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분야/진단

가족계획사업의 득과 실

구슬뫼 2008. 10. 1. 15:34

가족계획사업의 득과 실

                              

1. 가족계획사업을 추진한 시대적 배경

 1960-70년대는 너무 가난하여 먹고사는 게 급선무였다. 오죽하면 1961년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서 소위 혁명공약 중에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는 조항을 넣었을까?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는 많고 식량은 부족하여 국가적인 해결책이 절실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경제개발사업과 함께 녹색혁명(綠色革命)을 부르짖으며 대대적인 식량증산시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억제하는 것 또한 정부가 역점을 두어 추진한 시책의 하나였다. 그만큼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인구증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 오늘날에 평가한다면 가족계획사업이 바람직한 사업이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때에는 본 사업이 심각한 인구증가를 막기 위해 범정부적으로 추진하였던 중요한 시책이었던 것이다.

 이때 멜서스1)의 인구론(人口論), 즉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인구와 식량 사이의 불균형이 필연적으로…(중략)…그리하여 기근·빈곤·악덕이 발생하게 된다."라는 이론도 가족계획사업추진에 크게 작용하였다.


2. 가족계획이전의 자녀관  

 옛날에는 자손이 많이 태어나 번창하는 것을 다복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식은 팔자에 타고 난 대로 낳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일단 태어난 자식은 자기 밥그릇은 각자 타고나는 것이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또한 뿌리 깊은 남아선호(男兒選好)사상 때문에 아들을 낳아서 대를 잇도록 하려는 집착이 대단하여 딸을 연이어 낳으면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기를 낳겠다고 계속 출산(出産)을 하는 바람에 7공주(딸 7명)집이나 8공주 집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딸을 그만 낳고 남자 동생을 보라는 뜻(바램, 기원)에서 딸아이의 이름을 남자이름으로 짖거나 아예 ‘득남(得男)’이라고 짖기도 하고 나아가 ‘딸 고만’(딸을 그만 낳으라는 뜻, 고만은 그만의 사투리) 또는 말랭이(산의 고갯마루를 뜻하는 사투리로 딸의 말랭이에 섰다는 뜻)이라고 짖기도 하였다.

 그러나 차츰 시대가 변하여 의식이 깨어나고 자식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많이 낳아 잘 기르지 못하는 것보다 알맞게 낳아 훌륭하게 길러야 한다는 의식으로 바뀌어 1960년대에 들어서자 자녀관은 “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자”로 변하고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 “3살 터울로 3자녀를 두되 35세 이전에 낳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자녀생산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자녀의 성비율(性比率)은 “아들 둘에 딸 하나”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흔히들 말 하곤 하였다. 그래서 “모두들 바라는 대로 아들 둘에 딸 하나씩 낳으면 이 아이들은 커서 어른이 되면 남자 둘에 여자 하나씩 사는 2부1처(二夫一妻)가 되어야 하겠네?” 하면서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3. 산아제한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가족계획

  1971년에는 늘어나는 인구를 억제하기위해 가족계획요원(家族計劃要員)을 각 읍면사무소까지 배치하여 농어촌주민들에게 산아제한(産兒制限)의 필요성을 계몽하고 콘돔보급과 루푸시술, 그리고 여성의 불임수술(不姙手術), 남성의 정관수술(精管手術)을 적극 권장하였으며 산아제한에 대한 홍보영상물을 만들어 저녁마다 각 마을을 찾아가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상영하면서 인구증가의 억제와 산아제한의 필요성, 피임방법 등을 설명해주고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설득 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쉽게 호응하지 않았다. 자식을 많이 두면 고생이라는 데는 공감하였지만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男兒選好思想) 때문에 딸만 둔 집에서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낳겠다고 버티기 일쑤이고 아들을 하나 둔 집에서도 하나로는 부족하여 허뚱 댄다며 더 낳아야겠다고 피임을 회피하였다.


4. 가족계획으로 이름 변경

 1970년대 중반에는 시책 이름을 가족계획(家族計劃)으로 바꾸고 지속적으로 주민계도를 한 결과 차츰 가족계획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청소년들 사이에 젊은 부부들이 “두 자녀를 두면 문화인, 세 자녀를 두면 미개인, 넷 이상을 두면 원시인”이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하였다.

  1979년부터는 정부에서 가족계획사업을 더욱 강력하게 밀어부쳤다. 우선 자녀의 권장 숫자도 둘에서 하나로 바꾸면서 표어도 다음과 같이 바꾸었다.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를 사용하다가 한발 더 나아가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과 “무서운 핵폭발, 더 무서운 인구폭발” 등 절박한 구호를 사용하고 인구가 폭발하는 갖가지 그림의 포스터를 곳곳에 부쳐놓아 인구증가의 심각성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 또한 홍보와 권장 외에 다음과 같은 유인정책을 개발하여 시행하였다.


1)셋째아이 이하 가족수당 미지급

 공무원들에게는 매월 부양가족 1인당 얼마씩 일정액을 지급하는 가족수당(家族手當)이 있다. 그중 자녀수당(子女手當)은 18세 미만의 자녀에게 지급하는데 두 자녀까지만 지급하고 셋째아이 이하는 지급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둘까지만 낳으라는 것이었다.


2)셋째아이 이하는 소득공제 대상에서 제외

 봉급생활자는 매월 갑종근로소득세(甲種勤勞所得稅)를 납부하는데 부양가족(扶養家族)공제대상에 20세 미만의 자녀도 포함하였지만 셋째아이 이하는 공제대상(控除對象)에서 제외 시켰다.  역시 둘까지만 낳으라는 것이었다.


3)가족계획 시범마을에 대한 상사업비 지원

 마을의 가임여성(加姙女性)이 100% 불임수술을 완료한 마을을 가족계획시범(示範)마을로 정하여 상사업비(賞事業費)를 지원하며 실적이 높은 마을도 우수마을로 선정하여 표창하는 등 마을간 경쟁을 부추겼다.


4)가족계획우수기관 및 우수공무원 표창

 기관마다 부서마다 가족계획 목표를 정해놓고 일정기간 내에 이를 초과 달성한 기관이나 부서(部署), 담당공무원을 표창하면서 지역별(시군별, 읍면별), 기관별, 부서별 경쟁을 유도하였다.


5)정관수술자 예비군훈련 감면

 예비군훈련장에 출장하여 씨 없는 수박의 예를 들면서 정관수술을 하면 정력엔 아무런 지장이 없고 오히려 성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등 정관수술의 좋은 점과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홍보한 후 정관수술을 신청하는 사람은 보건소로 데려가 수술을 해주고는 일정기간 예비군훈련을 면제하여 주었다.


6)공무원 1인당 책임량부과

 가족계획 담당부서가 아닌 군청 및 읍면사무소와 사업소의  전 공무원을 대상으로 불임수술 2-3명씩 목표량을 주고는 책임지고 채우도록 강요하면서 매일 같이 직원회의를 열어 실적을 확인함으로서 공무원들이 본연의 업무 외에 틈틈이 출장하여 가족계획을 독려토록 하였다.

 

 

5. 가족계획사업추진실적(보령시)

연도별

여성(명)

남성(명)

자궁내

장치

임신

중절

난관

수술

피임약및 

기구보급

정관

수술

콘돔

보급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1,230

1,900

1,900

1,600

1,600

1,527

1,684

1,327

1,400

1,161

616

589

784

 

 

 

 

 

 

 

 

 

 

 

323

253

 

 

 

 

 

 

 

 

 

 

 

766

574

7,698

7,800

7,040

8,040

9,140

9,371

13,108

12,625

10,699

17,942

7,345

369

744

66

88

27

28

69

71

60

56

41

128

63

46

62

 

 

 

 

 

 

 

 

 

 

 

333

657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706

803

2,452

821

669

544

570

480

343

293

336

584

801

506

495

. . .

. . .

. . .

. . .

2

552

1,009

1,503

939

726

589

530

385

244

135

1,139

6,254

237

166

114

95

1,142

53

38

26

118

217

421

306

282

89

98

51

27

21

1,027

5,242

420

432

395

251

4,118

225

175

107

1991

1992

1993

1994

1995

215

239

221

182

309

 

86

74

86

56

91

6

7

13

145

12

12

15

42

37

53

142

163

159

394

56

   ※1986년-1994년까지는 보령군+대천시의 실적임. 자료는 보령시 통계연보와  보건소에서 제공한 자료를 참조함.


6. 가족계획사업추진과 관련한 이야기들

○ 모든 공무원에게 2-3명씩 불임수술 목표를 주고 실적을 올리도록 강요하자 그들은 일가친척이나 가까운 사람들 중 이미 자녀가 있는 가임여성(加姙女性)을 찾아다니며 불임수술(不姙手術)을 강요(사정)하는 웃지 못 할 촌극을 빚었다.

○공무원들 중 이미 자녀를 둘 이상 둔 사람들에게는 불임수술을 은근히 강요하였으므로 약이나 기구를 이용하여 피임을 하기는 하지만 수술은 하기 싫은데도 울며 겨자 먹기로 본인의 정관수술이나 부인의 불임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불임수술이 무서워 도저히 못하겠으나 은근한 강요에 못 이겨 아는 사람을 수술시켜놓고 수술자를 자기 처의 이름으로  거짓 보고하는 공무원도 있었다.

○정관수술을 하면 정력이 감퇴된다는 낭설 때문에 수술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부인과 사전협의 없이 수술을 받은 후에 부부가 대판으로 싸웠다는 사람, 실제로 수술 후에 정력이 감퇴되었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도 있었고(정신적인 문제였지만)

○딸만 3-5명씩 둔 공무원들이 부모님들의 바람대로 아들을 낳고자 불임수술을 기피하는데 직장상사는 매일같이 실적을 확인하는 직원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언제 수술을 할 것이냐? 고 자꾸 물어서 곤혹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대천읍사무소에 근무하던 김XX, 정XX 등이 대표적인 사례의 주인공들이었는데 그들은 끝내 수술을 받지 않고 김XX는 결국 아들을 낳아 길렀으나 정XX는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4명을 키웠다.

○또한 군청에 근무하던 박XX는 딸만 둘 두었는데 동료직원에게 농담 삼아 “눈물을 머금고 정관수술을 받았노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전해 듣고 웅천에 사시는 부모님이 허겁지겁 쫓아와 사실을 확인하는 해프닝을 빗기도 하였다.

※박XX는 수술을 받지 않았으나 그 후 또 딸을 낳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셋을 키웠다.  


7. 가족계획사업의 성과와 부작용

 앞의 표에서 보는바와 같이 1979년부터 1985년경까지 무리하게 추진한 실적이 나타나고 그 후 차츰 실적이 줄어들다가 1990년대 들어서면 뚜렷하게 줄었음을 볼 수 있다.  마침내 정부에서 1996년에 가족계획사업을 중단하였지만 그러는 동안 젊은이들의 의식구조(意識構造)가 차츰 “낳고 보자”에서 “적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고 뿌리 깊던 남아선호사상도 눈에 띄게 낮아졌을 뿐더러 오히려 “딸을 키운 부모는 비행기 타고 여행을 다니고 아들을 키운 부모는 양노원엘 간다.”느니 “딸만 둘 둔 집은 금메달, 아들 하나 딸 하나 둔 집은 은메달, 아들만 둘 둔 집은 동메달”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가족계획사업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게다가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고 부부맞벌이가 보편화되었으며 육아의 어려움, 교육비의 증가 등으로 인하여 여성의 출산기피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인구의 증가가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8. 출산장려로 바뀐 정책

   이제는 젊은 부부들이 대부분 아들, 딸 구분하지 않고 1-2명의 자녀만 두는가 하면 무자녀가정도 늘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결혼을 기피하는 독신녀가 늘고 있어 인구증가율이 빠르게 둔화되고 이에 따라 인구의 고령화(高齡化)가 너무 빨라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범정부차원의 출산장려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한 자녀 보다 둘, 둘 보다는 셋이 더 행복합니다.”

“하나의 촛불 보다는 여러 개의 촛불이 더 밝습니다.” 등  여러 가지 표어를 사용, 홍보하면서 ①각급 직장의 산모에게 주는 출산휴가(出産休暇)기간을 늘리고

②남편에게도 육아휴가(育兒休暇)를 주며

③탁아시설(託兒施設) 설치를 의무화 하여 아기를 가진 주부직원들의 불편을 덜어준다.

④6세이하의 자녀에 대한 소득공제액을 높이고

⑤지방자치단체에서는 관내 주민이 아기를 낳으면 출산수당을 지급하며

➅셋째아이부터는 출산수당의 액수를 높여 아이를 많이 낳도록 유도하고

➆농어촌이나 저소득층의 가정주부가 애기를 낳으면 출산도우미를 일정기간 파견하여 가사(家事)를 도와주는 등 아이를 낳는 가정에 갖가지 인센티브를 주며

➇아파트청약에서 아이를 셋 이상 둔 세대주에게 우선권을 주는 등

 사회 각계 각 분야에서 출산장려시책을 적극 펼치면서 출산율을 높여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막아보고자 안간힘을 써도 여성1인당 출산아(出産兒) 수가 OECD국가 중 가장 적은 나라가 되었다.


9. 맺는말

 1960-70년대는 가난을 벗기 위한 범국가적인 몸부림의 시대였다.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잘살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해서 한강의 기적도 이루었고 세계 속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여 오늘 날 이만큼 잘살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폭발하는 인구증가의 억제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라고 판단하여 국가정책으로 강력히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구증가의 둔화가 인구의 고령화로 그리고 생산성의 둔화로 이어져 심각한 국가적 문제로 대두될 줄이야 미처 짐작치 못했던 것, 결론적으로 가족계획사업은 앞을 길게 내다보지 못하고 국가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가 부메랑(?)이 된 실패한 정책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끝)      -관련사진은 본 블로그의 동영상란 가족계획포스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