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향토사랑

우리고장 인물 任廷立

구슬뫼 2012. 7. 2. 11:47

 

1.들어가기

 주산면 금암리에 임정립(任廷立)이라는 사람이 살았었다.

이 고장에서 태어나 일찍이 조선 숙종조에 무과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군기사판관(軍器寺判官)을 거쳐 군자감정(軍資監正)에 봉직하였으나 부모님이 연로하시자 직접 모시고자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동산에 집을 짓고 두문불출, 독서하며 멀리 출타하기를 삼가고 몸소 농사를 지어 부모를 극진히 섬기다가 부모가 돌아가시자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한편 숙종42-43, 두 해에 걸쳐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여서 그 가구 수가 무려 2,450호나 되므로 자신이 아끼는 땅을 팔아 조()629석을 마련하여 굶주리는 주민을 구휼하였다. 남포현감이 이를 충청감영에 보고하고 감사가 임금에게 장계를 올림으로서 조정에서 이를 가상하게 여겨 벼슬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여러 차례 품계를 올려주었고, 임금이 친히 불러 격려하였으며, 양삭료를 지급하고 수직(壽職)을 내리는 한편 증조(曾祖), (,) () 3대에 걸쳐 벼슬을 추증하는 등 끔찍이 예우하였다

 

 기근이 심하다고 조정이나 지방관청이 아닌 순수한 민간인이 사재를 털어 굶주리는 백성에게 대대적으로 나누어준 일은 아마도 그 예를 찾기 힘들 것이다. 훌륭하게 덕행을 일삼으며 고향을 지킨 그에게 하늘도 축복을 내렸는가, 믿기 어려울 만큼 보기 드물 게 96세의 천수를 누리다가 죽은 후에는 고향인 안터마을 뒤에 묻혀 그 묘소가 있다.

그 임정립이 과연 누구인가 알아보고자 한다.

                                                                                                                                                                             

2.임정립의 구휼사실을 전하는 문서

1)丁酉四月 日私賑戶口數及穀數並錄 成冊

1717(숙종43)에 만들어진 책자이며 남포현감이 작성하여 충청감영에 보고하고 충청감사가 장계하여 숙종에게 올린 자료로서 조정에서 이를 확인, 각 장마다 간인한 서류이다.

(후손의 말에 의하면 3부를 간인하여 조정에 1, 충청감영에 1, 보관하고 1부를 본인에게 주었다고 함)

 

(1)내용

임정립이 구휼한 가구의 호주 명, 가족 수, 지원 횟수 및 지원 량을 기록한 서류로 상당부분 훼손되어 없어졌다.

 

 

(2)구휼내용 집계

훼손이 심하나 남은 문서내용을 집계하면 다음과 같다.

1.431가구, 2.529, 지원 량 46618.3

 501/ 118호 등 노비가 가정을 이루어 사는 사람들이 전체 구휼가구의 43.3%를 차지하여 그들의 생활이 대개는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구휼가구 중 소가족 가구가 많고 대가족 가구는 적은 것으로 나타난다. 1인가구 739/ 2인가구 485/ 3인가구 108/ 4인가구 55/ 5인가구 20/ 6인가구 8/ 7인가구 5/ 8인가구 7/ 9인가구 3/ 10인가구 1/ 1,4312,529

 가구당 17회까지 지원하였고(1회 지원 20/ 2회 지원 671/ 3회 지원 182/ 4회 지원 312/ 5회 지원 115/ 6회 지원 57/ 7회 지원 73/1,431)

지원 량은 대개 1회에 가족 한사람 당 쌀 1두씩을 지원(1= 가족 수 × 1)하였다.

 

2)조사보고서

임정립의 구휼사실을 조사한 경위, 조사방법 등을 기록한 남포현감의 보고서로서 관련자들의 수결도 보이나 훼손이 심하여 확실한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1)내용

큰 글씨들

分給品○○方是

分給之行(?)如爲(?)是福於極稀貴之事○○○分賑(?)

人戶口行(?)○○(?)如開設成冊詳細修正桑(?)(?)

月十○○○○

 

작은 글씨들

藍浦縣監書目

近日00000000000 及上下民人數百餘人0000

與周境儒鄕諸人等以其公議所口字文則本縣出人任廷立0000

穀普賑貧民是如衆口一談而此意呈于備局人呈于營門題辭○○

各其面任等一一詳査爲乎矣自於冬十二月初十日同月二十七日今年正月初七

日同月十八日二月初七日同月二十一日三月初七日幷七巡分給0有矣人戶之全00

四百餘戶是遣分給穀數六百二十 石零是如乎當此大飢之歲此人之如是 ---

活之義實爲可嘉叱(?)分不喩今到題辭內有此從實査報之令是乎---

以前敢査報爲去乎 特賜 叅下事

康熙五十六年( 참고 : 1717 정유)四月初六日 行縣監 ○○

 

 (2)해역

문서의 훼손이 심하여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다음과 같다.

주변지역 유생과 더불어 향리의 많은 사람들의 말과 문자로 공의가 있었은즉 본현(남포현)에서 나온 임정립이 곡식을 내어 널리 빈민을 진휼했음이 여러 입에서 한 가지 말로 나옴으로 이 뜻을 비국인(備局人)에게 드리고 영문에 이 문제의 말씀을 드려 각기 면의 책임자 등에게 일일이 조사케 하였다. 지난 12월 초10일부터 동월 27일 금년 정월 초7일 동월 182월 초7일 동월 213월 초7일에 아울러 일곱 차례 순회 조사하였다. 분급한 인호가 온전히 있어 ○○400여 호에 이를 분급하여 보낸 곡식의 수량이 620석으로 계산한 나머지 이 같았습니다. 이때에 큰 흉년을 당한 해에 이 사람이 이같이 의로운 활동은 실로 가히 아름다운바라. ? ? 효유치 못하고 지금에 이른 것의 문제의 말이 안으로 있어 이를 쫓아 실사하여 보고하는 것이 이 같사옵니다. 이전을 조사하여 보고 합니다. 특별히 준 - - - - 아래와 같이 행하였습니다.

강희 56(1717 정유) 4월 초6일 현감 ○○ 행함

이덕영 역

 

3 문서 소장자: 임창빈(任昌彬: 임정립의 10대손)

소장자는 200922일 이 문서와 조사보고서, 교지 등의 영인본 즉,‘丁酉四月 日 私賑戶口數及穀數並錄(成冊)疏明’(이하 영인본이라 한다)을 만들었다.

영인본의 서문(소명)에는 조()천 여석을 마련하여 2,450가구를 구휼하였다고 되었고

영인본의 내용을 집계하면 46618.31,431가구 2,559명으로 되었으며

신도비에는 근천석이라 하였고

족보에는 629석이라고 하였다.

지원량을 영인본 서문(1,000여석)에는 흔히 쓰는 용어로 대략의 숫자로 쓴 것(영인본 만든 이의 말)이며 영인본 집계가 적은 것은 서류 보존 상태가 나빠 일부는 훼손되어 그렇고,

신도비에 근 천석이라 함은 천석에 가까운이라는 뜻이고

족보에 629석이라고 단위까지 쓴 것으로 보아 이게 정확한 것으로 짐작 할 수 있으며 구휼가구 수는 2,450가구라는 기록이 맞을 것이고 수혜인구는 정확히 알 수 없음.

 

4.승정원일기에 나타난 임정립

1).숙종 45(1719) 420일자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임정립의 구휼사실

. . . , 籃浦私賑人任廷立, 邊將除授事, . . . .

<任廷立邊將除授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 籃浦私賑人: 남포에서 私的으로 백성을 구휼한 사람

 ○邊將: 변방의 일정한 지역에서 국경 수비를 맡은 장수. 첨사(僉使, 3)-만호(萬戶, 4)-권관(權管, 9)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제수 받았는지 논의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로부터 3년 후인 경종 2(1722) 충청수군절도사로 제수 받았다고 하니 이때 충청수영의 첨사로 제수 받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2).영조 11(1735) 613일자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임정립

. . . . 任廷立爲同知 . . . .

<임정립을 동지중추부사로 임명>

 

5.임정립의 일생

1652(효종3)보령시 주산면에서 출생

1676(숙종2)과거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에 다시 군기사판관(軍器寺判官)에 제수(除授)되었다가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됨.

1695(숙종21)아버지 상을 당하여 시묘(侍墓)살이

17161717(숙종42∼43)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백성이 속출하자 땅을 팔아 629석을 마련, 2,450호 구휼

1719(숙종45)변장(邊將)에 제수(除授)하는 문제에 논의

1722(경종2)忠淸道 水軍節度使(충청도 수군절도사/신도비에는 수군절제사로 되어 있음)

1724(경종4)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1732(영조8)嘉善大夫行龍驤衛副護軍(가선대부행용양위부호군)

1742(영조18)資憲大夫行龍驤衛大護軍(자헌대부행용양위대호군)

1745(영조21)正憲大夫同知中樞府事(정헌대부동지중추부사)

1747(영조23)二月五日 享年 九十六歲.

 

6.족보에 나타나는 임정립의 기록

字君望號愼齋 孝宗壬辰生 肅宗丙辰武科 景宗癸卯進階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英宗壬子嘉義大夫行龍驤衛副護軍壬戌加階資憲大夫行龍驤衛大護軍乙丑正憲大夫行知中樞府使丁酉二月五日卒享年九十六墓在珠山面金岩理靑石橋後麓壬座原

公當丙申丁酉之飢荒以正租六百二十九石分賑飢民因忠淸監司狀啓邊將除授事承傳矣 因公之子以遠上言以其年老依所願授以加設同知三代追 贈英宗乙卯自兵曹奉 敎賜從二品兩朔料米三石三斗太二石六斗前後敎旨與文蹟藏干本孫家

配貞夫人延安車氏渭在女德鉻孫朝散大夫應洙曾孫林川林鉉外孫孝宗庚寅生 肅宗戊子十二月二十五日卒墓祔合封有神道碑銘吏曹叅議大司成趙重燁撰本宗郡守任良宰書本宗縣監任道鎬篆

 

 

7.임정립의 신도비

1).원문: 正憲大夫成均館同知事愼齋任公府君神道碑銘

通政大夫行吏曹參議原任成均館大司成侍講院司書楊洲趙重燁撰

通訓大夫行溫陽郡守洪州鎭管兵馬節制使族孫艮宰書

通政大夫行鎭海縣監金海鎭管兵馬節制都尉族孫道鎬篆

維保寧郡,南四十里,珠山面,靑石橋後麓,壬坐之原,卽正憲大夫行成均館同知事,任公之藏也,公沒後,一百六十六年,壬子春,公之後孫,瓊鎬,泳宰,相宰,抱行錄,謁余以碑銘,余知其不必誣先,乃按其狀而叙之,,諱 廷立,,君望,,愼齋,其先,豊川任氏,以高麗御史大夫,,,爲遠祖,,,子順,民部典書,,和齋,有諱,,政丞,,,安吉,入本朝,進士,歷一代,,永智,同中樞,,命新,僉中樞,又歷一代,,彭祖,靖陵參奉,,百齡,僉知中樞府事,寔爲公之高祖以上也,曾祖,,彦忠,龍蛇之變, 以武,薦拜秉節校尉, 贈司僕寺正,,,慶恒,掌隸院判決事, 贈工曹參議,,,時振, 贈漢城府左尹,刑曹參判,三世追 贈,皆公之貴也,, 贈貞夫人,牛峰李氏,僉知慶植女,以孝宗壬辰,生公,,天資英邁,氣宇魁偉,肅宗丙辰,登武科,除宣傳官,拜軍器寺判官,旋拜軍資監正,恪謹奉職,,歸鄕里,築室東山,杜門讀書,嘗思父母在,不遠遊之訓,事孰爲大,事親爲大之語,又深慕重峰趙先生,躬耕,養親之,大節永謝榮途,孝養父母,朝夕親膳,志養俱備,兄弟五人,,其長也,友愛尤篤,敎子以義方,夫婦相敬如賓,恩周而義洽也,族黨隣里,或有婚喪者,無不隨力救助,又有來學者,隨其才品而敎之,每佳辰令節,必具酒食,會朋友,討論經史,間以嘯詠,樂易如也,肅宗乙亥,丁內外憂,居廬三年,守制如禮,逐日哭墓,不以風雨而或廢,値 國恤,登高望哭, 列聖朝諱辰,必前期齋素,每語及君親,未嘗不,嗚咽感泣,皆忠孝所致也,逮至丙丁兩年,飢饉荐至,生靈流散,老者塡壑,生者餓莩,境內,炊烟已絶者,爲二千四百五十餘戶,,惻然有救恤之心,賣土貿租近千石,分賑飢民,本縣監,以此報告營門,道伯,啓聞 于朝, 景宗壬寅,除忠淸水軍節制使,以衰老,謝恩不赴,甲辰,陞嘉善階除同知中樞府事, 英宗乙卯,命戶曹, 賜兩朔科米及,大豆各幾石,丙辰,陞嘉義大夫,同中樞,壬戌加陞資憲大夫,,龍驤衛副護軍,乙丑,加陞正憲大夫,,成均館事,公有孝行兼壽職而加秩,此 聖主之殊恩異渥也,至丁卯二月初五日卒,享年九十六,遠近士友,莫不咨嗟曰,善人萎矣,挽誄致奠者,數十人,皆當世名宰也,且其肖孫, 爲之悲感而作故記列文蹟,確然遺傳,公之交遊,尤善,是可知矣,配貞夫人延安車氏,渭載女,庚寅生,戊子十二月二十五日卒,與公墓合祔,有四男,長以遠,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以瑩, 龍驤衛,副司直,以謙,忠武衛副司勇,以平,通德郞,折衝將軍,僉樞,四男,聖夏,聖遊,出后,聖弼,聖章,司直,系男,聖游,司勇,四男,聖岳,道東,訓練院判官,道昌,道發,通德,,聖說,曾玄以下,多不盡錄,嗚呼,公之立 朝事業, 居家著行, 猶多可述,,其文學, 足以爲需世之材而且以賑恤之功,荐蒙 兩朝之加秩,未能展布於世,豈以淸高之質,爵祿,不入於心,採薇西山,永矢不諼而然歟,抑亦孝養父母之心,出於 天性不能自己而然歟,,世遠無徵事遺逸於公德行,未能模象其萬一,是可慨也,乃系以銘. 銘曰,

於惟任公,挺出我東,間世之氣,英豪之鍾,有忠有孝,出處雍容,歷事 四聖,進退以時,經史自娛,孝友爲基,扶倫棟梁,生民柱石,實踐屢職,恪守繩尺,旣而歸鄕,築室而居,謝絶榮途,杜門讀書,竭力耕田,奉養于親,兩年歉荒, 饑饉荐臻,公其惻然,濟活普均,景宗甲辰,嘉善封勳,逮至 英宗,正二品除,終以天年,恬然而歸,碩果不食,種德之門,如木有根,若水有源,繼玆以往,於萬斯年,庸銘貞石,昭揭于阡.

檀紀四千二百八拾一年 戊子五月 日

 

2).해역:정헌대부성균관동지사신재임공부군신도비명

통정대부 행 이조참의 원임 성균관 대사성 시강원 사서 양주 조중엽(趙重燁)짓고

통훈대부 행 온양군수 홍주진관 병마절도사 족손 간재(艮宰) 쓰고()

통정대부 행 진해현감 김해진관 병마절제도위 족손 도호(道鎬) ()을 쓰다.

 유(발어사) 보령군 남쪽40리 주산면 청석다리 뒤 산줄기 임좌의 언덕은 즉 정헌대부 행 성균관 동지사 임공이 묻히신 곳이다.

공이 돌아가신 후 166년인 임자년(1912) 봄에 공의 후손 경호(瓊鎬)와 영재(泳宰) 상재(相宰)가 행록을 가지고 비명 때문에 나에게 찾아왔다. 나는 그것이 반드시 선대에 대하여 속이지 아니했음을 알기에 이에 그 글을 살펴보고 서술하노라.

 

 공의 휘는 정립(廷立)이요 자는 군망(君望)이요 호는 신재(愼齋)였다. 그 선대는 풍천임씨이니 고려 어사대부 휘 주()께서 먼 조상이 되시고 휘 자순(子順)을 낳으셨으니 민부전서 호 화재(和齋)요 휘 향()을 두셨으니 정승이요 휘 안길(安吉)을 낳으셨으니 본조에 들어와 진사요 한 대를 지내서 휘 영지(永智)는 동중추, 휘 명신(命新)은 첨중추요 또 한 대를 지내서 휘 팽조(彭祖)는 정릉(靖陵)참봉이요 휘 백령(百齡)은 첨지중추부사니 여기까지가 공의 고조 이상이 되신다. 증조 휘 언충(彦忠)은 용사지변(임진왜란)에 무()로써 병절교위에 천배 되어 사복사정에 증작되고 할아버지 휘 경항(慶恒)은 장예원 판결사로 공조참의에 증작되고 아버지 휘 시진(時振)은 한성 좌우 윤, 형조참판에 증작 되었으니 3세가 추증됨은 다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증 정부인 우봉이씨는 첨지 경식(慶植)의 딸이다.

효종 임신(1652)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영매(英邁:재능이 뛰어남)하고 기개와 도량이 크고 훌륭하여 숙종 병진(1676)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제수되고 군기사(軍器寺) 판관에 배수되었다가 돌이켜 군자감정에 배수되어 정성껏 삼가히 직무를 받들었다.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동산에 집을 짓고는 두문불출하고 독서를 했다. 일찍이 부모가 계시면 멀리 나가 있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섬기기를 온전하고 극진히 했음이요 어버이 섬기는 것을 극진하게 해야 함을 말했었다. 또 중봉 조선생(조헌)을 깊이 사모했으며 몸소 농사지어 어버이를 봉양함에 제절에 극진하였다. 영화로운 길을 사양하고 부모를 봉양하였으니 조석으로 친히 반찬을 맛보아 잡수시게 하였으며 뜻을 봉양함을 함께 하였다.(공자의 가르침은 "일찍이 부모가 계시면 멀리 나가 있지 않는다"/맹자는 섬김이 무엇이 큰 것이 되는가. 부모를 섬김이 큰 것이 된다.”하였고/趙憲의 몸소 밭을 갈아 부모를 봉양한 큰 절개를 흠모)

 형제 5인에서 공이 그 장자였다. 우애가 더욱 돈독했고 자식을 교훈하는 데는 의로운 방법으로 했으며 부부간에는 서로 존경하여 손님과 같이 하였으니 두루 은혜롭고, 의롭고, 화하게 했다. 일가들과 이웃에도 혹 혼인이나 상이 있으면 역량에 따라 도와주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또 와서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재품에 따라 가르쳤고 매양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좋은 가절에는 반드시 술과 먹을거리를 갖추어 벗들과 모여서 경사를 토론하고 사이로는 풍월을 읊고 하며 즐거움을 삼았다.

 숙종을해(1695)년 부모상을 당하여 3년을 여막에서 거하고 례와 같이 제도를 지켜서 날마다 묘에서 곡하였으며 풍우가 심해도 혹시라도 폐하지 안했다. 국휼(國恤: 국상)을 당해서는 높은 곳에 올라가 망곡하고 열성조의 휘일인 때에는 반드시 전날에 집을 깨끗이 하고 매양 군친에 대하여 말을 하고 미상불(아닌 게 아니라) 오열하여 느껴 우니 다 충효의 소치였다.

 병정(丙申(숙종 42, 1717)丁酉(숙종43, 1718) 양년에 이르러 기근이 거듭되어 생령들이 유리하여 흩어지니 죽은 자는 구렁을 메우고 살은 자도 배고파 굶어죽어서 경내에 불 때는 일이 끊어진 집이 2,450여 호나 되었다. 공이 측연하여 구휼지심으로 땅을 팔아 조곡과 바꾸어 근 천여 석을 만들어 나누어 기민을 진휼하니 본 고을 현감이 이것을 영문에 보고하고 도백이 계청함으로 조정에서 듣고 경종임인(1722)년 충청 수군절제사에 제수 했으나 공이 늙었음을 이유로 하여 사양하고 은혜에 나가지 안했다.

 갑진(1724) 가선(嘉善)의 계제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영종을묘(1735)에 호조에 명하여 양삭에 과미(科米) 및 대두를 각기 몇 석씩을 주게 하였다. 병진(1736)년 가의대부 동중추에 올랐었고 임술(1742)년 더하여 자헌대부 행 용양위 부호군에 오르고 을축(1745)년에 더하여 정헌대부 행 성균관 동지사에 올랐다. 공은 효행이 있어 겸하여 수직(壽職)에 품수가 더해졌으니 이는 성주(聖主=임금)에 남다른 은혜를 받은 바였다.

 정묘(1747)2월 초5일에 졸하시니 향년 96세이셨다. 원근 사우들이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이 말하기를 선인(善人)이 위락했다 하였다. 만장을 지어 올린 자가 수십 사람이었는데 모두가 당세에 명재상들이었다. 또 그 초손(肖孫)들이 비감해 하며 지어서 문적에 열거하여 기록하였던 고로 확연히 유전하니 공의 교유와 더욱이 선()했음을 이로써 가히 알 수 있다.

 배위 정부인 연안차씨는 위재(渭載)의 딸이다. 경인(1650)생이요 무자(1708)1225일 졸하니 공의 묘와 더불어 합부되었다.

아들 넷을 두었으니 장자 이원(以遠)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요 이영(以瑩)은 용양위 부사직이요 이겸(以謙)은 충무위 부사용이요 이평(以平)은 통덕랑이었다. 절충장군 첨추는 아들 넷을 두었으니 성하(聖夏), 성유(聖遊)는 출후하고 성필(聖弼), 聖章(성장)이다.

사직의 이은 아들은 성유(聖游)요 사용(司勇)은 아들 넷이니 성악(聖岳), 도동(道東)은 훈련원 판관이요 도창(道昌), 도발(道發)이며 통덕랑의 아들은 성렬(聖說)이다. 증손, 현손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 한다.

 

오호라! 공이 조정에 서서 하신일의 업적과 집에 거하며 행하신일이 나타난 것만도 오히려 가히 찬술하기가 많은데 하물며 그 학문은 족히 세상의 재목으로써 쓰이게 되었고 또 진휼의 공으로 양조(兩朝: 경종, 영조) 에 거듭 은혜를 입어 품계의 차례가 더해졌으나 능히 세상에 펼치지 안했으며 어찌 청고한 자질로 작록은 마음속에 들이지 않고 서산에 고사리 채취함은 길게 곧은 것만을 잊지 못하여 그러함인가? 또한 물러남이 부모에 대한 효양지심이 천성으로 나신 것이라 스스로 능히 그러지 못함인가? 탄식할 일이로다. 세월이 멀어 그 때 일을 징험할 수 없고 유일(遺逸)로서의 공에 덕행을 능히 그 만분의 일도 그려낼 수가 없으니 이것도 가히 개탄스러운 바다. 이에 이어서 새기노라.

 

명왈

오직 임공이 우리 동쪽에 빼어났음이여!

세간에 기상이요 영웅호걸로 정기가 함께 뭉쳤음이로다.

충심과 효심이 있고 나가서 사람을 만날 때는 화평하게 했다.

네 성주를 섬기며 때에 따라 나가고 물러났다.

경사(經史)를 스스로 즐기고 효도와 우애를 근본으로 삼았다.

윤상을 부지하는 동량이요 생민의 단단한 기둥이었다.

실로 여러 직위를 밟았고 성심껏 지키어 자와 먹줄 같이 했다.

이미 고향에 돌아와 집을 짓고 살며

영화로운 길을 사절하고 문을 닫고 독서했다.

힘을 다해 밭을 갈아 어버이를 받들어 봉양했다.

두해의 흉년으로 기근이 거듭될 때

공은 그것을 측은하게 생각하여 널리 고루 살아갈 수 있도록 구제했다.

경종갑진(1724)년에 가선에 봉훈 되었다.

영종 때 이르러서는 정 이품의 품계에 제수되었으나

마침내 천수를 다하여 고요히 돌아가니

큰 과일은 먹지 못함인가 덕을 심은 가문이로다.

나무 같으면 뿌리가 있고 물에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이

이같이 이어서 만년이나 가리

떳떳이 좋은 돌에 새겨서 묘도언덕에 밝게 계양한다.

해역: 이덕영(李悳寧)

 

8. 임정립의 가계도

 

                                ()

                                 

                                가규()

                                 

                               ()

                                 

                              ()

                                

                                천유(天裕)

                                

                              ()

                                

                             자순(子順)

                                 

                       --- ()  

                                

                     孝崑-안길(安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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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永信-영지(永智)

                                

                           명신(命新)

                                

                      世弘-세훈(世勳)   

                               

                           팽조(彭祖)

                               

                                         백령(百齡)-百期-百壽

                                      

                          언충(彦忠)

                               

                              慶完-경항(慶恒)---

                               

時曾-時說-時敏-時顯-時達-시진(時振)-時緝

                                

 廷贊-廷泰-廷望-廷尹-정립(廷立)

 

9. 임정립과 관련하여 구전하는 이야기

임정립이 세상을 떠난 지 300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하여 전하는 이야기들이 고향에 아직도 여러 가지 구전하고 있다.

 

첫째, 영조가 친히 불러 손을 잡으며 격려를 하였는데(손을 잡고 다녔다는 말도 있음) 임금님이 잡은 손이라 하여 고향에 돌아와서도 한 달 이상 그 손을 씻지 않고 명주수건으로 감싸고 다녔다고 한다.

둘째, 임금이 벼슬을 내렸으나 나이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니 큰아들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셋째, 옛날에는 습의면(習衣, 주산면<서부지역>의 옛 이름)에 오는 외지인들은 훌륭한 어른이 계신 고장이라면서 머리를 조아렸다고 하며

넷째, 임정립이 죽은 후 그의 묘소에서 200-300m 떨어진 입구에 간재장터에서 미산면 대농리로 가는 큰 길이 지나고 있는데 묘소가 있는 안굴 고랑에서 흐르는 작은 개울이 이 길을 가로지름으로 넓적한 청석으로 다리를 놓아 이용하고 있었다.(이를 속칭 청석다리라고 하며 마을이름도 이 다리로 해서 청석다리마을이 되었음) 이 길에 사람이 많이 왕래 하다 보니 말을 타고 지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마을사람들은 무엄하게 훌륭한 어른 앞에 함부로 말을 타고 다니면 곤란하다고 그 길을 약 200m정도 더 떨어지게 돌려냈고 자연히 청석다리도 옮겨 놓았다. 1930년대에는 원래 길과 묘소 사이에 철도가 시설되어 묘소에서 길이 보이지 않지만 새로 난 길을 계속 이용하고 있으며 원래 길은 농사용 작은 길로 남아 사용하고 작은 다리도 놓여 있다.

 

10.맺는 말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백성위에 군림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갖가지 비행을 저지른 탐관오리들이 적지 않았고 실제로 그로 인한 폐해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청사에 길이 빛나는 청백리도 많이 있었고,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충신이나 특별한 사랑으로 고단한 백성들을 어루만진 애민가, 그리고 뛰어난 예지로 나라를 구한 선각자도 많았다. 그런 선인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외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수 천 년 동안 우리나라가 역사를 유지하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 아닐까?

 이 글에서 소개한 임정립도 그런 훌륭한 선인들 중 한분이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부모가 연로하자 영화로운 길을 미련 없이 던지고 고향에 돌아와 직접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극진히 모신 이름난 효자였을 뿐 아니라 그는 타고난 인보정신으로 대대적인 이웃사랑을 실천하였으니 2년간에 걸쳐 흉년이 거듭되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스스럼없이 사재를 털어 무려 천석에 가까운 조()를 마련하여 2,450가구를 구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속담에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기근이 들었다고 순수한 민간인 신분으로 사재를 털어 대대적인 구휼을 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 아닌가? 임금이 이를 알고 불러 직접 벼슬을 내렸으나 나이 많음을 이유로 기꺼이 사양하였으니 다시 한 번 그 인품을 짐작케 한다. 임정립이야말로 백성에 대한 큰 사랑을 실천한 훌륭한 선인으로 만고에 추앙받아 마땅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그의 구휼을 전하는 승정원일기와 입증서류들과 함께 구휼내용을 비롯하여 효행, 형제간 우애, 부부상경, 자녀훈육, 이웃이나 일가친척들에 대한 상부상조, 후학들에 대한 교육, (文友)들과의 교류 등 모든 면에서 귀감이 되었다고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 대한 칭송이 고향인근에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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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丁酉四月 日 私賑戶口數及 穀數並錄(成冊)疏明(2009.2.2. 임창빈 영인),

승정원 일기,

정헌대부성균관동지사신재임공부군신도비명

풍천임씨족보

도움말슴 주신분: 임시재, 임용순, 임동식, 임창빈

 

실은 곳: 보령문화 제21집

 

  구휼자 명부는 108매 전하고 있으며 그중 3매만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