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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베트남여행기

구슬뫼 2008. 2. 28. 20:29
 

캄보디아, 베트남여행기

(2008.2.19 - 2008.2.24)

    ►2.19 05:30 대천출발(관광버스) →08:40 인천공항도착 →10:35인천출발(베트남항공) →4:10

     베트남 탄손루트공항도착 →16:35탄손출발(베트남항공)→17:35 캄보디아 씨엠립공항도착

   ►2.20 08:00 앙코르톰 유적군 관람

   ►2.21 08:00 톤레삽 호수 수상촌(水上村) 관람 →13:00 바라이 호수, 웨스트메본 관광 →18:00 

   씨엠립출발(베트남항공) →20:00 하노이 노이바이공항 도착

   ►2.22 09:00 하롱베이섬 관광, 석회동굴 탐사, 수상인형극 관람

   ►2.23 06:40 흐엉사 관광 →22:30 호치민공항 도착

   ►2.24 00:45 호치민 출발(베트남항공)→06:45 인천공항도착 → 귀향(관광버스)


<2008.2.19 맑음>

○출발: 일행은 남자 5명, 여자 7명, 그리고 가이드 등 총 13명이었다.

 대한민국 민항기를 이용하지 않고 베트남 민항기를 이용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 민항기로 가면 베트남 - 캄보디아 간의 운항은 반드시 캄보디아 민항기를 이용해야 해야 하는데 그 비행기는 너무 낡아 위험하고, 베트남기를 이용할 경우 캄보디아 간 이동도 베트남기를 이용할 수 있어 그래도 덜 위험한 베트남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베트남기는 역시 좀 낡았고 좌석마다 설치한 TV스크린이 대부분 고장이 난 듯 내 좌석의 것은 아예 나오질 않는다. 출발하기 전 스튜디어스들이 안전장구 착용에 대한 시범을 보일 때도 판토마임 하듯, 말없이 몸동작만 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1. 잠자는 캄보디아

○탄손루트공항 → 씨엠립공항: 맨 먼저 도착한 호치민의 탄손루트 공항에서 2시간이나 기다리는 지루함 끝에 캄보디아행 작은 민항기에 올랐고 1시간을 날라 캄보디아 씨엠립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얼굴이 한국인과 비슷한 아가씨가 옆자리에 앉았기에 캄보디아인이냐고 물으니 베트남인이란다. 내가 한국인이라 하니 자기는 한국을 좋아 한다고 반색을 한다. 그녀가 보는 신문을 보니 모두 영문자인데 글자 위에 이상한 부호들이 있기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어냐고 물으니 베트남어란다. 글자는 알파벳이 아니냐고 하였더니 글자 위에 있는 부호들을 가리키며 무어라고 한다. 영어회화를 못하니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평소에 회화를 조금씩 배워 둘 걸 하는 아쉬움이 크다. 비행기 안엔 한국인 탑승객이 많은데 한국어 방송이 없는 것도 아쉬웠다.


○골디아나 호텔: 공항을 나와 평양식당이라는 곳에 가 상밥+냉면을 먹는데 한식을 먹은 후 냉면을 맛보는 정도로서 음식 맛은 입에 맞는다. 주인도 종업원도 모두 북한사람이라고 하며 한쪽에 무대를 마련하고 북한식 공연도 한다. 청순하게 차린 북한 아가씨의 ‘반갑습니다’ 노래에 이어 몇 명의 무용수들이 나와 춤을 추는데 일행들이 별로 볼 것 없다며 공연도중에 나와 숙소로 향했다. ‘골디아나 호텔’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하게 멋�으나 내부는 오래되고 청결관리가 엉망이라서 객실과 침구 등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나고 치약, 면도기 등 기본물품도 질이 떨어진다. TV에서 KBS월드, YTN, 아리랑TV가 나와서 반갑게 9시뉴스를 볼 수 있었다.


<2008.2.20 맑음>

○앙코르톰: 앙코르톰은 캄보디아 말로 커다란 도시라는 뜻, 한 변이 3km인 정사각형의 도시로서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고 안에는 1200년 경 자야바르만 7세가 세운 중앙의 바이욘 사원을 비롯하여 코끼리테라스, 피미안 나가스 사원, 바푸욘신전 등 많은 유적이 있는 곳이다. 톰의 남문 앞에 이르니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특히 한국관광객들이 유난히 많다. 30-40%는 되지 않을까? 남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100m정도의 다리 양쪽에는 각각 54개의 돌로 만든 신의 조각상들이 나란히 서 있다. 한쪽은 착한 신들, 또 한쪽은 악한 신들이라고 한다. 남문에는 4면에 부처의 얼굴을 새긴 불상(佛像)이 성루를 이루고 있다. 남문뿐이 아니라 앙코르에 있는 사원들은 수많은 탑(바이욘 사원만 54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탑들 모두 4면 불상인 게 특징이다. 우리나라에는 서산(瑞山)에 한 개의 4면 불상이 있어 귀하게 여기는데 . . .

 또한 이상한 것은 신전이라는 것이 불상, 신 등을 모시거나 사람들이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좁은 공간뿐인 여러 개의 탑과 회랑, 통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회랑 벽에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전쟁모습, 생활상 등이 벽화로 조각되어 있다.

 한편 이 사원들은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어 프랑스에서 그 기울기를 측정키 위해 설치하였다는 수평측정기가 있었고 커가는 나무들의 뿌리에 사원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성장 억제제를 주입한다고 한다. 다만 그중 따브롬 사원만은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이 자연의 파괴력이 어떻게 유적을 파괴하는지 연구하고자 그대로 방치한다고 한다.

 

 

○앙코르와트(앙코르는 왕성함, 와트는 사원을 뜻함):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곳은 한때 동남아를 지배했던 크메르족의 앙코르 왕조가 12세기 초에 건립한 사원이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그들의 신과 같아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왕들은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사원은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수리아바르만(Suryavarman) 2세가 브라만교 주신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해 지은 거대한 힌두교 사원으로 돌로 지었다. 앙코르에 있는 사원들 대부분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나 이 사원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세계가 있다고 보고 왕의 사후세계를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원은 1868년 프랑스 탐험가 헨리 모하트가 발견했는데 탑의 모양은 줄기가 점점 가늘어지는 연꽃 모양 또는 원뿔형으로 되어 있다. 주달관(周達觀)이라는 원나라 사신이 1295년 6월~1297년 8월 앙코르왕국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로 앙코르 왕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는 물론, 사람들의 일상생활 등 찬란한 문명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고 한다.


○프놈 바켕(Phnom Bakeng)사원: 앙코르 최초의 사원으로서 67m의 높은 언덕에 있는데  야소바르만 1세가 서기 889년 즉위한 뒤 자신의 도시를 롤루오스 북쪽에 세우면서 자신을 상징하는 사원으로 이 프놈 바켕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15-20분정도 걸어 올라가니 마지막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너무 가파러 두 손과 양발을 모두 사용하여 기어 올라가야 했다. 신전이 있는 곳은 사방팔방이 탁 트여 전망이 매우 좋다. 그래서 해가 질 무렵 여기에는 하루 2천 여 명의 관광객이 모여 일몰광경을 감상한다고 한다. 오르내리는 계단이 너무 급경사라서 자칫 사고의 위험이 있으므로 우리 일행들은 일몰을 보지 않고 그냥 내려오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꾸역꾸역 올라가고 있다.

 


<2008.2.21맑음>

○톤레삽 호수: 이 호수는 건기에는 서울의 5배, 우기에는 10배 크기라고 한다. 우기에 히말라야산의 빙산이 녹아내리면 해수면이 높아져 이 호수와 연결된 메콩강물이 바다로 흐르지 못하고 호수로 흘러들어 넓어지고 건기가 되면 해수면이 낮아져 이 호수의 물이 메콩강을 따라 빠져버리기 때문에 줄어든다고 한다.

 호수로 가는 길은 수로를 따라 난 도로를 한참 달린 후 배를 타고 긴 수로를 거쳐 호수의 중앙에 나가게 된다. 길옆이며 수로 가에는 수많은 수상가옥이 늘어섰는데 집이라고 하기 어려운 허름한 원두막같이 생긴데다, 너저분한 살림살이들, 신발도 신지 않은 헐벗은 아이들, 게다가 길이며 주변이 몽땅 누런 황토로 되어있어 자동차가 다닐 때마다 날리는 먼지로 집도, 풀도, 사람도, 모든 것이 누렇게 뒤집어썼고 심지어 흐르는 물까지도 심한 홍수와 같이 누런 흙탕물이다. 그런 물에서 빨래도 하고 그릇도 씻고 목욕도 하고 고기도 잡고 심지어 그곳에 또 똥오줌도 버리는 생활이라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관광객이 탄 배에는 7-10세 정도인 꼬마 둘이 타서 배에 오르는 관광객들에게 “머릿 쪼심 하세요.”라고 일일이 주의를 주고 닷 줄을 잡아주기도 하며 배가 잘 출발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는 재빨리 배에 올라 타 작은 심부름을 하는 등 보조를 한다. 또한 부둣가에는 수많은 꼬마들이 팔찌, 바나나 등을 관광객에게 팔러 다닌다. 또 너무 어려 그것도 팔지 못하는 꼬마들은 관광객들에게 손을 벌려 “완 딸라”하면서 구걸을 하러 다닌다. 호수위에도 조각배를 타고 다니며 관광객의 배가 서면 다가와 “완 딸라” 하면서 물건을 사라고 조르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우리 배가 달리는 도중 조각배 하나가 부딪힐 듯 다가오기에 “어- 이거 위험한데” 하는 순간 쿵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 깜짝 놀랐는데 어느 샌가 조각배에 있던 꼬마 둘이가 물건바구니를 든 채 우리 배에 올라 탄 게 아닌가? 참으로 기절초풍 할 노릇이다.

 호수중앙으로 나오니 바다로 착각할 만큼 넓다. 군데군데 수상가옥들이 촌락을 이루고 학교, 교회, 휴게소도 있다. 휴게소에 내리니 갖가지 과일, 술, 물고기 요리 등을 팔고 악어, 뱀, 물고기 등을 가두어 놓고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7-8세나 되었을까 하는 계집아이가 제 키보다 더 긴 비단구렁이를 꺼내어 몸에다 칭칭 감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구경시킨다.

 

○왓트마이 사원: 왓트마이란 새로운 사원이란 뜻이라고 하며 이곳은 캄보디아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말해주는 200여개의 ‘킬링필드’ 중 한곳이다. 이 나라는 19세기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954년 독립하여 시아누크가 이끄는 불교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했으나, 1970년에 논롤장군이 구테타로 집권하였고, 곧 캄보디아 공산주의단체인 ‘크메르 루즈’군과의 내전으로 모택동주의자인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군이 1975년 승리함으로서 "민주 캄프치아"라는 공산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이로부터 1979년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800만 인구 중 170만 명이 살해되는 비극이 전개되며 킬링필드라는 끔찍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폴포트는 이미 죽었고 당시의 악명 높던 "키우 삼판"등 각료, 군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범재판이 열리고 있다 한다. 참사의 현장에 세워진 왓트마이 사원에는 당시의 유골들을 모신 위령탑과 고문장면들을 사진 및 그림으로 전시해놓고 이념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 질 수 있는 것인지.....? 후세에 말없는 교훈을 던지고 있다.

 

○바라이 호수: 바라이란 말은 제방으로 둘러 싸여진 큰 저수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은 11세기 초에 인공으로 만들었는데 8km×2.2km 나 되는 큰 규모이며 중앙에 웨스트메본 이라는 인공 섬이 있고 여기에 11세기 후반 유다야디타바르만 2세(Udayadityavarman II)가 메본 사원을 지었으나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돌담으로 된 문과 약간의 흔적들만 볼 수 있다. 우리 일행들은 2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섬까지 갔는데 선착장에는 갖가지 과일과 토속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섰고 팔찌 등을 파는 꼬마들이 떼로 몰려다닌다. 섬에 건너가자 역시 그곳에도 팔찌 등을 파는 꼬마들이 많이 몰려든다.

 폐허가 된 사원의 흔적들을 구경코자 혼자 떨어져 돌아 다녔더니 17세, 고등학생이란 청소년이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안다면서 제 이름을 ‘믹싯츠’라고 밝히며 접근하기에 호의를 가지고 대화에 응해주었더니 사진이 있는 관광책자를 10달러에 사라는 것이었다. 5달러를 주겠다니 안 된다는 것, 흥정하다보니 또 다른 청소년 1명과 근처의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사전에 가이드의 설명에 호의를 베풀면 아이들이 떼로 몰려들고, 난처한 입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 일행들이 있던 곳을 보니 벌써 돌아가려고 배에 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떨치고 일행들과 합류하여 섬을 나와 버렸다.


2. 격동의 베트남

○씨엠립공항→하노이 노이바이공항/ 낙시믹스 호텔: 관광을 마친 후 2시간을 비행기로 날라 하노이의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하였고 대기한 관광버스로 호텔을 향해 달렸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분위기부터 달랐다. 넓은 도로망과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행렬, 세련된 건물들, 활기찬 사람들, 무엇인가 생동감이 느껴진다. 시내를 달리려니 LG와 대우를 선전하는 간판이 보이고 한글로 ‘석우종합건설’이라고 쓴 네온간판도 보인다. 흐뭇한 심정으로 가다보니 높다란 다리를 건너는데 가로등 기둥마다 LG홍보 판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가이드의 설명에 이곳은 홍강(메콩강)을 건너는 ‘홍강다리’인데 LG에서 가로등을 희사하면서 단독으로 홍보 판을 걸게 되었고 공항에서 하노이시내로 진입하는 모든 차량은 이 다리를 거쳐야 함으로 국제적으로 대단한 홍보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 게다가 이 다리를 흔히 ‘LG다리’라고도 부른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얼마나 달렸을까? 우리가 묵을 ‘낙시믹스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크고 매우 깨끗하다. 그러나 TV에서 한국방송은 없고 아리랑TV는 나왔으나 영어로 말해 알아들을 수 없어 섭섭했다.

 

<2008.2.22맑음>

○하롱베이: 베트남 북부의 아름다운 해변, 원래는 한자(漢字)로 하룡만(下龍灣)인데 이를 베트남식 말로 하롱베이라고 한 것,  이 나라도 원래는 한자문화권이었는데 프랑스의 100년 지배 때에 영자문화권으로 바뀐 가슴 아픈 과거가 있는 것이다.

 하롱베이에는 3천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는데 여기에도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싸우다가 여의주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것이 수많은 섬으로 변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보면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여의주를 입으로 뿜어 떨어지면서 섬이 되었다고 하니 전설이 여러 가지로 전하는 것 같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니 기기묘묘한 섬들과 잔잔한 물결이 어울려 여러 폭의 아름다운 그림들이 펼쳐져 있는 듯 한 착각에 빠진다. 일행들은 바다가운데 있는 생선 집에서 ‘다금바리’라는 생선을 사서 회를 쳐 술과 함께 먹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다에 갈매기가 없다는 것, 이유는 이곳은 모두 석회암으로 되어있어 산호는 있으나 해초류가 없다는 것 그래서 작은 고기들이 별로 없고 따라서 그 먹이 사슬인 갈매기도 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흠이랄 수 있겠다.

 

○띠똡섬: 하롱베이에는 띠똡섬이 있는데 420여개의 계단을 오르면 하룡만 전체를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그림같이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 정말 환상적인 경치가 아닌가? 이 섬은 베트남에 큰 도움을 준 러시아의 티톱이라는 사람이 호치민에게 도움을 준 댓 가로 섬 한 개를 달라고 했지만 내 개인의 땅이 아닌 국민들의 땅이기 때문에 줄 수는 없고 그 대신 당신의 이름을 새겨 주겠다며 작은 해변이 있는 이 섬에 그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움으로서 띠똡섬이 되었다는 것.

 

○석회암동굴: 하롱베이에는 수많은 석회암동굴이 있다고 한다. 그 중 우리가 본 곳은 천궁동굴이다. 하늘 문, 용형석, 용좌, 폭포, 선녀 목욕탕 등의 이름을 붙인 곳들이 나름대로 자태를 자랑하지만 전쟁 통에 동굴 한쪽이 구멍 뚫려 하늘이 보이고 그곳을 통해 공기가 소통됨으로서 동굴내부에 습기가 말라 뽀송뽀송하다. 종유석이나 석순이 더 이상자라지 못하고 작은 동식물도 서식하지 않는 그야말로 죽은 동굴이다. 그렇다면 뚫린 구멍을 막으면 어떨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이 섬은 미국과의 전쟁 당시에 베트공들이 숨어 있었으나 이 지역을 공격하던  미국의 한 장군이 상부의 폭격명령을 받고도 동굴이 무너짐을 아깝게 여겨 폭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수상인형극/ 하롱프라자: 저녁에는 수상 인형극을 관람하였는데 베트남의 농경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는 하지만 베트남 말로 공연함으로 알아들을 수 없고 내용 또한 어린 학생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것이라 별 흥미가 없어 일행들은 도중에 나와 ‘하롱프라자 호텔’이라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어제보다 더 깨끗하고 좋았으나 역시 TV는 영어방송인 아리랑 TV 뿐, 한국방송이 나오지 않아 볼 수가 없다.


<2008.2.23맑음>

○흐엉사: 흐엉틱(Huong Tich)산 석회암 절벽에 세워진 수많은 탑과 사원으로 많은 불교 신자들이 음력 2-3월에 소원(영혼정화, 질병치유, 득남)을 비는 성소로 순례행사를 가지는 곳이라는데 특히 동굴사원 내 천연석회암을 그대로 이용, 조각한 관세음보살상은 종교적, 미술적가치가 매우 크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관광객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아 찾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데 특별히 이번 투어에 편입하였다는 가이드의 자랑 섞인 설명이다.

 아침을 먹고 06:40분에 호텔을 출발해 4시간정도를 달린 다음 다시 철판으로 만든 조각배로 물길을 따라 1시간 여, 또 걸어서 30분정도를 올라가는 흐엉사 가는 길은 멀고멀었다.    속담에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하였던가? 이곳 사람들은 설을 보내고 대보름을 전후로 부처님께 소원을 비는 풍습이 특히 많다는데 어제가 대보름이고 오늘은 마침 토요일이라 소원을 빌고자 이곳 ‘흐엉사’ 가는 길은 그야말로 초만원이다. 수로를 따라 올라가는 조각배 수 백 척이 마치 자라새끼들이 일제히 물위로 떠 오른 듯 수도 없고 그 조각배마다 적게는 4-5명, 많게는 20여 명씩 타고 가는 것이었다. 특히 그들 중 상당수가 베트남 특유의 고깔모자를 쓰고 있어 사극에서 보는 왜군과 흡사함을 느껴 우리 일행들은 한산도해전의 왜군과도 같다고 웃으며 농담 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선착장은 이미 정박한 조각배 수 백 척이 넓은 호수에 가득하고 물가와 산을 오르는 계곡 길은 수천명의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길가에는 갖가지 음식과 과일 등을 파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특이한 광경은 불에 그슬린 소, 노루, 개, 고양이 고기들을 통째로 걸어 놓고 한쪽씩 떼어 파는 광경이 좀 역겹게 느껴졌다. 케이블카 타는 입구에 가서 점심을 먹고자 늘어선 식당 중 한곳으로 들어갔다. 이곳 역시 주방에 생고기들을 통째로 늘어놓고 조금씩 떼어 요리를 하고 있고 손님들은 그 옆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다. 우리일행도 자리를 정해 앉아 고기요리와 볶음밥이 나와 먹는데 현지인들에게는 매우 고급스런 요리라지만 일행들은 시각적으로 역겹고 미각적으로 느끼하여 잘 먹지를 못한다. 그렇게 점심을 때운 일행이 케이블카를 타려니 이게 또한 전쟁이다. 1천명도 넘을 것 같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서로 먼저타려고 아우성이다. 밀고 밀리면서 간신히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니 그곳에서도 30-40분은 걸어 올라가야 흐엉사란다. 이미 올라오는데 시간을 많이 허비한 우리는 아깝지만 흐엉사 구경을 포기해야만 하는 아쉬움을 안고 돌아서 내려오고 말았다. 평소에는 하루에 200명정도밖에 찾지 않는다는데 그야말로 가든날이 장날이었다.

 


<2008.2.24맑음>

○귀국: 호치민공항에서 베트남항공 편으로 00:45분 출발하여 기내에서 잠을 자면서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06:45(한국시간)분, 대기한 버스에 올라 돌아오는 도중에 아침을 사먹고 집에 도착하니 10시, 5박 6일의 여행은 이렇게 해서 끝을 맺었다..


3. 여행을 마치고

○캄보디아는 옛날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쌀을 원조한 나라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옛날에는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였다는 것,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본 것은 우리의 1950년대 내지는 1960년대의 생활수준이라고 할까? “완 달라”를 외치며 물건을 팔거나 구걸을 하는 헐벗은 아이들, 초췌한 어른들, 허름한 원두막 같은 민가들, 그 속에 꾀죄죄한 살림살이들, 활기라고는 찾기 힘든 사회 분위기 . . . 왜? 우리보다 잘 살았다는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나? 넓고 비옥한 농경지, 1년에 2모작은 물론 3-4모작도 가능한 기후조건, 하늘을 찌를 듯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들, 어족자원, 지하자원 . . . 노력만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을 텐 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 가난한 나라가 되었나?

 오랜 내전과 지식인 학살, 정치인들의 실정이 계속되다보니 국토는 초토화 되고 국민들은 도탄에 빠진 게 아닌가? 저 불쌍한 백성들이 지도자를 잘못만난 것 말고는 무슨 잘못이 있어 저렇게 헐벗고 굶주려야 하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문맹자가 주를 이루는 국민들, 학교보다는 먹고 살기위해 거리로 나가는 아이들,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이 나라가 잘 살 수 있을까?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국민들을 일깨우고 잠재력을 끄집어내어 나라를 일으킬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야 할 텐데 . . .

 이번에 같이 여행한 일행 한 분은 헌 옷가지를 한보따리 가지고 가서 여행길에 시람들에게 한 점씩 나누어 주는 좋은 일을 하였다. 캄보디아에 여행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 싶다. 여행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여행의 기쁨은 더욱 커질 수 있을 테니까 . . . 

 


○베트남은 우리나라의 1970년대 초반 정도가 아닐까 싶다. 전국이 새마을운동의 열기 속에 가난을 벗고 잘살아보자고 발버둥 치던 그때와 흡사함을 느낀 것은 나 혼자 만의 생각일까?

실제로 이 나라에서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발전모델로 삼는다고 한다. 도로에 넘쳐나는 오토바이들, 함께 달리는 자동차들, 그들이 울려대는 경적소리, 뿜어내는 매연, 휘날리는 먼지,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거리는 온통 시끌법적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다. 무질서한 광경이지만 무엇인가 생동감이 있는 발전과정의 격동이 느껴진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떠오르는 아시아의 용 두 마리가 있는데 바로 중국과 베트남이라고 한단다.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느낌도 든다. 외모부터 피부가 좀 깨끗한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로 비슷하다. 도로변에 지은 주택들은 획일적인 모양들이긴 하지만 정면을 아름답게 치장을 하였는데 옆면과 뒷면은 페인트칠도 하지 않았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내부 장식은 거의 하지 않고 방안 벽은 페인트만 칠한다고 하니 우리나라사람들이 외형을 중시하여 집을 분수에 맞지 않게 크게 짓고 으리으리하게 장식하는 성향과 닮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럴까? 그들은 유난히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인을 닮으려고 한다는 것, 거리를 달리는 한국산 자동차, 심지어 한글로 쓴 상호를 지우지 않고 다니는 중고차, 곳곳에 있는 한국산 휴대폰가게 . . .한국은 확실히 이 나라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것 같다. 

 


 ●베트남에는 ‘라이따이한’이 있다. 월남전에 참여 하였던 한국군들이 남기고 간 씨앗들이 이제는 30대 후반이 되었는데 그들의 어려움이 말이 아니란다. 전쟁 직후에는 베트남인들의 복수의 대상이 되어 무수히 죽어갔고 그를 피해 애들을 데리고 피신한 엄마들은 숨어살며 그들을 키웠으나 성인이 되었어도 국적이 없고 따라서 나라의 혜택도 전혀 받지 못하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자신의 신분을 함부로 밝히기를 꺼려하여 라이따이한의 모임에 나오는 숫자도 150여명에 불과 하다고 한다. 그들은 엄마로부터 들은 “아버지가 찾으러 온다는 말”을 희망으로 삼고 아버지가 남기고 간 사진과 주소를 적은 종이를 보물처럼 간직하며 산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인가?

 한인(韓人)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그들을 만나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며 어떤 한인은 현지에서 기업을 운영하면서 따이한만을 고용하는 훌륭한 분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작은 봉사활동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정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다. ‘이산가족 찾기 사업’ 등을 주선하여 그들의 혈육을 찾아주고 나아가 본인이 원한다면 우리나라의 공장 등에 취업시켜 여생을 고국의 품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는 기업들이 많으니 기왕이면 우리의 피가 섞인 ‘라이따이한’을 쓰면 일거양득이 아닐까?


 ●베트남여인과 농촌총각의 결혼에도 문제점이 많다고 한다. 아가씨들은 총각이 선택하는 대로 따라가는 결혼이고 대개는 20년 정도 연상인 신랑, 열악한 가정환경, 문화는커녕 말도 안 통하는 생활에서 다행히 좋은 가족을 만나면 그런대로 어려움을 견뎌나가겠지만 그렇지 못해 파탄이 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런 부작용을 최소화 할 대책은 없는가?

싱가폴의 경우 필립핀이나 타이랜드 등의 여인을 가정부로 채용하면서 정부주관으로 일정기준에 의한 모집과 면접에 의한 선발을 한 후 가정부와 그를 채용할 고용주를 함께 교육시킨 다음 가정부의 인권을 보장시켜 근무를 하도록 함으로서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외국인 여성과 농촌총각 결혼시키기 사업’도 싱가폴의 가정부 채용과 비슷한 정부차원의 대책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일찍이 프랑스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한 그는 베트남을 프랑스로부터 독립시켰고 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으나 아깝게도 월남전이 끝나기 전에 죽었다. 그 후 전쟁은 끝났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공산주의화 한 베트남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답보상태로 지지부진하다가 뒤늦게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개방정책을 펼침으로서 이제 개발의 열기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다.

 ‘호치민’이 일찍이 사회주의자가 되어 베트남의 방향을 그쪽으로 틀지 않고 자본주의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그래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후 미국과의 전쟁도 없었다면 베트남의 오늘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제 와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것, 그것도 베트남의 국운으로 돌리는 수밖에 . . . 이제 뒤늦게라도 개방정책으로 발전의 고동이 힘차게 울리고 있으니 머지않아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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