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서 장치기를 찾아보면 ‘두 편으로 나뉜 사람들이 각각 공채로 장치기공을 쳐서 서로 한정한 금 밖으로 먼저 내보내기를 겨루는 민속경기의 한 가지․ 공치기’라고 되어있다. 오늘날의 필드하키와 비슷하여 어찌 보면 하키의 원조가 아닐까하는 짐작도 해 볼 수 있는데 이 장치기는 오육십년 전까지만 해도 청소년들 사이에서 많이 행해지던 놀이였으나 지금은 우리 주위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그런 놀이가 있었던지 조차도 기억을 하는 사람이 그리 흔치않은 실정이다. 물론 이 놀이는 전국적으로 행하여지던 놀이이므로 일부 고장에서는 아직도 그 형태가 남아있을수도 있지만 우리 고장에는 전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사라져가는 이 민속놀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며 우리 연구회 박정순 원로회원님과 몇몇 촌로들의 도움 말씀을 토대로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고장에서는 공치기라고 하였다. 다만 공치기라는 이름은 공을 치며 노는 여러 가지 놀이의 총칭일 수 있으며 표준말은 장치기이므로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아무튼 이 놀이는 먼 옛날 신라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설도 있고 고려 말과 조선중엽에 널리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무과시험의 한 과목으로 채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격구나 타구가 무과시험으로 채택되었던 것이 잘못 전해지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격구나 타구는 말을 타고 하는 놀이로써 무관이나 또는 말을 기르고 부릴 수 있는 상위층 신분을 가진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놀이이므로 말이 없는 평민들이 이를 본 따서 한 놀이가 바로 이 장치기가 아닌가싶다.
여기에서 격구와 타구는 어떤 놀이인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격구(擊逑) : 말을 타고 달리며 구장(逑杖)으로 공을 치던 옛날 무신들의 무예 또는 놀이, 기(騎)와 보(步)의 두 가지가 있었음.
○ 타구(打逑) : 지난날의 공치기의 한 가지, 두 패로 나뉘어 각각 말을 타고 내달아 구장(逑場)의 한복판에 놓인 홍(紅), 백(白)의 두 공 가운데 자기편의 공을 구장(逑杖)으로 떠서 자기편 구문(逑門)에 집어넣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던 운동.
위에서 보면 격구 중에 보(步)가 바로 장치기와 비슷하겠으며 여기에서는 우리 지역에서 청소년들 사이에 널리 즐기던 서민놀이로서의 장치기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니 격구나 타구와 결부시키지 않고 경기방식이나 규칙 등도 우리 고장에 맞게 변형되었으면 변형된 대로,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자 한다.
2 장치기에 쓰이는 도구
장치기를 하려면 우선 장치기공이 있어야 하는데 짱공이라고 하는 이 공은 나무를 둥글게 깎아서 만든다. 소나무의 가지가 돌아가며 난 마디부분을 아래위로 자르면 조금만 다듬어도 둥그스름하게 되어 공 만들기에 편리하지만 부엉이 방귀 뀐 나무(수액이 뭉쳐져 둥글게 된 나무)를 잘라 만들기도 하였고 그 밖에 아무 나무건 둥글게 깎아서 공을 만들어 썼으며 새끼를 둥글게 감아서 공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짚공은 시대가 뒤떨어져 1940년대에 와서야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만든 공은 공판(공치기하는 마당) 근처에 숨겨 놓고 놀이를 할 때마다 꺼내어 사용하였는데 크기는 대개 달걀만한 것에서부터 오늘날의 야구공정도 크기까지 들쑥날쑥하는 등 직접 깎아서 사용하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가 나기도 하였다.(짚공은 크기가 더욱 커졌고 웅천읍 소황리 최종수[75세]씨의 말씀에 의하면 나무공도 직경 15㎝정도로 컸다고 한다.)
다음에는 공채(땅매라고도 함)라고 부르는 막대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 고장에서는 뽈채라고도 하였는데 길이 1m~1m50㎝정도, 굵기는 지름 3㎝정도의 끝이 약간 구부러진 막대기를 사용하지만 흔히 나무하러(땔나무를 채취하려고)가다가 이 놀이를 하므로 작대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 놀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채를 아예 나무지개에 매달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3 장치기의 방법
우선 놀이에 참가하는 사람을 양편 같은 수로 나누는데 한편에 5~10씩이 가장 알맞다. 하지만 사람의 수가 많으면 한편에 10명 이상도 할 수 있고 적으면 2~3명씩 편을 짜는 경우도 있었다.
놀이하는 장소는 편편하고 넓은 공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곳은 밭으로 일구기 때문에 장치기를 할 수 있는 장소는 마을 주변에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따라서 장치기를 하는 장소는 한 마을에 한군데 정도가 있을 뿐이며 대개 산이나 고개 마루에 있던 곳을 공판(공치기를 하는 장소라는 뜻), 또는 공바탕이라고 불렀다.
마을에 따라서 조금씩 틀리지만 공치기를 시작하는 가운데 부분은 낮고 양쪽 부분은 약간 올라가는, 그러니까 양쪽으로 경사가 완만하게 올라가는 ‘V'자형 지형이면 아주 좋은 공바탕이 되었다.
공판 양쪽 가에는 금을 그어 놓고 공을 금 밖으로 쳐내면 이기게 되는데, 마을에 따라서는 변형이 되어 양쪽 가에 골문을 만들어 놓고 골문으로 쳐 넣으면 이기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이 경우 골문은 대개 큰 돌을 주어다가 적당히 떼어 놓으면 골문이 된다. 경기는 17~20세정도의 청소년들이 하였는데 많게는 25~26세정도의 장정들까지 참여하였다고 한다. 어른들은 공판둘레에 앉아 구경을 하면서 심판을 보아주기도 하였다. 맨 처음에는 한가운데에 있는 구덩이(직경 2~3자, 깊이 1~1.5자)에 공을 넣고 공채로 쳐내어 시작하는데 양편에서 서로 쳐내려고 처음부터 다투게 된다.
어떤 마을에서는 공을 높이 던진 후 떨어지는 것을 서로 다투어 빼앗아 시작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마을에서는 가운데에 공을 놓은 다음 양쪽 대표가 공채를 공에 대고 있다가 시작 신호와 함께 재빨리 공을 자기편에 쳐내어 시작하는 곳도 있었다.
공채(뽈채) 또는 작대기로 공을 쳐서 서로 패스하면서 자기편 금 밖으로 쳐내면 이기게 되는데 골문을 만드는 방법으로 변형이 된 마을에서는 상대편 골문쪽으로 다가가 골문에 집어넣음으로서 점수를 따게 되며 서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많은 점수를 따려고 겨루는 것이 바로 요즈음의 필드하키와 너무 흡사하다.
한번 금 밖으로 쳐내거나 한 골을 넣게 되면 “이겼다.”라고 외치며 일정한 시간동안 점수를 많이(보통 5~10점내기를 정하고 점수를 먼저 올리는 편이 이김) 따는 편이 이기게 된다. 공채(뽈채)로 사람을 치거나 고의로 넘어뜨리면 반칙으로 공은 상대방에게 주어지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큰 규칙이 없이 억지를 부리고 반칙을 해도 별로 제재함이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옆줄 밖으로 공이 나가면 “나갔다.”라고 소리 지르며 다시 처음과 같이 구덩이에 공을 낳고 다시 시작한다. 또한 공을 손이나 발로 다루면 안 되고(공채를 사용하므로 다칠까봐서 감히 손이나 발을 댈 수도 없지만) 다만 골문을 만들도록 변형된 후에는 문지기가 손발을 사용하여 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공이 나무로 되었기 때문에 경기 도중 힘껏 친 공에 맞으면 다치기도 하고 막대기를 가지고 하기 때문에 휘두르는 공채에 잘못하여 앞정강이를 맞아 부상을 당하는 일도 많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직접 경기를 하는 사람보다도 가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날아오는 공에 맞아 이마가 터지는 등 다치는 일이 더 많았다고 증언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좀 특이한 마을의 예를 두 곳만 들어보고자 한다.
웅천읍 황교리 석진개 마을의 경우에는 처음 공치기를 시작하려면 구덩이에 공을 넣고 양편이 다투며 꺼내어 자기편의 금 밖으로 쳐내게 되며 일단 한번 금 밖으로 나가면 두 번째 시작은 구덩이 위에서 공을 높이 던진 다음 양편이 다투어 공채로 야구하듯 쳐서 자기편으로 보내어 시작 하는데 이를 ‘딱떼기’라고 부른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공을 금 밖으로 내보내면 세 번째는 자기편 금에 공을 놓고 공채로 한번에 상대방 금까지 나가도록 치는데 이를 ‘먼장떼기’라고 한다. 말하자면 1회전은 구덩이에서 시작, 2회전은 딱떼기로 시작, 3회전은 먼장떼기 기회를 주는 것인데 이렇게 먼장떼기까지 먼저 이기는 편이 완전히 이기게 된다. 다음에는 그 이웃 마을인 서어개 마을의 경우인데 이곳은 동달산이라는 산의 입구로서 인근 4~5개 마을의 땔나무 공급원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나무꾼이 항상 많이 모이는 곳이다. 거기다 공치기 할 청소년들도 한 편에 20~30명씩이나 될 만큼 그 수가 매우 많아 보통 공치기 방법으로는 할 수가 없었다. 우선 공바탕부터가 다른 곳과는 달리 폭은 5~7m, 길이는 50㎝정도로 길게 만들었다.(산등성이에 지형을 이용하여 경기하기 좋게 높은 곳의 흙은 깎고 낮은 곳은 돋우어 만들었음) 경기는 양편이 한 줄씩 약 3m정도 떨어지게 서로 마주보고 길게 늘어선 다음, 가운데 구덩이에 공을 놓고 다투어 쳐낸 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계속 쳐 보냄으로서 자기편 금 밖으로 내보내기를 겨루는데 상대편과 서로 마주보고 서서 왼쪽으로만 보내니까 공을 보내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적은 수의 사람으로 하는 경우에는 공을 치며 계속 내달아 금 밖으로 쳐내지만 이 마을이 경우는 공을 쳐 왼쪽 사람에게 보내어 연결시키면 된다.
이렇게 금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의 경기를 할 때 특이한 것은 반드시 공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쳐야 되며, 그래서 사람이 서는 방향이 같은 편끼리는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등을 보여야 한다. 만약에 상대편과 같은 방향으로 돌아서서 공을 빼앗으려고 하거나 공치기를 방해하면 “외방섰다.”(“방섰다.”라고도 하는데 왼쪽방향으로 섰다라는 뜻 같음)라고 하며 이는 반칙이 되므로 밀치거나 심한 경우에는 공채로 때리는 등 제재를 가하였다고 한다.
나무를 하러 가든가(땔나무를 채취하러 가든가), 아니면 봄판에 풀을 하러 갈 때(봄에 연한 풀을 베어다가 논에 넣어 썩힘으로서 거름이 되게 하는 일을 풀한다고 함) “공치기 하자.”하고 누군가 선동하면 모두들 모여들어 이 놀이를 하는데 놀기에 정신을 팔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하다가 해가 저물면 그제서야 “야, 이거 큰일 났다. 빨리 가서 나무를 해 오자(또는 풀 해오자).” 하고는 허겁지겁 산으로 가서 급히 조금씩 해 가지고 오는 일도 종종 있었고, 일이 없을 때에는 아예 공치기를 하기 위해 모이기도 하였는데 이런 때는 해지는 줄도 모르고 놀이를 계속하는 등 옛날에는 청소년들 사이에 매우 인기 있는 놀이 중 하나였다.
4 장치기 놀이마당과 관련한 우리 고장의 지명들
지명을 조사하다 보면 공판이라고 부르는 곳이 가끔 있는데 이런 곳은 대개 공치기(장치기)하던 장소이다.
대보문화연구회 황의호 회원이 조사한 공판 관련 지명은 다음과 같다.
(이 밖에도 많은 곳이 있겠지만 다음 기회에 찾아보기로 한다.)
○ 청라면 내현리 공판1 : 진밭고랑 위에 있는 넓은 공간으로 옛날 나무꾼들이 공치기를 했던 곳인데 아직 공판이란 이름이 남아있다.
○ 청라면 내현리 공판2 : 안골 북쪽 음현리와의 경계 지역이다. 홍두깨날의 서쪽으로 평평한 곳이 공치기하던 곳이다.
○ 청라면 내현리 공판3 : 위장골 고개 정상부분으로 평평한 지역이 공치기하던 곳이다.
○ 청라면 소양리 공바탕 : 당산 서쪽으로 평평한 지역이 있어 나무꾼들이 공치기를 하며 놀았다고 전한다.
○ 청라면 신산리 공밭 : 새말 북쪽 산 능선에 있는 밭이다. 이곳이 옛날 나무꾼들이 공치기를 하던 곳이다.
○ 청라면 황룡리 공바탕 : 중리 북쪽의 언덕에 있고 나무꾼들이 공치기하며 놀던 곳이라 전한다.
○ 대천동 공판재 : 윗갈머리 대천초등학교 동쪽 뒤에서 죽정동의 지장골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고 꼭대기에는 서낭이 있었다.
○ 미산면 남심리 공터 : 바랑뫼 마을의 북쪽, 잉척골의 입구에 공을 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미산면 풍산리 공판고랑 : 은골의 서쪽에 있는 작고 평평한 골짜기, 옛날 공치던 곳이라고 하나 지금은 밭으로 써먹는다.
○ 주교면 관창리 공판골 : 큰 샘골이 서쪽 부분에 공을 치던 장소가 있다.
○ 청소면 성연리 공바탕 : 머리재 안고랑의 북쪽 산 사면, 공치기하던 곳이지만 밭으로 개간하여 쓰기도 하였다.
○ 청소면 재정리 공바탕 : 냉정골 땅빠지골 남쪽에 있는 평평한 곳, 옛날에 공치기하던 곳이라 전한다.
○ 청소면 진죽리 공터 : 송암마을과 벗도러 마을 사이에 있는 평평한 산으로 옛날 공치던 곳이라 전한다.
○ 주포면 관산리 공판재(1) : 신낙골 동쪽 계곡에 있는 말둠벙 동남쪽의 평평한 지역.
○ 주포면 관산리 광판재(2) : 원댕이 마을과 역구렁목 마을 사이에 있는 언덕, 공치던 장소라 전하나 지금은 대천대학이 들어서 있다.
○ 주포면 봉당리 공판재 : 원댕이 마을 남쪽 언덕이다. 공치기하던 곳이라 전한다.
○ 주포면 연지리 공판 : 칙머리 남쪽에 있는 평평한 언덕, 쉴터와 이미재 사이에 있다.
○ 남포면 봉덕리 공판 : 붕산의 동쪽에 있고 공판 동북쪽에는 공판재가 있다. 옛날 공치기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 남포면 신흥리 공판 : 봉촌 남쪽 골짜기 입구에 있는 평평한 곳, 원재의 입구로 옛날 나무꾼들이 공치던 곳이라 전한다.
○ 주산면 황율리 공판재 : 쇠꼬지마을 정골고랑 위쪽 산능선, 산이 평평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공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웅천읍 평리 공판터 : 장번데기 오른쪽 끝부분에 평평한 곳이 있어 공치기를 하였으나 집터가 되어 지금은 김동일씨가 살고 있다.
○ 웅천읍 황교리 공바탕 : 석진개에서 무성끝으로 넘어가는 석진개 고개 위에 공바탕이라 불리는 곳이 옛날 공치기하던 곳이다.
○ 웅천읍 황교리 공판터 : 서어개에서 무성끝쪽으로 넘어가는 동달산 자락 중 평평한 곳이 있어 공치기를 하였는데 지금은 공군 사격훈련장에 편입되었다.
○ 웅천읍 죽청리 공바탕 : 뒷고개 정상중 북쪽으로 평평한 곳이 있어 공치기를 하며 놀았다고 한다.
5 맺는 말
이상과 같이 장치기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약 50여년전까지 존속해 오다가 해방을 전후로 사라진 것으로 짐작된다. 60대 초반의 노인들은 장치기(공치기)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60대 후반의 노인들은 구경하였다고 이야기한다.
다행이도 70세 이상의 노인들은 이 장치기 놀이를 직접 해보았거나 같은 또래들이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대부분 알고 있었고, 청소년시기에 경기도 의정부에서 살았다는 분(웅천읍 죽청리 김순집, 72세)의 말씀에 의하면 그곳에서도 공치기라는 이름으로 이 놀이가 성행하였다고 하니 장치기 놀이는 전국적으로 퍼져있던 민속이었던 것 같다. 불충분한 자료와 미숙한 글로 아까운 지면만 메꾸어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송구스럽지만 사라져가는 민속을 살펴보자는 뜻으로 이해하여 주시길 바란다.
우리의 민속놀이는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고 조금씩 변형되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 숨쉬면서 민족정신이 그대로 깃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건전한 민족은 건전한 민속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서 살펴 본 장치기 놀이도 우리의 많은 건전한 민속 중의 하나이다. 먼 옛날부터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청소년들이 이 놀이를 통해서 보다 튼튼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가꾸었고 단체심과 협동심 나아가서 호연지기를 길러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각종 운동경기나 오락게임 등 새로운 놀이문화에 밀려 장치기놀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디 장치기놀이 뿐인가?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가 배어있는 아니 민족정신이 깃들어 있는 각종 민속놀이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멀지 않아 우리의 민속놀이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기우가 아니리라. 우리 모두 민속을 알고, 아끼고, 보전하는데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또한 정부기관, 지방자치단체, 각급학교, 문화단체 등 각계각층에서 활발한 민속놀이 보존사업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장치기놀이도 지역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통해 재현하고 보존해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면서 끝으로 조사에 협조하여 주신 박정순 원로회원님, 황의호 회원님, 황장연 회원님, 그리고 오종록님, 오정규님, 김혁기님, 김순집님, 황인기님, 황의직님, 김은기님, 황도연님, 최종수님 등에게 감사드리면서 졸고를 맺는다.
※실은 곳 : 1998년 발행 대보문화 제7집/ 2006년 발행 향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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