증기기관차(蒸氣機關車)시대의 간치역(艮峙驛)

 

 

1. 4개 면의 교통중심지

 간치역은 1922년 6월 천안-온양(天安-溫陽)간 개통으로 시작한 장항선(長港線)의 마지막 구간인 남포-판교(藍浦-板橋)간 철도가 개통(판교-장항간은 1930,11개통)되면서 1931. 8. 1 문을 열었다.(자료: 철도박물관)

 이때부터 주산면(珠山面) 지역사람들이 편리하게 열차를 이용해 서울을 왕래하게 됨으로서 지역의 개화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다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열차운행을 하루 1회씩 왕복하다가 차츰 횟수를 늘려가서 나중에는 6회 정도씩 왕복하였으며 열차도 처음에는 증기기관차가 운행되다가 1958년경부터 장항선에도 점차적으로  디젤기관차로 교체되었는데 철도가 개통된 이후부터 증기기관차가 운행되었던 약 30년간 간치역의 영화(?)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버스나 승용차 등 육상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는 교통수단이래야 걷거나 우마차(牛馬車)를 이용하는 정도 이었으므로 기차가 다니는 지역의 편리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었고 철도가 시설되지 않은 지역주민들의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편리한 기차를 이용하여 인근 고장이나 먼 도시, 서울까지 왕래하면서 경제활동 등 생업에 종사하기도 하고 기타 많은 볼일을 보았는데  주산면을 비롯하여 미산면(嵋山面), 서천군(舒川郡)의 서면(西面), 비인면(庇仁面)등 4개면의 주민들이 이용함으로서 간치역에는 타고내리는 열차손님들이 한번에 100명 정도씩 되었고 그중에서도  집이 멀리 떨어진 지역 사람들은 새벽열차를 타려면 하루 전에 나와서 역전근처에서 투숙하기도 하고 밤 열차로 도착하면 근처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집에 가기 때문에 여관이나 음식을 파는 주막집이 성황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2 간치역의 주요시설 물탱크

 기차높이보다 높게 철탑을 세우고 거대한 물탱크를 양쪽에 설치함으로서 상행열차 하행열차가 동시에 물을 넣을 수 있었는데 물탱크는 1개의 크기가 5드럼들이 정도였다. 간치천의 맑은 물이 풍부함으로 흄관을 묻어 그 물을 끌어다가 지면의 저수탱크에 넣고 발동기를 이용하여 다시 물탱크까지 올린다음 기차가 들어오면 물탱크 가까이 대고는 호스를 이용하여 넣는데 사람이 일일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호스를 집어 기차의 물주입구에 넣는 수동식이었다. 장항선에 물탱크가 있었던 역은 이곳 간치역과 함께 장항역(長港驛), 광천역(廣川驛), 예산역(禮山驛), 천안역(天安驛) 등이었음으로 간치역이 장항선의 5대 주요역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기차에 물을 넣으려면 정차시간이 길어 차를 타려고 오던 사람이 멀리 3km정도 떨어진 짓재 아래에서도 기차가 정차하는 것을 보고 달리면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물탱크를 초창기에는 웅천역(熊川驛)에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나 어떤 못된 사람이 물탱크 속에 소금을 집어넣어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어 간치역으로 옮겼다고도 하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한편 물을 넣는 긴 시간을 이용, 기차에서 연료로 사용하는 석탄이 타고남은 재를 배출하고 새로 석탄을 싣는 일도 자연적으로 그 시간대에 하기 때문에 물탱크 있는 정거장은 반드시 석탄을 취급하였고 그래서 시커먼 석탄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3 간치역과 관련한 경제활동(經濟活動)

●정거장 앞에는 계림여관, 전일여관 등 2개소의 여관이 있었는데 그 시설이야 열악하였지만 그래도 방의 숫자가 한집에 6호실까지 있었으니 시골치고는 상당한 규모의 숙박시설 이었던 것이다. 이 여관들은 주막집까지 겸하여 술과 밥을 팔았고 이밖에 매점(賣店)도 있었으며 인근 제배마을에 5개소(나중에는 3개소로 줄었음)의 주막집이 있었다.

 이 주막집들은 한곳 당 하루에 20리터들이 막걸리를 5통 정도씩 팔수 있을 만큼 장사가 잘 되어 색씨도  2-3명씩 두고 장사를 하였으니 그 경기가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 촌에서 색씨를 놓고 술잔이나 기울이려는 난봉꾼(?)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들게 마련이었으니  경기가 풍성하여 많은 술꾼들이 흥청거렸던 것이다.

 

●대한통운(大韓通運) 간치 출장소도 지역경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마루보시(마라보시라고 하였음)라고 하였고 해방 후에는 미창주식회사라고 하다가 대한통운으로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대화물(大荷物)을 위탁받아 운송 처리하는 일을 주로 취급하였으나 차츰 비료, 시멘트, 무연탄 등을 기차로 실어오면 각처로 운송하는 일을 맡아 처리함으로서 대한통운에 딸린 직원이며 인부들이 많아 지역경제에 기여하는바가 컸던 것이다.  

 하지만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옛날보다는 디젤기관차로 바뀌고 1970년대 새마을사업이 시작된 이후 그 역할이 활발하였고 특히 1980년대 서해화력발전소(西海火力發電所)로 가는 철도를 시설하고 간치역사(驛舍)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던 1982년이 이곳 대한통운 간치출장소의 전성기였다고 하니 옛날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 간치역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곳에서는 이만 줄이고자 한다. 


●여관이나 매점, 주막집 외에도 정거장을 이용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열차가 물을 넣으려면 30분 정도씩 쉬기 때문에 그 시간을 이용하여 서있는 기차에 올라가 떡이며 엿, 삶은 옥수수, 찐 감자나 꽃게, 밀가루 빵, 과일 등을 목판에 담아 들고 다니며 승객들에게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10-20명이나 되었고 특히 인근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지인들까지 장사에 끼어들었고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도 주전자에 사카린이나 당원을 물에 타가지고 다니며 팔아서 학용품값을 벌어 썼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역에 근무하는 역장과 역원들(차에 오르면 열차원까지 합세)들은 못 팔게 하고 장사꾼들은 도망 다니며 팔고 하는 숨바꼭질이 자주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역원들의 복장은 왜 그렇게 왜놈헌병처럼 시뻘건 테를 두른 정모에 정떨어지는 군대식 정복이었는지 눈에 가시처럼 보였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매일 상대해야 하는 모습들이었다고 기억한다. 또한 그들은 마땅한 놀이터가 없어 기차역으로 놀러오는 인근꼬마들에게도 큰소리로 야단쳐 쫓아 보내곤 하였는데  그 분들 입장에선 음식물판매가 불법이요 또한 무슨 사고가 언제 발생할지 모르니 철저하게 내쫓아야 마땅하지 않았겠는가? 


●이 밖에도 기차에서 내린 손님이 멀리까지 갈 때 보따리를 들어다 주고서 받는 태전도 제법 쏠쏠한 벌이였다. 어떤 부부는 밤열차로 도착하여 멀리 미산면(嵋山面) 늑전(勒田)까지 보따리를 들어다 달라고 해놓고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태전은 줄 생각도 않고 부부싸움만 하는지라 태전꾼이 화가 나서 그 보따리를 집으로 가지고 왔더니 다음날 그 사람이 찾아와서 태전을 주고 보따리를 찾아가더라는 추억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기차에서는 석탄(처음에는 분탄을 태웠으나 후에는 조개탄을 태웠음)을 태워 그 열로 물을 끓이고 발생하는 수증기를 이용하여 기차의 동력을 발생시키는데 타고남은 탄재를 기차가 쉴 때 밖으로 배출하게 된다. 이때 타다 남은 연탄 부스러기(분탄이 타다 남은 것 중 ‘곡스,라고 하는 것은 화력이 매우 좋았음, 조개탄은 둥글둥글하게 뭉친 것임으로 타다 남은 곳을 떼어 내면 연료가 됨)를 모아도 수입이 꽤 괜찮아 직업으로 삼은 사람도 있었다.

 이 부스러기는 대장간이나 양조장 등 화력이 센 불을 필요로 하는 곳에 팔았는데 그 벌이가 쏠쏠하여 탄재 치우는 사람(역 직원)밑에는 무보수로 탄재를 치우고 골라가는 조수들이 여러 사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돈벌이였지만 사전에 기관사에게 담배 값이나 주고는 타지 않은 새 탄도 재와 함께 배출하면 모아서 팔아먹는 비리가 있어 이 때문에 조사를 받아 벌을 받은 사람도 있었으니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고 비리가 있기 마련인가 이곳 정거장과 관련한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아무튼 간치역의 전성기에는 이런 저런 돈벌이로 주변의 마을사람들이 수입이 좋아 정거장 앞에 30여 호의 집들이 있었고 좀 떨어진 제배마을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나 간치역이 쇠락하면서 여관도 주막집도 서서히 사라지고 사람들도 떠나 이제는 역 앞에 10여 호 제배마을에는 20여 호 살고 있으나 그나마 정거장하고는 아무 관련 없이 농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4 간치역과 관련한 이런저런 이야기

●자동차가 발달하지 않은 그 시절 간치역과 주산면의 소재지가 떨어져 있어 크게 불편하였다. 특히 물류의 이동이 필요한 장터가 정거장과 1.5km나 떨어져 있어 그 불편함이 상당하였으므로 정책적으로 장터와 관공서 등 면소재지를 간치역 부근으로 옮기는 사업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재지에 사는 유지들이 그렇게 할 경우 자기네들의 생활기반이 없어질 것을 걱정한 나머지 반대를 함으로서 소재지를 옮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편 웅천면의 소재지는 구장터(大川里)에 있었는데 웅천역을 따라 지금의 대창리(大昌里)로 옮김으로서 웅천의 시가지가 발달하였다고 한다. 그 후 간재장터는 옮기고 싶어도 장터와 장터사이가 일정거리이상 떨어져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웅천장과 거리가 가까워 옮길 수가 없었다고 하며 교통이 불편한 간재장은 웅천장에 치어 쇠락의 길을 걸었고 주산면의 면세가 줄어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만약 주산면의 소재지를 먼저 옮겼다면 웅천장은 구장터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웅천보다 주산이 더 커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릴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명절전후의 역전은 시골 장을 방불케 한다. 명절 전에는 주로 꼬마들이 몰려 나와 서울로 돈벌러간 아버지 또는 오빠, 형을 기다리는데 차시간이 정확하지 않은 때라 그저 한없이 웅천쪽에서 들리는 기차소리에 귀를 나팔같이 열어놓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반가운 가족이 내리면 의기양양해서 얼른 보따리를 받아들고 앞장서서 휭 하니 가버리고 아직 오지 않은 사람 네는 풀이 죽어 눈이 빠져라 금방오지도 않을 차를 기다렸다

명절이 지나면 서울 올라가는 사람 하나에 적어도 다섯 사람은 나와서 전송을 해주는 바람에 또 역전은 장 아닌 장이 서는데 공장으로, 식모살이로 처음 가는 이는 더 많은 사람이 딸려서 나왔으며 보따리에 채소, 곡식 등을 메고 지고 머리에 이어다 놓은 물건들이 플랫 홈에 가득했으며 다시는 못 올 사람 보내는 것처럼 처연하게 보내고, 가고 하던  간치역 이었다.


●정거장에는 순경 2명이 주재근무하면서 각종 사고를 담당하였는데 한번은 어떤 손님이 여관에서 자고 새벽차를 탔는데 기차에 오르고 보니 손목시계를 차지 않고 왔으므로 차장에게 부탁하여 간치역에 연락, 자기가 잤던 여관방에 가서 손목시계를 찾아달라고 하였다. 역직원이 가보고는 시계가 탐이나 슬쩍 가진 후 없다고 하여 수사 끝에 탄로가 남으로서 그 직원은 벌을 받게 된 사건도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순경과 그 직원은 한집에서 셋방을 사는 사이라서 매우 난처한 경우에 빠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육이오 때는 전쟁터에 차출되어가는 수많은 장정들이 곡간차(유개화차)에 실려 가다가 정차하였는데 목이 말아 물을 달라 아우성이었다. 곡간차의 육중한 철문양옆에는 총을 든 헌병이 서서 맘대로 물조차 못 먹게 막다가 워낙 많은 장정들이 울부짖음에 틈을 주면 동네아주머니들이 물을 들이 밀어주었는데 물통이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지라 물통에 짧은 줄을 매어 죽어라 잡고 매달렸다가 빈 물통을 끌어내었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물통이야말로 요긴한 부엌용품이라서 팔뚝이 끊어져라하고 지켜야할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약삭빠르게 돈을 받고 물을 팔아먹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돈벌이에 눈먼 얌체들은 있기 마련인가보다.


●한편 이곳 간치역에서 출발하는 장정들은 전쟁 중에는 물론 휴전 후에도 언제다시 전쟁재발이 있을지 모르는 터라 마치 전쟁터로 직행하는 그런 분위기로 역에서 출정을 하였다. 아침 일찍 농악대를 앞세운 수많은 동네 분들이 잘 다녀오라고 전송을 성대히 해주었다.(전사자 유해가 가끔씩 오는 때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나이든 어머니들의 통곡과 함께 간치역 플랫 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데 장정들은 머리엔 수건을, 어깨엔 띠를 두르고 동네 분들이 쥐어주는 담배 한두갑, 적은 위로금등을 남은 가족에게 전하고 유개화차(곡간차라고 불리었음)에 비장한 맘으로 오르고 기차가 떠나면 남은 이들이 만세를 소리 높여 불러줘서 정말 사지(死地)로 가는 그런 비감한 분위기였다.


●황성마을에 사는 이모(李某)라는 사람이 열차를 타려고 삼베모퉁이를 돌아 야관이 앞을 지날 때 아는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열차출발시간 전까지 정거장까지 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차를 타긴 꼭 타야 되겠으므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정거장에 빨리 가서 “황율리에 사는 이모(李某)가 차를 타러오는 도중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바람에 기차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가 없으니 기차를 조금만 늦게 출발시켜 주시오”라고 부탁해 달라하고는 달려가서 탔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모라는 사람이 영향력이 대단한 지역유지였던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때 묻지 않은 풋풋한 시골 인심이 살아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시절의 기차는 좌석이 정해져 있지 않고 양옆으로 길게 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이 바짝바짝 붙어 앉고 중앙통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서 타게 마련이었다. 임모(任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기이한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 사이에 유명 하였다.

 이분은 얼굴이 우둘두둘 하고 체격도 컸는데 일행들과 함께 기차를 탔다가 자리가 없으면 이곳저곳 기웃거려 작은 공간이라 있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비비고 앉은 다음, 미리 약속한 일행이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어이 임모 아냐? 친구 참 오랜만이네”하고는 능청스럽게 인사하면 “그래 자네 김모 구만, 정말 오래간만 일세”라고 답변을 하고 그 일행이 “야! 참 반갑네” 하면서 악수를 하려 들면 짐짓 깜짝 놀라는 척하면서 “안돼, 나 수용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어, 아직 함부로 악수하면 안돼!”라고 말하면 그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는 혹시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됐다는 말인가 생각하고 슬금슬금 피하여 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행들이 와서 자리에 앉아 깔깔거리며 여행을 하였다고 한다.

 또 어떤 때는 점잔하게 생긴 신사나 여자들 앞에 가서 엉덩이를 내놓고 긁적긁적 하면서 “어이 가려워” 하면서 비비고 앉으면 옴 환자인줄 알고 옆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도망가면 “자리 잡는 방법도 여러 가지여” 하면서 일행들을 불러 앉혔다고 한다. 

 또한 기차를 탈 때 언제나 무임승차를 하였다고 하는데 열차 내에서 차표검사를 하면 내릴 때 보자고 미루어 놓은 다음, 목적지역에 도착하면 차장을 차에서 내려오라고 하고서는 “내가 타서 기차바퀴가 얼마나 닳았나 보자”면서 기차 밑으로 기어들어간다고 한다. 기가 막힌 차장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사고가 날까 염려도 되어 하는 수없이 그냥 보내고 말았다는데 얼마나 걸작인지 열차원이고 승객이고 가리지 않고 웃기는 바람에 나중에는 열차의 승무원들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무임승차를 하여도 만담가 오셨다고 극진히 예우를 하였다고 하니 오늘날의 유명 코미디언이나 개그맨 정도는 되었던 모양이다.


●무임승차에 대한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주로 기차를 이용하여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고 일반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열차승무원과 무임 승차자 사이에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자주 일어났는데 열차가 정차하면 재빨리 내려서 차표검사를 마친 칸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차에서 내리면 울타리 구멍으로 달아나기도 하고 정거장 근처에서 차가 느릿느릿 갈 때 뛰어내려 도망가는 수법 등을 많이 써먹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학생들의 경우 붙들려 모자를 빼앗기기고 혼쭐이 나기도 하였으나 무임승차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정거장근처에서 활동하는 불량한 사람들은 도망가는 사람을 쫒아가 자기가 역의 직원이라도 되는 양  돈을 받아가지고 슬그머니 착복하는 웃지 못 할 사건도 있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편 힘이 없는 기차는 고갯길을 못 올라가 몇 번이고 뒤로 밀렸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도 구경거리요, 이때 느릿느릿 가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기집으로 가는 사람과 짐 보따리를 열차 밖으로 던지고는 미리 약속한 연고자에게 가져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포장 신작로 보다 훨씬 편한 철로 걷기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역원이나 선로반원들이 조바심이 많았고 실제로 그 때문에 사고도 간간히 있었다.  개구쟁이 아이들은 철로에 못을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간 후 납작해지면 신난다고 떠들고 그것을 칼처럼 사용하기도 하였다. 시계가 많지 않던 시절인지라 기적소리로 시간을 가늠하기도 하였다. 기차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기적소리를 듣고 9시구나(9시차구나)12시구나(12시 차구나)하면서 시간을 짐작하였던 것, 

 

●간치역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멀리 사는 일가친척들이 새벽기차를 타기위해 하루 먼저 와서 하룻밤을 묵거나 밤차로 내려와서 하룻밤 묵어가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손님 치르려면 어렵기도 하지만 게다가 술속이라도 고약한분이면 술을 사다 바치랴 술주정 받으랴 그야말로 곤욕을  치렀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고


●사람들이 항상 혼잡한 기차에는 쓰리 꾼도 참 많았다. 일명 따개 꾼, 이들이 얼마나 극성이었는지 애기 업은 엄마 속곳안의 돈도 따 갔는데 두꺼운 처녀포대기 몇 겹을 째서 꺼내가 속살이 안 다치길 다행이라지만 돈을 잃고 울지도 못하고  하얗게 질린 젊은 아낙이 애처로워서 다들 눈을 돌릴 지경 이었다

 그땐 고액권도 없어서 부피 큰 돈을 가지고 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거의 다 무방비상태로 그들에게  당했던 것, 그런데 어떤 의뭉한 사람이 한번도 돈을 잃지 않는지라 동네 돈을 도맡아 운반을 했다고 하는데 비결은  아주 쉬운 곳에 있었다. 물통 속에 돈을 넣고 그 위에 쌀을 넣어 메고 다님으로서 아무리 날카로운 면도칼도 피할 수 있었다고 하니 무식한 농사꾼이지만 지혜가 대단한 분이었던 것 같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므로  역전의 전기불은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밤길을 걸어 역 근처를 지나려면 환한 불빛에 딴 나라에 온 것 같이 신나게 걷다가 조금 지나면 다시 더 깜깜한 어둠속에 묻혀 언제나 저렇게 밝은 곳에서 한번 살아보나 한탄을  하기도 하였다. 

 그 불도 막차가 지나면 꺼버리는데 막차에서 내린 손님이 들 건너 주야리(珠野里)까지 가야하니 집에 가는 동안 불을 끄지 말아 달라고 하면 역원이 조금 불 끄는 시간을 늦추어 주기도 하는 풋풋한 인심이 살아 있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밤새 불이 켜져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땐 끔찍하게도 철도사고로 숨진 시체를 창고에 두고 유족에게 연락하여 찾아 갈 때 까지  안치하는 때였으니 사람들은 그 불빛을 보고 사고가 난 줄을 알았다고 한다.


●1950년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신깃골에 사는 같은 반 친구들 말에 의하면 저의동네에 기차가 선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야, 자동차도 아닌 기차가 어떻게 정거장이 아닌 곳에서 설 수가 있느냐? 거짓말 하지 말라”고 웃어 넘겼으나 정말로 기차가 서고 사람이 내리거나 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마을에 살면서 서울에 올라가 건달(?)생활을 하는 어떤 사람이 집에 올 때면 차장에게 부탁하여 자기마을 앞에서 기차를 세운 후 내리고는 서울 올라 갈 때는 차장에게 일시를 정확히 알려 기차를 세운 후 타고 갔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은 서울에서 출세를 하였거나 돈을 많이 벌지도 못했지만 그릇은 큰 인물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만약 그가 일찍이 관계나 재계로 풀렸다면 큰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건달세계로 풀려서 그냥 썩은 아까운 인물이었다고도 한다.        


●간치역 옆에 농협창고가 있었는데 창고가 생기기 전에 부여(扶餘)에 사는 어떤 사람이 이곳을 지나며 보니 밭에 천석꾼의 집터가 있었다. 그 사람은 땅 주인에게 팔 수 있는지 여부 그리고 가격 등을 알아 본 후 부여의 자기집으로 가서 한달여 후 땅값을 가지고 다시 와보니 이미 그 땅은 농협에서 사서 창고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아깝도다. 천석꾼의 집터를 놓치다니 . . .”크게 탄식하고는 “그 창고 터 뒤의 땅을 사도 조금은 그 기운이 따르겠지”하는 생각에 바로 뒤에 터를 장만하여 집을 짓고 살았는데 아들 대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나 아직도 그 집을 사람들은 부여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천석꾼의 집터는 농협창고가 들어서 보리수매와 벼 수매로 양곡을 수도 없이 들였다, 내보냈다 하였으니 “과연 천석꾼의 집터가 맞지 않느냐”고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말한다.  


5 아쉬움 속에 쇠락해버린  간치역

 이상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약 30년간의 간치역은 말 그대로 호황, 그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경부터 디젤기관차로 점차 바뀌어가자 물을 공급받지 않아도 되는 기차는 간치역에서 오랜 시간 쉬지도 않고 또 특급열차제도가 시행되어 간치역에서는 정차하지 않는 열차도  생기게 되니 간치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버스나 승용차 등 육상교통이 발달하여 간치역에서 먼 미산면, 비인면, 서면 등의 주민들은 더 이상 간치역을 이용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디젤기관차로 교체될 무렵 주산간이역이 금암리에 설치되어 10여 년간 운영됨으로 학생들과 간재장을 보는 장꾼들이 간이역을 이용함으로서 간치역의 쇠락에 가속도가 붙었던 것이다.  지금은 주산 간이역마저 없어졌지만 디젤기관차 시대, 이용객마저 없는 오늘날의 간치역은 그 역할이 별로여서 무궁화호나 새마을호열차는 통과역으로 그냥 지나쳐버리고 통일호 열차만이 하루에 두 번씩 왕복하며 쉬었다 가는 바 열차손님도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한 두 사람씩 이용하니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어차피 요즘 세상이 탈 농촌, 도시집중화현상으로 주산면의 인구도 형편없이 줄고 따라서 간치역을 이용할 사람도 별로 없지만 한때는 깨끗한 옷으로 단장하고 여행하는 출입 객들이며 시끌법적 한 장사꾼들, 질펀한 술꾼들로 흥청거리던 간치역의 영화를 그리며 눈을 지그시 감으면 그때 그 시절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는 말들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세월의 한켠으로 물러나버린 한줌의 추억, 흑백사진처럼 아련한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 볼라치면 어디선가 빼-액 하고 기적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증기기관차의 피스톤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자료 및 도움말씀 주신 분: 김인환, 구본흥, 양창순, 나석운, 이기복, 서재욱, 손길신. 구자흔, 안능환) 

※실은 곳: 2005년 주산면 발행 구슬뫼 이야기 , 2006 향토사랑, 2008 대천문화원발행 애향

(이 글은 2005년에 쓴 것이며 그 후 2007년 6월 1일부터는 여객열차는 서지 않고 양회사일로가 있어 양회화물만 취급하며 한전소속의 전용철도인 서천화력선의 분기 역으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