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문화원에서
2019년에 <보령의 마을1>을 발간하였다
미산면늑전리, 오천면 소성리,
주산면 화평리, 남포면 창동리 등
4개마을의 역사, 문화, 자연, 교통, 환경 등을
수록한 마을지이다.
여기에 주산면 화평리 부분만 올려본다.
01.자연환경
1)위치
화평리는 주산면 11개 법정리 중 하나로 화평1리와 화평 2리의 두 개 행정리로 나눈다. 그중 화평1리는 큰삿갓재, 작은삿갓재(안태) 등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화평1리는 화산 또는 화산내라고 하는 한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1리와 2리는 화산내(웅천천 상류)라고 하는 하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화평들과 화산들 등 들판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자리한 채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있다.
북으로는 왕봉산(화산/해발239m))이라는 작은 산을 사이로 웅천읍 평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운봉산(해발337.3m)을 경계로 웅천읍 성동리와 인접하고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주산면 창암리 남전마을과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주산면 삼곡리, 그리고 동쪽으로는 주산면 동오리와 경계를 이룬다.
한편 주산면 소재지에서 미산면으로 이어지는 군도1호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으며, 보령댐 물빛공원에서 매바위를 거쳐 삽재를 넘어 웅천읍 평리로 이어지는 도로가 잘 만들어졌고, 댐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도로까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2)지형
화평1리는 운봉산을 뒤로 하고 마을 앞에 유유히 흐르는 화산냇물로 인하여 배산임수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면모를 과시하여 왔으며, 화평 2리는 웅천천의 일부 인 화산내라는 큰 냇물이 왕봉산자락에 펼쳐진 화산내마을(냇물도 화산내, 마을 이름도 화산내)과 화산들을 감싸면서 U자형으로 돌고 있어 예로부터 세칭 명당이라 하여 풍수지리학자들의 관심을 모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화산내를 막아서 보령댐을 만들어 충남 서부지역 7개시·군 즉, 보령을 비롯하여 서천, 홍성, 청양, 서산, 당진, 예산 등에 생활용수와 공업용수 그리고 일부 농업용수까지 공급하고 있지만, 아주 먼 옛날부터 이 마을뿐만 아니라 동오리, 삼곡리 나아가 웅천읍 동부와 중앙부일원까지 그야말로 이 냇물은 주변지역의 젖줄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화평리는 가까운 동오리, 삼곡리 와 더불어 일찍이 풍부한 수자원과 사질양토의 기름진 문전옥답이 형성되어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한 흔적들이 엿보이는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3)자연재해와 자원
(1)자연재해
화평 1리와 2리 마을을 양쪽으로 두고 사이를 통과하여 흐르는 화산냇물은 인근지역의 젖줄이지만, 반면에 여름철 큰비가 내리면 다리가 떠내려가고, 냇둑과 논둑이 무너져 모래와 자갈이 밀려 막대한 피해를 주는가 하면 며칠씩 학교에 못가 애태우는 일이 흔하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인명까지 앗아가는 피해원이 되기도 하였다. 홍수가 나면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고, 논과 밭은 온통 모래와 자갈로 덮여 일 년 농사를 망침은 물론 경작지 자체가 엉망진창이 되어 복구 작업에 크게 애를 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피해가 막심하다보니 화산내의 하류에 있는 배챙이들의 논과 밭들은 인기가 없어 팔려고 내어놓아도 팔리지가 않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근래에 일어났던 홍수만 해도 1971년, 1979년, 1987년, 1995년 등 공교롭게 8년 주기로 홍수가 찾아와 피해를 주었으나 그 후로는 보령댐이 건설되었고, 또한 하천가꾸기 사업 즉, 치수가 잘 되어 아직은 화산내 일대에 홍수피해가 없었다.
한편 지금까지 화산내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는
①일제강점기인 1910년경 화산에 살면서 삿갓재서당에 가서 학동들을 가르치던 훈장선생님(김○○)이 큰비가 내린 직후 무리하게 냇물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변을 당한 사건,
②역시 일제강점기에 화산마을에 살면서 좌익 활동을 하던 황○○씨가 집을 나가 만주 등지로 떠나자 그 부인이 홧김에 화산냇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
➂1950년대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 김○○군이 물이 넘쳐흐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희생된 사건 등이 있었다. 이 밖에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사람을 구조해낸 일들은 부지기 수였다고 하며
➃익사사건은 아니지만 삿갓재마을 이○○(당시 26세, 남)씨가 1970년 대 여름 어느 날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세차게 내리자 화산내 둑에 매어 놓은 소를 끌러 오려고 나갔다가 벼락에 맞아 숨진 사건도 있었다.
(2)자연자원
①모래·자갈 :
홍수 때만 되면 밀려와 하천범람은 물론 논·밭을 뒤덮는 원인이 되었던 골칫덩어리, 모래·자갈들이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 농로 및 마을안길 확포장, 소교량가설, 암거시설 등등 갑자기 시멘트사업이 많아지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골재로 변했다. 이 마을 저 마을 시멘트를 필요로 하는 사업들이 봇물처럼 터졌으니 골재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화평리마을 뿐 아니라 이웃마을과 먼 마을에서까지 화산내의 골재를 채취해가는 일이 벌어졌다.
새마을사업은 전국적인 개발붐으로 이어지고, 본격적인 산업화시대가 되면서 정부에서 시행하는 대단위 건설 사업들이 늘어나다보니 골재의 수요가 더욱더 많아졌다.
전국적으로 강이나 큰 하천이 있는 곳은 으레 골재채취가 이루어졌고 화평리에도 1980년 전문 골재업자가 보령군청의 허가를 받아 냇물바닥에 밀린 골재를 채취했다. 이때 이를 채취했던 골재업자 이찬형씨(대천거주)는 약 2년간 매일같이 큰 트럭으로 40∼50차씩의 골재를 채취하여 공사장 등에 납품하였다고 회고한다.
그 후 1987년에는 엄청난 비가 내려 화산내가 크게 범람하였는데 이 홍수가 지난다음 농경지에 밀린 모래자갈을 약 2년간 채취했다. 이때 골재업자는 박세규싸(주산거주), 오찬규씨(남포거주), 이규원씨(대천거주)등이었고 이 골재채취는 자연스럽게 1989년 화산들의 경지정리로 이어졌다. 화산내는 1970∼1980년대 새마을 사업장과 대단위 건설공사장 등에 모래와 자갈을 10여 년 동안 공급하는 산업화시대 자원자원의 보고역할을 하였으나 대개의 하천들이 그랬듯이 이곳 화산내도 대대적인 하천 가꾸기 사업으로 홍수의 위험이 사라지고 따라서 더 이상 골재가 밀리지도 않는다.
②석재
화산(왕봉산)의 뒷부분은 자연석 암반으로 이루어진 벼랑이었다. 1980년대 양지석산이라는 업체에서 석산을 개발하여 서천화력 시설공사와 홍원항 시설공사에 3∼4년간 납품하였다. 이때 돌을 채취해간 흔적은 20여 년간 흉물스럽게 방치하였던 것을 2003년 보령시에서 복구사업을 하고 나무를 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곳 자연석 암반은 관광명소로 전해오던‘매바위’로 연결되는데 석재채취업자는 지역의 명물인 이 ‘매바위’까지도 훼손하여 돌을 팔아먹으려 하였으나 지역 명소로 각광받아온‘매바위’를 지키려는 지역주민들의 강렬한 반대로 훼손을 면했던 것이다.
➂소풍지로 이름난 명소
화산내는 상류에 있는 매바위와 함께 학생들의 소풍 고적으로 인기가 많았다. 매년 봄과 가을에는 주산면과 미산면 그리고 웅천읍의 초등학생 및 중학생들이 단체로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 장끼자랑, 레크레이션 등 추억을 쌓았던 곳으로 인기가 높았으니 이 지역의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 몇 차례씩 화산내와 매바위로 소풍을 갔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그들이 자라서 사회생활을 하던 중에 동창회를 하면서 추억에 젖어 이곳 화산내를 다시 찾는 일이 많았으니 객지에 나가 살던 친구들은 화산내가 그리워 반드시 동창모임에 참석한다는 친구들도 많았고, 고향에 사는 친구들은 그런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물고기를 잡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수고로움을 즐거워하기도 하였다.
➃천렵으로 인기 많았던 화산내
화산내의 맑은 물에는 피리를 비롯한 쏘가리, 메기, 뱀장어, 은어, 빠가사리, 꺽지, 중태기, 징게미(새우일종), 참게 등 각종 물고기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시사철 사람들이 찾아와 투망, 쪽대 그물, 피리 등(燈), 피리낚시, 화래 질(횃불을 이용한 물고기 잡이), 벼락고기잡기(햄머로 돌을 내리쳐 그 밑에 숨은 물고기를 기절시켜 잡는 방법) 등으로 물고기를 잡아 현장에서 끓여먹으며 천렵을 즐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친구들끼리, 혹은 직장인들이 개를 잡아 현장에서 끓여먹으며 야유회를 즐기고 화합을 다지는 장소로도 인기가 높았다.
화산내의 하류인 웅천 성동리, 평리, 수부리에는 고급어종인 은어를 잡아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화평리 주민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다만 참게를 잡아 팔아서 가용돈(可用돈/ 가정생활에 조금씩 들어가는 푼돈)에 보태 쓰는 사람들은 있었다. 8월하순경 벼이삭이 패기 시작할 무렵 즉, 처서(處暑)를 지나면 참게들이 모두 냇물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참게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친 다음 그 새끼 참게들은 다시냇물을 따라 올라오는 것이다. 참게를 잡으려면 대나무를 이용한 발을 엮어야 한다. 길게 엮은 발(그이발이라고 하였음)을 냇물을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친 다음 끝부분에 통발을 설치하면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던 참게가 발을 따라 내려오다가 통발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든 것으로 많이 잡히는 날에는 하룻저녁에 100∼200마리씩 잡혀서 그 수입이 쏠쏠하였다고 한다. 특히 비라도 오는 날에는 참게가 많이 내렸고 9월을 지나 10월 늦은 참게들은 11월까지도 내렸다고 한다.
발(그이발)옆에 작은 게막을 지어놓고 호롱불을 밝히며 참게를 잡는 재미에 밤이 지새는 것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도 무더운 여름철이면 화산교 아래나 매바위 근처 다리아래에는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물고기 또는 개를 잡아 천렵을 하거나, 삼겹살을 현장에서 구워먹으며 놀고자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룬다. 또한 마을 바로 옆에 시설된 보령댐과 댐 유수지에 만든 물빛공원, 미산면에 있는 애향의 집(수몰기념관) 등과 연관해서 관광객이 꾸준하게 찾아들며, 특히 벚꽃이 피는 봄철에는 시단위 행사로 추진하는 봄꽃축제까지 어우러져 이를 즐기려는 행락객들로 붐비므로 보령시에서 2011년 12월에 왕봉산(화산)의 동쪽 벼랑인 밤안고랑에 인공으로 폭포를 시설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폭포의 높이는 92m이고, 폭은 3∼12m이며 물을 내리는 시간은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4월∼10월까지는 1일 7회, 40분씩, 11월은 1일 5회, 40분씩이고, 날씨가 추운 12월∼다음해 3월까지는 가동하지 않는다.
02.인문환경
1)인구
(1)조선시대 인구
여지도서(輿地圖書/1765)에 의하면 화산리(현재 화산 2리)는 91호에 남자 149명, 여자 184명이며 평리(현재 화산1리)는 20호에 남자 39명, 여자 45명이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주산면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
면별 | 마을명 | 호수(호) | 인구수(명) | ||
계 | 남 | 여 | |||
계 |
| 972 | 3,887 | 1,693 | 2,194 |
습의면 (習衣面) | 소계 | 455 | 1,906 | 887 | 1,019 |
농암리(籠巖里) | 30 | 137 | 61 | 76 | |
심동리(深洞里) | 45 | 184 | 86 | 98 | |
회룡리(回龍里) | 35 | 168 | 86 | 82 | |
야관리(野舘里) | 85 | 442 | 185 | 257 | |
구산리(龜山里) | 59 | 187 | 88 | 99 | |
신촌리(新村里) | 56 | 199 | 83 | 116 | |
유곡리(柳谷里) | 47 | 185 | 92 | 93 | |
외증산리(外甑山里) | 55 | 230 | 119 | 111 | |
내증산리(內甑山里) | 43 | 174 | 87 | 87 | |
불은면 (佛恩面) | 소계 | 517 | 1,981 | 806 | 1,175 |
금당리(金塘里) | 10 | 37 | 20 | 17 | |
황성리(篁城里) | 73 | 287 | 128 | 159 | |
동곡리(東谷里) | 65 | 280 | 115 | 165 | |
정곡리(井谷里) | 38 | 152 | 54 | 98 | |
내동리(內洞里) | 69 | 257 | 109 | 148 | |
화산리(花山里) | 91 | 324 | 140 | 184 | |
평리(坪里) | 20 | 75 | 30 | 45 | |
역리(驛里) | 116 | 464 | 171 | 293 | |
주렴산리(珠濂山里) | 15 | 53 | 20 | 33 | |
연암리(鳶巖里) | 20 | 52 | 19 | 33 |
위 표에서 보면 마을별 인구수가 불은면의 역리와 습의면의 야관리에 이어서 화산리의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음을 알 수 있다(가구 수는 역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음). 역리는 남전역(藍田驛)이 있었으므로 관리들 그리고 유동인구와 관련해서 인구가 많았을 수 있고, 야관리는 큰길가에 위치한 곳으로 길손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막거리 등 상인들이 많이 거주하였을 수는 있지만, 이곳 화산리는 조용하고 외진 마을인데 왜 인구가 많았을까?
위 지형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풍부한 수자원과 기름진 옥토로 살기 좋을 뿐 아니라, 화산(왕봉산)과 화산내가 그럴 듯하게 어우러진 속칭 명당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2)인구변화
연도별 | 주산면 | 화평리 | ||||
계 | 남 | 여 | 계 | 남 | 여 | |
2000 | 4009 | 2026 | 1983 | 158 | 77 | 83 |
2001 | 3861 | 1934 | 1927 | 139 | 66 | 73 |
2002 | 3704 | 1849 | 1855 | 139 | 65 | 74 |
2003 | 3558 | 1792 | 1766 | 130 | 61 | 69 |
2004 | 3477 | 1751 | 1726 | 121 | 56 | 65 |
2005 | 3363 | 1689 | 1674 | 111 | 51 | 60 |
2006 | 3268 | 1634 | 1634 | 115 | 52 | 63 |
2007 | 3230 | 1598 | 1632 | 110 | 48 | 62 |
2008 | 3154 | 1552 | 1602 | 110 | 49 | 61 |
2009 | 3017 | 1481 | 1536 | 101 | 46 | 55 |
2010 | 2997 | 1447 | 1520 | 103 | 45 | 58 |
2011 | 2980 | 1460 | 1520 | 102 | 46 | 56 |
2012 | 2989 | 1412 | 1486 | 92 | 40 | 52 |
2013 | 2829 | 1384 | 1445 | 91 | 40 | 51 |
2014 | 2764 | 1352 | 1412 | 90 | 38 | 52 |
2015 | 2699 | 1312 | 1387 | 90 | 38 | 52 |
2016 | 2662 | 1287 | 1375 | 87 | 36 | 51 |
2017 | 2609 | 1265 | 1344 | 79 | 33 | 46 |
2018 | 2585 | 1264 | 1321 | 85 | 36 | 49 |
(3)현재인구
마을별 | 가구수 | 인구수 | ||
계 | 남 | 여 | ||
주산면 | 52 | 70 | 29 | 41 |
화평1리 | 34 | 38 | 18 | 20 |
화평2리 | 18 | 32 | 11 | 21 |
※이 표를 보면 가구당 식구 수가 1.35명이 채 못 되어 1인 가구가 많음을 알 수 있다.
(4)연령별인구
마을 | 성별 | 10대 | 20대 | 30대 | 40대 | 50대 | 60대 | 70대 | 80대 | 90대 |
계 | 남 | 1 | 1 | 2 | 1 | 6 | 7 | 3 | 6 | 1 |
여 |
| 4 |
| 1 | 8 | 6 | 9 | 11 | 2 | |
화평1 | 남 |
|
| 2 |
| 3 | 7 | 2 | 3 |
|
여 |
| 1 |
|
| 4 | 6 | 4 | 6 |
| |
화평2 | 남 | 1 | 1 |
| 1 | 3 |
| 1 | 4 |
|
여 |
| 4 |
| 1 | 4 |
| 5 | 7 |
|
※위 연령별 인구 표를 보면 어린이나 젊은이들 그리고 장년층인 40대까지도 그 수가 적고 고령층이 주를 이루어 화평리에도 다른 농어촌지역과 마찬가지로 초 고령화 현상을 알 수 있으며 특히 고령일수록 여자가 많음은 여자수명이 남자보다 길다는 것을 보여준다.
2)가옥
(1)가옥의 특색
보령지방의 전통가옥은 대들보 아래에 일렬로 배치한 ‘일자형(一字型)’ 가옥에 속한다. ‘안방’이나 ‘윗방’의 뒤에 ‘골방’이라는 작은 방을 두기도 하는데 대들보를 중심으로 대칭되게 두는 게 아니라 안방이나 윗방에 딸린 작은 공간정도로 쓰기 때문에 이들도 일자형 집이라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자형을 ‘이자형(二字型)’ 또는 ‘꼬패집’이라 부르는 ‘ㄱ’자형으로 짓기도 하는데, 이곳 화평리에는 일자형 가옥이 8채 남아 있으나 2채는 빈집으로 묵고 있어 곧 사라질 것 같다. 이자형은 한 채 남아있고 ‘ㄱ’자형은 5채가 남아있다. 꼬패집은 충남북부지역의 가옥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한다. 우리지역 꼬패집은 전통적으로 별도의 건물을 지어 원채와 어울려 꼬패집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며 이때 별도로 짓는 아래채(사랑채라고 부르기도 함)를 사랑방 또는 행랑방, 때에 따라서는 외양간으로 쓰기도 하였고, 헛간을 겸해 농기구 또는 겨울용 땔감 등을 보관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농가에서는 헛간을 별도로 지어 나뭇간, 외양간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2)가옥의 변화
전통가옥은 안방이 좁아 새로운 문화의 물결인 tv를 시청하기에 불편함으로 안방 넓히기 작업을 했다. 뒷마루나 골방을 없애고 안방을 넓히는가 하면 안방과 윗방을 터서 한 개의 방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대개 농어촌이 그러했듯이 전통가옥은 광풍처럼 불어 닥친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바람을 타고 초가지붕을 함석과 스레트로 개량하는 지붕개량사업(정부에서 필요자금의 70%를 1년 거치 3년 무이자 상환으로 융자해 주었음)을 필두로 담장개량, 뜰팡개량, 부엌개량 등 가옥의 구조를 바꾸는가 하면, 주민소득이 점점 높아지자 정부에서도 취락구조개선, 주택개량사업 등 더욱 적극적인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지원하였고, 이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주민들은 수 백 년 살아온 불편한 전통가옥을 헐어버리고 박공형 주택이나 스라브 집을 짓는 등 아예 현대식 주택으로 바꾸어가므로 전통가옥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이곳 화평리에도 홍판서댁이라 부르던 집과 함께 2채의 큰 기와집이 1960년대까지 건재 하는 등 전통가옥들이 보존되어 왔으나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사라지고 변형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떠나고 고령층만 사는 농촌에는 집을 다시 지을 형편이 안 되어 옛날 가옥을 변형시킨 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비록 변형되긴 하였어도 전통가옥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있으나 그런 집들도 공가로 비어 있는 집이 있고 대개는 많이 퇴락해 있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지는 의문이다.
3)개발사업
(1)새마을사업
새마을운동은 1971년에 시작한 우리나라 근대화사업의 시작이다.
근면, 자조, 협동의 기치아래 국민의식을 바꾸어 잘살아보자면서 주민공동으로 생활환경개선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던바, 첫해인 1971년에는 화평1리와 2리에 각각 335포대의 시멘트를 지원받아 시험사업을 하였고, 계속해서 매년 500포대의 시멘트와 철근 1톤씩을 지원받아 농로확장, 마을안길 넓히기, 소교량가설, 소하천정비, 암거시설 등 생활기반사업과 관정, 보시설, 도수로시설 등 소득기반시설과 마을회관, 마을창고, 공동작업장 등 주민공동시설, 그리고 지붕개량, 부속사개량, 변소개량, 담장개량, 부엌개량 등 개인의 주거환경개선사업들도 병행함으로서 10여 년 만에 마을환경과 가정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때 새마을사업으로 시행한 사업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조상대대로 전해오던 화산내의 징검다리를 없애고 현대식 철근콩크리트로 화산내다리를 건설한 것이었으나 이 다리는 1987년 홍수로 떠내려가 보령시에서 정부의 수해복구보조를 받아 122.7m×5m의 현대식 철근콩크리트 화산교를 다시 놓았다.
(2)경지정리
1974년∼1975년 인근 삼곡리, 동오리와 화평리를 합해 동부지역 경지정리가 있었다.
이때 화평1리, 즉 약현들의 경지정리를 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경작로와 용·배수로의 변형 그리고 경작면적의 광역화 등 필요성이 제기되어 2005∼2006년까지 약현들의 재 경지정리를 실시하였으며, 배챙이들은 1987년 웅천, 주산, 미산을 중심으로 큰 비가 내렸을 때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논과 밭은 엉망으로 망가져 버렸으므로 농경지에 밀린 모래와 자갈 등 골재를 채취하고 1989년 수해복구 겸 경지정리를 하였고, 화산들은 1996.11∼1997.5까지 소규모경지정리사업으로 실시했다.
(3)개간사업
1960년대 백창호, 백영호, 이종윤씨등이 속칭 밀가루개간을 1000평정도 했으나 세월이 흘러 다시 산이 되었다.
4)교통통신
(1)교통
①도로교통
조선시대에는 인접한 창암리 남전마을에 이인도(利仁道 조선시대 충청도 中路의 서남부로 연결된 소로)소속의 남전역(藍田驛)이 있어 북쪽의 보령현(保寧縣)이나 남쪽의 비인현(庇仁縣)으로의 왕래는 이곳을 이용하였다.
주변 마을이나 시장, 면소재지, 학교, 기차역 등으로 왕래하는 작은 길로는
○웅천읍 수부리에 있던 고읍면(웅천동부지역으로 수부리에 치소가 있었다고 한다)에서 성동리 → 평리 → 화산 → 동오리 → 미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이용하였고,
○남전역 → 삿갓재 → 선돌마을 → 곰재 → 미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장항선 철도가 개설되고 1931년 간치역이 들어서자 이 길이 간치역까지 연결되어 이용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한편 1914년 주산면사무소가 금암리에 들어서고, 1921년에는 주산 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화평 → 동오 → 삼곡 → 황률 → 금암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생겨 이용을 많이 하게 되었으며, 1933년에는 주산농업중학교(주산중학교전신), 1953년에는 주산농업고등학교(주산산업고등학교전신)가 차례로 생기면서 이 도로는 미산으로 이어져 군도 1호가 되었다. 현재 이 도로에 대천∼미산 간 운행하는 대천여객 시내버스가 1일 9회 들어가고, 8회 나옴으로서 이를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나오는 버스의 횟수가 1회 적은 것은 1회는 노선을 바꾸어 다른 길로 나가기 때문이다.)
시외버스를 이용하려면 주산면 소재지까지 나와야 국도1호가 있어 대천∼장항 간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②철도교통
화평리 주민들은 주산면 황률리에 있는 간치역을 이용하였다. 화평리에서 직선거리로 3km정도 떨어진 간치역은 화평리 마을을 포함한 주산면뿐 아니라 미산면, 서천군의 서면, 비인면 등 4개면 주민들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이 역은 1922년 6월 천안∼온양 간 개통을 시작으로 장항선(長項線)의 마지막구간인 남포∼판교 간 철도가 개통(판교∼장항 간은 1930년 11월 개통)되면서 1931년 8월 1일 문을 열었다(자료: 철도박물관)
1일 1회 왕복열차를 운행하기 시작하여 차츰 횟수를 늘려 나중에는 6회씩 왕복 하였다.
처음에는 증기기관차를 운행하였고 간치역에 물탱크시설이 있어 기차에 물을 공급하였기 때문에 특급열차도 모두 정차하는 중요한 역이었다.(장항선에는 물탱크시설이 장항역, 간치역, 광천역, 예산역, 천안역 등 5개소에 있었음) 그러나 1960년대에 기차가 디젤기관차로 바뀌어 물 공급이 필요 없게 되고 또한 주산 소재지에 생긴 간이역을 학생들과 장꾼들이 이용하자 간치역의 이용객을 급히 줄어들고 1972년 국도의 포장과 함께 점점 육상교통이 발달하자 기차이용객은 더욱 줄어들어 역의 기능은 점진적으로 서천화력에 보내는 석탄을 보관했다가 실어가는 화물 취급 역으로 바뀌더니 2000년대에는 완전히 화물만 취급하게 되었다.
(2)전기, 통신
①전기
화평리에는 1971년 전기가 들어왔다. 면소재지에는 일제강점기에 전기가 들어왔지만 1960년대 중반에 전국 전기보급율이 25.5%, 그리고 농촌지역은 12%에 불과 하였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1965년 12월 30일 농어촌 전기화 촉진법을 공포하고 5개년 계획을 세워 대대적인 전기시설을 추진하였다. 우선 엄청나게 들어가는 시설비용을 정부에서 지원한 다음 30년에 걸쳐 상환한바 상환방법은 매월 전기요금에 조금씩 얹어서 받아내는 형식을 취하였다.
우선 마을마다 추진위원 1명씩을 위촉하여 전기시설사업을 추진하였는데 각 마을마다 추진위원들이 자기마을이 먼저 전기를 놓고자 한전직원들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이는 등 경쟁이 심하였고, 마을마다 사업비는 한정되어 있어 여건이 좋지 않은 마을에서는 50m간격으로 세워야 하는 전봇대를 60m∼70m로 드물게 세우는 일도 있었다. 한전에서는 외선, 즉 전봇대에서 가정의 처마에 설치하는 애자까지만 시설하고 내선은 개인이 책임지고 시설하였고, 각 가정에서는 전기 업 2종 자격을 가진 업자에게 내선시설을 의뢰하였으나 비싼 임금 때문에 전기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직접 시설하기도 하였다.
수 천 년 동안 호롱불이나 등잔불로 살아 온 사람들에게 전기는 광명천지의 밝은 세상을 제공하였지만 전기상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안전사고를 당하기도 한바 전기콘센트에 아기들이 젓가락 따위를 넣어 감전사를 당하는 불상사도 있었는데 삿갓재마을, 이○○(4세남아)가 ‘새끼 꼬는 기계’에 연결하는 콘센트를 잘못 건드려 변을 당하였고, 이웃마을 안굴에서도 5세 남자어린이가 ‘풍구’에 연결코자 마당에 늘여놓은 전기 줄의 콘센트로 감전되어 변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또한 옥외에 전기 줄을 늘여놓고 선풍기나 농기구 등을 돌리다가 합선이 되는 경우, 물에 젖은 손으로 전선을 건드려 혼이 나는 경우 등 그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그런가하면 전등, 선풍기, 농기구 등 무리하게 많은 전기를 사용하다가 과부하로 휴즈가 나갔을 때 전기상식이 전혀 없는 사람은 마을 내 전기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고쳐달라고 의뢰하게 되고 그들이 간단하게 휴즈만 갈아 끼워도 전기가 들어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며 큰 기술자로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반면에 전기상식이 있는 사람들 중 일부 비양심적인 사람은 계량기를 슬그머니 조작해 도전(盜電)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수로(水路)가 인가근처를 지나가는 화산마을이나 동오리, 웅천의 성동리 등에서는 전선을 한 가닥 늘여 속칭 삐삐선(PP선/ polypropylene선)으로 길게 연결한 다음 수로를 따라가며 불법으로 물고기를 감전시켜 잡는 경우 등 몰래 전기를 불법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어 이를 적발하고 막는 일도 한전직원들의 큰 업무였다.
②우편통신
화평리의 우편배달은 1928년 2월 11일 개소한 웅천우편취급소(웅천우편국→웅천우체국→대창우체국)에서 배달하다가(주산면과 미산면까지 배달), 1954년 3월 25일에 주산우체국이 개설되어 주산면과 미산면의 우편물을 배달하였다. 당시에는 시내배달이라 하여 면소재지에는 집배원이 자전거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였으나 그 밖의 마을들은 우편집배원이 무거운 우편가방을 메고 하루 종일 수 십, 수 백리씩 걸어서 편지를 배달하였으며, 주산우체국에서 거리가 멀고 범위가 넓었던 미산면은 하룻밤을 묵어가며 배달하느라 1박2일씩 소요되었다.
또한 그때는 문맹자가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편지를 읽지 못하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 마을 내 글을 아는 사람들이 편지를 대필해주고 읽어주는 일도 흔히 있었고. 편지를 배달해주는 집배원이 읽어주는 광경도 흔히 볼 수 있었으니, 군대에 간 아들이 보낸 편지를 배달하는 집배원에게 읽어달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 때문에 갈 길 바쁜 집배원이 할 수 없이 시간을 빼앗기는 경우도 많았던 시절이다.
➂유선방송
1960년대 초에는 유선방송업자가 면소재지에 방송시설을 갖추어 놓고 각 마을, 각 가정마다 속칭 삐삐선(PP선/ polypropylene선)을 늘여 스피커를 설치한 후 라디오방송 중계와 간단한 대중가요, 민요 등을 보내주는 유선방송 사업이 유행하여 화평리에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름에는 보리, 가을에는 벼로 청취료를 내면서 스피커방송을 청취하였다. 라디오가 귀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집집마다 설치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는 주민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흥겨운 음악과 라디오 연속극은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스파커 앞으로 모이게 하였으며 면사무소나 지서, 예비군 중대 등에서 전 면민에게 알려야 할 공지사항을 유선방송을 통해 전달하기도 하는가 하면, 면소재지에 나갔던 주민이 급히 집에 연락할 일이 있으면 유선방송에 부탁하여 방송을 보내기도 하였고, 심지어 가설극장의 홍보를 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유선방송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데도 유용하게 쓰였으니, 삿갓재에 사는 김동윤(65세)씨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어느 토요일 방과 후 학교에서 집으로 가지 않고 주야리의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서 한 마을에 사는 사촌 누이에게 그 사실을 집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누이가 이를 깜박 잊고 전하지 않았다. 이를 까마득히 모르는 부모님들은 저녁이 되어도 학교에 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겁이 덜컥 났다. 당시에는 “용천배기(문등병환자)가 어린아이의 생간을 빼먹으면 낫는다.”는 터무니없는 속설이 회자되어 어린아이 혼자서 진달래꽃을 꺾으러 산에 가면 용천배기가 잡아 간다는 등 분위기가 불안하던 시절이었으므로 혹시 아들이 그런 변을 당한 게 아닐까하고 크게 걱정되어 면소재지에 있는 유선방송실을 찾아가 면 전체에 방송을 하는 바람에 이를 듣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갔다고 회고한다.
그때의 스피커는 고장이 잦고 또한 늘여놓은 유선이 비바람에 끊어져 며칠씩 방송을 못 들어 주민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일이 많았고, 갑자기 접하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을 못하는 노인들로 인하여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시절에 전하는 우스갯소리 한마디를 소개하면 ‘어느 집에 스피커를 놓은 지 3일 만에 고장이 났다. 그 집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내 그럴 줄 알었다니께. 즤덜이 천하장사라두 되남, 밤낮읎이 뛰구 놀적이 알어봤지, 메칠을 잠두 안자구 뛰구 노니께 빙 안나구 배겨?”’(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저희들이 천하장사라도 되는가, 밤낮 없이 뛰고 놀 때 알아봤지, 며칠을 잠도 안자고 뛰고 노니까 병 안 나고 배겨?)
그러나 1970년대에는 라디오 보급이 많아지고, 1980년대에는 TV가 보급되면서 방송의 대중화가 이루어짐으로서 유선방송사업은 서서히 사라졌다.
➃전화
1970년경 각 리 단위에 전화 1대씩을 보급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썼다. 1975년 주산우체국의 전화가입자수가 업무용 69대, 가정용 17대, 공중용 1대(보령시 통계연보)였으니 대개의 마을에서 이장 댁이나 반장 댁에 전화를 한 대 놓고 마을사람 전체가 필요시에 가서 사용하였으며 먼데 출타했다가 집에 연락할 일이 있거나 친척집에서 급히 전할 말이 있으면 전화를 걸어 “○○○씨 좀 바꿔주세요” 라고 하면 이장댁 가족이 달려가서 알려주면 받았고, 마을마다 이장댁에 확성기 방송이 설치되자 이장님이 동네 확성기방송으로 “○○○씨 전화 왔어요.” 하고 알려주어 뛰어가서 받곤 하였던바 동네방네 울려 퍼지던 확성기방송소리가 어색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때 삿갓재마을에는 백광현씨댁에, 그리고 화산내 마을에는 이상설씨댁에 전화를 놓았었다.
03.역사
1)문헌에 나오는 화평리
(1)여지도서(輿地圖書)
화산리가 남포현 치소로부터 30리가 떨어져 있고, 91가구에 남자140명 여자 184명 살고 있으며(花山里自官門距三十里編戶九十一戶男一百四十口女一百八十四口), 평리는 치소로부터 35리 떨어져 있고 20가구에 남30명, 여45명이 살고 있다.(坪里自官門距三十五里編戶二十戶男三十口女四十五口)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능묘(陵墓)란에 고병조참판 이줄의 묘가 치소로부터 30리 떨어진 화산의 남쪽 기슭에 있다.(故兵曹參判 李茁墓 在縣南三十里 花山南麓)라고 기록하고 있다.
(2)호서읍지(湖西邑誌), 남포읍지(藍浦邑誌)
여지도서와 같이 화산리는 30리, 평리는 35리 떨어져 있다고 되어 있으나 가구 수와 인구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고 병조참판 이줄의 묘가 있다.(故兵曹參判 李茁墓 在縣南三十里 花山南麓)는 내용은 똑 같이 실려 있다.
(3)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국립중앙도서관소장, 1911년 조사)
○마을이름 : 화산리(花山里), 평촌(坪村)
○들이름 : 화산평(花山坪)
○보이름 : 화산보(花山洑)
○냇물이름 : 화산천(花山川)
○주막이름 ; 화산주막(花山酒幕), 평촌주막(坪村酒幕)
(4)충남도지(忠南道誌)
고 병조참판 이줄의 묘가 있다.(故兵曹參判 李茁墓 在縣南三十里 花山南麓)라고 실렸다.
(5)구군지(舊郡誌)외 여러 향토지
남포군(藍浦郡) 불은면(佛恩面)지역으로 화산리(花山里)와 평촌리(坪村里)로 되어 있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일제개편 시 화산리와 평촌리, 그리고 천곡리(泉谷里), 정곡리(井谷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화산(花山)과 평촌(坪村)의 이름을 따서 화평리(花坪里)라 하여 주산면(珠山面)으로 편입하였다. 라고 실려 있다.
2)일제 강점기의 화평리
1914년 행정구역개편 이후 화평리에 1명의 구장(區長)을 두고 면사무소 를 통한 일제(日帝)의 대주민 지시사항 하달, 1939년 시행된 ‘국민강제징용’, 1941년 시행된 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한 ‘금속회수령’,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후 본격화된 위안부모집 등 주민수탈행정을 펼치는 창구역할을 담당케 했다.
이때 화평리에서도 김철규씨, 이종운씨, 김돈흠씨, 김형철씨, 이종경씨 등 5명이 징용으로 끌려가 남양군도 등지에서 고생하다가 다행히 살아 돌아왔으나 이종운씨는 징용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돌아온 후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으며, 마을에서는 금속회수령에 따라 집집마다 솥이나 수저, 놋요강 등 쇠붙이를 거두어 공출하는 등 불편이 컸었다.
한편 웅천 구룡리출신 황석현(黃奭顯, 1886∼1945)이 1924년 분가하면서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는데 남포청년회 평의원, 남포소작회 상무위원, 화평리 진흥회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청년계몽활동, 소작관계개선 등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전후로 청년회와 소작회의 성격이 사회주의와 항일운동으로 변화하면서 황석현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일본을 왕래하고 만주로 가서 사회주의계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34년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1년을 언도받아 복역한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말 경에 또 다시 체포되어 대전고등법원의 판결로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5월 9일 60세의 나이로 옥중 사망하였다. 황석현은 2019.8월 15일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건립에 이바지한 공로로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그가 만주로 갈 때 부인과 아들2, 딸2명이 같이 갔으나 일본 패망 후 부인과 차자는 돌아왔고 장자인 황학주는 소련으로 들어가 소련군에 입대하였다가 제대 후에도 계속 소련(우즈베끼스탄)에 살았는데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고향(웅천, 구룡)의 일가들과 연락이 되어 1991년 다녀간 일이 있다.
3)6.25와 화평리
6.25한국전쟁당시 화산마을 내 큰 기와집(홍순영씨댁)에 중대급 정도의 인민군이 주둔하면서 소년들을 모아놓고 북한 노래를 가르치고, 씨름을 시키기도 하였으나 마을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큰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다만 부녀자들에게 빨래를 시키거나 가축을 일부 잡아먹는 일은 있었다고 하며 삿갓재마을에도 일부 인민군이 주둔하면서 화산마을에서와 같은 행동을 하였는데, 얼마 지난 후 더 많은 인민군들이 들어올 것처럼 큰 집을 몇 군데 비우라고 하더니 국군에 밀려 북쪽으로 쫓겨 가는 바람에 철수해버렸다.
한편 6.25한국전쟁에 참여한 마을주민은 김상규씨, 김동규씨, 김만춘씨, 박관우씨, 김주흠씨, 이문영씨, 임윤학씨, 김만춘씨, 이영재씨 등 9명이었으며 그중 김만춘씨와 이영재씨는 전사하고 나머지만 돌아왔다. 전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이상천씨는 6.25전쟁 발생 직전에 행방불명이 된 채 소식이 없어 월북한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4)마을행정
(1)일제강점기의 마을행정
위에서 기록한 제2)항 ‘일제강점기의 화평리’와 같음.
(2) 해방후의 마을 행정
해방 후에도 종전과 같이 구장을 두고 국가시책홍보, 주민계몽 등 행정을 추진하다가 1951년경부터는 구장(區長)이라는 명칭을 이장(里長)으로 바꾸었다. 1970년 7월 1일 화평리라는 법정리(法政里)를 두 개의 행정리(行政里)로 나누어(分區) 큰 삿갓재 마을과 작은 삿갓재 마을을 합해 약현리(篛峴里), 화산내 마을은 화산리(花山里)이라 하여 각각 이장 1명씩을 두어 행정을 추진하였으며 약현리를 약현부락, 화산리를 화산부락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의 시작으로 마을마다 새마을지도자 1명, 부녀회장(여자새마을 지도자라고도 함)1명씩을 주민 자체적으로 선출하여 이장과 함께 새마을 사업을 추진하고 마을행정을 함께하도록 하였으며 1975에는 부녀회장을 부이장(副里長)으로 임명하여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1980년 10월에는 전국적인 행정리의 명칭변경에 따라 약현리는 화평 1리, 화산리는 화평 2리라고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이장의 임명
이장의 선출은 주민회의에서 선출하여 마을 개발위원회명의로 면장에게 보고하면 2년 임기(2008년부터는 3년)로 발령하였으며 임기가 지나 재임명 하는 때에도 개발위원회의 추천서를 받는다. 마을에 따라서는 이장을 서로 하려고 주민 간 알력이 있는 경우도 있었는가하면 어느 마을에서는 이장을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하여 순번을 정하여 놓고 차례로 하는 곳도 있었다. 특히 2개의 토착 성씨가 있는 마을에서는 서로 자기 성씨에서 이장을 해야 한다며 대립하는 마을도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60세 이하로 연령제한이 있었으나 농촌의 고령화가 심하여 지금은 연령제한이 없으며 나이 많은 사람 중에도 이장 할 만 한 사람이 없어 혼자서 오랫동안 이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4)이장의 위상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 문맹(文盲)율이 높고 민도가 낮았던 시절에 이장은 상당한 지식층의 인사가 담당하였으며 마을에서 그 위상이 당당했다. 따라서 옛날에는‘이장 댁 며느리만 들어가도 시집 잘 가는 것’이라는 속담까지 있었다.
1950년∼1970년대까지만 해도 주민세, 가옥세(현 재산세), 농지세 등 각종 세금을 비롯하여 수세, 적십자회비, 산림조합비, 도로부역대, 기타 여러 가지 잡종금들을 이장이 거출하여 면직원에게 인계하고, 새마을사업이나 소득사업, 비료의 공급 등 행정의 수혜대상주민을 선정하는가 하면, 풍수해의 피해, 가축통계조사...등등 행정 최 일선에서 이장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이장 아래에 주민 자체적으로 반장을 두고 이장의 일을 보조하였던바 화평 1리에는 2개의 반을 두었다. 보수는 전통적으로 모조(耗條)라 해서 각 가정마다 일 년에 두 번씩 가을에 벼, 여름에 보리를 걷어 보수를 주었으나 1970년대부터 정부에서 일정액의 수당을 지급함으로서 이장모조는 서서히 사라졌다.
(5)이장명단
①일제강점기 화평리구장 : 이남석, 김억규, 백창호
②독립 후∼ 1970년 6월 30일까지(분구전) 화평리장 : 백창호, 이정우, 김억규, 황철주, 김중흠
➂1970.7.1.이후(분구후) 화평1리장 : 김중흠 이상필 백영호, 명용구 김영필, 김동완 이상건 이당우 白明鎬 金吉洙 李相乾, 權英植, 白雲鎬(2019년 현재 이당우)
➃1970.7.1.이후(분구후) 화평2리장 : 황의용, 박봉준, 이성근, 김낙규, 김진옥, 이억규(2019현재 김진옥)
5)이괄네 묘
1506년에 일어났던 중종반정(1506년 연산군을 폐위시킨 사건)이후인 1508년 이줄(李茁/ 중종반정협조여부로 논쟁)이라는 사람이 남포로 귀양 왔다가 2년 여 만인 1510년 11월에 경기도로 이배되었다. 그 후 1527년 11월까지도 그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만 더 이상의 기록은 없어 귀양살이 중 사망한 후 남포의 화산에 묻혔는지, 귀양이 풀려서 남포에 돌아와 살다 죽어서 이곳 화산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남포유배로 2년 여 살았기 때문에 인연이 되어 화산에 묻혔음은 물론이려니와 그 인연으로 하여 그의 후손들이 남포에 100여 년 동안 살다가 1624년경에 떠난 것으로 짐작된다. 고성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줄의 아들 응(應)은 목사를 지냈고 손자 충(忠)은 진사시, 증손 당(讜)은 별시문과, 현손 관(灌)은 사마시, 현손 필(滭/보령의 등과유생에서도 확인됨)은 식년시에 급제하였으며 증손자 집(諿/ 灌과 滭의 父)은 남포의 광주안씨와 혼인을 맺어 사위 안대진(安大進/알성문과)을 사위로 맞아 외손 안우성(安遇聖/식년진사)을 배출하는 등 쟁쟁한 권문세가로서 그 위세가 대단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다가 평정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동안 세를 누리
며 살던 이줄의 후손들도 큰 타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괄과 이줄은 같은 고성이씨(古城李氏)로서 이괄과 이줄의 증손 이집은 12촌 사이였다. 역적의 집안은 삼족을 멸하고 일가친척도 화를 입었으며, 문중에서 역적과 같은 이름자를 피하고 항렬자도 바꾸는 등 당시의 살벌한 사회분위기 속에 후환이 두렵고 불안하여 마을을 떠나려 하였을 것이고, 또한 공교롭게도 이줄의 손자 중에 이괄(李佸)이라는 역적 이괄(李适)과 동명이인이 있어 사람들의 괄시와 관청의 감시 등 불안요소가 가중되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이때의 고성이씨들이 얼마나 불안했던가는 이집(李諿/이줄의 증손)의 외손자 안우명(安遇明)은 당시 웅천 소황리에 살았는데 고성이씨인 어머니를 모시고 역시 고성이씨인 아내와 함께 성주산 골짜기에 숨어 들어가 숯을 구우며 살다가 그곳에서 죽고 아들(安取善)이 사면령이 떨어진 후에 소황리에 돌아와 세거했다고 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연들도 인하여 이줄(李茁)의 묘와 그의 아들(應), 손자(保)내외 등 4기의 묘가 남아 오늘에 전하고 있으며, 후손들은 남포를 떠난 후에도 계속하여 화산마을 주민 중 특정인을 선정해서 묘역관리를 맡겨왔으나, 1980년대 당시 관리인이 죽은 후 묵은 묘가 되어버렸다. 그 후 2001년 후손이 다시 나타나 마을사람에게 의뢰하여 관리를 해오고 있으나, 경매로 새롭게 산을 사들인 산주(山主)가 부근에 묘역을 설치하고 수종(樹種)갱신 및 약용식물을 재배하는 등, 산을 가꾸는 바람에 이괄네 묘역은 관리가 허술해졌다. 이 묘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이괄네 묘’라고 부르는 바, ‘이괄네 묘’라 함은 역적 ‘李适네 묘’가 아니라 이줄의 후손 중 공교롭게도 이괄(李适)과 동명이인 ‘李佸’이 있었기에 ‘李佸네 묘’라고 부른 것이 전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묘역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전설 두 가지가 있어 소개한다.
(1)전설1
‘이괄네 묘’는 호랑이 심장혈이어서 후손들이 들어가면 죽기 때문에 성묘를 하려면 3km정도 떨어진 삼곡리 월현마을에서 제를 올리고 간다는 전설 :
후손들이 역적의 집안으로 후환이 두려워 떠났기에 자신들의 신분이 밝혀지는 것을 꺼려 묘역에 나타나기를 피하고 멀리서 제를 올렸을 것이고 이를 보는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면 사실대로 이야기 할 수 없으니까 “묘역에 들어가면 죽기 때문에 그런다.”라고 대답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1950년경까지 후손들이 그렇게 제를 지내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그렇게 멀리서 제를 지내는 전통이 300여년 이어져 왔기 때문에 그런 전설이 생겼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2)전설2
‘이괄네 묘’의 장군석(문인석)을 세워놓으면 마주 바라다 보이는 동오리 선돌마을의 여인네들이 바람이 나고, 장군석을 넘어뜨려 놓으면 산 아래 화산내 마을의 남정네들이 바람이 난다는 전설 :
그 전설 때문에 동오리 사람들이 자기네 동네 여인들이 바람이 날까 두려워 밤에 몰래가서 장군석을 넘겨 트려 놓고 돌아가면, 화산내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발견하고는 자기마을 남정네들이 바람이 날까봐 세워놓았다는 것인데. 옛날부터 이렇게 ‘세웠다 넘겨 트리기’를 반복해 왔다고 한다. 당초에는 이 묘역에도 잘 갖추어진 석물이 있었을 것이나 상석은 사람들이 가져다가 사용했다는 말이 있고, 비석은 없어져 버렸으며, 지금은 방향이 틀어진 문인석 1기와 목이 없어진 채 묘역 밖에 서있는 문인석 1기, 그리고 약간의 석물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 전설은 관리가 허술한 묘역의 석물을 가지고 짓궂은 청소년들이 장난한 것이 전설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화평리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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