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30년 전에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안부를 물으면 대개는
“죽지 못해 삽니다.” 또는 “그저 그렇게 지냅니다.”라고 대답했다.
가난했던 시절 거친 세상 살기가 고달프다보니 그렇게 대답 하였던 것이리라.
사회적 분위기가 그러니 살기 어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대답을 하는 게 상례(?)였다.
그때 어떤 신문에서 이를 꼬집어 쓴 글에
4천만 인구가 어떻게 모두 ‘죽지 못해 사는 사람’과 ‘그저 그렇게 사는 사람’뿐이겠는가?
재미 좋은 사람도 있고 행복한 사람도 있을 텐데 대답은 왜 한결같이 나쁘다고 하는가?
잘 지낸다고 하면 시샘으로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또는 돈이라도 빌려 달래서 손해 볼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미리 엄살하는 것인가?
우리 국민들도 이제는 엄살에서 벗어나 사실대로 자신 있게 인사응대를 했으면 좋겠다.
라고 쓴 것을 보고 공감하여 나는 그때부터 인사응대 말을 바꾸었다.
엄살 성으로 말해봐야 그저 건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리고 자칫 내 처지만 궁색해 보일 수도 있을테니까 . . .
특별히 나쁜 일이 없는 한 “잘 지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좋은 일이 있으면 “예, 재미있게 지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이를 적극 권했는데 나의 이런 인사응답 습관 때문에 곤란에 처한 일이 있었다.
2006년 여름의 일이었다.
서울에 사는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나...○○○이야 어떻게 지내나?”
나는 습관대로 “어! 친구, 잘 지내, 친구도 잘 지내지? 그런데 어쩐 일이야?”
그 친구 하는 말이 “응, 나 지금 고향에 내려 왔는데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할까?”
나는 순간 대답이 안 나왔다.
공교롭게도 아내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암수술을 받고 퇴원하여 집에 막 내려온 참이었던 것이다.
수술이 잘되었다고 병원측에서 말하지만
당사자인 아내는 물론 암 발견 시부터 수술, 퇴원까지 줄 곳 함께 한 나도 걱정이 태산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말을 더듬으며 “으음.. 내가-아.. 지그음... 그럴 수-우 없는 형편인데....”
친구는 크게 오해했다. 금방 잘 지낸다고 하고서 고향에 내려왔다고 하자 말을 더듬으며 꺼려하니 그럴 수밖에,
어쩌면 그는 자기가 공짜 술이라도 거하게 얻어먹으러 온 것으로 고향친구인 내가 지레 짐작하고 경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시골 중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일찍이 서울에 올라가 경찰로 근무하다 퇴직 후에 그곳에 사는 친구였으므로 수 십 년간 만나지 못하다가
그때 무렵 또 다른 동기동창생들의 자녀 결혼식 때문에 서울의 예식장에서 두 어 번 만나
반갑게 안부를 주고받은 사이였다.
“그래? 알았어. 뚝”
전화가 끊기자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뭐라고 해명했어야 하는데, 아니 처음부터 안부를 물을 때 어려운 상황을 말했으면 오해는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하지? 친구의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지?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초췌해진 아내가 누우려고 힘겹게 요를 깔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황급히 전화기를 내려놓고 아내를 밀치며 “가만히 있어요, 내가 깔테니”
친구에 대한 미안함이나 오해에 대하여 해명해야한다는 생각은 어느새 잃어 버렸다.
그 후로도 아내에 대한 걱정과 간병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나는
친구에게 연락하여 해명해야 하는데 ...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날이 가고 달이 갔다.
그가 서울에 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나는 기회도 좀처럼 없었으므로
오해를 푸는 데는 꽤나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인사응대 한번 잘못하여 생긴 후유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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