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이야기/우리가족이야기

형제사랑(모셔온 글)

구슬뫼 2018. 12. 24. 09:52

어느 집이든 한 명씩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형제 중 한명이, 자식 중 한 명이 유독 골칫거리이고 불운합니다.



우리 집은 째 형이 그랬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불운아였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장남은 장남이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중간의 형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몇 년 먼저 상경한 둘째 형이 배달 일을 하며 지척에서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째 형은 프레스기계에 손가락 몇 개를 잘렸습니다.


째 형은 좋은 머리와 재능으로 검정고시도 합격하고 글도 참 잘 썼지만, 꿈은 번번이 좌절됐고 스무 살이 넘어서는 아예 생사조차 모른 채 10년 동안 행방불명되기도 했습니다.

째 형이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가족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의 불행은 끝난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형수가 서른 중반에 급성간경화로 세상을 뜨면서 그의 삶은 더 고단해집니다. 그리고 2003년 공원에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사업 부진과 가장으로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지요.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의사가 우리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뇌사 상태인데 연명치료를 할지, 안 할지 보호자들이 결정하라고. 몇 년 전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최종 결정을 해야 하는 큰형은,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며 째 형을 요양원으로 옮겼습니다.

온갖 모난 짓으로 부모 속을 썩이고, 형제들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는 등 나쁜 짓을 다 했으나, 형제들은 십시일반 힘을 합쳐 조카들에게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주고 큰형은 째 형을 지속적으로 보살폈습니다.


째형은 깨어났지만 언어 능력이 없어지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큰형을 보면 두세 살 아이처럼 해맑게 웃다가 금세 어엉~’ 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렇게 15년이 지났습니다. 큰조카는 결혼을 했고, 작은조카는 자기 앞가림을 잘하며 아버지를 돌봤습니다. 태어난 순서대로 가는 거라고 버릇처럼 말하던 큰형이 올 설날, 차례를 지낼 때 아버지 사진에 큰절을 올리며

아버지, 올해 째가 환갑이네요. 15년을 저리 있으니 이제 아버지 곁으로 데려가세요. 아이들, 그만 고생해야죠.”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517, 째 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은 아버지 기일이었습니다. 저녁에 모여 기제사를 지내기로 한 형제들은 큰형 집이 아닌 장례식장에 모였습니다. 온 가족이 합심해 삼일장을 치르고, 벽제의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변한 째 형을 유골함에 담아 부모님 산소 앞에 모셨습니다. 5형제가 죽으면 묻힐 자리 중 가장 중앙에 째 형이 먼저 자리를 잡았습니다.


남은 형제들의 마음엔 슬픔과 아쉬움, 안쓰러움 등이 가득했지만 공통적으로 지닌 감정은 미안함이었습니다. 그 미안함 때문에 우리는 째 형을 묻으며 많이 울었습니다. 형제들은 늘 묘한 죄의식을 째 형에게 느꼈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찾아올 불행과 불운까지 모두 째가 가지고 간 것 같다고. 다른 가족을 위한 불행의 바람막이였다고 해야 할까요? 설사 그것이 미신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 형제들은 그런 마음으로 째 형을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형제들이 어린 조카들을 자기 집에서 돌보고, 그들이 살 집을 마련해주고, 야간대학이라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마음 때문이었겠지요.


손가락 다섯 개 중 한 개는 나머지 네 개의 아픔까지 대신 가지고 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형제들끼리 우애 있게 살아라.”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째 아들을 지켜보며 오늘도 어머니는 살아생전 자주 했던 저 말씀을 이승의 가족들에게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유난히 속 썩이는 형제나 자식이 있다면, ‘다른 가족 액받이 역할로 저리 안 풀리나보다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원망과 서운함 등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돌연 측은한 감정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은 2018.7월 '공무원연금'지에 실린 글을 모셔온 것이다.

형제가 많은 칠성가족들이 생각해 볼 만한 글이기에 옮겨봤다.

다만 글중 우리형제와 덜 어울리는 자구를 조금 수정하고 몇째라는 숫자는 ○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