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생활민속

짚의 문화를 돌아보며

구슬뫼 2007. 5. 17. 12:16
 

 짚의 문화를 돌아보며

 

                                                                   임근혁

 1 볏짚과 함께 해 온 농촌

 벼를 타작하고 나면 볏짚이 남는다. 요즈음은 콤바인이나 트럭타 등 영농기계를 이용, 벼베기와 동시에 타작을 하여 벼는 벼대로 자루에 넣어지고 볏짚은 잘게 썰어 논바닥에 뿌려져(특별히 사용할 볏짚은 썰지 않고 가지런히 받아 깔기도 하지만 그 양은 매우 적음) 거름으로 돌아가지만 옛날에는 이 볏짚이야말로 우리 농촌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이었다.

 옛날이라고 해서 몇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니라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볏짚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그보다 20년만 더 올라가면 짚으로 신을 삼아 신었기 때문에 당장 걸음을 걷는데도 짚이 필요할 정도로 생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기껏해야 거름이나 극히 일부의 가축사료 등으로 밖에 사용되지 않는 하잘것없는 볏짚을 어떻게 생활에 이용하였던가, 그때 그 시절 ‘짚의 문화’를 회상하면서 선인들의 지혜와 생활상을 살펴보고자한다.

 우선 우리의 선인들이 이렇게 짚의 이용을 많이 하게 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첫째는 길이 1m정도인 볏짚의 질이 질기고 부드러워 가공하기가 좋고 또한 잘만 간수하면 오랫동안 썩거나 상하지 않는 장점을 들 수 있다. 보릿짚이나 밀짚은 잘 부서지고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기껏해야 밀대방석을 만드는 외에는 땔감 또는 거름으로 밖에 쓸 수 없고 콩대, 팥대, 수수대등은 딱딱하고 잘 부러져 땔감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등 그 용도가 단순하지만 볏짚은 이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재료인 것이다.

 둘째로 우리 농촌의 주업이 논농사이었으므로 질 좋은 볏짚이 풍부하게 생산되었기에 이용하는 기술도 발달하게 된 것이리라.

 아무튼 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이 되면 농촌마을엔 갑자기 초가집들이 곱절로 늘어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데 집집마다 집채 만큼씩이나 큰 짚더미들을 한두 채 이상씩 쌓아놓기 때문이다. 이 짚더미들은 개초(改草)라 하여 초가지붕을 새롭게 해 이는데(바꾸는데) 절반 이상이 들어가며 나머지는 겨우내 소먹이 여물로, 그리고 땔감으로 사용되고 일부는 갖가지 생활용품을 만드는 귀중한 재료가 되었다.

 가마니, 섬, 멱서리, 멱둥구미 등 곡식을 담아두는 것, 멍석, 도래방석, 맷방석, 짚자리 등 곡식을 널거나 자리로 사용하는 것, 물건 따위를 넣거나 꼴 벨 때 가지고 다니는 망태기, 쓰레기, 재 등을 담아내는 삼태기, 비올 때 걸치는 도롱이, 조선벌통에 씌우는 멍덕, 암탉이 알을 품는 둥우리를 비롯하여 짚신, 등태, 멜방, 앉을개, 장독덮개(두트레), 꺼적(떼우적), 소이망(쇠망 : 소가 채소나 곡식 따위를 뜯어먹지 못하게 입을 막는 망), 소덮석(소가 춥지 않도록 덮어주는 등덮개), 소짚신 등 짚으로 만드는 용품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으며 이 밖에도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짚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하게 활용하였던 것이다.


2 짚을 이용한 구체적인 예

가. 개초(改草), 땔감, 여물

1) 개초(改草)

 개초는 ‘개초 한다’ , ‘지붕 해 인다’라고 표현하는데 보통 추수가 끝난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하지만 그 이듬해 봄에 하는 집도 더러 있다. 먼저 이엉(우리 지방에서는 나래라고 함)을 엮어야하는데 볏짚을 한줌씩 한편으로 엮으며 볏짚 3단을 다 엮어 길이가 6m정도 되면 도르르 말아서 한 축으로 치며 개초하려는 초가지붕의 크기에 따라서 50~100축정도 엮는다. 이엉 엮기가 끝나면 지붕 위에 올라가 겉에 있는 묵은 이엉(석은 새라고 함)을 걷어내고 굴곡이 없도록 잘 고른(물매를 잡는다고 함)다음, 세로로 새끼줄을 약 2m간격으로 단단히 맨 후 새 이엉으로 처마부분부터 한 바퀴씩 둘러 올라가 지붕꼭대기까지 덮게 되는데 이때 미리 매어둔 새끼줄에 묶어 고정시킨다.

 이엉 덮기가 끝나면 그 위에 단단한 새끼줄로 다시 가로, 세로 약 1.5m간격으로 지붕매를 띄우고 처마에 잡아당겨 묶어 맨다.

 이상과 같은 작업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맨 꼭대기에 용마름(우리지역에서는 용고새라고 함)을 틀어 덮는데 용마름이 얼마나 잘 틀어졌느냐(만들어졌느냐)에 따라서 초가집전체에 빗물이 잘 막아 지느냐가 달렸으므로 용마름을 트는 사람은 손아귀 힘이 강하고 솜씨가 좋은 사람이 뽑히게 마련이라서 동네에서도 4~5명 정도가 지정되어 있다시피 하여 그 사람들은 어떤 집이고 개초하는 집에 일하러(품팔러)가면 맡아 놓고 용마름만  틀게 마련이었다. 용마름을 틀려면 미리 짚을 잘 추려(다듬어) 물을 촉촉이 적셔 놓아두었다가 사용하는데 반 줌씩의 짚을 Ⅹ자로 엇갈린 다음 한쪽을 감아 돌리고 또 다시 짚으로 엇갈린 다음 반대로 감아 돌리기를 반복하여 틀어나간다. 짚의 양을 고르게, 꼭꼭 힘을 주어야 훌륭한 용마름이 된다.

 이엉을 엮거나 용마름을 틀려면 옆에서 적당량씩 짚을 섬겨주는(집어주는) 보조수가 있어야 능률이 오르는데 이런 보조수 역할은 대개 10대 소년들이 맡아하게 마련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농촌출신들은 서리가 하얗게 내린 추운 아침에 손을 호호 불며 어른들의 이엉 엮기에 짚을 섬겨 드리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리라. 너무 짚을 많이 섬긴다, 또는 너무 적게 섬긴다는 등 지청구(꾸지람)듣던 기억까지......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1970년대 전국적으로 불어온 새마을운동의 열풍은 대대적인 지붕개량으로 이어졌고 따라서 수 천년동안 농촌을 장식해왔던 초가지붕은 순식간에 함석과 스트레스로 기와와 스라브로 탈바꿈하고 이제는 민속촌에나 가봐야 초가지붕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산에 기우는 태양이 그 빛을 잃어가는 저녁 무렵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둥글둥글한 초가지붕들 사이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저녁밥 연기, 그 평화로운 광경이 눈앞에 아직도 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추억은 아니리라.


 2) 땔감

 새 짚은 초가지붕을 해 일고, 소여물을 쑤고, 새끼를 꼬거나 고공품(짚으로 가공하는 가마니 등)을 만드는 자료 등으로 써야하므로 직접 땔감으로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고 초가지붕을 해 이을 때 걷어내는 석은새를 주로 땔감으로 썼다. 석은새는 1~2년동안 지붕위에서 햇볕과 비, 바람에 시달렸으므로 많이 삭아서 다른 용도로는 쓰지 못하고 거름이나 땔감으로밖에 쓸 수 없다.

 땔감이 부족한 지방에서는 이 석은새야 말로 귀중한 월동준비용 땔감이 되는 것이다.

 지붕위에서 내린 석은새는 돌돌 말아서 헛간에 쌓아놓거나 마당 한구석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잘 쌓아놓고 한쪽에서부터 조금씩 빼내다가 겨우내 땔감으로 쓴다. 잘 마른 석은새는 화력도 괜찮고 불때기도 편리하지만 어쩌다 추진(빗물이 스며들어 습기가 차있는) 석은새로 불을 지펴 아침밥을 지으려면 불은 타지 않고 연기만 자꾸 나서 눈물 섞어 밥을 짓는 며느리의 설음에 한 몫 하기도 하였다.


 3) 여물

 여물은 소의 먹이다. 깨끗한 짚을 작두로 잘게 썰어 큰 가마솥에 넣은 다음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푹 삶은 다음 꺼내어 쌀겨, 보릿겨를 섞어서 여물통에 넣어주면 소가 좋아하며 먹는다.

 여물을 삶는 솥은 사랑채의 아궁이에 걸게 되는데 소여물을 한번 쑤면(삶으면) 사랑방이 뜨끈뜨끈해서 동네사람들이 마실 와서 놀기도 하고 새끼를 꼬거나 간단히 짚 가공품을 만들기도 하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우는 장소가 된다. 여물을 잘게 썰기 위해 작두를 사용하기 때문에 간혹 서툰 작두질에 손가락을 자르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도 많이 있었다. 소여물을 쑤는 것은 대개 남자들의 몫이고 특히 머슴을 둔 집은 머슴이 도맡아서 여물관리를 한다.

 좀 엉뚱한 이야기인지 몰라도 옛날 판교장(서천군 판교면에 서든 5일장)에 커다란 찌럭대(사람에게 반항하며 덤벼드는 황소) 한 마리가 뛰어들어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설쳐 댔다. 사람들이 겁이 나서 감히 붙잡기는커녕 접근조차 못하고 이리저리 피하는데 웬 15~16세정도 된 체격도 작고 꾀죄죄한 한 소년이 찌럭대 앞으로 나아가 콧도래를 움켜쥐니 그렇게 사납던 황소가 갑자기 얌전해져 따라가더라는 것. 하도 신기하여 사람들이 알아본즉 그 소년이 머슴 사는 주인집의 소였는데 어린 나이에 머슴을 살면서 갖은 고생을 하는 이 소년은 속상한 일이 있었던 날은 분풀이 할 데가 없으므로 여물을 쑤면서 불붙은 부지깽이로 소를 찔러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는 것. 그래서 이 황소는 뜨거운 막대기로 찌를까봐 이 소년만 보면 무서워서 벌벌 떨게 되었더라는 웃지 못 할 실제 이야기가 있었다.


나. 짚으로 만든 가공품들

1) 새끼

 우리지방에서 사내끼라고 부르는 새끼의 용도는 매우 다양하다.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끈은 새끼를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짚으로 만드는 가공품은 대개 새끼를 꼬아서 그 기초를 만드는 그야말로 새끼는 짚가공의 시원이요 그 모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끼를 꼬려면 우선 짚을 깨끗하게 추려야 되는데 먼저 메갱이(나무로 만든 메)로 짚단을 마구 두들겨 부드럽게 만든 후 꽁무니(밑 부분의 겉껍질 등)를 빼고 물을 촉촉이 적신 다음 거꾸로 세워놓아 물기가 땅으로 빠지게 하고 일부는 짚에 배어들면 준비가 완료된 셈이다.

 짚 2~3매씩을 양 손바닥에 놓고 손을 비벼 꼬게 되는데 계속 새끼가 이어지도록 새짚을 이어가며 꼬아야하고 꼬아진 줄은 엉덩이 밑을 통해 뒤로 계속 빼내어 적당히 서려놓은 다음 일정량을 꼬면 둥글게 사려서 한 사리씩 묶어두었다가 사용한다. 사용용도에 따라 굵은 새끼, 중간 새끼, 가는 새끼 등으로 꼬는데 반드시 오른쪽으로 꼬아야하므로 왼손잡이들도 새끼만은 오른손으로 꼰다.(왼 사내끼를 꼬면 동티가 난다든지 하는 미신으로 금기시킨다.)

 새끼는 필요한 양에 따라서 혼자 꼬기도 하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꼬기도 하지만 지붕매(초가지붕을 엮어 매는 새끼)와 같이 다량으로 필요한 새끼는 보통 동네 큰 사랑방에 장정들이 모여앉아 합동으로 꼬는 일이 많다. 그렇다고 일꾼을 사서 꼬는 경우는 드물고 부잣집 사랑방에 그 집 머슴이 새끼를 꼬면 동네 사람들이 마실 도 갈 겸, 자기집 새끼도 꼴 겸 각자 짚단을 가지고 모여든다. 손바닥에 침을 퉤퉤 밭아 바르며 새끼를 꼬노라면 입심 좋은 사람의 걸쭉한 농담에 온 방안이 왁자하게 웃음바다가 되기도 하고 동네 총각, 처녀의 염문에서부터 어느 집 노인의 병세가 어떻고 엊그제 장터에서 일어났던 일이며 웬만한 동네 대소사의 의논까지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오늘날 반상회의 원조는 여기서 부터라 할 수 있다. 밤이 이슥하면 안채에서 뜨끈뜨끈한 삶은 고구마 한 소쿠리에 쭉쭉 쪼갠 동치미 한 양푼을 내놓으면 굴픔한(배가 조금 고파 무언가 먹고 싶은)김에 너도나도 한 두개씩 집어먹는 그 맛, 그것을 기억하는 오육십대 이상의 농촌출신들은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돌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새끼틀(새끼를 꼬는 기계)이 등장함으로서 다량 생산이 되고 전문적으로 새끼만 꼬아 파는 곳이 생기자 손으로 새끼 꼬는 풍경이 점차 사라지더니 1970년대 초가지붕이 없어지면서 새끼의 수요도 급격히 줄고 곡식 가마니 묶는 용도마저 기계 새끼가 차지하다가 가마니마저 마대로 대체된 1980년대 중반 경부터는 우리 주위에서 새끼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2) 섬

 사전에는 ‘짚으로 엮어 만든 멱서리’라고 되어있는데 짚으로 만든 곡식 용기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여섯자 정도 되는 곧고 튼튼한 장대를 허리 높이로 수평되게 걸쳐놓고 가늘게 꼰 새끼 다섯줄을 약 20㎝간격으로 걸어놓되 새끼줄 양쪽에는 벽돌크기의 돌을 하나씩(총10개) 달아놓는다. 이상 준비가 끝나면 깨끗하게 추린 짚을 10여 낫씩 맛방구 쳐(짚의 밑 부분은 약 30㎝정도 길게 양쪽으로 남도록 하되 약 2m정도 엮으면 가로 1.5m, 세로 2m정도의 성꺼치가 된다. 이것을 U자 모양으로 구부린 다음 볏짚 밑부분을 서로 잡아당겨 엮으면 섬이 완성되며 용량은 벼 2가마 정도 들이로 만들지만 용도나 개인의 취향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한다. 벼를 담는데 사용하며 고구마 등을 넣어두기도 한다. 정부에서 식량증산 몇 천만 석이라고 할 때 ‘석’이라는 단위는 바로 이 섬과 같은 단위이다.


3) 멱서리

 짚으로 날을 촘촘히 결어서 곡식 따위를 넣어두는데 쓰는 그릇으로서 만드는 방법은 멱둥그미와 비슷하고 크기나 모양은 가마니와 비슷하다. 섬과 함께 곡식을 넣어두는데 쓰였으나 만드는데 품과 정성이 많이 들고 드닫기도 불편하여 가마니가 나오고부터는 별로 사용치 않는듯하다.


4) 가마니

 섬보다 진일보 한 용기가 가마니이다. ‘가마니 짠다’ 또는 ‘가마니 친다’라고 제작과정을 말하는데 70년대까지만 해도 농가에서는 물론 정부 양곡을 취급하는데 가마니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의 수요가 엄청나게 많았으며 따라서 가마니치기는 농가의 겨울철(농한기) 부업으로 짭짭한 소득원이 되었다. 가마니 공판(정부에서 가마니를 사들이는 일) 날이면 우마차, 지게, 트럭으로 가마니를 날라다가 넓은 공판장에 꽉 차게 쌓아놓고 수매하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줄줄이 쌓아놓은 가마니사이를 검사원이 돌아다니며 등급을 매긴다. 좀 더 좋은 등급을 받으려고 조마조마한 농민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정한 검사원들은 슬쩍슬쩍 보고서는 등급을 매기는데 그 정확도는 어떻든지 간에 낮은 등급을 받은 사람은 적지 않은 가격차이 때문에 검사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일도 간간이 있고......

 어찌나 검사원이 소행이 얄밉고 검사를 대충했다고 생각했던지 무슨 일을 찬찬히 하지 않고 대충대충 하는 경우에 ‘가마니 검사하듯 한다’는 속담이 생기기도 하였다.

 가마니를 짜려면 가마틀이 있어야한다. 우선 이 틀에 가는 새끼를 세로로 촘촘히 날아야 되는데 구멍이 규칙적으로 나란히 뚫린 바디라고 하는 부분에 새끼줄을 일일이 끼워서 단단히 고정시킨 후 바디를 위로 올려 손잡이를 앞으로 당기면 씨줄(새끼줄)중 1,3,5,7...... 등 홀수 줄이 앞으로 나오고 2,4,6,8...... 등 짝수 줄은 뒤로 젖혀져 홀수 줄과 짝수 줄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옆에 사람이 가마니 바늘대(대나무를 쪼개서 길게 다듬은 것)을 이용하여 짚 2매를 맞방구 쳐 그 틈새에 집어넣으면 바디를 힘있게 아래로 내려친다. 바디를 다시 올려 이번에는 손잡이를 뒤로 재끼면 짝수 줄이 앞으로 나오고 홀수 줄이 뒤로 젖혀지게 된다. 또다시 볏짚 2매를 맞방구 쳐 틈새에 집어넣고 바디를 다시 내려친다. 이렇게 씨줄을 교차하면서 짚을 넣어 바디로 내려치기를 계속하면 가마니때기가 짜지게 되고 이것이 완성되면 떼어내어 양쪽 가에 빠져나온 짚의 밑 부분을 예쁘게 우겨가며 마무리를 한 다음 반으로 접어 가마니바늘(쇠로 만듦)을 이용하여 새끼로 양쪽을 붙여 꿰매면 가마니가 완성된다. 이렇게 만든 가마니는 그 용량이 곡식 5말(소두 10말) 들이이며 각종 곡식을 넣어두는데 쓰였고 헌 가마니는 모래, 흙 등을 넣어 허물어진 제방을 복구하는 등 수방 자재로 쓰기도 하였으며 뜯어서 가마니때기로 만들어 축사, 온상 등 각종 보온 덮개로도 사용하였는가 하면 뒷간이나 잿간입구에 문으로 걸쳐 사용하는 등 그 용도가 다양하였던 것이다. 이 가마니들은 1960년대 후반쯤 기계 가마니가 등장하여 대량 생산이 됨으로서 가마니치기를 하는 부업 농가에 큰 타격을 주는가 싶더니 1980년대에는 마대가 보급되어 가마니를 대체하게 되어 오랜 세월 곡간을 지켜오던 가마니는 스르르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5) 멱둥그미

 사전을 찾아보면 ‘짚으로 둥글고 울이 깊게 결어서 곡식 따위를 담는 그릇’이라고 되어있는데 우리 지방에서는 메꾸리라고 부른다. 가는 새끼를 햇살 퍼지듯 사방으로 뻗쳐놓은 다음(날 놓는다고 함) 그 새끼를 교차해 둥글게 돌려가며 짚으로 단단히 결어나간다. 여러 바퀴를 돌려 날줄 사이가 벌어지면 가는 새끼로 날줄을 더 박아 늘려가며 만든다.

 만들고자 하는 크기의 밑바닥이 완성되면 날을 세우면서 결어나가다가 적당한 높이의 그릇이 되면 날줄을 서로 결어 돌아가며 마무리를 한다. 콩, 팥 등 잡곡이나 고구마, 감자 같은 것 을 담는데 사용하는데 그 크기는 일정하지 않아 소두 한 말 들이로 부터 반 가마 들이까지 각자 취향이나 용도에 따라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쓴다. 솜씨 좋고 손아귀 힘이 좋은 사람이 정성들여 만든 메꾸리는 모양도 예쁘고 질겨서 비만 맞지 않는다면 10년 이상 사용이 가능하며 가볍고 깨지지도 않아 우리 농촌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용기중의 하나이다.


 6) 망태기

 우리 고장에서는 구럭이라고 부른다. 가는 새끼로 엮어서 엉글엉글하게 만들어 작은 물건 따위를 넣어가지고 다니는 물건으로서 요즈음의 가방이나 시장바구니등과 비슷한 용도로 쓰이던 것, 이를테면 산에 약초를 캐러 가거나 산나물을 뜯으러 갈 때에 망태기를 걸머메고 다녔고 갯바닥(바다)에 게나 조개를 잡으러 갈 때, 먼 길을 떠날 때 도시락이나 간단한 여행용품을 넣어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고 또한 어린 소년들이 토끼, 돼지, 또는 소에게 먹일 꼴(우리 지역에서는 깔이라고 함)을 벨 때 가지고 다녀서 꼴망태가 되기도 하고 지게를 사용치 못하거나 없는 소년 또는 부녀자(옛날에는 부녀자들이 땔나무를 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음)들이 산에 망태기를 가지고 가서 솔방울도 줍고 작은 나무등컬, 버급쟁이(나무껍질 벗어진 것)등을 주어 담아 오는데도 사용하였다. 망태기는 된새끼(힘을 많이 주어 단단히 꼰 새끼)로 만들지만 간혹 노끈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아무튼 엉글엉글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작은 물건은 넣지를 못한다.

 10세 안팎의 조물조물한 꼬마들 한패가 놀고 있으면 어른들이 “에이 그 녀석들 엉근구럭(망태기)에다 넣고 흔들면 하나도 안 남고 다 빠지겠다.”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는데 이용되기도 한다.

 한편 두 가지 일을 하려다 한 가지도 못 이루고 실패하는 경우를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한 마리도 못 잡는다’고 표현하고 이것저것 욕심내다가 이미 이루어진 일까지 망가트리는 경우를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도 놓친다’라고 말하는데 이와 비슷한 뜻으로 ‘긔(게)도 구럭도 다 놓친다’라고 하여 여기에도 구럭(망태기)이 들어간다. 또한 망태기와는 좀 다르지만 개똥망태라는게 있다.

 가는 새끼로 3~4줄 날줄을 두고 잘 추린 짚을 나란히 엮어 1.5m정도 되면 U자로 구부려 짚의 밑 부분을 잡아당겨 함께 엮은 후 짚의 끝부분을 예쁘게 우겨 넣어가며 마무리를 하면 위와 한쪽 옆이 터진 용기가 된다.

 여기에다 멜방을 매어 한 쪽 어깨에 걸머지고 다니면서 개똥을 주어 담는데 이 용기가 바로 개똥망태이다. 농사철에는 바빠서 개똥을 주울 시간도 없고 또한 개똥도 얼지 않아서 줍기가 어려우므로 개똥망태도 쓸모가 없지만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서리가 하얗게 내린 이른 새벽에 개똥을 줍는 부지런한 사람이 있었다.

 비료가 흔한 요즈음에는 실감이 통 나지 않는 웃기는 얘기로 들리지만 거름이 부족했던 옛날에는 이렇게 주은 개똥을 잿간이나 똥통에 넣어 거름으로 썼던 것이다.


7) 삼태기

 우리 지역에서는 삼태미라고 부른다. 대나무나 싸리로 만들기도 하지만 주로 짚을 이용하여 만든다. 삼태기를 만들려면 우선 삼태기 바퀴를 준비해야 하는데 직경 3㎝, 길이 1.5m 정도의 질기고 곧은 생나무를 잘라서 잘 다듬은 다음 U자형으로 구부려 묶어서 그늘진 곳에 오랫동안 걸어 놓았다가 삼태기를 만들 때 쓰는데 이 구부러진 마른나무를 삼태기 바퀴라고 한다. 가는 새끼로 여러줄 날줄을 놓고 짚으로 결어서 바닥을 만들고 바닥을 완성하면 앞부분만 제외한 옆과 뒷부분을 세워가며 앞쪽은 얕게,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게 모양을 맞추어 만든 다음 삼태기 바퀴를 대고 마무리를 하면 삼태기가 완성된다. 거름, 흙, 재 등을 담아내는 용기, 즉 요즈음의 쓰레받이와 같은 용도로 쓰였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고을의 수령이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에 의해 쫓겨나는 경우 ‘삼태기 태웠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집단이나 혹은 동네에서 돌출 행동을 하여 골칫거리로 통하는 사람이 있으면 ‘삼태기 태워’하는 말로서 그를 추방하자는 표현을 대신하기도 한다. 쓰레기같은 못된 인간을 쓰레기 담아내는 삼태기로 담아다 버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 같다. 우리 모두 가정에서, 마을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나라에서 삼태기를 태워야 될 사람은 없는 가 찾아보아야겠다. 아니 혹은 나 자신은 삼태기를 탈 사람이 아닌 가 뒤돌아보는 자성의 기회를 가져보아야 하겠다.


 8) 멍석

 가을철에 농가의 널찍한 밭마당(바깥마당)에 멍석을 깔고 빨간 고추를 널어 말리던 광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요즈음이야 건조 시설이 좋아 고추건 벼건 쉽게 말리지만 옛날에는 오직 하나뿐인 건조 수단이 멍석을 펴놓고 그 위에다 널어 말리는 방법밖에 없었으므로 고추, 벼, 콩이나 팥 그 밖에 애호박 썰은 것, 고구마 줄기 삶은 것 등 건조시켜야 할 모든 농산물을 바로 이 멍석을 이용하여 말렸던 것이다. 그 종류를 둥근 것, 네모난 것으로 크게 나누지만 필요에 따라 크기가 천차만별 다양하게 만들어졌고 농가마다 3~5개씩, 많게는 10~20개씩 보유하면서 특별히 많이 써야 될 경우에는 이웃끼리 서로 돌아가며 빌려 쓰기도 하였다.

 짚으로 만든 가공품 중 섬이나 가마니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다 새끼줄로 날줄을 놓고 짚으로 결어 만드는데 멍석도 마찬가지다.

 네모진 멍석을 만들려면 우선 잘 꼰 새끼로 날줄을 여러 줄 놓고 짚으로 결어 나가다가 적당한 크기가 되면 끝내기를 한 다음 양쪽 갓부분을 단단히 마무리하면 되는데 2m×4m정도로 크게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여자들이 드닫는(취급하는: 들어내고 걷어두는) 물건이므로 크기도 적당히 하고 두께도 얇게 하여 무게를 줄이는 게 보통이다. 둥근 멍석의 용도는 네모 멍석과 같고 만드는 방법은 맷방석과 같으므로 설명을 줄이고 대신 멍석을 이용한 풍습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멍석말이’라는 이름의 이 풍습은 옛날 세도가에서 하인이나 상인에게 벌을 가하던 사형(私刑)중의 한가지인데 벌 받을 사람을 멍석에 넣고 둘둘 만 다음 하인들을 시켜 몽둥이로 마구치는 형벌로서 마을 내에 못된 짓을 한 사람을 벌 줄 때도 이런 방법을 썼다고 전해진다.

 또한 ‘멍석말이’라는 놀이도 있다. 주로 소년들이 하는 놀이인데 그 내용은 뒤에 나오는 ‘보령지방의 어린이 놀이’편에 소개한다.


9) 맷방석, 도래방석

 맷방석과 도래방석은 만드는 방법도 같고 모양도 같다. 맷방석은 맷돌 받침으로 쓰이고 도래방석은 조금 더 크게 만들어서 양이 적은 농산물 이를테면 삶은 시래기, 삶은 고구마줄기, 고추 잎이나 애고추 등을 말리는 작은 멍석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만드는 방법은 멱둥그미를 만들 때처럼 가는 새끼로 햇살 퍼지듯 사방으로 뻗혀 날을 놓은 다음 그 새끼를 교차하여 둥글게 돌려가며 짚으로 단단히 결어나간다. 적당한 넓이가 되면 날줄을 둥그스름하게 세우면서 결어 높이가 두치(6㎝)정도 되면 예쁘게 마무리한다. 크기는 개인의 용도나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맷방석은 직경이 60㎝정도, 도래방석은 직경이 1m정도 되게 만드는 게 보통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만드는 방법은 둥근 멍석, 멱둥그미와 같으며 넓고 평평하면 멍석, 울이 직각지고 깊으면 멱둥그미가 된다.


 10) 멍덕

 재래식 토종벌의 사육은 대개 속이 텅 빈 통나무위에 멍덕을 씌워서 그 속에 벌집을 짓도록 한다. 지금은 토종벌집도 네모진 상자를 겹겹이 쌓아놓고 한 층씩 잘라 팔기도하고 어떤 이는 양봉처럼 소초(벌집을 지을 기초)를 넣어 집을 짓도록 함으로서 관리하기에 편리하도록 발달하였지만 옛날에는 봄철에 분봉을 하여 벌떼가 나와 나뭇가지에 앉으면 미리 준비한 벌 멍덕에 꿀을 발라 벌떼위에 놓고 말린 쑥대뭉치 등으로 벌떼를 멍덕 속으로 몰아넣은 다음 빈 벌통위에 가져다 올려놓으면 새로운 벌집이 지어지는 것이다. 멍덕 역시 만드는 방법은 멱둥그미와 다를 바 없다.

 가는 새끼로 햇살 퍼지듯 사방팔방으로 놓고 짚으로 촘촘히 결어나가되 멱둥그미는 평평하게 하다가 직각으로 꺾어 올리지만 멍덕은 처음부터 조금씩 조여 올려가며 둥그스름하게 모자처럼 만들다가 적당한 크기에서 마무리하면 된다.


 11) 도롱이

 도롱이는 어깨에 걸쳐 두르는 재래식 우장의 한가지이다. 우리 지방에서는 도랭이라고 하는데 띠 같은 풀로 만들기도 하지만 볏짚으로 만드는 경우가 더 많았다. 도롱이를 만들려면 우선 깨끗하게 추린 짚의 중간부분을 엮되 사람의 등 넓이 이상이 되게 첫줄을 만든 다음 둘째 줄 역시 볏짚의 중간부분을 엮되 첫줄 엮은 짚의 밑 부분과 합하여 엮는다. 셋째 줄은 둘째 줄의 밑 부분과, 넷째 줄은 셋째 줄의 밑 부분과 합하여 엮는 방법으로 층층이 엮으면 훌륭한 빗물받이 우장이 된다. 사람의 신장에 따라서 적당히 길이를 맞추고 멜방을 달아 어깨에 걸치면 되는데 웬만한 비는 거뜬히 막을 수 있다.


12) 짚신

 짚신은 수 천년동안 서민들의 발을 감싸왔다. 194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고무가 들어와 고무신이 등장하고 운동화와 구두로 발전해 오늘날에는 편리하고 멋진 신발이 앞다투어 생산되고 있지만 옛날에는 오직 짚신만이 신발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지체 높은 양반네나 신던 가죽신은 감히 구경조차 어려웠고 비오는 날에 신는 나막신은 만들기도 까다로울 뿐 아니라 신고 행동하기도 불편하여 자연스레 짚신을 많이 애용하게 되었던 것,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신을 짚신을 직접 삼았고 먼 길을 떠날라치면 으레 짚신 몇 켤레씩 짊어지고 다녀야했다. 짚신을 삼으려면 두발을 모아 앞으로 뻗고 앉아 새끼줄로 U자를 만든 다음 양쪽 엄지발가락에 한 가닥씩 걸고 안쪽으로 줄을 늘여 허리춤에 두른 줄에 묶어 매면 4줄의 짚신 날이 된다.

 다음에는 짚신 날을 이용하여 발뒤꿈치부터 결어나가되 양쪽 옆으로 7개정도의 신총을 만들어 놓으면서 나가다가 중간에는 신총을 만들지 말고 그냥 결어나간다. 중간을 넘어서면 양쪽으로 다시 10개정도의 신총을 만들면서 끝까지 결어나간다. 결기가 끝나면 발가락에 힘을 주고 허리춤에 묶은 줄을 잡아 다니면서 짚신틀 전체를 튼튼하고 보기 좋게 갖춘다. 이렇게 해서 신발바닥이 완성되면 신발총들을 세워 신발 벽을 만들면서 질긴 줄로 마무리를 하면 된다.

 짚신과 얽혀진 이야기가 있어 두 가지 요약해본다.

 짚신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아서 먹고사는 부자(父子)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만든 짚신은 언제나 인기가 있어 시장에 내다놓으면 금방 팔리고 값도 잘 받는데 아들이 만든 짚신은 그렇지를 못했다. 아들은 더욱더 정성을 들여 삼아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아버지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았지만 언제나 빙그레 웃으시며 네가 짚신을 잘못 만들기 때문이라고만 하실 뿐 비결은 좀처럼 말씀하시지 않더라는 것. 세월이 흘러 마침내 아버지가 늙어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임종을 앞두고 그 비결을 물은즉 아버지는 죽어갈 때 “터-어-ㄹ......”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다 만든 짚신의 털을 뜯어서 매초소롬하게(매끄럽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짚신은 인기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기술의 전수를 꺼려서 오늘날 첨성대의 비밀도, 고려청자나 거북선의 제작법도 전래되지 않고 있는 게 아니냐는 씁쓸한 생각과 함께 상품의 뒷마무리 소홀로 국제시장에서 반품 율이 높다는 우리나라 수출품 생산업체들에게 경종으로 들려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또 한 가지 이야기, 어느 어머니가 짚신 장수와 나막신 장수 두 아들을 두었는데 비오는 날에는 짚신 장수 아들걱정, 좋은 날에는 나막신 장수 걱정으로 도대체 걱정 떠날 날이 없었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자식을 걱정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언제나 편할 날이 없다는 뜻의 이야기일 것인즉 다시 한 번 어버이에 대한 고마움을 느껴보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3 그 밖의 짚을 이용한 사례들

 위와 같이 짚을 이용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았지만 이는 실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산모가 애기를 낳을 때는 깨끗한 짚(찰벼 짚을 깔면 아들을 낳는다는 미신도 있었음)을 깔아주었고 애를 낳으면 대문간에 거는 삼줄도 짚으로 꼰 새끼줄이었다. 성황신께 메를 올리거나 거리제를 지내는 등 치성을 드릴 때, 그리고 사자밥을 놓을 때도 정갈한 짚을 놓고 그 위에 음식을 올렸던 것, 집을 짓고 흙벽을 붙일 때, 지붕 위에 새오를 받을 때에도 짚을 잘게 썰어 황토에 개어 썼는가 하면 겨울철 외양간이나 돼지우리 등 축사의 보온도 짚으로 둘러치고 속에는 북데기(북덕한 지푸라기)를 많이 넣어 따뜻하게 해줌과 동시에 가축의 똥, 오줌이 흠뻑 밴 지푸라기는 두엄이라 해서 논밭에 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최고의 유기질비료가 되었다.

 짚으로 트는 동아줄은 섭울타리(소나무, 참나무 등의  나무의 생가지를 쳐다가 나란히 세워 만드는 울타리)나 짚울타리(짚으로 이엉을 엮은 다음 맞방구쳐서 둘러치는 울타리)를 칠 때 둘러 묶는데 쓰는가하면 가랫줄 등 튼튼한 줄이 필요한 곳이면 으레 동아줄을 찾게 되었고 비가 왔거나 얼었던 땅이 녹아서 질퍽대는 길에는 짚을 깔아 걷기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화초나 어린나무가 겨울에 얼어 죽지 않도록 짚으로 싸매어 주는가하면 가을철에 가로수 중간에 짚을 둘러놓았다가 해충들이 월동하려고 그 짚 속에 모여들면 이른 봄 거두어서 불태움으로서 해충구제에 이용되기도 하고 농촌 청년들은 널빤지에 새끼줄을 칭칭 감아 세워놓고 맨주먹으로 마구 두들겨 단련하기도 하였다.

 여자들이 물동이나 짐을 머리에 일 때 배기지 않도록 짚으로 또아리를 틀어 대었고 김장독을 묻을 때 또는 무, 배추를 겨울철에 먹기 위해 땅에 묻을 때도 짚을 이용하여 보온하였고 시래기, 파, 마늘 같은 농산물을 엮거나 메주를 묶어 말릴 때, 달걀꾸러미를 만들 때도 짚을 이용하였으며 심지어 화장실에서 휴지대용으로까지 지푸라기를 사용하던 게 우리 선인들의 생활이 아니었던가.

 또한 짚을 민간약으로 쓴 부분도 있다. 해삼을 먹고 체했을 때 짚을 삶아 그 물을 마시면 즉석에서 ‘꺼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트림이 나온 후 시원하게 뚫려 내려가는 게 느껴지는데 이는 해삼과 짚이 상극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로 해삼이 짚에 얼마나 약한지 시장에서 굴, 조갯살 등 작은 어패류를 사면 짚꾸러미에 싸서 주는데 만약 해삼을 짚꾸러미에 싸거나 짚으로 묶어가지고 가면 집에 도착했을 때 모두 녹아 물만 젖어있게 된다.

 또 한가지 어린애가 우유를 먹고 체했을 때 짚을 삶아 물을 먹이면 낫는다고 하며 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을 때 세 가지 성씨(김, 이, 박 등)집의 뒷간(화장실) 지붕에 있는 짚을 빼다가 합하여 가지고 환자를 때리면서 “중도 고기 먹나.”하는 주문을 되풀이하면 두드러기가 낫는다는 미신에 짚이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어디 그뿐인가, 짚은 우리 놀이문화에도 깊숙이 침투하여 전래되는 민속놀이에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단오날에 뛰는 그네줄은 대개 짚으로 동아줄을 틀어서 사용하였고 전국 곳곳에서 계승하고 있는 민속 줄다리기나 고싸움, 차전놀이 형태의 각종 민속놀이에 이용되는 대형 동아줄도 짚을 이용한 것이며 가늘게 꼰 새끼를 똘똘 뭉쳐 공을 만든 다음 작대기로 쳐서 상대방문에 넣는 ‘장치기’는 오늘날 하키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였다. 장치기는 아니라도 어렸을 적 짚공을 차며 신나게 뛰어놀던 기억은 50~60대 이상의 남자라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를 것이며 새끼줄을 그물처럼 늘여놓고 배구하던 생각도 쉽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 마을 친구들 여럿이서 이웃 마을로 마실갔다(놀러갔다가) 돌아오는 늦은 겨울밤 짚단을 몇 개씩 훔쳐다가 바람 없는 언덕 밑에 모닥불 피워놓고 삥 둘러서서 불을 쬐며 왁자지껄 웃고 떠들던 추억은 또 어떤가. 정월대보름에는 쥐불을 놓는데 손쉬운 짚단에 불을 붙여가지고 돌아다녔는가 하면 여관도 여인숙도 없고, 데이트 할 장소도 돈도 없던 시절 청춘남녀가 염문을 뿌리는 장소로 짚더미가 이용되기도 하는 등 실로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여 짚의 이용은 곧 농촌 생활이요, 농촌 생활은 곧 짚의 문화였던 것이다. 이렇게 짚이 우리 삶과 밀접했기에 짚과 관련된 속담도 많은데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들어보면,

○ 짚불도 쬐다 물러나면 서운하다.[하찮은 일도 하다 그치면 서운하다.]

 ○ 짚신도 제날이 좋다.[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린다.]

 ○ 짚신도 짝이 있다.[못난 사람도 짝을 만나 결혼할 수 있다.]

 ○ 짚신을 뒤집어 싣는다.[너무 가난하다.]

 ○ 짚둥우리 태우다(삼태기 태우다)[나쁜 지방 수령을 내쫓다.]

 ○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궁지에 몰리면 아주 작은 힘에라도 기대려한다.]

 ○ 짚불 사그라지듯(꺼지듯) 한다.[운명(殞命)을 조용히 하다.]

 ○ 짚불 꺼지듯 하다.[권력이나 부(富)가 갑자기 없어지다.]

※실은 곳: 1995년 발행 대보문화 제 5집 ,2006년 발행 향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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