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남양홍씨와 화산사
고성이씨들이 화산에 묘를 썼다는 것은 당시에 그들이 화산의 주인이었음을 말해준다.
1624년 ‘이괄의 난’이후에 그들이 떠나고, 그들과 혼인관계를 가졌던 홍씨들에게 산의 관리를 맡겼다는 말이 집안에서 전해온다는 이각호(고성이씨 종친회, 서울거주)씨의 말이 있으나 확인한 길이 없다. 아무튼 200여년이 지난 19세기에 화산의 주인은 서울에 사는 남양홍씨가(南陽洪氏家)였으며 화산에 농막을 짓고 장노(庄奴)를 두어 산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이 화산사(花山事)라는 사건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한편 19세기 당시 미산면 삼계리에 낙향하여 세를 누리며 살던 조병덕(趙秉悳/ 조선후기의 학자, 산림)이 부인 덕수이씨가 죽자 1863년 화산에 투장을 하였고 이 사실을 화산에 살던 장노가 서울 홍씨가에 알렸다. 조병덕가(趙秉悳家)에서는 차후에 산주를 설득해서 매입할 계획이었지만 홍씨들은 완강히 거부하였고, 조병덕의 아들 조장희(趙章熙)가 서울 홍씨네로 가서 10일을 석고애걸(席藁哀乞)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내려와서 결국 묘를 미산면 삼계리로 옮겼으니 이 사건이 바로 화산사(花山事)로 지역에서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하면서 권세를 부리던 조병덕가가 처음(?)으로 굴욕을 당한 사건이었다.
그 후 진주목사를 역임한 홍병원(洪秉元/ 남원부사, 진주목사역임)이 입향하고 이어서 그 동생인 홍병위(洪秉瑋/1805∼1896,남원과 장성부사 역임)와 셋째 홍병희(洪秉僖/1811∼1886, 진주목사 역임)가 차례로 입향하였으며 홍병희의 아들 홍철섭은 서울에 살면서 진사시에, 또 다른 아들 홍세섭(洪世燮)은 남포에 살면서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 하는 등 홍씨가(洪氏家)는 지역에 쟁쟁한 권문세가로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 후예들이 살아온 화산내마을에 홍판서댁이라고 부르는 큰 기와집이 있어 1950년 6.25한국전쟁 때 그 집에 인민군들이 주둔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바 있고, 1960년대까지도 홍순영씨(당시 주산 중·농업고등학교 서무과장)가 그 집에 살았으며 그 후 그 기와집은 없어졌지만 마을에 지금도 홍병원의 현손 홍순정씨가 살고 있다.
7)문화유적
(1)고인돌
화평리에는 2개소에 3기의 고인돌이 있고, 이웃마을 동오리에 5기의 고인돌과 1기의 선돌이 있어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①화평리 1지구 고인돌
화평리 성드라에 있는 1기의 고인돌이다. 고인돌이 위치한 곳은 밭이 있다가 묘역이 되었다. 고인돌이 위치한 곳의 해발고도는 약 45m로 작은 골짜기 가운데의 평지 이다. 이곳 동쪽 120여m 지점의 능선 위에도 2기의 고인돌(화평 2지구)이 분포하며 남쪽 700여m 지점인 황율리-삼곡리 경계지역에도 3기의 고인돌이 분포한다.
덮개돌은 분암으로 320×200×290cm, 둘레 920cm로 다른 고인돌에 비해 상당히 높다. 덮개돌의 표면은 분암의 풍화 특성을 반영하여 둥글고 매끈하다. 덮개돌의 남쪽과 서쪽에는 여러 개의 돌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편마암으로 70×30×50cm(높이)이며 서남쪽 모서리 끝에도 작은 분암 1개가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은 편마암으로 폭 40cm 높이 30cm의 분암 1개가 괴어있다. 위의 돌들로 이루어진 무덤방의 크기는 200×100cm이다. 묘지공사 때문에 이 고인돌 북서쪽을 굴착했는데 길이 170cm, 폭 100cm 두께 20cm의 평평한 돌이 출토되어 고인돌 옆에 놓았다.
②화평리 2지구 고인돌
화평리와 창암리 사이에 걸쳐있는 고인돌 2기의 고인돌 군이다. 고인돌이 있는 곳은 해발 60m정도로 운봉산에서 내려온 구릉의 꼭대기이다. 이 구릉은 오랫동안 공동묘지로 사용하던 곳으로 수많은 무덤들이 산재하여 있는 곳이다. 특히 미혼남녀 즉, 처녀나 총각이 죽으면 길가에 묻어주어야 좋다는 속설에 따라 이곳 창암리와 삿갓재를 넘나드는 고갯길 양편에 묻었기 때문에 길가에는 그런 무덤들이 많았다. 이곳 고인돌 중 서쪽 창암리 지역의 것을 1호, 화평리 지역에 있는 것은 2호라고 하였다. 현지 확인 시 풀과 잡목이 우거져 창암리쪽 1기의 고인돌만 보일뿐 1기는 찾기가 어렵다. 낙엽이 지고 풀이 마른 후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다. 이곳 남쪽 700여m 떨어진 곳에도 3기의 고인돌(황율리 고인돌)이 있고 동쪽 120여m 지점에도 1기의 고인돌(화평리 1지구)이 있다.
○화평리 2지구 1호 고인돌
화평리-창암리 사이에 있는 고인돌 군 중 창암리 지역에 있는 고인돌이다. 편마암으로 된 덮개돌은 280×190×55cm, 둘레 730cm의 크기이다. 윗면은 평평하고 둘레는 다듬어진 모습이며 굄돌은 보이지 않는다. 긴 방향은 동서 방향이다. 동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2호 고인돌이 위치한다.
○화평리 2지구 2호 고인돌
화평리-창암리 사이에 있는 고인돌 군 중 화평리 쪽에 있는 고인돌이다. 편마암으로 된 덮개돌은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데 남은 부분은 175×140×60cm, 둘레 530cm의 크기이다. 덮개돌의 서쪽 부분은 길로 이용되어 지표에서 50cm쯤 파여 있는데 이곳을 통해 보면 얇은 돌 2개가 모로 세워져 있어 굄돌인 것으로 보인다.
모두 편마암으로 북쪽의 것은 높이 40cm, 폭 10cm이며 남쪽의 것은 높이 55cm, 폭 15cm이고 길이 45cm 이상이다. 덮개돌의 남쪽 밑에도 편마암으로 된 길이 55cm, 높이 10cm 의 돌이 놓여 있다. 1호와의 거리는 3.0m이다.
※이 고인돌에 대한 글은 황의호 선생이 조사, 집필하고 보령시가 발간한 ‘보령의 고인돌’ 중에서 발췌한 것이며 약간의 자구수정이 있었음 밝힙니다.
(2)들돌
①들돌이란 무엇인가?
들돌(擧石)이란 마을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정자나무 밑이나 당집, 당산 등에 크고 둥그스름한 돌을 놓아두고 정월대보름, 단오, 기타 명절에 놀이용(힘자랑)으로 쓰거나 청소년들이 진쇠가 되거나 농사를 짓기 위한 힘 기르기 용으로 들어보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마을마다 1∼3개씩 놓아두었으며 5∼7개까지도 두는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일인력(一人力)들돌을 들면 성인(진쇠)의 품을 인정받고, 이인력(二人力)들돌을 들면 장사라 하며, 삼인력(三人力)들돌을 들어 넘기면 머리나이라 하여 곱절의 품값을 받았으며, 풍물판의 기수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들돌 이름도 마을에 따라서 들돌, 들독, 등돌, 든돌, 진쇠돌, 당산돌, 신돌, 초군돌, 차돌백이돌 등로 다양하게 불렀으며 둥그스름한 모양에 사람의 손때가 많이 묻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게 보통이었다.
②들돌의 신앙성
마을에 따라서는 들돌을 영험한 신물로 여겨 이를 숭상하여 특정한 날에 들돌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었는데 제일은 정월대보름이나 단오, 한가위, 유두와 칠석, 백중 등을 이용하였고 무당이 개입하여 들돌굿으로 전하는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들돌을 신성시하는 문화는 돌이 단단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항구불변성과 초자연적인 힘, 영험(靈驗)성까지 깃든 것으로 믿어져 고대 원시 사회부터 신성한 주술적(呪術的) 신앙대상으로 삼은 데서 비롯한 것이다.
➂들돌 놀이 방법과 시기
○들돌 들기의 방법
들돌놀이는 양발을 벌리고 굽은 자세로 땅 뜨기, 물박치기, 허리에 올리기, 가슴팍 올리기, 등 넘기기 등이 있으며 가슴에 안고 당 돌기, 어깨에 메고 당나무 돌기, 마을돌기, 머리위로 치켜 올리기, 들돌을 지게에 지고 귀 잡고 일어서기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들돌 놀이는 크게 어른이 되는 관문 통과의례(通過儀禮)와 체력을 기르는 목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년식 ‘들돌 들기’
농민들은 성년식으로 ‘들돌 들기’를 하였다. 젊은이들은 정월대보름이나 2월 초하루, 또는 백중날에 마을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들돌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그 젊은이는 그날부터 어른으로 인정받아 어른들의 품앗이에 낄 수 있음은 물론 품값도 어른 품값을 받을 수 있었다. 머슴의 경우에는 들돌을 들어 올리면 어른 몫의 사경(농가에서 머슴에게 주는 1년 치 품삯)을 받게 되지만 스물이 훨씬 넘어도 들돌을 들지 못한 사람은 반 품값밖에 받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들돌을 들어 올릴 정도의 힘은 있어야 농민으로서 정상적인 생산활동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들돌을 들어 두레에 가입하면 기존 두레구성원들에게 술과 안주로 신입례를 치렀는데 이를 ‘진세턱’이라 했으며, 들돌도 두레도 사라진 마을에서도 1960년대 말까지 1년에 한번 마을잔치 때 ‘진세턱’을 내는 풍습이 있었다.
○체력을 기르는 ‘들돌 놀이’
들돌 들기가 사라진 후에도 마을의 정자나무아래 등 사람들이 잘 모이는 장소에 놓은 들돌을 젊은이들이 힘자랑으로 한번 씩 들었다 놓는 놀이들을 하였다.
마을 내 젊은이들끼리 힘자랑도 하지만 이웃마을 젊은이들이 와서 마을 대항 힘자랑을 하기도 하고, 큰길이 있는 마을에서는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들돌을 들어보도록 한 후 들면 통과시키고, 들지 못하면 야유나 어려움을 주는 잘못된 풍습도 있었다.
➃들돌과 두레와의 관계
두레는 마을의 실질적인 노동력을 가진 청장년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이들은 마을에 공동으로 농사일을 할 때나 동제를 지낼 때, 공동부역을 해야 할 때 등 공동으로 노동이 필요할 때마다 함께 일하는 집단이었다. 기본적으로 한 마을에 한 개의 두레를 조직하며 마을 규모에 따라 인원수는 7∼9인에서부터 10∼50인까지 조직되었지만 큰 마을에서는 2개 이상의 두레를 조직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2개 이상의 마을이 합동으로 두레를 짜기도 하며 인원수도 10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사는 젊은이가 두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노동력이 있음을 인정받는 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이때 들돌을 들어 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 또는 들어서 어깨너머로 넘길 수 있는냐 없느냐가 자격기준이 되었다.
➄화평리의 들돌
화평 2리 즉, 화산마을 정자나무 옆에 6.25한국전쟁 이전까지 주막이 있었고 여름철과 같이 농한기에 사람들이모여 들돌 들기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 놀이가 행해진 적이 거의 없고 그냥 방치된 상태로 있다가 1996년 화평리 경지정리 시 없어졌던 것을 화평리 김종필(당시 75세)씨의 제보로 찾게 되었다.
제보를 받은 보령문화연구회에서 2005년 4월 16일 현지 출장하여 경지정리작업 때 수로 둑을 쌓는데 둑에 묻어버린 들돌을 발굴하여 현 위치에 안치하였다.
이 들돌은 지름 56cm, 무게 118kg 이었고, 겉에 주산면 화평리 화산동내(珠山面 花坪里 花山洞內)라고 쓰여 있다. 이 들돌은 2인력으로 성인 두 사람이 힘겹게 들 수 있는 것으로 이 것을 들면 장사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장사가 몇 있었어, 나는 들어 볼 생각도 못했어. 그런데 들돌이 한 개 더 있었어. 한 150근 나갔었던 것 같아. 우리 동네 남자들은 웬만하면 다 들었어. 나도 들어 보았다고. 그런데 그 작은 놈은 깨졌지. 어른들 말에 의하면 불이 타서 깨졌다고 그러는데 내 생각에 하두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 놨다 하니까 깨진 것 같아(남, 김종규, 79세)”
김종규씨 제보에 의하면 이 들돌은 옛날 어른들이 마을 냇가에서 주워다가 현재 위치의 정자나무 밑에 갔다 놓은 것이라 한다. 제보자의 말에 의하면 이 들돌은 농한기나 저녁 때와 같은 한가한 시간을 활용하여 농촌 사람들의 근력 단련을 위한 소일거리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화평1리에도 1990년대까지 정자나무아래에 들돌이 있었으나 없어졌다고 한다.
※이 들돌에 관한 글은 보령문화 제 14집(2005년)에 실린 ‘보령지방의 들돌에 관하여(박정순 씀)’에서 ‘화평리 들돌’부분을 발췌한 글입니다,
(3)이웃마을 선돌과의 관계
선사시대 사람들이 물가를 따라 살기 시작한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따라서 이곳 화산내의 주변인 화평리와 동오리 일대에 일찍이 사람들이 정착하였음을 위에서 설명한 화평리 고인돌 3기와 동오리에 있는 고인돌 5기, 그리고 1기의 선돌이 말해주고 있다.
동오리에 있는 선돌은 268cm의 높이에 지표부분의 둘레 240cm, 1m높이의 둘레 197cm, 2m부분의 둘레 180cm에 이르는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민간신앙의 대상, 기념비, 일정구간의 표시 등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바 이 선돌이 화평리 사람들의 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8)민속 - 삿갓재 마을 단오제
(1)마을의 개관
삿갓재 마을은 큰 삿갓재와 작은 삿갓재로 나누어지는데, 남쪽의 큰 삿갓재에 25가구, 북쪽에 있는 작은 삿갓재에 15가구가 거주한다. 옛날에는 남포백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는데, 현재는 경주김씨 8가구, 경주이씨 7-8가구, 남포백씨 5-6가구가 거주한다.
마을 서쪽은 낮은 산지, 북쪽은 높은 산지(운봉산)이고 동쪽은 넓은 들을 이룬다. 이 들에는 웅천천에 대규모 보(洑)를 축조하여 동오리들, 삼곡리들과 함께 물을 댄다. 마을 안에는 3기의 고인돌이 분포하여 오래 전부터 주민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근처에는 토성이 있고 창암리로 통하는 고개에는 성황당이 그대로 남아있다.
(2)단오제의 기원
삿갓재 마을에 단오제가 생긴지는 5-6년밖에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정월 초에 집집마다 날을 잡아 정자나무 밑 동자상에 제를 올렸다.
대개는 정월 초사흘, 초이레, 열나흘 밤이 가장 많았다. 정자나무는 큰 팽나무이고 그 밑에는 넓적한 바위가 두 개 있고 바위 안쪽으로 동자상 2개와 문인상 2개가 있는데 옛날에는 동자상은 1개가 있었으나 동자상은 크기가 작아 사람들이 장난을 치다가 목이 부러져서 1999년 동자상을 다시 만들어 세울 때 2개를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이 동자상에 소원을 빌었다. 마을 단위의 산제나 당제는 없었다.
단옷날에는 젊은이들이 마을 회관 옆 큰 팽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고 띄고 놀았다. 5-6년 전 마을 어른들이 단옷날 동자상에 제를 올리자고 발의하여 단옷날 아침 제를 올리고 그네를 매고 놀게 되었다.
(3)단오제
단오 전날 마을 기금을 가지고 제물을 마련한다. 제물은 밤, 대추, 곶감, 수박, 참외 등 약간의 과일과 떡, 술이다. 제물과 마을 주민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마을 부녀회원들이 회관에서 준비한다.
젯날 식전에 마을 사람들이 예취기를 가지고 나와 마을로 통하는 길의 풀을 베고 정자나무 밑을 청소한다.
그리고 각자 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와 10시쯤 제를 올린다. 먼저 동자상 앞에 촛불 2개를 꽂은 쌀 한 그릇을 놓고, 물 한 그릇을 놓는다. 그 앞에는 넓은 상을 놓고 상 위에는 팥을 섞은 떡 1시루(떡집에서 만들어 온 것임), 수박 두통, 참외, 밤, 대추, 곶감 등을 놓는다. 그 앞에는 향을 피운다. 술은 정종을 사용하였다(1999년).
마을의 원로 중 한 사람이 제관을 한다. 일반 유교식 제사처럼 잔을 올리고 축을 읽는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 己卯 五月庚午朔 五日辛丑 幼學白永錫 敢昭告于 애기佛像之神
○○珠山面 花坪里蒻峴洞
家家戶戶 無病長壽 富貴榮華 太平聖代祈願
謹以淸酌 脯醯 疏薦于神 神其佑之 尙
饗
(번역문)
해는 차례로 이어 己酉年五月庚午朔五日辛丑에 幼學 某는 감히 昭에 계신 애기부처 神靈님께 告하나이다. 우리 주사년 화평리 약현동에 家家와 戶戶마다 無病하고 壽命 長壽하며 富貴하고 榮華로우며 太平聖代케 하옵시기를 기원하나이다. 삼가 맑은 술과 안주로써 소홀히 차렸으나 신령님께 받드오니 신령님이시어 이를 도우시고 흠향 하옵소서.(박정순 역)
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술을 올리고 절을 한다. 이때 돈은 상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제는 남자들이 주도적으로 지내지만 여자들도 나와서 절을 하였다.
제를 마치면 제물의 일부를 떼어 동자상과 문인상에 놓는다. 특히 문인상에는 먹으라는 의미로 입 밑에 놓는다. 이어서 제물을 회관으로 운반하고 마을 부녀회원들이 음식을 장만한다. 대형 솥과 통에 음식을 끓여내고 돼지고기, 술 등을 차려 먹는다.
(4)그네 매기
단옷날 마을 젊은이들이 그네를 맨다. 그네를 매기 위해서는 짚 5∼6단이 필요한데 아무네 짚이나 손쉬운 대로 가져다가 만든다. 먼저 동아줄을 만드는데 동아줄은 한사람이 끝을 돌리고, 한 사람이 짚을 먹여나간다. 돌리는 사람이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돌려야 틀어지지 않고 줄이 만들어 진다. 긴 외줄이 만들어지면 잡아당긴 상태로 절반으로 접어 한 사람이 동아줄을 만들어 나가고 한 사람은 줄을 넘긴다. 이때 한쪽 끝은 나무에 묶어놓고 하기 때문에 2사람이면 동아줄을 만들 수 있다. 세 접으로 만드는 동아줄은 1/3씩 갈라 트는데 그네에 사용되는 것은 보통 두 접으로 만든 것이다. 동아줄을 틀을 때 손잡이 부근에 는 광목천으로 고리를 만들어 놓는다. 이것은 그네를 잡을 때 손목에 감으라는 것으로, 그네 탈 때 손을 놓치더라도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안전장치이다. 그네는 회관 옆 팽나무에 맨다. 정자나무는 그네 맬 나뭇가지가 마땅하지 않고, 팽나무에는 그네 맬 적당한 나뭇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5)단오제의 쇠퇴
2000년과 2001년에는 단오제를 지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오제를 찬성하는 사람도 있지만 몇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제 비용을 마을 기금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100%찬성하여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네도 매지 않는데 만들 사람도 없지만 탈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단오제는 1999년까지 매년 제를 지냈으나 그 이후부터는 불규칙적으로 2015년경까지 제를 지내다가 이제는 지내지 않으며 더러 동자상 앞에 개인들이 촛불을 켜놓고 소원을 비는 풍습만은 전하고 있다고 한다.(이장 이당우 증언)
도움말 주신분 : 김주흠(72) 주산면 화평리 430, 김준흠(65) 주산면 화평리 430
※이 단오제에 관한 글은 황의호선생이 조사하여 쓰고 대천문화원에서 발간(2002년)한 ‘보령의 동제’에 실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다만 내용이 달라지지 않는 범위에서 약간의 자구수정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9)노거수(오래된 나무)
(1)지정보호수
화산마을(화평리 259-2답)에는 1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1982년 11월 1일에 지정한 이 나무(지정번호 8-10-9-6-262)는 느티나무로서 수령이 190년에 달하며, 높이가 20m에 이르고, 사람의 가슴정도 높이에서 나무둘레가 6m, 그리고 직경이 191cm에 달하는 큰 나무이다.
마을 앞 들판 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오랜 세월동안 마을의 수호신역할을 해온 이 나무는 사람들이 좋은 일이나 나쁜 일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찾아가 금줄을 띠거나 나무 밑에 음식을 차려놓고 소원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영농 철에는 일하다 새참을 먹고, 짬을 내어 쉬기도 하는 쉼터요, 여름철에 그늘 막을 제공하고, 농한기에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놀면서 각종 놀이도 하는 마을 광장으로 그 쓰임새가 다양하였다. 실제로 이 나무 밑에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들돌(앞에서 설명한 문화유적 편 참조)이 놓여있다.
(2)비지정 노거수
①삿갓재마을의 팽나무
삿갓재마을의 회관 옆에 오래된 팽나무가 한 그루 있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되었을 성 싶은 이 나무는 키가 20m 정도, 가슴 높이의 둘레가 2.7m정도, 직경이 90cm정도로 옛날부터 마을 수호신으로 역할을 해왔다. 마을 한 편에 자리 잡은 이 나무는 마을사람들의 모임장소로서 사랑방과 같은 곳이다. 어른들에게는 쉼터,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를 제공하는 마을 광장이며 앞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단오제 후에는 이 나무에 그네를 매어 뛰었고, 나무아래에 모셔놓은 문인석(동자상)과 함께 기쁜 일이나 궂을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나무도 보호수로 지정하여 체계적인 관리를 하였으면 좋겠다.
②삿갓재마을의 상수리나무
팽나무에서 40여m 떨어진 곳에 커다란 수령이 150년은 넘었을 것 같은 상수리나무가 있다. 높이가 25m 정도, 가슴 높이의 둘레가 3m 30cm정도, 직경이 105cm정도로 팽나무와 쌍벽을 이루며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 왔을 것이나 팽나무와 문인석을 신앙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나무는 특별히 주민들이 치성을 드리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이 나무만큼 큰 상수리나무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 크기와 상상되는 수령을 보아서는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➂화산마을의 비지정 노거수
화산마을 당산 쭉 뿌리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높이가 20m정도 둘레는 3.5m정도, 직경이 105cm 되는데 크기도 크려니와 수령 또한 보호수로 지정할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는 나무이지만, 서 있는 장소가 산의 끝부분이고 사람들의 접근성도 어려운 곳이라서 신앙의 대상으로 이용되지도 않았다.
마을에 접근하기 좋고 더 큰 보호수가 한 그루 있어 일찍이 그 나무를 신앙대상이나 수호신으로 삼아왔고 그 아래 부분이 마을광장의 역할도 해왔기 때문에 이 나무는 관심권에서 멀어져 보호수지정에서도 제외되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크기나 짐작되는 수령을 보아서는 이 나무도 보호수로 지정관리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0)주요성씨의 정착
○고성이씨 : 1508년 조선중기 무신 이줄(李茁)이라는 사람이 귀향와서 살았던 관계로 그의 후손들이 100여년 살다가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떠난 것으로 추정함. 이줄의 묘가 있음.
(이괄네 묘 참조)
○남양홍씨 : 남원부사와 진주목사를 역임한 홍병원(洪秉元)이 1863년 낙향하고 그의 동생 홍병위(洪秉偉)와 홍병희(洪秉僖)가 차례로 낙향하여 살았음. 그의 묘가 있고 후손이 아직 한집 있음.(남양홍씨와 화산사 참조)
○경주김씨 : 웅천 죽청리를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어 살던 경주김씨 중 김수목(金秀穆)이라는 분이 1820년경 처음으로 화평리에 들어와 살면서 그의 후손들이 삿갓재마을에 작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 그의 묘소는 가까운 창암리에 있고 아직도 마을에는 5가구의 김씨들이 살고 있다.
○금령김씨 : 금령김씨 족보에 의하면 충의공파 김문기의 8세손인 김후형(金厚亨)이라는 분이 영동에서 남포 비인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후손에 의하면 그 손자인 김하두(金河斗)의 묘부터 화평리에 집단화 되어 있었는데 2004년경 묘역을 손질하면서 비인에 있던 그 윗대 즉, 후형(厚亨)과 그의 아들인 길현(吉鉉)의 묘도 화평리로 모셔왔다고 한다. 그분(河斗)이 화평리지역에 처음 살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 시기는 1700년 초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족보에 하두의 아들인 김봉진(金鳳振)의 묘가 불은면 내기리, 또한 봉진의 현손인 김용일(金溶一)과 용일의 동생 용구(溶九)의 묘가 성주산과 화산, 그리고 5대손인 김중권(金重權)의 묘가 미산면 늑전리, 중권의 아들 형영(炯榮)의 묘가 주산면 증산리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아 화평리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까지 많이 살았었음을 알 수 있다.
후손의 말에 의하면 금령김씨가(家)는 천석꾼이라 부를 정도로 큰 부자였으나 김용일대에 와서 세상물정에 어두운 그(溶一)가 사업을 한다고 재산을 날리는 바람에 가문이 쇠락하였다고 하며 이제는 화평리에 겨우 3가구만 살뿐, 안터마을에 집단화한 묘역만이 그들이 한때 번성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04 교육
1)서당교육
화산내마을은 일찍이 고성이씨에 이어 남양홍씨 등 권문세가들의 연고지였기에 서당이라든지 어떤 형태의 교육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는 있지만 화산내마을에 서당이나 기타 교육의 흔적을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1940년경까지는 화평리 삿갓재에 백인기훈장이 운영하던 서당이 있었으나 1950년대 초에 문을 닫았고 이후부터는 이웃마을인 동오리의 서당을 이용하였다고 한다.(김선흠 증언)
2) 초등교육
화평리의 어린이들은 주산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44년부터 5년간 삼곡분교가 부설되어 다녔으며, 1963년부터 28년간 신설된 정곡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91년부터 다시 주산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3) 중등교육
화평리의 학생들은 주산중학교에 다녔다. 주산중학교는
1933년 2월17일 : 주산공립농업실수학교 1년제 인가 같은 해 4월 1일 개교
1935년 5월 6일 : 1년제로 개선
1942년 3월 1일 : 주산공립여자농업실수학교로 개칭(2년제로 개선)
1942년 4월 1일 : 주산여자초급중학교로 인가(3년제)
1948년 0월 0일 : 주산공립초급중학교 개편
1950년 6월 1일 : 주산농업중학교로 개칭
1951년 1월 1일 : 주산중학교로 개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산중학교를 다닌 화평리 학생들 중에 뛰어난 인재들이 상당수 있어 대법관, 대학교수, 유명의사, 영관급 군인 등 각계각층에 진출하였고 특히 2007년 8월에는 화평리에 살면서 주산중학교를 졸업 후 대천고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김성환학생이 KBS에서 진행하는‘고교생 도전 골든벨’을 울려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한 사실도 있었다.
4)고등교육
중학교는 거주지에 있는 주산중학교를 다니지만 고등학교는 자유롭게 선택하므로 주산산업고등학교와 인근 웅천고등학교 그리고 대천고등학교 등 여러 곳으로 취학하고 있으며 나아가 많은 학생들이 대학교까지 진학한다.
05 지명
○가장골 : 큰 삿갓재와 작은 삿갓재(안태) 사이에 있는 골짜기, 상당히 높이까지 밭으로 개간되었다.
○갓날 : 왕봉의 동남쪽 능선.
○개똥구녕 : 작은 삿삭재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공동묘지 : 성재를 중심으로 위쪽으로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다.
○궁개또랑 : 오방내와 삿갓재에서 내려오는 내가 합해지는 곳.
○그석밭 : 화산내 마을 북쪽에 있는 산능선, 뜸터의 남쪽이다.
○글자새긴바위 : 정판보 위에 있던 바위. 지금은 주변의 변형으로 없어졌다.
○넙적바위 : 정판보 위에 있던 바위. 주변의 변형으로 없어졌다.
○능그리샘 : 능그리샘굴에 있는 샘. 해발 150m 정도에 있다.
○능그리샘굴 : 운봉산의 남서쪽 골짜기.
○당산 : 화산 마을 북동쪽에 내민 작은 산줄기, 마을 주민들은 제 지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므로 제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것 같다.
○도둠바위 : 큰 삿갓재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
○도툼바위 : 큰 삿갓재 마을 안에 있는 바위. 옛날에는 쉼터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마을안길 확포장사업 개울정비사업 등으로 지대가 낮아져 쉼터로 사용하지 않는다.
○두투매 : 뒤테메의 다른 이름.
○뒷굴재 : 화산 마을에서 방죽굴로 넘어가는 고개.
○뒷테메 : 화평리 남쪽 끝에 있는 산, 삼곡리와의 경계에 있다. 꼭대기에는 예 토성이 있는데 정상에 축사를 지어 훼손되었다.
○들미돌 : 큰 삿갓재 정자나무 아래에 공처럼 생긴 200근 정도 되는 돌이 있는데 마을 장정들이 힘자랑으로 한 번씩 들었다 놓고 그 위에 앉는 풍습이 있었다. 1990년대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뜸터 : 왕봉 남쪽 7부 능선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큰 인물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쇠말뚝을 박아 뜸을 뜬 곳이라고 전한다.
○마살메 : 큰 삿갓재와 작은 삿갓재 사이의 산, 이 산줄기의 끝이 마살메 모탱이다.
○마살메모탱이 : 큰 삿갓재에서 작은 삿갓재로 돌아가는 모롱이.
※마살메와 마살메 모탱이는 이곳에서 1∼1.5km 정도 떨어진 창암리 도롱굴마을의 산 쭉 뿌리에도 있다. 왜 그 이름이 가까운 다른 곳에도 전할까? 남포읍지 세조 12년 군명(郡名)란에 “군명 사포 마산 금위남포 진관홍주(郡名 寺浦 馬山 今爲藍浦 鎭管洪州)”라고 기록하고 있어 마산(馬山)이란 지명이 나오고, 보령군지(1991년 발간)의 기록을 보면“남전 뒷산 즉, 운봉산(雲峯山)자락의 낮은 부분에 둘레 200m정도의 테뫼식 산성이 있다고 한다. 일제시대 조사하였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마산(馬山)이라고 하였으며 성벽은 훼손되어 문터 등 시설물을 확인할 수 없으나 다만 성안(城內) 부분에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격자문계(格字文系) 토기파편이 발견된다고 하였다”라고 하여 여기서도 마산(馬山)이란 지명이 나온다. 마살메란 마산이라는 지명에 산을 뜻하는 말, 뫼를 붙여지어진 이름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하며 마산에 대한 전문가들의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밤나무너머 : 화산 마을 남동쪽 제방에 밤나무를 심었었고 그 너머를 말한다.
○밤안고랑 : 왕봉 동쪽 골짜기. 92m높이의 인공폭포를 설치하였다.
○방죽굴 : 화산 마을 서북쪽 배꼽뿔산 북쪽에 있는 작은 방죽.
○배꼽뿌리 : 배꼽뿔산 남쪽에 있는 산줄기의 끝.
○배챙이 : 화산 마을 서쪽 내 건너에 있는 산사면을 통칭하는 말.
○배챙이내 : 화산 마을 서쪽 부분의 내.
○배챙이들 : 화산 마을 서쪽에 있는 들.
○백추강말림 : 작은 삿갓재(안태) 서남쪽 산.
○보들 : 큰 삿갓재의 남쪽에 있는 들.
○산밑이 : 큰 삿갓재의 남쪽 부분.
○삿갓재(고개) : 큰 삿갓재 마을에서 창암리 시그내로 통하는 고개, 고개 꼭대기에는 성황당이 있다. 신수로 팽나무가 있으며 아직도 서낭댕이 흔적이 남아 있다.
○삿갓재(마을) : 화평리 남쪽 마을, 큰 삿갓재와 작은 삿갓재(안태)로 구분된다. 큰 삿갓재의 북쪽 산 모롱이 정자나무 밑에는 어느 묘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보이는 문인석 2개와 목이 부러진 동자석 1개를 세워놓고 단옷날 제를 지냈으나, 동자석이 가벼워 장난치다가 목이 부러졌으므로 1999년 새로 2개를 만들어 세웠다. 이곳 바로 아래쪽 마을 회관 옆에는 수백 년 된 팽나무 정자나무가 있으며 그네를 맨다. 마을에 산제당은 없다. 한편 건너마을 동오리에서 이 마을을 보면 형세가 삿갓을 엎어 놓은 것 같아 삿갓재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다.
○상강재 : 화산 마을에서 당산을 넘어 정판들로 통하는 고개.
○상투바위 : 운봉산 봉우리 동쪽에 있는 바위.
○새배챙이 : 화산 마을의 서북쪽 부분, 왕봉의 서쪽이다.
○새배챙이들 : 배챙이들의 북쪽 부분.
○새토백이 : 화산 마을의 동북쪽 부분.
○서낭댕이 : 삿갓재위에 서낭댕이가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
○성굴보담 : 새배챙이에 있는 보, 웅천 성동리에 물을 댄다.
○성드라 : 화평리 남쪽, 뒤테메 복동쪽 골짜기, 골짜기 안에는 고인돌 1기가 있다.
○성재 : 성드라에서 창암리 시그내로 넘어가는 고개, 뒤테메의 북쪽이다. 성재의 꼭대기에는 고인돌 2개가 있다.
○아랫들 : 613호 지방도 서쪽 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지방도 동쪽을 위들, 서쪽을 아랫들이라고 한다. 삼곡리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안산 : 큰 삿갓재 남쪽에 있는 산, 산밑이의 바로 남쪽이다.
○안태 : 작은 삿갓재의 다른 이름.
○안태보 : 화산 마을 남쪽에 있던 보.
○앞다리 : 화산 마을 남쪽에 있던 다리, 삿갓재로 통하였다. 섶다리 또는 징검다리로 이루어 졌었다. 지금은 없어졌다.
○앞들 : 화산 마을 앞 들.
○약방다리 : 화산 마을 남동쪽에 있던 다리, 동오리에 있는 약방에 다니던 다리라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약현(蒻峴) : 삿갓재의 한자 표기. 큰 삿갓재마을, 작은 삿갓재 마을을 합한 이름.
○약현부락 : 약현(蒻峴)을 약현부락이라고 하다가 1985년 이후에는 화평 1리라고 한다.
○약현들 : 삿갓재 마을 동쪽의 들, 화평들이라고도 한다.
○약현들2 : 삿갓재 마을 앞에 있는 들.
○오방내다리 : 앞다리의 다른 이름. 지금은 없어졌다.
○오방내 : 화산 마을 남쪽에 있는 내.
○오방내들 : 화산 마을 앞들, 앞들의 서쪽부분이다.
○왕봉(王峯) : 화산마을 뒤에 있는 산봉우리, 동서로는 급경사이나 남북으로는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산에 묘를 쓰면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혈을 끊기 위해 산줄기 두 곳을 찾아 쇠말뚝으로 뜸을 떴다는 뜸 터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 ‘이괄네 묘’라는 4기의 묘가 전해오고 있으며 이괄의 난이 있은 후 조정에서 지관을 파견하여 산세를 살펴 본 후 이 산의 혈은 호랑이 혈인데 건너편 운봉산 밑 안터 마을이 호랑이에 쫓기던 개가 반항하는 형국이라 호랑이혈 구실을 못하며, 또한 왕봉과 양각산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삽재라는 고개라서 화산은 꽂아 놓은 꽃에 불과하여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할 형국이라 판단, 안심하고 돌아갔다는 전설도 있다.
○왕봉산 : 화산을 왕봉산이라고도 부른다.
○우물산 : 화산 마을 북쪽에 내민 산줄기, 화산 마을 가운데로 내민 산줄기이다.
○운봉산 : 삿갓재 마을 서쪽에 있는 웅천읍 성동리, 대창리, 주산면 창암리와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높이는 339.2m이다.
○운봉암 : 운봉산 정상 남동쪽에 있던 절. 이 암자에 이씨 성을 가진 여자주지스님이 있었으나 1960년대 건너편 능굴절로 옮겨 간 후 암자는 없어졌다.
○원뚝 : 화산내 마을 앞 제방뚝.
○이괄네 묘: 화산마을 북쪽 새토백이에 있다.(역사 편에서 설명함)
○이미기바위 : 정판보 위에 있던 부위. 지금은 없어졌다.
○작은 삿갓재 : 삿갓재 마을의 북쪽 마을, 안태라고도 부른다.
○절터굴 : 화산 마을 서쪽, 내 건너에 있는 골짜기, 옛날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정판들 : 화산 마을 동쪽 들, 정판보에서 물을 댄다.
○정판보 : 화산 마을 동북쪽에 있는 보, 화산 앞들에 물을 댄다. 옛날부터 있었으나 1987년 큰 홍수가 지난 다음 튼튼한 시멘트 보를 만들었다.
○큰 삿갓재 : 화평리 남쪽, 삿갓재 동북쪽에 있는 마을.
○퇴끼바위 : 운봉산 동쪽에 있는 바위, 상투바위의 동쪽이다.
○퇴끼봉 : 작은 삿갓재(안태)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 창암리와의 경계이다.
○평리(坪里) : 삿갓재 마을의 옛 이름.(평촌(리)→약현→화평1리)
○평촌(坪村) ; 평리와 같은 이름.
○화산(花山) : 화평리 북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면서 마을 뒷산의 이름이다.
화산이라는 산 아래에 화산마을(화산내마을)이 있고, 마을 앞에 화산들, 이 모두를 감싸고 U자형으로 흐르는 냇물을 화산내라고 한다. 산이 왕봉이라는 한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어 왕봉산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긴 산줄기가 왕봉(王峯)으로 뭉쳤다가 끝나는 산자락 남쪽 부분을 맑은 물이 그림처럼 휘어 감고 돌아 흐르니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葬風得水)의 명당형국이라서 이산의 이름도 화산(花山)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앞의 왕봉에서 설명했듯이 화산이 꽂아놓은 꽃이라서 큰 인물도 안 나오고 또한 명당이 갖추어야할 좌청룡 우백호 중 좌청룡이 없어 부자가 안 나온다는 설도 있다.
○화산내(川) : 화산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냇물, 매바위에서 부터 화산(왕봉)을 휘어감으며 U자형으로 흘러 웅천읍 성동리로 들어간다.
○화산내(마을) : 화산 마을의 다른 이름.
○화산리(花山里) : 화산내 마을의 한자 표기.
○화산부락 : 화산리의 다른 이름, 화평 2리의 옛 이름.
○화산보 : 화산 마을 동쪽에 있던 보, 현재는 없어졌다.
○화평 1리 : 큰 삿갓재와 작은 삿갓재를 합한 행정리(1반 삿갓재, 2반 안태)
○화평 2리 : 화산 마을 전체를 말하는 행정리
※이 지명에 관한 글은 보령시에서 1998년에 발간한‘보령의 지명’책자에 수록한 된 것을 기초로 작성하였으며 현지조사로 약간의 수정을 한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06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
마을에 아기울음소리가 사라진지는 오래된 이야기이고, 주산면 전체로 보아도 출생신고가 한해에 7∼8명밖에 안되며, 어린이들이 없어 초등학교에 졸업생보다 입학생수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게 대부분의 농촌현상이다. 젊은이들은 살길을 찾는다고 떠나거나, 자녀들 교육을 위해 떠난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도시로, 도시로 떠나고 나이 많은 세대들만 남아 농촌을 지키고 있다. 오죽하면 노인회관(마을회관)에 가면 70대가 젊은이라서 물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농담이 아닌 서글픈 현실이다. 한해가 다르게 줄어드는 인구, 점점 피폐해지는 농촌을 활성화 시킬 방안은 없을까?
태어나는 아기는 없고, 새롭게 이사 오는 사람도 없고, 노인들은 한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농촌의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아직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삿갓재와 작은 삿갓재(화평 1리)에 38명, 화산마을(화평 2리)에 32명 그분들의 이름을 이곳 마을지에 남겨놓는 것도 뜻이 깊을 성 싶다.(이름 생략)(끝)
※참고문헌 등
○문헌 : 보령군지(1991년/ 보령군), 보령의 지명(1998/ 보령시), 보령의 동제(2005/ 대천문화원), 보령의 고인돌(2000/ 대천문화원, 보령문화연구회), 보령문화제14집(2005/ 보령문화연구회), 보령문화 제23집(2016/ 보령문화연구회), 구슬뫼이야기(2005/ 주산면), 금령김씨 족보.
○자료협찬 : 보령시청 산림공원과, 주산면사무소
○도움말씀 주신 분 : 김낙규, 김동윤, 김선흠, 김진옥, 백승국, 이당우, 조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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