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잃었다가 되찾은 성주사지석등

구슬뫼 2010. 6. 3. 19:35

 성주사지에는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성주사지 석등(聖住寺趾石燈)이 있는데 이를 도난당했다가 되찾은 사건이 있었다.

 

1.사라진 석등

 1989년 2월 6일 보령군청에 성주사지 관리인 배모(裵某)씨로부터 석등이 없어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어제까지 있었던 석등이 6일 아침에 보니 없어졌다는 것이었다(사실은 며칠 전에 없어졌으나 뒤늦게 이를 발견한 관리인이 거짓으로 어제까지도 있었다고 한 것임).

 보고를 접한 군청에서는 즉시 이를 충남도청에 보고함과 동시 보령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하였고 자체조사반을 편성하여 성주사지 부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조사를 실시하는 등 대처하였고, 충남도에서는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관리청)에 보고하는 한편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도난신고가 있기 전인 1989년 2월 3일 서울의 한 대학원생이 성주사지를 탐방하다가 석등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상경하여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 관리청)에 그 사실을 신고하였고 이를 접수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전국의 골동품상(骨董品商)에게 알리고 석등이 나올 경우 신고하여 줄 것을 협조 요청하였다. 말하자면 보령군과 충남도의 보고가 있기 전에 벌써 도난사실을 알고 대처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보령군청 자체조사반의 활동에도 참고할 만한 아무런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경찰의 수사도 이렇다 할 진척 없이 10여일이 지났을 때, KBS 대전방송에서 석등의 도난사실을 처음으로 보도하였고 그렇게 되자 다른 TV방송과 각 신문사들이 앞 다투어 이를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2. 석등을 훔친 범인과 장물아비의 자진신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석등을 훔친 도둑일당은 모두 4명으로 밤을 틈타 성주사지 앞에 봉고차를 대 놓고 5단으로 이루러진 석등을 분리하여 목도(두 사람 이상이 짝이 되어, 무거운 물건이나 돌덩이를 얽어맨 밧줄에 몽둥이를 꿰어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로 하나씩 날라다 실은 다음 1차로 한내여중(한내女子中學校) 뒷산에 가져다 감추어 놓았다. 그리고는 천안지역에 출타하여 골동품상들을 찾아다니며 팔 곳을 물색한 끝에 장물(臟物)아비 한사람을 만나 450만원을 받기로 흥정을 하였고, 그 후 당시 대천역(大川驛) 앞에 있던 수다방(秀茶房)에서 다시 만나 400만원을 건네받고, 석등을 아산(牙山)에 있는 모(某)중학교 뒷산에 실어다 주었으며 50만원은 나중에 받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범인과 장물아비는 서로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석등을 산 장물아비는 그것을 산에 숨겨 놓은 채 팔 곳을 물색하던 중, 전국의 골동품상에게 성주사지 석등이 수배 된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TV방송이며 각 신문사에 석등도난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겁이 나서 문화재관리국에 자진신고를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3. 돌아온 석등

 신고를 받은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즉시 석등을 찾아다 보관하였고, 충남도를 거쳐 보령군에 석등을 가져가라는 지시를 내려 보령군에서 이를 가져왔으니 석등을 잃은 지 꼭 한 달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석등을 찾아오기는 하였으나 현장에 다시 세워놓았다가는 또다시 어찌 될까봐 겁이 나서 한동안 성주면사무소 창고에 보관을 하다가 사건이 있은 지 2년여 후에 성주사지에 다시 안치하였다.


4. 석등도둑 검거

 석등을 찾아온 후 며칠이 지난 3월 중순이었다. 문화재관리국 수사반원 한사람이 보령군청에 들러 석등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은 후, 문화재담당계장을 앞세우고 대천시(大川市) 신흑동사무소(新黑洞事務所)를 가더니 관내 주민을 많이 아는 직원 한사람(세무담당자: 세금징수업무로 호별방문이 잦아 누가 어디에 사는지 잘 알고 있었음)을 불러놓고, 신흑동 00번지 주소를 내어 놓으며 이곳으로 안내하라는 것이었다. 셋이서 근처까지 가서는 먼발치에서 그 집을 보아놓고, 그 집 아래채에 최모(崔某)라는 사람이 세(稅)들어 산다는 것까지 세무담당자에게 확인하고는 돌아가면서 자기가 왔다갔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다. 심지어 경찰에게까지도 숨기라는 것이었다. 알고 본 즉 장물아비가 자진 신고할 때 범인의 전화번호를 함께 신고하였는데 그 전화의 주인이 바로 최모였던 것이다

 그 후 일주일쯤 지나서 문화재관리국 수사반은 서울 지하철수사대의 협조를 받아 형사대를 이끌고 내려와 최모의 집 근처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검거하여 동대파출소(東垈派出所)로 데려가서 다그친 결과 대천동(大川洞)에 사는 박모(朴某)와 청라면(靑蘿面)에 사는 김모(金某)등을 추가 검거함으로서 일당 4명 중 3명을 검거하여 돌아갔다. (나머지 한명은 요암동(蓼庵洞)에 사는 김모(金某)였으나 출타 중이라서 검거치 못함)

 다음날 피해자진술조서를 작성하고자 보령군청 문화재담당계장이 성주사지 관리인 배모씨와 함께 문화재관리국을 거쳐 지하철수사대에 출두하여 처음으로 범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배모씨는 그들 중 한명이 전년(1988년)까지 성주사지 근처에 살다가 이사를 간 사람임을 알아보았고, 그 범인은 배씨를 보자마자 얼른 외면해버렸다. 그 얼마 후 나머지 범인 한명도 검거하였다는 소식을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들었고 이렇게 하여 성주사지 석등도난사건은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5. 도난사건이 준 교훈

 문화재는 철저한 관리로 도난으로부터 잘 지켜야 하겠으나 1989년 당시만 해도 성주사지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이름뿐이지 전문적인 지식이 있거나 책임성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근에 사는 주민 한사람에게 담배 값 정도에 불과한 월1만원을 주고 관리를 부탁한 상태였기 때문에 성주사지 내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행위를 못하도록 한다든지, 사지 내에 소나 염소를 매어 놓지 못하도록 한다든지, 아이들이 사지의 담장에 올라가 놀지 못하도록 하는 따위의 기초적인 관리만을 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밤에 몰래 문화재를 훔치려는 도둑에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 해결책을 다각도로 판단하고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야 하는데 치부가 들어 날까봐, 또는 질책이 두려워 이를 숨기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의 행동은 사태수습을 더욱 어렵게 한다. 석등도난사건도 신고를 받은 즉시 신문과 방송에 터뜨렸다면 좀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 후 성주사지는 연차적인 발굴조사와 연구, 주변의 토지매입과 정비사업, 그리고 체계적인 관리를 통하여 명실 공히 국가사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이 밖의 모든 문화재들도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의 관리는 관계당국에만 의존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시민모두가 그 중요성을 알고 이를 사랑하며 관리에 동참하는 높은 문화시민의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