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33
진나라 장양왕의 협박장을 받은 위왕은 크게 걱정을 하였다. 이에 신릉군은 "진은 육국을 송두리째 말아먹을 생각으로 우선 조를 정벌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를 정벌하려는 각개격파의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옵니다. 진은 예의도, 신의도 없는 오랑캐 족속들이온데, 우리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 어찌 생명인들 유지할 수 있으오리까! 하오니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조를 비롯하여 한, 연 등, 모든 국가들과 힘을 합하여 진에 대항해야만 하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위왕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나하나의 힘은 약할지 모르오나 여섯 나라가 힘을 합하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미 군사 동맹까지 맺었는데, 그것을 배신한다면 국가간의 신의를 어떻게 유지해 나갈 수 있겠사옵니까? 조나라를 돕는데 지금, 작은 손실이 있더라도 내일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조나라와의 군사 동맹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을 해도 될 일, 당장 오늘 멸망을 자초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위왕은 끝내 조나라와의 군사 동맹을 배신할 결심이었다.
열국지 34
그러자 후생 노인이 만류하며 다시 말한다.
"장수가 전장에 나가 있을 때에는 사정 여하에 따라서는 왕명에 복종하지 않아도 무방한 경우가 있사옵니다. 따라서 공자께서 진비장군에게 병부를 내보이셔도 진비장군이 공자에게 군사를 넘겨주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옵니다. 사태가 그렇게 되면 부득이 진비장군의 목을 칠 수 밖에 없사오니 그런 때를 대비하여 주해(朱亥)를 꼭 데리고 가시옵소서."
"그 사람이 나를 따라가 주겠습니까?" "이런 경우라면 공자께서 직접 찾아가 사정을 말씀하시면 반드시 따라 나설 것이옵니다."
신릉군은 후생노인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부랴부랴 푸줏간으로 주해를 찾아갔다. 주해는 마침 푸줏간에 있었다. 그러나 주해는 신릉군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전히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셨소?"하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신릉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찾아오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주해는 신릉군의 설명을 묵묵히 듣더니,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던지고 옷을 갈아입으며 "그런 일로 오셨다면 같이 가십시다. 지금 곧 떠납시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의를 위해서는 주저함이 없는 주해였던 것이었다.
주해와 함께 길을 떠나려는데 후생노인이 전송 차 따라 나선다. "빨리 가야하니, 선생께서는 그만 돌아가십시오." 후생노인에게 작별을 고하는 신릉군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생노인이 그 눈물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 "공자께서는 왜 눈물을 흘리십니까?"
"그건 두 가지 이유로 눈물이 납니다." "그 두 가지 이유란 무엇인지요?" "첫째는 대왕의 뜻을 거역하는 불충때문이고, 둘째는 국가에 공이 많은 진비장군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후생 노인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실로 합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충성에도 대충이 있고, 소충이 있는 법이옵니다. 대충을 위한 소충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후일 대왕께서 공자의 높으신 뜻을 이해해 주실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오니, 안심하고 장도에 오르시옵소서."
그리고 10리 까지 따라 오다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한다. "소생도 공자를 따라가고 싶사오나 너무 늙어서 아무 쓸모가 없겠기에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공자를 따르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사와 공자께서 진비장군의 목을 치고 군사를 넘겨받으셨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저는 공자의 성공을 비는 마음에서 그날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후생 노인은 그 후, 자기가 약속한 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하였다.)
신릉군은 그길로 곧장 진비장군의 주둔지로 달려가 병부를 내보이며 군대를 물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후생노인의 예측대로 진비장군은 군대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 국경을 수비하는 것은 대왕께서 저에게 부과하신 거룩한 책무요. 그런데 공자께서는 조서(詔書)도 한 장 없이, 병부만 가지고 오셔서 무턱대고 군사를 내 달라고 하시니, 제가 그 말씀만 믿고 어떻게 군대를 내어 드리겠습니까?" 말인즉 옳은 말이었다.
열국지 35
그때였다. 주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품 안에 숨겨왔던 40근짜리 철퇴(鐵槌)를 꺼내 진비장군을 일격에 쳐 죽여 버렸다. 신릉군은 진비장군을 처치한 뒤, 10만 군사의 사령관으로 취임하자 모든 군사에게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내렸다.
"너희들 중에 부자가 같이 나온 경우, 아비는 집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같이 나온 사람도 형은 돌아가고 아우는 남으라. 그리고 자신이 외아들인 사람도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모시도록 하라."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10만 군사가 8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남은 8만의 군사들은 새로 지휘관에 오른 덕장 신릉군의 자애로운 조치에 감동되어 사기가 크게 오르게 되었다.
그 무렵 진군은 조도(趙都)인 한단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성안으로 화살과 돌 등으로 우박이 쏟아지듯, 공격을 퍼부어대니 한단성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신릉군이 진군의 후방을 전격적으로 기습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후방의 대비가 소홀했던 진군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많은 군사를 잃고 패퇴하고 말았다. 신릉군은 평원군과의 약속대로 8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진군을 괴멸시키고 승전보를 올리게 되었다.
조왕은 신릉군과 그의 군사들을 성안으로 정중히 맞아들이며 말했다. "공자의 도움이 없으셨던들 우리는 지금쯤 진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평원군도 신릉군의 손을 마주잡고 눈물로 감사한다.
진군이 격퇴되고 난 후, 신릉군은 데리고 온 군사들을 고국인 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신릉군은 그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왕명을 사칭하고 대장군 진비를 살해하고 군사를 무단으로 조나라 지원군으로 몰아 왔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고국에 돌아갈 형편이 못되었다.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 조왕은 신릉군에게 5개 성시(城市)의 영주(領主)로 봉하여 생활을 보장해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릉군을 따라온 식객 하나가 이렇게 간한다.
"무릇, 모든 일에는 잊어야 할 일과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남에게 베푼 덕은 하루 속히 잊어버리셔야 할 일이옵고, 대왕의 뜻을 거역하여 진비장군을 살해하고 군사를 빼앗아 왔던 일은 결코 잊어 버리셔서는 안 될 일이 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잊어야 할 일에 대한 공로로 5개 성시에 영주가 되신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 되옵니다." 신릉군은 그 말에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영주로 취임할 것을 끝까지 사양하고 오로지 병학에만 몰두하여 몇 해가 지난 후, <위공자병법)>이라는 병서를 저술하였다.
한편, 진군이 신릉군의 참전으로 여지없이 참패하고 돌아가자, 차제에 신릉군을 없애 버릴 계획으로 위나라에 첩자를 대거 밀파하여 갖은 유언비어로 신릉군을 음해하기 시작하였다. <신릉군은 위왕을 내쫒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지금 조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위의 제후들과 긴밀이 내통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중이다.>
이에 위왕은 크게 노하여 < 역적 신릉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으면 삼족을 멸함과 동시에, 그를 잡아 오거나 죽여 없애는 자에게는 천만금을 주겠다>는 방문까지 써 붙였다. 신릉군은 조나라에서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괴로운 심사를 달랠 수가 없어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