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은 1919.3.16일 밤, 충남 보령시 주산면에 있는 주렴산 정상 국수봉 등 3개소에서 18명의 애국지사가 독립만세를 부른 운동이었으나 지역 향토지를 제외하고 『한국독립운동사』 등 독립운동관련 기록들에는 날자가 다르게 기록되고 애국지사의 수도 6명으로 기록 되는 등 사실과 달라 이를 바로잡아야 하며 참여 애국지사에 대한 대통령표창도 6명만 추서하였으므로 나머지 분들도 마땅히 공적을 인정하여 적정한 표창을 추서해야 할 것이다.
본 독립만세운동의 시기, 인원, 유공자 등을 사실에 맞게 바로 세워야 한다.
1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기록들
1). 지역 향토지(이하 향토지라 한다)
이철원(李哲源) 등 18명이 1919.3.16.일 밤 보령시 주산면 주렴산(珠簾山)의 국수봉 등 3개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3.17일 야룡리 복개봉(覆蓋峯)에서 다시 부르기로 하였으나 대부분 체포되고 붙잡히지 않은 박윤화(朴奫和) 홀로 3.17일 복개봉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참여애국지사: 18인 애국지사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지 | 비고 |
김양제(金亮濟) | 주산면 주야리 | 수형인명부 기록/ 대통령표창 |
박태현(朴台鉉) | 주산면 증산리 | 〃 / 〃 |
박윤화(朴奫和) | 주산면 야룡리 | 〃 / 〃 |
이장규(李莊圭) | 주산면 증산리 | 〃 / 〃 |
이철규(李哲圭) | 주산면 주야리 | 〃 / 〃 |
임문호(任文鎬) | 주산면 주야리 | 〃 / 〃 |
윤기호(尹起鎬) | 주산면 유곡리 | 〃 |
이관규(李觀圭) | 주산면 증산리 | 〃 |
이성규(李成圭) | 주산면 증산리 | 〃 |
이성수(李性秀) | 주산면 증산리 | 〃 |
이홍규(李洪圭) | 주산면 증산리 | 〃 |
박성하(朴性夏) | 주산면 주야리 | 기록 확인 못함 |
이항규(李恒奎) | 주산면 증산리 | 〃 |
최봉규(崔鳳圭) | 주산면 창암리 | 〃 |
신도휴(申道休) | 청라면 내현리 | 〃 |
윤용원(尹用源) | 웅천읍 대창리 | 〃 |
윤천영(尹天榮) | 주산면 주야리 | 미체포 기록 무/ |
이철원(李哲源) | 주산면 증산리 | 미체포 기록 무/ 독립만세주도 |
2).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4월 17일 밤 주산면 증산리(甑山里) 외 2개 처에서 산 위에 큰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이 운동의 주동인물은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 이종연(李鍾淵)으로 동지 5인을 모아 거사하였는데 이로서 그들은 적에게 구금되었다.
※실제와 다른 점: 거사일 1919.3.16.일이 4.17일로 되었으며 주동자가 동지 5명과 함께 즉, 6명이 독립만세를 부른 것으로 되었으나 실제는 18명이 불렀고 주동인물 이종연도 구금된 것으로 되었으나 체포되지 않았다.
3). 충남의 독립운동가(충남역사문화연구운)
1919.4.17일 주렴산에 올라가 국사봉을 비롯한 3개소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군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부르다가 체포되었거나 주렴산에서 만세운동을 부른 후 웅천시내까지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실제와 다른 점: 1919.3.16.일이 4.17일로 되었으며 웅천시내까지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고 했으나 시위행진은 없었다.
4).대한민국독립유공자공훈록(이하 공훈록이라 한다)
주렴산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처벌을 받은 애국지사 11명 중 공적이 크다고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은 6명 의 공적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1)김양제(金亮濟)
충남 보령(保寧) 사람이다. 1919년 4월 17일 보령군 주산면(珠山面) 증산리(甑山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주민들을 규합하여 마을에 있는 주렴산(珠簾山)에 올라가 국사봉(國師峰)을 비롯한 3개의 산봉우리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고 시내로 진출하여 시위행진을 벌이려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해 4월 20일 보령경찰서(保寧警察署)의 약식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2)박태현(朴台鉉)
충남 보령(保寧) 사람이다. 1919년 4월 17일 보령군 주산면(珠山面) 증산리(甑山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여 주민들을 규합, 주렴산(珠簾山)에 올라가 국사봉(國師峰)을 비롯한 3개의 봉우리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군중과 함께 시내로 진출하려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20일 보령경찰서(保寧警察署)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이장규(李莊圭)
충남 보령(保寧) 사람이다. 1919년 4월 17일 보령군 주산면(珠山面) 증산리(甑山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 주민들을 규합하여 마을에 있는 주렴산(珠簾山)에 올라가 국사봉(國師峰)을 비롯한 3개의 산봉우리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로 진출하여 시위행진을 벌이려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 해 4월 20일 보령경찰서(保寧警察署)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4)박윤화(朴奫和)
충남 보령(保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밤에 보령군 주산면(珠山面)에서 이철원(李哲源)과 함께 주렴산(珠簾山)에 올라가 국사봉(國師峯)을 비롯한 3개소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징을 치는 등 시위를 벌였고 3월 18일 밤에는 주산면 야용리(野龍里) 복개봉(覆蓋峯)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하였으나 여의치 못해 진행하지 못하게 되자 홀로 복개봉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바로 일경에 발각되어 피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0일 보령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5)이철규(李哲圭)
충남 보령(保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보령군 주산면(珠山面)에서 이철원(李哲原)과 함께 주렴산(珠簾山)에 올라가 국사봉(國師峯)을 비롯한 3개 봉우리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마을사람들과 시내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4월 20일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보령경찰서에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6)임문호(任文鎬)
충남 보령(保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보령군 주산면(珠山面)에서 이철규(李哲圭)·이철원(李哲源) 등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주렴산(珠簾山)에 올라가 국사봉(國師峯)을 비롯한 3개의 봉우리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징을 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내를 향해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0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보령경철서에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실제와 다른 점: 6명 모두 시내로 진출하려고 시위행진을 벌였다고 되어 있으나 시위행진은 없었다. 거사일을 김양제, 박태현, 이장규는 4월 17일로 되어 있고 박윤화. 이철규, 임문호는 3월 17일로 되어 있으나 거사일은 3월 16일이다. 박윤화가 복개봉에서 홀로 독립만세를 부른 날도 3.18일이 아니라 3.17일이다.
5).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공훈록과 같으나 거사일은 모두 3월 17일로 되어 있다.
※실제와 다른 점: 거사일은 3월 17일이 아닌 16일이며 시내진출은 없었다.
6). 관련유적
(1) 주렴산 기미독립만세 진원지비
위치: 주산면 증산리 산65-1 주렴산 국수봉
내용: 1919.3.16 밤 18의사가 독립만세를 부른 내용과 애국지사 명단
국가 현충시설 23-1-9
(2) 3.1항일지사의거추모비
위치: 주산면 야룡리
181 주산면사무소
내용: 주렴산독립만세 운동의 내용과 애국지사명단 그리고 다른 분야에서 활동한 지사 윤길(尹洁)과 김정제(金廷濟)의 공적
국가현충시설 23-1-3
2. 각 기록의 다른 점
기록별 | 거사일 | 주동자 | 애국지사 | |
향토지 | 19.3.16 | 이철원 | 18명 | |
독립운동사 | 19.4.17 | 이종연 | 6명 | |
충남의 독립운동가 | 19.4.17 | 언급무 | 6명 | |
공훈록 | 김양제,박태현,이장규 | 19.4.17 | 언급무 | 개인공적기록으로 전체숫자 없음 |
박윤화,이철규,임문호 | 19.3.17 | 이철원 | ||
독립기념관 | 김양제,박태현,이장규 | 19.3.17 | 언급무 | |
박윤화,이철규,임문호 | 이철원 |
1)거사일이 각 기록별로 다르게 나온다.
(1) 3.17일 기록에 대하여
①1919년 당시에는 음력으로 1일, 6일이 간재장(주산소재지에 서든 5일장)이었다.
당초 계획은 간재장날(음력 2.16일=양력 3.15일)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예정이었으나 기밀누설로 다음날(음력2.17일=양력3.16일)밤 주렴산에 올라가 국수봉 등 3개소에서 불렀고 대부분 체포되자 다음 날(음력2.18일=양력3.17일) 체포되지 않은 박윤화 홀로 복개봉에서 불렀음으로 마지막 박윤화가 부른 3.17일을 기록한 것이거나
②기록당시에는 양력으로 1일, 6일이 간재장(주산소재지에 서든 5일장)이었다.
간재장날 부르려다 기밀누설로 다음날 불렀다고 함으로 양력을 적용하여 간재장인 3.16일 부르려다 3.17일 부른 것으로 잘못 기록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2) 공훈록의 3.17일과 4.17일로 다르게 기록된 것은
①박윤화, 이철규, 임문호 등 3명은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할 때 3명을 같은 내용으로 같이 조사하면서 똑 같이 앞의 설명대로 3.16일을 3.17일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②김양제, 박태현, 이장규 등 3명은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할 때 3명을 같은 내용으로 같이 조사하였기 때문에 기록과정에서 똑 같이 3.17일(3.16일의 오기)을 4.17일로 잘못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3)『한국독립운동사』와 『충남의 독립운동가』
3.17일(3.16일의 오기)을 4.17일로 잘못 기록하였을 가능성 있다
(4) 애국지사들이 겪은 고초기간으로 본 거사일
향토지 기록에 의하면 애국지사들이 3.16일 밤 만세를 부른 후 3.17일까지 대부분 체포되어 33일간 고문 등 고초를 겪다가 풀려났다고 하며,
수형인명부에 의하면 4.20일자로 보안법 위반이란 이름을 붙여 즉결처분 된 것으로 나타남으로 3.17일 붙잡혀 33일 후인 4.20일 즉결처분을 받고 풀려난 것이 확실하다.
만약 4.17일을 거사일로 한다면 왜경들 입장에서는 중대한 사건인데 3.18일 붙잡아 불과 2일 만에 처리완료하고 즉결처분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은 1919.3.16일 거행한 것이 확실하다.
※결론: 거사일은 3월 16일로 확정하여야 한다.
2)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
(1) 이철원이 주동자로 나오는 곳
향토지에는 “이철원이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 한 것”으로 나오고 공훈록 중 박윤화, 이철규, 임문호 공적에 “이철원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되었으며 『한국독립운동사』에는 “주동자는 이종연이다”(이종연은 이철원의 본명)로 되어 있다.
(2) 이철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곳
공훈록 중 김양제, 박태현, 이장규의 공적에 이철원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충남의 독립운동가』에는 주도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결론: 주렴산독립만세운동 주동자는 이철원이다.
3)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의 수
(1). ‘향토지’에서 18명의 애국지사를 확인한다.
○태형90장을 받고 표창 추서 받은 애국지사: 6명(김양제, 박윤화, 박태현, 이장규, 이철규, 임문호)
○태형60장을 받은 애국지사: 5명(윤기호, 이관규, 이겅규, 이성수, 이홍규)※태형 60장을 받은 사람은 전국적으로 수가 너무 많아 추서치 않았다는 말이 있음
○수형인명부에 나타나지 않는 애국지사: 5명(박성하, 신도휴, 윤용원, 이항규, 최봉규)
○체포되지 않아 기록이 없는 애국지사: 2명(윤천영, 이철원)
이들 18명 애국지사 명단은 1950-60년대에 조직된 ‘주렴산 독립만세운동 애국지사 추모위원회’에서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애국지사 후손들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확정한 것으로 1971년 보령군에서 발간한 구보령군지에 실었고 1985년에는 3.1항일지사의거추모비를 세웠으며 추모위원회 주관으로 수 십 년 추모행사를 해오다가 2008년부터는 문화원 주관으로 거행하고 있다. 신빙성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2)수형인명부의 애국지사
① 주산면사무소 소장된 수형인명부-11명을 확인할 수 있다.
○태형 90장 : 6명(김양제, 박윤화, 박태현, 이장규, 이철규, 임문호) -보안법 위반, 1919.4.20 즉결처분-보령경찰서장
○태형 60장 : 5명(윤기호, 이관규, 이성규, 이성수, 이홍규)-보안법위반 1919.4.20 즉결처분 -보령경찰서장
②『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11명을 확인할 수 있다.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은 6명과 추서 받지 못한 5명이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 수록형식은 다음과 같다.
제목 | 김양제(金亮濟) |
대체제목 | 수형인명부 |
편찬자 | 충남 보령군 주산면 |
사건발생일 | 1919-04-20 |
분류 | 인물> 독립운동가자료 > 독립운동가옥고(獄苦)기록 |
초록 | 활동 :보안법위반 본적 :忠南 保寧郡 珠山面 珠野里 419 주소 :忠南 保寧郡 珠山面 珠野里 419 연령 :1894-10-05 판결처 :보령경찰서 |
원문의 포맷 | text/xml |
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ID(KHON ID) | KH.PV.PV_SH_0001_00000729 |
URL | http://e-gonghun.mpva.go.kr/portal/url.jsp?ID=PV_SH_0001_00000729 |
수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름 | 본적 | 주소 | 연령 |
김양제(金亮濟) | 珠野里 419 | 珠野里 419 | 1894-10-05 |
박윤화(朴奫和) | 野龍里 73 | 野龍里 73 | 1868-01-17 |
박태현(朴台鉉) | 甑山里 479 | 新九里 479 | 1886-08-20 |
이장규(李莊圭) | 甑山里 562 | 甑山里 562 | 1895-01-03 |
이철규(李哲圭) | 珠野里 327 | 珠野里 327 | 1892-07-28 |
임문호(任文鎬) | 珠野里 151 | 珠野里 151 | 1879-03-03 |
윤기호(尹起浩) | 甑山里 | 甑山里 127 | 1893-06-19 |
이관규(李觀圭) | 甑山里 236 | 甑山里 236 | 1890-08-09 |
이성규(李成圭) | 甑山里 511 | 甑山里 511 | 1886-04-02 |
이성수(李性秀) | 甑山里 736 | 甑山里 736 | 1890-02-3 |
이홍규(李洪珪) | 甑山里 659 | 甑山里 659 | 1894-10-2 |
(3) 6명으로 기록된 곳
『한국독립운동사』및『충남의 독립운동가』에 6명이 기록되었고‘공훈록’과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는 표창을 추서 받은 6명의 기록만 있다.
※결론: 주렴산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는 18명이다
3 ‘주렴산독립만세운동’을 바로 세워야 한다.
주렴산의 국수봉 등 3개소에서 만세를 부른 날은 1919. 3.16일, 박윤화 홀로 복개봉에서 부른 날은 다음날인 3.17일이다. 주동자는 이철원(이종연)이었고 참여한 애국지사는 18명이다.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은 왜경에 붙잡혀 33일간이나 혹독한 고문을 치렀고 그 후유증으로 운명하거나 평생을 불구로 사는 등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은 애국지사는 겨우 6명에 불과하며 학계의 관심도 적어 아직까지 이 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없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대학교수,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연구와 이를 발표하는 세미나를 통하여 주렴산독립만세운동을 바로 세우고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4. ‘주렴산독립만세운동’뒷이야기들
주산면 일대에는 부모나 형, 누나로부터 ‘주렴산독립만세운동’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들 사이에 그 당시의 상황, 애국지사들의 고문후유증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철원은 자신의 고모부였던 윤용원과 사전에 많은 것을 협의하였으며 그 집에서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하였다”
“윤용원은 풀려 난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최봉규는 고문후유증으로 평생 다리불구로 살았다”
“애국지사들은 풀려난 후에도 고문후유증으로 매 맞은 엉덩이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나오는 등 고생이 심했다”
“달아난 이철원과 윤천영을 내어 놓으라고 마을에 왜경이 매일 찾아와 문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렸다”
“그들을 찾아내라고 볶아대는 게 무서워 왜경이 마을 어귀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모두 숨어버렸다”
“박용규(朴龍圭)라는 사람은 미처 피하지 못해 어기적거리며 나타났는데 왜경이 왜 빨리 오지 못하냐고 호통 치자 (자신도 연루되어)고문으로 이렇게 생겨 빨리 걷지 못한다며 엉덩이를 까 보였다”등 뒷이야기들이 수없이 전해 온다.
애국지사들의 후손들도 대부분 연락이 가능하다. 주민들과 애국지사 후손들을 대상으로 폭 넓은 조사를 실시한다면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의 뒷이야기를 엮은 훌륭한 이야기책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학생이나 주민교육에 활용할 수도 있고 지역을 홍보하는 자료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기관과 추모위원회의 관심을 촉구한다.
맺는 말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은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한 숭고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아직까지 『한국독립운동사』 등 관련 기록에 완전한 모습으로 기록되지 않고 있음은 통탄할 일이며 참여 애국지사들께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모든 독립운동과련 자료에 올바른 모습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관심과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연구를 촉구한다.
또한 18명 애국지사 중 태형 90장을 받은 6명만이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나머지 태형 60장을 받은 5명도 마땅히 추서해야 하며 수형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해도 풀려 난지 한 달 만에 숨진 윤용원선생이나 고문후유증 때문에 평생 불구로 살다간 최봉규선생의 공적이 인정되며 또한 ‘주렴산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이철원(李哲源=李鍾淵)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 독립기념관홈페이지, 공훈록, 향토지 등에 그 공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정황을 보아 수형기록이 확인되지 않는 5명과 체포되지 않은 2명도 마땅히 공적을 인정하여야 한다.
18애국지사 모두는 같은 날, 같은 시에, 같이 목숨을 걸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똑 같은 애국지사들이니 마땅히 모두 표창을 추서해야 하며 나아가 대통령표창보다 겪을 높여 훈장을 추서해야 할 것이다.(끝)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충남의 독립운동가, 구보령군지(1971 보령군), 보령군지(1991 보령군), 보령시지(2010 보령시), 대천시지(1994 대천시), 보령향사(1998 대천문화원), 구슬뫼이야기(2005 주산면),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진원지비문, 3.1항일지사의거 추모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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