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이야기/살아가는 이야기

되돌아 본 60년

구슬뫼 2007. 7. 8. 08:14



 

소년시절


1. 1946년 4월 6일생(음 3월5일)

 나는 충남 보령군 주산면 주야리 158번지에서 우체국(郵遞局)에 근무하시던 임정빈(任貞彬)씨와 나인례(羅仁禮)여사의 7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후 2년 만에 동생이 태어남으로써 나는 젖배를 골았다고 어른들은 곧잘 말씀하셨다. 우유 등 이유식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동생에게 젖을 양보한 나는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그 시절에는 어린아이들이 모두 한차례씩 홍역(紅疫)을 치러야 할 때였다. 의학이 발달치 못하고 시골엔 의료시설이 귀하여 홍역을 앓다가 죽는 아기들이 부지기 수였다. 오죽하면 아기가 태어나도 출생신고(出生申告)를 하지 않고 있다가 홍역을 치른 후 죽지 않으면 호적(戶籍)에 올리는 일까지 있을 정도로 홍역은 아이들에게 무서운 병이었고 그에 희생되는 아기가 많았던 시절이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그 무서운 홍역에 걸렸다고 한다. 그것은 폐렴(肺炎)으로 돌았고 너무 심하게 앓는 바람에 어른들은 내가 죽을 줄 알았다고 한다. 내가 열 살 때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생전에 나를 가리켜 “돈으로 뭉쳐서 살린 아이”라는 말씀을 곧잘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려서 그렇게 심하게 앓아서인지, 젖배를 골아서인지 나는 몸이 허약한 편이었다.


2. 학생 시절

 나의 초등학교 때 성적은 한마디로 기복이 심했다. 여덟 살 되 든 해에 입학한 주산초등학교(당시 珠山國民學校)에서 1학년과 2학년 때에는 공부를 잘해 우등상을 탐으로써 주위의 큰 기대를 받으며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으나 3학년 때에는 담임선생님과 정이 들지 않아서 사기가 떨어지고 성적이 뚝 떨어져 주위사람들을 실망시켰다. 특히 부모님의 낙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4학년과 5학년 때에 조금씩 만회하긴 하였으나 6학년에 가서야 본래의 성적을 되찾을 수 있었으니 선친께서는 6학년 성적표와 우등상을 받아 보신 후에야 “이제 옛 성적을 찾았구나” 하시면서 마음을 놓으셨다.

 주산중학교(珠山中學校)에 입학한 나는 부모님의 기대 속에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초등학교 때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하였다. 그래도 우등상권내에는 간신히 들 만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학급 대표로 학생대의원회(學生代議員會)활동, 교내 각종 토론회(討論會) 참여 등 특별활동을 열심히 하고 특히 교내 웅변대회(雄辯大會)에 나가 세 차례 우승하는 등 여러 방면에 두각을 나타내며 적극적인 학생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어찌 짐작이나 하였으랴? 내 일생 최대의 시련, 아니 우리 집 최대의 시련이 찾아왔으니 온 가족의 운명이 한꺼번에 바뀌어 버리는 불행이 닥쳐온 것이었다. 내가 열여섯 살 되 든 해 봄, 그러니까 중2에서 중3으로 오르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평소에 아무런 이상 없이 직장에 잘 나가시든 선친께서 뇌일혈(腦溢血)로 갑자기 쓰러져 한마디 유언도 못 하신 채 3시간 여 만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야말로 청천 날벼락,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충격이었다.

 당시 어머니와 일곱 형제(막내가 갓 백일을 지난 때임)가 아버지의 박봉에 매달려 살던 때였는데 기둥이 무너져버렸으니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 막막하였다. 그로부터 우리 가족들은 모두 인생궤도를 바꾸어야 만 했다. 나는 엄청난 충격으로 이따금씩 넋을 잃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고 그로부터 쉽게 헤어나지 못해 활발하던 특별활동도 시들해지고 학업성적도 차츰 떨어져 결국 3학년에서는 우등상을 타지 못한 채 졸업하였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등학교 진학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3. 소년가장 시절

 중학교를 졸업하고 17세가 되든 해 여름, 형님마저 군(陸軍)에 입대하니 나는 어머니와 다섯 명 동생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소년가장(少年家長)이 되었다. 친구들은 고등학생이 되어 희희낙락 학교에 다니는데 나는 바로 아래 동생(15세)과 함께 매일같이 논밭에 나가 일을 하여야만 했다. 학생복을 입은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이나 배우고 싶은 욕망이야 이루 말 할 수 없었지만 조물조물한 어린동생들의 새까만 눈망울을 보노라면 학교, 배움 같은 것은 그저 사치스런 생각에 불과 하였다.

 살아야 한다. 저 아이들과 먹고 살아남아야 한다. 어린마음에 자나 깨나 늘 먹고 살 궁리에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예부터 전해오는 ‘밥 먹는 입, 즉 식구(食口)라는 말을 이 때 만큼 실감나게 느껴본 일도 없을 성 싶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뭐니 뭐니 해도 먹매가 제일 크다”라는 등의 속담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세월이었다.

 다른 소득은 없고 좁은 농토(선친의 퇴직금과 생명보험금 등으로 농토를 조금 구입한 상태였음)로는 우리 일곱 식구가 살아가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더구나 농사일에 서툴고 또한 몸이 약한 터라 남들처럼 억척같이 일을 잘하지 못하여 수확도 남들만큼 거두지 못했다. 소득은 적고 생활비는 들어가고 . . .  

 정신없이 보낸 세월이 3년, 군에 가셨던 형님이 제대(除隊)하여 집에 돌아오시고서야 나는 소년가장 신세를 면할 수 있었으나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결국은 머리 굵은 형제들이 하나씩 둘씩 일자리를 찾아 객지로 떠나야 한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청년시절


1. 3년간의 서울생활

 내가 20세 되든 해, 고종(姑從) 형님의 소개로 용산(龍山)에 있는 ‘한국 후로킹 공업사’라는 작은 공장에 취직하여 상경(上京)하였다. 액자용 그림을 인쇄하는 곳이었는데 침식(寢食)을 제공하고 봉급도 주는 곳이었다. 그래서 매달 적은 봉급이나마 타서 고향집에 송금, 생활하는데 보탬이 되긴 하였지만 앞날을 보장받을 수 있는 좋은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비전 있는 직장도 아니었기에 늘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러나 쥐꼬리만 한 봉급이라도 타서 고향에 부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형편인지라 당장 때려치우지도 못했다. 다른 곳에 취직하기위해 노력도 했으나 그것도 헛수고, 뾰족한 수 없이 안타까운 세월만 보내면서 나는 점점 염세주의자(厭世主義者)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학창시절 대표로 활동하던 일, 한 때는 좋았던 성적 등을 떠 올리면서 “언젠가는 나도 크게 성공해야 하는데,” “아니 성공할 수 있을 거야” 하는 막연한 공상(?)을 하기도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독학(獨學)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다짐도 해보았지만 막상 학원에 나가는 결단을 내리지도 못하고(그럴 경제적 형편도 안 되고) 우유부단한 허송세월에 안타까움만 더해갔다. 어릴 때의 꿈들이 무산되어버린 것 같은 자포자기 심정이 들기도 하면서 한해, 한해, 지나다보니 군에 입대할 시기가 닥쳐 3년간의 서울생활을 접었다.


2. 군대생활

 1968년 4월 9일 입대(入隊)를 위해 집을 나섰다.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시는 어머니를  억지로 들어가시라 하고 주산(珠山)간이역으로 나갔다. 같이 입대하는 이웃마을(답박골) 이○○은 조부모, 부모, 동생 등 5-6명이 주산역에서 같이 차를 타고 간치역까지 가서는 배웅하고 돌아갔다. 그뿐 아니라 그 시절에는 훈련병 때 면회가 안 되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는 훈련소의 아는 사람을 통해 면회도 하고 모종의 부탁도 하여 훈련이 끝나고 카츄사로 미군부대에 배치 되도록 손을 썼다. 그렇게 가족들이 끔찍이 생각한 그 친구는 부대 배치되던 해 가을에 부대에서 교통사고로 죽어 모두를 안타깝게 하였다.

 아무튼 나는 논산훈련소(論山訓鍊所) 28연대 2중대 1소대에서 6주를 훈련받고 의정부 ○○○보충대를 거쳐 ○군단 통신대에 배치되어 전신타자병(電信打字兵)으로 근무하였고 중간에 군단 포병사령부에 1년간 파견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나는 타고난 졸필(拙筆)이어서 이등병 때 부대본부 행정요원으로 발탁 될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이에 한이 맺힌 나는 군대생활 3년 동안 필적을 개선키로 작정하고 피나는 연습에 들어갔다. 좋은 글씨체를 보면 흉내 내어 열심히 쓰고 연습하다가 또 다른 예쁜 글씨가 있으면 그걸 흉내 내고, 틈만 나면 글씨를 쓰고 또 썼다. 아마 솜씨가 좋은 사람이 나만큼 노력하였다면 명필(名筆)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다행이 전신타자병이라는 게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직책이었고 폐지(廢紙)가 많이 발생하였기에 글씨 연습하는 데 유리하였다.

 1년을 연습하니 조금 나아지고 3년 후 제대할 무렵에는 완전히 표가 날정도로 좋아졌다.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연습 안 한 것만도 못한 글씨 솜씨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되었으니 망정이지 그때 연습하지 않았더라면  공무원생활도 지장이 많을 뻔 했다.

 1971년 3월 13일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심정은 시원함과 함께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가난을 떨치고 살 것인가 막막함으로 눈앞이 아득하였다.


3. 주경야독의 세월

 형님은 공무원으로 수원(水原)에 근무하시고 동생 2명은 기술을 배운다고 객지에 나갔으며 집에는 어린 동생 3형제를 데리고 어머니께서 생활하시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매월 형님이 부치든 생활비를 끊도록 조치하고 고향집의 생활을 도맡았다. 우선 입대 전에 하던 그림인쇄업에 종사하면서 취직자리를 구해 보기로 했으나 취직은 좀처럼 되지 않고 그럭저럭 1년이 흐르니 어머니와 형님께서는 내가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앞날을 망친다고 걱정이 태산이셨다.

 1972년 여름 마침내 형님의 주선으로 경기도 수원시에 작은 방을 하나 얻어 공무원 시험 준비에 들어갔으나 2개월 반 만에 중단하고 집에 내려와야 할 사건이 터졌다. 그동안 살던 집을 팔고 작은 집을 마련 할 계획으로 어머니께서 집을 팔았던 것이다. 시험공부를 중단한 나는 고향에 내려와 모래와 시멘트를 사서 나르고 기술자를 얻어 직접 집을 지어 완공하니 그해도 겨울이 다 되었다. 집을 해결하고 나니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져 수원으로 공부하러 다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림인쇄업에 종사하면서 저녁으로 책을 보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여야 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세월이었다.

 해가 바뀌어 1973년이 되었다. 8월에 지방공무원시험(地方公務員試驗)이 있어 응시 하였으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나니 이제는 시험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공무원 시험은 만 28세까지 응시 할 수 있는데 내가 이듬해 5월 5일이면 만 28세가 되니 그 전에 시험이 있을 것 같지 않고 그 후에 시험이 있으면 응시자격 조차 없구나 생각하니 이제는 공무원으로 입문하기는 틀렸다 싶었다.(지방직 공무원은 35세까지 볼 수 있는 사실을 몰랐음) 그래서 하던 공부도 집어치우고, 그림 인쇄에 만 매달려 살았다. 그렇게 한해가 가고 또 새해가 밝았다.

 1974년 1월 십 며칠인가 초. 중교 동기동창생인 서재욱(徐載旭)이 찾아와서 1월 31일에 공무원 시험이 있으니 보라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난 이미 포기하고 책도 몇 달 채 안 보는데 10여 일 남은 시험을 어떻게 준비하란 말이냐”고 난색을 표했으나 그 친구는 막무가내로 원서를 접수시켜 주었다. 그리고 “넌 할 수 있어, 넌 머리가 좋으니까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거야”라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날부터 공부에 들어갔다.  시험 준비기간이 너무 없어 많은 책을 볼 수는 없으니 최신형(最新型) 문제집을 한권 사서 풀고, 다시 처음부터 풀어보기를 반복하기로 하고 화학사(華學社)라는 회사에서 발간한 최신형 문제집을 한권 사서 공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설 대목을 앞두고 그림주문이 많이 밀려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인쇄 일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어 공부는 밤으로만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시험에 합격할 자신도 없는 터라 남들에게 공무원시험 준비한다고 밝히기도 곤란하여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비밀에 부치고 공부는 집에 와서 몰래 하기로 하였다.

 하루 종일 그림인쇄에 매달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집에 돌아오면 저녁 8시, 이를 악물고 문제집을 풀고 또 돌려서 풀기를 수없이 거듭하다보면 어느새 새벽, 그렇게 공장과 집을 오가며 정신없이 지나다보니 마침내 시험일이 닥쳤다.

 시험은 충청남도에서 주관하였고 장소는 대전여자상업고등학교였다. “아버지, 당신께서 혹시 이 자식을 도울 수 있으시다면 도와주십시오.”무신론자(無神論者)였지만 선친에게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리고는 긴장을 풀고 차분하게 한 문제 한 문제 풀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든가, 선친의 보살핌이었을까? 마침내 시험에 합격하였고 나의 공직생활은 이렇게 하여 시작 하였으니 형님과 친구 서재욱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공직생활


1. 병아리 공무원

 1974, 4, 3 첫 발령을 받은 곳은 당시 보령군 웅천면사무소(熊川面事務所)였다. 직급은 지방행정서기보(地方行政書記補), 안정된 직장을 잡았다는 안도감에서 가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어머니와 형님이 나보다도 더 기뻐하시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축하한다는 인사를 들으면서 공직에 들어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인생이 겨우 말단 면서기(面書記=면사무소에 근무하는 공무원의 총칭)란 말이냐? 어쩌다 내가 이렇게 최 말단까지 굴러 떨어졌단 말이냐? 하면서 자괴감(自愧感)도 많이 느껴졌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나의 그릇이 그뿐인 것을 모르고 주제넘은 생각을 한 것에 불과 하지만 그 때는 어릴 적부터 막연히 속으로 키워온 영웅심리랄까, 자기도취에 젖어 그런 생각을 해보며 남 몰래 한숨을 내쉬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아니야 내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직장에 다니면서 4급시험(당시에는 7급을 4級 乙이라고 하였음)준비를 한다거나 아니 고시(行政考試)공부인들 못하랴? 할 수 있을 거야” 하면서 자신을 달래보기도 하였고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가는 이, 오는 이 흙이라 하는 고야/두어라 알리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옛사람의 시를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위로 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 3명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너무 쪼들려 달리 어찌 해 볼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는 삶이었다. 3명의 동생들은 각각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녔고 그해 10월에는 결혼을 하고 연이어 2명의 자녀가 태어나 여덟 식구가 박봉에 매달려 살았으니 신혼의 단꿈도 어려운 생활에 묻혀 휙 지나가버린 느낌이었다.

 아무튼 나는 하루하루 새로운 직장생활에 적응하여 나갔고 현 위치에 대한 자괴감이나 출세에 대한 미련은 삶이라는 어려운 현실 속에 묻혀 서서히 무뎌져 가게 되었으며 30년 공직생활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웅천면사무소에서 4년 주산면사무소에서 1년여, 공무원에 들어 온지 5년이 넘은 1979년 여름 보령군청(保寧郡廳)에서 실시한  공무원 소양고사(素養考査)에서 1등을 함으로서 그 특전으로 군청전입(郡廳轉入)을 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소양고사에서 세 번 상을 탔으며 충남도(忠南道) 소양고사에 보령군(保寧郡)대표로 나가 3등을 하기도 하는 등 소양고사는 나의 공무원생활에 많은 영향을 준 제도(制度)이다.


2. 군청근무 시절

 지금은 시청과 읍면동간 직원의 인사교류(人事交流)가 활발하지만 옛날에는 군청에 한번 전입하면 읍면에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자체승진(自體昇進)을 하면서 군청에서 퇴임 때까지 근무하는 게 보통이었다. 군청에서는 읍면사무소의 업무를 지도 감독하고 재정권과 인사권을 가지고 늘 통제하므로 군청직원은 면직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어떻게 하면 군청으로 발탁(拔擢)될 수 있을까 고심하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소양고사의 기회를 잡아 1979년 10월 26일 보령군청 경리계에 전근(轉勤)한 나는 3년여 만에 새마을계로, 다시 2년여 만에 행정계로 옮겨가며 근무하는 동안 서기(書記), 주사보(主事補)로 승진(昇進)하고 1988년 2월 26일자로 주사(主事)로 승진하여 같은 해 6월 25일자로 문화관광계장(文化觀光係長)으로 보직(補職)을 받았다.

 처음으로 초급관리자를 맡은 나는 2년여 동안  만세보령문화제(萬世保寧文化祭)를 기획(企劃)하여 1회-3회까지 개최하였고, 보령군지 편찬위원회와 집필위원회를 구성하여 군지(保寧郡誌)를 발간하는 업무를 완수하였다. 그 후 서무계장(庶務係長)으로 1년 6개월 근무하면서 당시 내무부(內務部)에서 공모한 부정선거방지 표어공모에 “주는 손 검은 양심, 받는 손 버린 양심”을 응모하여 입선한바 있다. 그 후 경리계장(經理係長) 2년, 행정계장(行政係長) 6개월을 거쳐 1995년 통합 보령시(大川市와 保寧郡을 合한 都農複合市)에서 상수도관리사업소장(上水道管理事業所長)의 직책을 맡아 같은 해 6월 3일 지방행정사무관(地方行政事務官)으로 승진하니 공무원에 들어 온지 21년 2개월 만의 일이었다.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하고  내가 공직생활을 마감하는 사무관까지 온 것이었다.


3. 일선책임자 시절      

 1995년 11월 21일자 웅천읍장(熊川邑長)으로 부임함으로써 비록 재량권은 적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의지대로 시책을 구상하고 주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웅천은 젊었을 때 4년간을 근무한바 있어 친한 주민들도 많고 지리적 여건, 산업의 특성, 주민성향 등을 잘 아는 곳이라서 근무하는 데 큰 애로는 없었다. 무창포해수욕장, 신비의 바닷길, 석공예품(石工藝品)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TV, 신문 등 언론매체를 활용하는 한편 탁상용(卓上用) 달력과 홍보용 엽서(葉書)를 만들어 배포하였으며 목장성(牧場城), 구마량진성(舊馬梁鎭城) 등 문화유적을 노출시켜 내 고장 역사를 주민들에게 알리고 잔미산, 운봉산(雲峯山), 화락산(花落山)의 등산로를 개설하는 등 3년 11개월의 근무는 매우 보람 있는 기간이었다고 회고한다.


 1999년 10월 보령시의회(保寧市議會) 전문위원(專門委員)으로 전근하여 2년여를 근무하고,

 

 2002년 2월 산림과장(山林課長)으로 전근, 1년 반 정도 근무할 때에는 산림청에서 공모한 표어공모에 조심하면 푸른 숲, 방심하면 검은 숲”을 응모하여 입선한 바 있으며

 

그 후 공직생활을 고향면장으로 마감코자 자청하여 2003년 10월 27일 주산면장(珠山面長)으로 발령받아 부임하였다.

 그러나 정책적으로 읍면동의 기능을 축소하고 인력도 많이 줄인 상태인지라 옛날 웅천읍장으로 근무하던 시절만큼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좋지 못했다. 말년에 고향에 왔으니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할 것인가?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인가?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싶은 충정으로 여러 가지를 궁리한 끝에 두 가지를 구상하여 실행에 옮겼다.

 첫째 군도 1호선 6km구간의 아름다운 벚꽃 길을 활용한 ‘벚꽃길 걷기대회’를 구상하여 1-2회까지 개최함으로서 많은 면민들과 출향인사들의 호응과 외지인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화창한 봄날 벚꽃이 만개한 도로에 끝없이 이어진 주민들의 걷기 행렬, 그리고 주산면 인구의 1/3은 참석한 것 같은 보령댐 공원에서의 흥겨운 잔치한마당 등 행사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앞으로 내가 퇴직하더라도 연례적으로 이 행사는 계속 되겠지 하는 생각에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둘째로 내고장 역사를 소재로 엮은 책자 “구슬뫼 이야기”를 집필, 발간하여 관내에 1000권, 출향인사에 1000권을 배포하여 주산을 바로 알고, 널리 알리고, 사랑하자는 의식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그 결과 많은 주산인들이 직접 찾아오셔서 또는 전화로, 이메일로, 우편으로 칭찬과 고맙다는 인사를 주셨으니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호응을 얻어 공직을 마감하는 마당에 가장 큰 보람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4. 공직을 마무리하며

 2005년 8월 19일자로 공로연수에 들어감으로서 이젠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조용히 지난날을 정리하고 있다. 오는 2006년 6월 30일이면 32년 3개월의 긴 공직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정년퇴직(停年退職)을 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공무원을 봉사하는 직업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과연 주민을 위해 얼마나 봉사하는 자세로 일 했는가? 주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그리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얼마만큼 큰  일을 했으며 얼마나 유능한 공무원이었는가? 눈을 감고 생각해보아도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다만 성실한 공무원, 양심적인 공무원으로 살려고 노력은 하였으나 그마저도 평가는 주민들과 선후배 동료공무원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70년대의 새마을 운동, 80년대의 과도기(過渡期), 90년대의 민주화(民主化), 그리고 빠르게 변화하는 2천년 정보화(情報化)시대를 거치면서 행정의 최 일선에서 주민들과 함께 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세월, 혹은 웃고, 혹은 울고, 혹은 찡그리며 화를 내다가도 대폿잔에 시름을 달래며 허허하고 웃어넘기든 그 숱한 사연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눈앞에 어른거리며 지나간다. 고마웠던 주민들, 섭섭했던 주민들, 선배공무원들, 동료들, 후배들! 그 많은 분들이 나에게 베풀어준 사랑에 힘입어 오늘 이렇게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고 정년퇴직을 맞을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고마운 사랑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며 정들었던 공직을 떠나게 된다.  작은 발자국을 촘촘히 남긴 채 . . .

 산림과 근무시 의회발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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